개혁국민정당

이름이 비슷한 개혁국민신당, 신정치개혁당과 혼동하지 않도록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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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존재했던 대한민국의 정당. 약칭은 개혁당. 성향은 자유 개혁주의다.

유시민, 문성근 등 친 노무현계 인사들이 2002년 말에 창당했고 이 때 한나라당의 개혁 성향 의원이었던 김원웅[1]이 입당해 대표직을 맡게 되면서 원내정당이 되었다.

정치사에 있어 개혁국민정당의 의의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당시 후단협 사태 등으로 후보 흔들기가 극심했던 민주당의 노무현 후보를 당 외부에서 적극 지원한 정당이라는 것이다. 얼핏 친박연대와 비슷하다고 느낄 수도 있지만 그 양상은 다른다. 친박연대는 공천 학살 등의 이유로 현역 의원들이 한나라당에서 대거 탈당해 만든 정당인 반면 개혁국민정당에는 민주당 탈당파라고 부를 만한 세력이 없었으며, 재야의 노무현 지지자와 한나라당 탈당파들이 모여 이뤄진 정당이기 때문이다.

두번째는 당내 의사결정 수단으로 인터넷을 적극 활용하였다는 것이다. 즉 당원의 참여와 소통을 중시하였다. 인터넷 커뮤니티들이 막 활성화되기 시작한 2002년 당시에 이는 혁신적인 발상이었으며 정당으로서는 얼리 어답터스러운 면모를 보였다. 때문에 기성정당에서는 보기 드문 '젊은 정당'이었는데, 왜냐하면 지금과는 달리 당시의 장년층은 인터넷에 익숙치 못했기 때문이다.

노무현이 16대 대선에서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치루어진 2003년 4월 24일 재보궐선거에서 유시민이 고양시 덕양갑 지역구에 개혁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열린우리당의 창당 추진에 따라 개혁당의 당권파는 당을 해산하려고 하였다. 이에 잔류파는 격렬하게 반대하였으니 결국 인터넷 투표에서 해산이 결정됐다. 그러나 인터넷 투표로 해산한것에 법적으로 하자가 있었기에 무효로 결정됐다.

이후 잔류파는 이용휘[2], 오정례[3]등을 중심으로 비대위를 구성하고 대체조직을 만들었다.

이후 유시민을 비롯한 개혁당 소속 국회의원은 모두 탈당을 하여 열린우리당에 참여했고 탈당파는 인터넷 권한을 내놓지 않았고 당원데이터를 가져갔다는 말도 있다. 또한 유시민이 개혁당DB 를 유출, 이용했다는 주장도 있다.기사기사2 이런 저런 관계로, 개혁당 잔류파였던 이들은 유시민을 극도로 혐오하기도 한다. 유시민이 만들었는데 어찌 되었든 간에 마무리가 좋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고, 주축이었던 정치인들에게 해명의 책임 혹은 비판의 여지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후 치루어진 17대 총선에서 민주노동당 지지를 선언하기도 하였으나 이미 주류언론의 관심을 벗어났기에 선거참여가 불가했고 결국 2004년 9월에 개정선거법에 따라 지역당 창당에 나서다가 5개를 만들지 못해 해체되었다.

  1. 노무현과 함께 한 때 민주당의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 활동을 했었던 인물.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을 지지하며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한 노무현, 김정길 등과는 달리 3김 청산을 내세워 신한국당과의 합당에 참여했고 이후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대전 대덕구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하지만 3김 청산 이외에는 완전히 민주당쪽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진보적인 모습을 보였던지라 한나라당 지도부와는 거의 앙숙 지경이었고 특히 2001년 김용갑 한나라당 의원이 본회의장에서 민주당을 향해 조선노동당 2중대라고 비난하자 이를 시대착오적인 발언이라고 맞받아치면서 설전을 펼치기까지 했다. 결국 2002년 대선을 앞두고 민주당과 자민련의 일부 의원들이 한나라당에 입당하는 와중에 거꾸로 한나라당을 탈당해 개혁당에 가는 역주행 행보를 보였다. 당시 조선일보 만평에서는 이회창을 비롯한 한나라당 지도부가 앓던 이가 저절로 빠진 기분을 느끼며 김원웅 의원 탈당식을 성대하게 열어주는 내용이 있었을 정도. (...)
  2. 한국의미래를준비하는당, 친박연합 등의 당을 만들어 활동하다가 한나라당(2012년)에 합류하기도 했다. 이후 희망한나라당을 다시 창당하였는데 현재 이 당은 개혁국민정당과 이름이 비슷한 개혁국민신당이 되었다.
  3. 전 전북여성운동연합위원장, 제5대/제6대(95년, 98년 지방선거) 전주시의회 시의원(송천2동.전미동/무소속->새천년국민회의). 1967년생으로 첫 당선 당시 만27세였으나 모친의 건강문제로 잠시 정계에서 멀어졌다가 훗날 창조한국당에 참여하여 비례대표 5번을 받았지만 비례대표 지지율 저조로 당선에 실패하였다. 이후 20대 총선과 함께 치러진 전북도의회 재보궐 선거에서 전주 완산의 제2선거구에 국민의 당 후보로(정동영 전 장관과 함께 입당) 출마하였으나 이도영 후보에게 밀려 경선에서 떨어졌다. 선거 결과는 이도영 후보의 당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