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우리당

대한민국의 민주당계 정당
새천년민주당
개혁국민정당
열린우리당대통합민주신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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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우리당의 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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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지방선거 당시 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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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11월부터 2007년 8월까지 존재했었던 대한민국의 중도개혁성향의 정당.

100년 정당을 자임했으나, 실상은 3년 9개월 존속[1]했던 짧은 역사의 여당이었다.[2] 더 짧은 경우로 바로 후신인 대통합민주신당이 있긴 한데, 여긴 대통령이 입당하지 않았던 터라.


1 명칭

열린우리당은 스스로 약칭으로 "우리당"을 선호하였으나, "우리 당(our party)"과 혼동을 일으켰기 때문에 언론 등에서는 "열린당", 심지어 "열우당"이라고 많이 불렸다. 영어명인 "Open Our Party"도 선호되지 않아 대부분의 영자지에서는 'Uri party'라는 표현을 썼고, 불어권 등에서도 이를 그대로 옮겨썼다. 그래도 우리당이라고는 불러줬네 [3]

흑색선전으로 "열우(列宇)"가 레닌의 한자 음차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그러나, 레닌의 한자 음차는 비슷하게 생긴 열녕(列宁[4] Liening)이다. 애초에 列宇는 한국 한자음 '열우'로도 중국어 발음 '례위'로도 전혀 비슷하지도 않다.

일부 보수 진영이나 열린우리당에 반대한 구 민주계는 멸칭으로 열우당(劣友黨 : 열등한 친구들의 무리), 돼지우리당, 열린오리당, 닫힌끼리당, 닫힌너네당(...) 등을 쓰기도 했다.[5]

2 역사

  • 영상의 연도와 달리 장영달 의원이 원내대표가 된 것은 2007년이다. 그 밖에도 30여명이 탈당했다는 발언이나, 제1당이 무너졌다(2007년 2월 6일)는 내용 역시 그 해 상황에 부합한다. 그러므로 이 영상의 정확한 날짜는 2006년 2월 14일이 아닌 정세균 의원이 의장에 당선된 마지막 정기 전당대회 날인 2007년 2월 14일이다. 여하간 발렌타인 데이 곧 탈당할 사람들이 탈당파 욕하는 명장면


2.1 2003년 - 미니 여당의 창당

2002년 대선이 끝난 후, 노무현 당시 대통령의 민주당의 영남 출신 세력과 소장파 세력(천정배-신기남-정동영(천신정)을 중심으로 하는 호남 신주류)들은 새천년민주당의 쇄신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적당히 부패한 이미지에 호남색이 강해보이는 낡은 민주당으로선 2004년 총선에서 승리하기 어렵다는 것이 명분이었다. 물론 민주당 역시 김대중 대통령이 새정치국민회의의 외연확대와 전국정당화를 위해서 2000년 재창당했던 정당이었지만, 대선 때의 혼란과 "실용주의" 노선으로 보수야당(한나라당)과의 구분점이 희미해진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쇄신론이 불거진 노무현 대통령의 집권 1년 차는 집권 여당이 쇄신을 하냐 마냐로 입씨름을 벌이던 시절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6] 쇄신을 주장하는 천신정(천정배-신기남-정동영)을 중심으로 하는 호남 신주류와 친노측은 총선 승리를 위해 과감한 재창당을 주장한 반면, 동교동계를 중심으로 하는 호남구주류는 이런 재창당 주장이 호남세력을 비토하기 위한 음모[7]라고 보아 합의점이 도통 나오지 않았다. 중진 의원인 정대철 등이 합의를 계획했으나, 결국 타결 직전 단계에서 박상천/권노갑 등의 보수파들이 "이념이 다르고, 색깔이 다르기에 함께 갈 수 없다"를 내세우면서 합의는 무산되었다. 박상천 의원의 경우 특히 당대표를 하고 싶다는 야심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란 지적이 있다. 실제로 그는 후에 반쪽도 안 남은 민주당 대표를 하다가 열린우리당의 후신인 대통합민주신당과의 합당을 성사시켜 2008년 통합민주당의 구민주계 주주 가운데 하나가 된다. 이건 뭐

그리고 막상 떠나려고 보니 과거 대선 국면에서 노무현을 적극적 지지했던 개혁파 조순형, 추미애 조차 대북특검 문제 등에서의 문제로 잔류를 선언한다. 당시 신당 창당론자들이 "준비는 다 되었으니 당신들만 떠나면 된다."라고 두 사람을 설득했으나 통하지 않았다고 한다. 잔류자가 70여명으로 훨씬 더 많다는 것이 드러났다. 도리어, 대선 때 노무현에게 반기를 들었던 김명섭, 송석찬, 설송웅 의원 등이 신당 참여를 선언하는 등 다소 애매한 경우도 있었다.

그렇게 이른바 "개혁신당파"들이 갈라져 나오게 되면서 대한민국 역사상 사실상 최초의[8] 집권 여당 대분열이라는 사태가 발생했다. 떨어져 나온 쪽은 집권 여당으로서 신당 창당을 준비했고, 남은 쪽은 민주당의 간판을 고수하며 정통 야당임을 선언했다.

한편으로 한나라당에서도 당의 보수성을 비판하면서 개혁성향의 5명의 의원(이른바 독수리 오형제)들이 탈당해 신당에 합류했고[9][10] 김원웅, 유시민을 주축으로 한 개혁국민정당도 신당과의 합당을 선언하면서 합류했다. 이렇게 해서 창당된 당이 바로 47석(민주당 탈당파 40 + 한나라 5 + 개혁국민 2)의 열린우리당이었다. 2003년 11월 11일 빼빼로 데이에 창당한다.


2.2 2004년 - 탄핵과 승리, 그러나...

사상 초유의 초미니 여당(제3당)으로 출범한 열린우리당은 기존의 1인 대표체제(총재 제도) 대신 여려명의 최고 위원을 선출하고 그 최고위원중에 최다득표를 한 사람을 "의장"으로 뽑는 구조를 택했다. 이른바 "집단지도체제"라는 것으로, 민주당은 물론 민주통합당에서도 이어진 제도였다. 이 집단 지도체제 속에 2004년 1월 초대 의장으로 정동영 의원이 선출되었다. 열린우리당은 의석 수의 한계 속에 여러 단점을 드러냈지만, 국민들의 기대감으로 지지율은 빠른 속도로 상승하면서 정계는 혼란에 빠졌다. 대북 특검을 포함한 정치권 전반의 대선 비리 사건이 드러나면서 정치권 전반이 불신론에 휩싸였고, 열린우리당은 비교적 적극적으로 대처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총선 3개월 전 여론조사 결과 열린우리당이 과반은 어려워도 제1당을 차지할 가능성이 매우 높게 나타났으며 그 뒤를 한나라당새천년민주당이 뒤쫓는 형국이었다. 만약 이대로 총선이 치러진다면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 양당 구도에 민주당이 제3 세력으로 캐스팅보트를 쥘 수 있었는데.....

2004년 3월 12일 국회에서 노무현 대통령 탄핵안을 가결시키면서 상황이 급반전한다. 노무현 대통령의 열린우리당 지지발언에 대해 민주당을 중심으로 한나라, 자민련까지 3당이 총 연합하여 탄핵안을 밀어붙인 것. 열린우리당으로서는 개헌으로 대몰락을 할 엄청난 위기였으나, 대통령 탄핵에 불과 50명으로 맞서는 장면이 국민들 앞에 생생히 중계되면서 주춤했던 열린우리당의 지지율은 급상승했다.

앞서 말했다시피 애당초 열린우리당의 지지율은 이미 탄핵 전에 상승세를 탔었고 도리어 탄핵이 그런 불안감을 뒤집으려는 한나라당과 민주당 중심의 "맞불" 전략, "판을 엎기" 전략이었다는 말도 있다[11]. 그러나 결국 탄핵을 주도한 민주당, 이에 편승한 한나라당, 그리고 막판 도박에 합류한 자민련은 탄핵의 역풍만을 맞게 되었다.

탄핵 돌풍으로 말미암아 영남을 제외한 전국에서 승리하면서, 열린우리당은 2004년 4월 15일에 열린 17대 총선에서 초기 예상 의석인 70석, 100석을 훌쩍 넘은 152석의 거대 여당이 되었다.[12] 제5공화국의 문제 많던 1985년 12대 국회의원 총선 이후 최초로 선거로 여대야소를 이루었다. 그러니까 민주화 후, 즉 제6공화국 최초의 여대야소.

그러나 갑작스러운 성공은 결국 열린우리당에게는 큰 불행이 되었다. 갑작스럽게 미니 정당에서 거대 정당이 돼버리는 바람에 머리는 그대로인데 갑자기 몸만 커진 것같은 상황이 되어버렸다. 더욱이 108명에 달하는 초선의원들은 제각기 자기 목소리를 내는 바람에 108번뇌라는 비아냥을 들었고 당의 이념적 노선을 가지고서도 실용이냐 개혁이냐를 놓고 갈등이 빚어졌다.

총선에서 승리했지만 노인 폄하 발언으로 입지가 약해진 정동영 의장은 총선 직후 김근태 원내대표와 함께 내각으로 들어갔으며, 최고의원 중 제2위인 신기남 의원이 2대 의장이 되었다(2004년 5월 17일). 신기남 의원은 "천신정" 가운데 하나인 당내 주류 개혁파 의원으로 손꼽혔으나, 부친의 일제 경찰 경력이 드러나는 바람에 의장에서 물러나야 했고(2004년 8월), 그 뒤를 한나라당 부총재 출신 이부영 前 의원(17대 총선에서 낙선)이 이어받았다.

10월 21일에는 헌법재판소에서 "신행정수도법 위헌 확인 결정"[#]으로 행정수도 이전 계획이 좌절되었다.[13] 결국 여당은 다음해 3월 2일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특별법을 의결한다.

한편 내각으로 들어간 김근태 원내대표를 대신하여 선출된 천정배 원내대표의 주도로 소위 '4대 개혁입법'[14]이 추진되었다. 그러나 국가보안법 완전 폐지에 대해서 국민적 여론은 손을 들어주지 않았고, 이를 등에 업은 한나라당의 강력한 저지와 당내 갈등으로 합의한 수정안까지도 통과되지 못하고 결국 2004년 연말 통과가 무산되고 말았다. 결과적으로는 대충 합의를 본 문제 조항 폐지 조차도 시도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결국 이부영 의장과 천정배 원내대표는 개혁입법 통과 실패의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행정수도 이전과 4대 개혁입법이 무산되고 김이 빠진 이 시기가 열린우리당의 피크였다. 그리고, 이제 기나긴 내리막길이 시작되었다. 아니, 어쩌면 어쩌면 이미 총선 승리에 도취 될 때부터가 기나긴 내리막길의 시작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해 12월, 노무현 대통령은 훗날 큰 논란거리가 될 한미 FTA를 진행시키기로 결정했다.)

2.3 2005년 - 약팽소선에 실패하다; 과반상실과 사학법 직권상정

이부영 의장의 뒤를 이은 임채정 의장의 과도기를 거쳐, 정기 전당대회를 통해 문희상 의원이 의장으로 선출되었다(2005년 4월 2일). 그러나 문희상 의장 체제에서도 열린우리당의 난맥상은 달라지지 않았고[15] 국민들은 우왕좌왕하는 열린우리당에 점점 실망하기 시작했다. 결국 4월 재보궐선거의 참패로 6석을 잃으며 146석으로 과반을 상실했고, 당내에서 갈등이 빚어지면서 문희상 의장은 책임을 지고 사퇴하게 되었다. 그 유명한 (한나라당과의) "대연정" 역시 7월, 8월 내내 부터 거론되기 시작했다. [#] 하지만 대통령의 표현 대로 한나라당에서 터질 것 같던 "폭탄은 당내에서 터졌고", 열린우리당은 더더욱 극심한 혼란과 분열로 빠져들었다.

이어 10월 재보선에서도 단 한석도 얻지 못한 채 참패함으로서 문희상 체제가 붕괴되고, 급기야 열린우리당은 비대위까지 구성하면서 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노력하게 되었다. 결국 의원들의 토의 끝에 원만한 조정자 타입인 정세균 원내대표에게 당 의장을 겸하게하여 위기를 돌파하려 하였다(2005년 11월). 정세균 의장은 개혁입법 중 하나인 사립학교법이라도 통과시키자는 생각에서 사립학교법을 강행처리했지만 열린우리당의 위기는 나아지지 않았다. 아니, 도리어 기득권 사학재단들의 격렬한 반대와, "다수당 강행처리시 지지율 하락"의 공식만이 작동했다.[16]


2.4 2006년 - 박살난 100년 정당의 꿈

해를 넘기자 노무현 대통령은 정세균 의장을 내각(산업자원부)으로 불러들였다(2006년 1월 6일).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 출신 유재건 의원이 전당대회까지 임시 당의장을 맡았고 김한길 의원이 원내대표로 새로 선출되었다.

2006년은 지방선거가 있는 해였다. 이에 열린우리당은 전당대회에서 내각에서 복귀한 정동영 의원을 다시 의장으로 선출했다. (2월 18일) 그러나 돌아온 정동영과 강금실, 진대제 등의 친노계 각료들의 수혈로도 열린우리당의 몰락은 막을 수 없었고, 정동영은 선거유세 막판 국민들에게 읍소를 해 가며 표를 달라고 하는 등 온갖 방법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한나라당의 초압승으로 끝났고, 사실상 민주당계 정당의 암흑기가 오게 되었다.

특히나, 격전지인 수도권에서 인천의 한 석과 경기도의 무소속 3곳과 열린우리당 1곳(구리시(박영순))를 제외하고는 죄다 한나라당이 싹쓸이했으며, 서울의 경우엔 시의회 106명 가운데 102명이 한나라당이었다. 그나마도 4명은 비례대표 때문이고 지역구에선 구청장, 시의원 모두 한나라당이 차지했다. 이건 뭐 일당 독재도 아니고... 선거 분위기는 대략 수도권에서도 우리 30 : 한나라 60.

반면 열린우리당은 단 한곳, 전북도지사만 당선되는 캐굴욕[17]을 남겼고 6월 9일 정동영 의장은 다시 사퇴했다. 이 때문에 선거 5일전만 해도 40% 후반 대를 자랑하던 노무현 대통령의 지지율은 20%대로 추락하면서 계속되는 하락의 나날을 보인다.

비슷한 시기, 부산의 민주노동당의 지지율이 열린우리당을 초월한다. 5월 17.1%로 15%인 열린우리당을 넘어선 것. [#] 하지만 이해 7월 재보선에서는 도로 지지율이 급락하면서 민주당보다도 낮은 4위로 추락. [#] 민주노동당은 이후 2007년 3월, 열린우리당의 붕괴에 따라 10% 초반대로 추락한 여당을 제치고 지지율 제2당이 된다. [#] 근데 그런데도 대선 지지율 3%를 얻는데 그친 걸 보면...[18]

그 뒤를 이어 전당대회에서 2위를 했던 김근태 최고의원이 의장을 승계했다. 김근태 의장은 "서민경제회복추진위원회"라는 거창한 위원회를 만들고 경제회복과 재벌과의 사회적 대협약 등을 추진했지만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그리고 열린우리당은 계속 재보궐 선거에서 참패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열린우리당의 간판으로서는 더이상 안된다는 위기감이 확산되었고 한나라당의 대권주자인 이명박, 박근혜 후보들의 기세가 갈수록 오르자[19] 한나라당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들을 연합해 2007년 대선에서 승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리하여 민주당과의 재통합 및 반한나라당 세력들과의 연합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7년 1월 9일 신년을 맞아 4년 중임 개헌을 제안하였으나, 이는 한나라당에게 대연정 때처럼 그대로 무시되었다(...) 문창극은 이명박/박근혜 분열을 획책하려는 노무현의 기획이었다고 주장한다마는 노무현 대통령은 한미 FTA 통과와 10월의 2차 남북정상회담으로 레임덕 속에서도 지지율을 회복했으나, 33% 정도의 확보로는 선거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리고, 그렇게 탈당 릴레이가 시작되었다.

2.5 2007년 - 대붕괴

2.5.1 탈당 엑소더스

바쁜 위키러들은 마지막 문단만 읽으면 된다
2007년 1월 22일 임종인 의원[20] 의 탈당에 뒤이어 최재천, 이계안 등의 천정배계 의원 6명이 탈당하면서 열린우리당의 의석은 133석이 되었다. 이들은 당 밖에서 "민생정치 준비모임"을 결성하고 개혁신당 창당을 바탕으로 한 당내의 김근태계와의 공조를 시도하였다.

2007년 2월이 되자 이번엔 당내 보수그룹 "바른 정치모임" 등의 김한길계 23명이 탈당했다(1차 탈당). 이로서 열린우리당은 110석으로 127석의 한나라당에게 원내 1당마저 내주게 된다. 이들은 중도개혁통합신당추진모임(24석)이란 교섭단체를 만들었다. 2월 22일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당적 정리"란 이름으로 탈당을 선언했다. 사실상 쫓겨난 것이라는 관측이다.

2007년 4월 재보궐선거에서 한나라당이 참패하면서 정국은 다시 한번 요동쳤다. 물론 이 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이 참패(기초의원 1명)한건 안습하지만 동시에 너무 당연한 일이라 일단 넘어가자 2006년 7월 성북을에서 당선된 민주당의 조순형에 이은, 4월 재보궐의 김홍업과 국민중심당의 심대평 등의 당선으로 " 범 여권 연대라면 선거에서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라는 희망이 발동했기 때문이었다.물론 현실은 아시발꿈 "5월 빅뱅설"이 등장했고, 급기야 5월 7일 중도개혁통합신당이 20석으로 창당을 선언했다.

6월이 되자 대거 탈당이 이어졌다. 8일엔 임종석, 우상호, 이강래 등 당내 초,재선 386 의원들 17명(2차 탈당), 15일엔 문희상, 문학진 등 김근태계 16명이 탈당했고(3차 탈당), 그 사이에 김근태와 김희선이 개별 탈당했다. 이들은 7석의 천정배계와 결합하여 43석의 '대통합추진모임'을 결성했다. 6월 18일엔 정동영이 탈당하면서, 이로서 당을 구성하는 두 축인 정동영, 김근태가 모두 탈당한 형국이 되었다.

6월 27일에는 민주당(2005년)김한길계의 중도개혁통합신당이 합쳐져 34석의 "중도통합민주당"이 탄생했으나, 7월 중순 이미 일부가 도로 탈당했다. 7월 24일에는 유인태, 송영길 등 개혁 재선 그룹을 중심으로 15명이 탈당했다. 같은 날 범여권신당 창준위가 발족되었다. 8월 3일에는 도로 김한길계와 김홍업 등이 한달만에 당을 박차고 나가고 당명 "대통합민주신당"이 결정되어 다음날 대통합민주신당이 창당되었다. 의석 수는 84석.

대통합신당은 이름 그대로 정동영계(구당권파) + 김근태계(재야파) + 김한길계 + 천정배계 + 기타 당내 세력 + 한나라당을 탈당한 손학규계 + 시민단체 세력(미래창조연대) 등의 다양한 세력들이 통합을 선언한 것이었다. 즉 열린우리당 탈당 세력에 민주당 탈당 세력 일부, 그리고 한나라당에서 쫓겨나다시피한 손학규 세력이 더해진 것이었다.


2.5.2 대통합신당에 합당되다

결국 열린우리당은 대통합신당에 동참하기로 하고 내각에서 돌아온 정세균 의장(2007년 2월 선출)과 최고위원들에게 대통합신당 추진을 위임했다. 결국 2007년 8월 18일, 일산 킨텍스에서 열린 마지막 전당대회에서 대통합민주신당과의 합당을 가결했고, 8월 20일 대통합민주신당과 합당선언을 하면서 열린우리당은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대통합민주신당은 열린우리당 59석을 더해서 143석이 되었다.

결국 139석에서 김홍업, 김효석, 이낙연, 채일병 등 구 민주당계의 5석만 추가하고 반년만에 Again 열린우리당. 훌륭하다 훌륭하다 이놈들 이럴꺼면 왜 탈당, 분당, 창당, 합당 난리를 쳤는지 모를 노릇.그야 열우당 간판으로는 뭔짓을 해도 답이 없다는것을 뻔히 아는데 그대로 죽을수야 없지. 굽시니스트에 의하면 고려조선처럼 다른 나라인 것 처럼!? 여기에 원래는 이 해 말 구 민주당 자체와 합당을 추진했다가 5:5냐 7:3이냐를 놓고 싸우면서 무산된걸 생각하면 가히 충공그깽. 그리고 이 구상은 2008년 총선 직전에 통합민주당으로 기어이 실현되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옛 탄핵 주도자과 동교동계 일부만 빠진 도로 열우당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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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8일 당일, 일산 킨텍스에서는 코믹월드 행사가 있었기 때문에 열린우리당의 최후는 오덕들에게 포위된 가운데 일어나게 되었다. 그것도 유일한 킨텍스 서코 열린우리당 해체 반대를 부르짓는 몇몇 사람들이 지나가던 오덕들에게 젊은이들의 궐기를 호소(?)하기도 했지만 그런건 관심없는 오덕들은 소 닭보듯이 하면서 지나갔다고. 심지어 애니갤러 GGG는 폐당 행사 중 "이명박 만세!!"라는 소리를 지르고 도망쳤다고 한다.[관련 링크]

해체하기 전에 허경영이 이 당의 대선후보로 출마하기도 했다.[21] 그의 존재는 가뜩이나 흑역사인 열린우리당의 최후를 더욱더 희극적으로 만들어 주었다.

허경영(60) 씨와 김혁규 전 경남지사 지지자들이 ‘우리당 지킴이’를 자처하면서 대의원들의 행사장 진입을 막은 것. 허씨와 김 전 지사는 악수도 나눴는데, 당원들과 함께 구호를 외치던 허씨는 이렇게 말했다.
“열린우리당에서 당의장까지 한 사람들이 흡수 합당을 기도한다. 기회주의다. 김혁규 전 지사, 강운태 전 장관 등과 신당을 만들 것이다. 밑그림도 그려져 있다.” [# 주간 동아의 기사]

열린우리당이 만약 독자 세력을 유지했다면 허경영이 대선 후보로 출마했을지도 모른다는 분석도 있다..[22] 후보가 된다는건 아니고 가히 할 말이 없다.

결론적으로, 열린우리당이 그렇게 싫어하는 한나라당의 탄생과 소멸[23] 모두 열린우리당 명칭과는 함께하지 못했다. 하다못해 그나마 가까운 민주노동당도 탄생과 소멸을 함께하지 못했다. 첫 문단에 있듯 한나라당은 새누리당 이후를 제외하고 15년간 존속했다. 당시 여론은, 한나라당보다 못하다는 비난이 결코 이상하지 않았다.


3 평가와 비판

열린우리당은 진성당원제[24]을 강력하게 의도한 정당으로, 정당제도의 민주화를 이끌어낸 공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25]

하지만 그만큼 문제도 많았으니 그 수준은 한국 정당역사상(특히 여당 사상) 안습 정당 일순위에 꼽힐 정도였다.


3.1 당내 계파 갈등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
:

열린우리당을 망하게 한 제 1 원인.

열린우리당은 지역감정을 뛰어넘은 전국정당을 지양지향했는데 이것은 17대 총선에서 152석이라는 결과를 얻으며 확실히 달성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과연 열린우리당이 지역감정을 뛰어넘었느냐는 점인데 이에 관해서 확실하게 실패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아니, 도리어 집토끼인 호남과 수도권만 잃었다는 평가다. 사실 열우당은 전국정당화에 성공하긴 했다. 전국적으로 죽쑤는 정당이라는 형식으로...열린우리당이 과반을 확보한 결정적 요인은 탄핵사태였지만 탄핵역풍 약발이 끝나자 스스로의 능력으로 평가받아야 했다. 문제는 국민들에게 스스로의 능력을 보여줄때마다 지지율이 폭락해서 선거때마다 전국적으로 죽을 쒀야 했다는것. 밑에도 언급되었지만 보여주는 모습이 참 안습이었다.


17대 총선에서 승리한 뒤에도 열린우리당의 난맥상은 계속 되었는데 무엇보다도 심각했던 문제는 152명에 달하는 거대한 여당을 이끌어나갈 역량을 가진 리더가 없었다는 점이었다. 그런 탓에 어떤 정책을 추진하려고 해도 당시 야당이던 한나라당 뿐만 아니라 당내에서도 갈등이 빚어질 정도였다.

대략적인 모양세를 그려보면...

천정배계, 김근태계 등의 재야계("민주평화국민연대")와 신기남계의 "신진보연대"가 당내 개혁세력으로 한편이 되고 VS

정동영계의 (구)당권파가 김한길계("바른정치모임")나 "안개모(안정적 개혁을 위한 모임)" 등의 온건/보수세력과 손을 잡고 당내 중도 우파 세력으로 한편이 되어 서로 대립하면서

이 사이에 친노(그나마도 직계 우파 집단(의정연구센터, 이광재 서갑원 외), 개혁당 세력(참여정치연구회=참정연. 유시민 등 참여), 외곽 등으로 나뉜다), 중진 위주의 중진파, 기타 386 세대 개혁의원 등이 나름대로 정치적 지분을 주장하는 형국이었다.

참고로 이게 단순화 한거고 각각 개별 의원의 움직임과 특성을 고려하면 정말 아노미 그 자체였다. 의원모임으로 존재했던 계파만 12계파를 넘고, 위에서 대충 언급한 큰 계파만 6~7계파였다.

게다가 역량있는 대표의 부재는 결국 당의 혼란이라는 악순환으로 계속 이어졌다. 한나라당이 박근혜 당시 대표의 활약속에 전열을 정비하고 차기 대권을 대비한것을 생각하면 참 안습스러운 일이다. 실제로 열린우리당 역대 당의장들의 재임기간(11명 46개월, 평균 4개월 5일.[26])을 살펴보면 거의 로마 제국 군인황제시기신라 하대 왕위 쟁탈전 과정에서 몇개월, 몇년 만에 죽어나간 왕들을 연상시킬 지경이다. 보통은 2년마다 한번씩 하는 공식 전당대회만 4회를 했다...

결국 개혁이냐 실용이냐를 놓고 당내 싸움만 하는 열린우리당에 실망한 국민들은 등을 돌렸다. 그리고 등을 돌려 보니 다른 대안 정당은 하나도 없었고... 결국 IMF를 불러와 정권을 내줬던 한나라당계 보수정당이 이 시기를 토대로 지방선거를 제외한 나머지 선거에서 승리하는 원동력을 얻게되었고 반면 민주계 중도진보 정당은 2015년 현재까지도 선거때마다 이때부터 징조를 보인 계파정치와 분열때문에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제외한 모든 선거에서 지고만 있다. 이는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로 깨지게 된다.[27] 사실 그동안의 선거 패배를 계파정치와 분열만으로 해석하는 것은 무리한 분석이기도 하다.


3.2 호남(구민주계)과의 결별에 대한 평가

열린우리당은 새로운 이미지를 내세웠기 때문에 호남에서도 처음에는 반응이 좋았다. 무엇보다 호남의 정치판도에 큰 영향력을 미치는 김대중 전 대통령도 열린우리당에 호의적이었다. 대북송검 갈등에도 불구하고, 괜히 김대중 지지 얻으려고 간 새천년민주당 측이 데꿀멍했다든지. 그러나 2006년 이후 호남에서의 민주당의 성장은 열린우리당의 지지율 하락에 의한 것으로 봐야한다.

그러나 여전히 구 민주계에게는 노대통령 집권 초기 여당이었던 민주당의 분열에서 탄생한 것에서부터 비판을 받는다. 호남색의 민주당으로선 안된다라는 주장을 펼치며 민주당의 창조적 해체 및 재창당을 부르짖었지만, 그 속내는 천신정(천정배-신기남-정동영)을 중심으로 한 호남 신주류 + 친노성향의 영남 + 신진 개혁세력이 당시 민주당의 주류였던 동교동계를 중심으로 한 호남 보수 세력을 밀어내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냐는 것. [28][29] 이 과정에서 강준만 등의 정치평론가들의 "안티조선" 움직임이 개입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이런 특성이 친 개혁적 의원 몇명을 분당과정에서 낙오시키는 경향을 보이기도 했다. [# 분당 찬성 측의 견해를 다룬 글.] 당선직후 지지자들 사이에서 노무현 당선의 "제1공신"으로 분류되던 이들이 함께가자는 제안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호남출신이 아님에도) 민주당에 남고,[30] 반대로 "역적"으로 여겨지던 이들이 열린우리당에 들어갔다는 것은 대표적 사례.

이글루스의 어느 포스팅에서는 새천년민주당과 열린우리당, 민주당의 강령을 비교했는데 새천년민주당> 민주당> 열린우리당 정도의 평가가 나왔다. (현재 블로그 폐쇄 상태) 뜯어보면 정말로 부실하다. 무엇보다 심각하게 보수적, 혹은 실용 우파적이다.

급격하게 세력을 확장하면서 정치적 스팩트럼이 기존 민주당계에 비해서 매우 넓어졌으며, 그에 따라 제대로 된 정책적 스탠스를 잡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도 탄핵정국 이후 의원은 많아졌지만 대부분이 초선의원으로, 출신들을 살펴보면 과거 기업가, 시민사회단체 운동가, 보수정당에 몸을 담았던 사람도 일부, 과거 민주당 계열 등 공통분모를 쉽게 가질 수 있는 집단이 아니었다. 다시 말해 한나라당에 갖다놔도 이상한 것이 없을 사람이 정말 많았다는 말이다[31]. 그것이 앞에서 서술했던 열린우리당의 와해의 결정적인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정책 노선도 부실했고, 더군다나 정치적으로 더할나위없이 무능했기에 당의 와해는 필연적일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열린우리당의 붕괴는 결과적으로 한나라당의 재집권을 불러왔다. 2006년 이후 압도적인 이른바 "파란나라" 보수정국은 열린우리당의 참담한 실패가 불러일으킨 결과인 셈이다. 본격 4년만에 천국과 지옥을 오간 정당


4 집권당 분열은 숙명인가

사실 역대 집권 여당들이 내홍을 겪었던 예는 결코 적지 않다. 4.19 혁명 이후 제2공화국 당시 민주당(1955년)이 신파 구파로 분열되어 서로 물고 뜯었던 것은 아주 대표적 사례이며[32], 이를 반세기를 텀 두고 열린우리당이 그것을 재현한 것 아닌가 싶을 정도다. 문민정부 때도 집권 민주자유당에서 자민련(민정계 일부와 공화계)이 이탈하고 신한국당은 경선 내홍으로 이인제 계파가 탈당해 국민신당을 만드는 등 내홍을 겪었으며, 집권당은 아니지만 민주노동당진보신당의 분화 사례도 이 못지 않다.

이는 2008년 이후 한나라당 내에서도 다시 약하게나마 재현될 조짐을 보였다. 압도적인 총선 몰아주기 -> 지방선거 대패 -> 분열 속에 대통령 버리기로 진행되는 형식은 비슷해보인다. 심지어 국회의원 수는 가장 많고 야당들도 내부 사정이 개차반(…)임에도 불구하고 정국 주도권 빼앗기고 내주는 형세까지 유사했다. 도플갱어? 지방선거 등의 중간평가에서 패배하고, 청와대도 당과의 의견 조율이 안 되기 시작하며, 당 내에서도 이념지향에 대해 다툼이 벌어졌다. 급기야는 말년 대통령의 그 유명한 레퍼토리인 "탈당해라"라는 소리도 나왔다.

이후 2011년 4월의 재보선 패배, 10월 서울시 보궐선거 패배(2011년 재보궐선거), 그리고 11월 드러난 한나라당 측 인사에 의한 선관위 디도스 공격, 12월의 이상득 의원 측근 비리 등으로 홍준표 대표가 사퇴하고 이후 당의 진로를 두고 친박-친이계의 힘겨루기가 발생하면서 다시 이 징크스가 반복되는 게 아니냐는 전망이 대두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은 19대 총선새누리당의 과반으로 끝나면서 모조리 없었던 일이 됐다(…).

사실 새누리당이 그렇게 쉽게 무너지리라는 (진보진영 입장에선) 희망적인 예측 자체가 실현되기 힘든 것이었다. 새누리당은 3당 합당 이후 민주자유당-신한국당-한나라당-새누리당을 거쳐 20년 넘게 하나의 정당을 유지하면서 한국 정당 중 정당 제도화의 측면에서 가장 발전했다는 평가를 받는 정당이며 이회창이 대선후보였던 김대중, 노무현 정권을 제외하곤 대통령을 놓친적이 없는 당이기 때문이다. 탄핵 역풍으로 호남/충청 지역정당인 민주당과 자민련이 붕괴하는 와중에 한나라당은 영남 지역정당에서 보수우파 이념-계급정당으로 체질을 개선시키며 살아남은 것이 단적인 예다.[33] 그리고 18대 대선에서 박근혜가 당선됨에 따라 징크스가 완전히 깨져버리게 되었다. 오히려 2016년 현재 야당 측에서 벌어지고 있는 더불어민주당의 연속 탈당 사태가 이 당시의 열린우리당과 닮아도 너무 닮아있다는 지적이 많았으나...

그러나 20대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 당이 서로 쪼개지고도 결국 큰 성과를 거둔 반면 새누리당은 친박과 비박간의 계파싸움이 본격화되고 공천 파동까지 겹치면서 그대로 폭망, 사실상 2016년판 열린우리당 폭망의 재림이나 마찬가지의 판세가 되어버렸다. 역사는 돌고 돈다. 특히 비례대표 선거에서 중도보수 성향의 유권자들이 새누리당에서 국민의당으로의 지지 이탈이 두드러지게 일어났기 때문에 더 이상 보수당 쪽에서도 안심할 수 없는 분위기가 되어버렸다.

5 역대 선거결과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총선거 152/299 지역구 41.1% 비례대표 38.3%
2006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
광역단체장 1/16 기초단체장 19/230 광역의원 52/655 기초의원 630/2888


득표율: 광역의원(지역구)23.7%(비례대표)21.7%
  1. 참고로 민주화 이후 최장수 정당(15년)인 한나라당의 탄생과 새누리당으로의 당명 변경을 둘 다 지켜보지 못했다.
  2. 1년 11개월 간 존속했고, 중간에 대통령이 탈당해야 했던 신한국당이 가장 단명한 여당이다. 하지만 신한국당은 당체를 보존하고 이름만 바꾼격이라 상황이 다르다.
  3. Our party라는 당명은 오글거리기 때문인지(...) 정당명으로 쓰이지도 않는데, 일본의 민나노당(직역하면 '모두의 당')이 Your party로 번역되는게 좋은 예다.
  4. 宁은 寧의 간화자(간체자).
  5. "닫힌그들당"이라는 표현도 있었는데 이것은 2003년 12월에 최규식 한국일보 논설위원이 '지평선'이라는 코너에 쓴 칼럼에서 나온 말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최규식 씨는 이듬해 열린우리당에 입당해 17대 총선에서 서울 강북을 선거구에 출마해 당선되었고 18대 총선에서 재선에 성공한다. 다만 청원경찰의 "청목회"에 후원금을 받았다는 이유로 논란 끝에 불출마.
  6. 여기에 한가지 떡밥이 더 있다면 이라크 전쟁 파병 문제. 처음엔 유시민을 위시로 파병에 반대하는 것이 주류였던 분위기에서 친노 그룹이 끝에는 파병 찬성으로 선회했다.
  7. 호남 신주류(천신정)는 호남 구주류(동교동계)가 장악하고 있던 광주-전남이 아닌 전북-수도권 지역이 근거지였다. 호남 구주류는 호남 신주류가 민주당계열 정당의 당내패권이 걸려있는 호남지역을 차지하려 한다면서 의심했고 이는 어느 정도 사실이기도 했다. 이 쇄신갈등의 핵심은 호남패권을 둘러싼 호남구주류와 호남신주류의 갈등이 메인이었고 여기에 지난 대선에서 후단협 사태 등으로 호남 구주류에 원한이 있었던 친노가 가담한 형국이었다.
  8. 제2공화국 때의 신구파 갈등 정도. 자민련의 케이스도 있지만 이것은 자민련 측이 짐을 싼거고, 대통령 측에서 당을 새로 차리는 경우는 윤보선 이래 유래가 없었다. 그나마 윤보선도 내각에 권한 없는 내각제 하의 대통령이었다.
  9. 꼬마민주당 출신이 대부분인 김부겸, 김영춘, 이부영, 이우재, 안영근 등 5명의 의원들을 말한다. "독수리 5형제"라는 별명은 좋지 않게 말하자면 철새 라는 뜻이지만, 실제로 애니메이션의 새 종류도 다양하다 정치성향적으로 따지면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하는 등 기존의 한나라당과 줄곳 충돌하는 의원들이었다.
  10. 김영춘 의원(민주당 유일의 상도동 직계, 김영삼 대통령의 전 비서)은 탈당해 창조한국당으로 가서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불출마를 선언했고, 김부겸 의원을 제외한 다른 세 의원 역시 불출마를 선언했다. [#]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김영춘 전 의원과 김부겸 의원은 각각 고향인 부산과 대구에 출마했고, 이부영 전 의원은 논란끝에 원 지역구인 서울 강동구에 출마했으나 모두 석패 낙선했다. 안영근 전 의원은 자신의 지역구였던 인천광역시 남구을에서 인천 남동구갑으로 지역구를 옮기며 19대 총선에 출마할 계획이었으나, 민주통합당 당내경선에서 박남춘 후보에게 밀려서 낙선했다. 이우재 의원은 정계를 은퇴했다.
  11. 손석희 항목에 (흔히 "알면서 왜 하셨습니까?"로 알려진) "그렇다면 안하면 될거 아닙니까?" 참조. 막판에 자민련이 합류한 것을 두고 내각제 개헌 가능성도 제기된 상황이었다. 안그래도 개헌 역시 탄핵만큼 전체 의석의 2/3가 필요했다.
  12. 정동영의 노인 폄하발언만 아니었다면 18대 한나라당(최대 170석. 친박계인 미래희망연대까지 하면 177석)을 넘어서는 의석 수를 얻었을거란 분석도 있다. 초반 여론조사에서는 한나라당 50석 초반, 열린우리당 200석 예상도 있었으니(;;;) 문제는 충남을 거의 석권한 상황에서 당시 열린우리당의 압도적 승리에 중요한 승부처가 바로 영남 지역이었다는 것이다. 이 영남 지역 역시 탄핵 역풍이 강하게 불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래도 한나라당을 지켜야하는데..."라는 여론이 뒤엉킨 상황이었다. 이 때 흔들리는 표심을 말끔히(...) 정리해준 게 정동영의 노인 폄하발언이라는 견해가 많다. 혹자는 울고싶은 영남에게 정동영이 후닥션을 날려준 격이라고 하기도.
  13. 흥미로운 것은 이 당시 행정수도법이 열린우리당이 소수당이던 시절 통과되었다는 것이다. 2003년 12월 29일, 해를 넘기기 전에 신행정수도특별조치법(안)이 국회 본회의에서 가결되었다. (여야합의. 찬성167, 반대13, 기권14)
  14. 1. 국가보안법 폐지 및 대체, 2. 과거사 진상규명 법안(과거사법), 3. 사립학교법(사학법), 4. 언론개혁법
  15. 도리어 호남에서 민주당보다 지지율이 뒤쳐지기만 했다. [# 조선일보 기사]
  16. 이건 과거 신한국당의 96년 노동법 날치기와 오늘날 여당인 한나라당 모두가 겪고 있는 징크스이기도 하다.
  17. 사실 하나(대전광역시) 현직 시장인 염 시장의 개인기로 건질뻔 했으나 선거전 터진 박근혜 면도칼 찌르기 사건과 박근혜의 "대전은요?"발언으로 인해 망했어요. 전라남도광주광역시는 민주당, 제주도는 보수계 무소속 후보가 승리했다. 여담으로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구의회의 도림1·2동/문래1·2동 지역구에 2006년 이 당 소속으로 출마한 '고기판'이라는 정치인이 있었는데, 이름의 임팩트(?)가 꽤 컸기 때문인지 이 당의 지지율이 하락세였음에도 불구하고 당당히 재선에 성공한다.
  18. 민주노동당이란 정당 자체에 대한 국민의 기대는 2006년 정당 비례(12.06%)에서도 거의 유지되었다. 심지어 2004년 말에는 20%까지 육박하는 여론조사도 있었다니 열린우리당을 대체하는 것도 불가능하진 않았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은 17대 대선 이후 국가보안법 폐지와 통일론이라는 NL적인 이슈에 몰입했고, 이로 인해 PD계 진보 세력이 반발, 탈당하여 진보신당을 창당한다. 당연히 국민 여론은 민노당에 등을 돌리고, 서서히 진보신당을 지지하게 되었다. 이후 통합진보당으로 통합됨에도 불구하고, 2012년 통합진보당 사태로 완전히 몰락한다. 그나마 이정희 정도만 인기 조금 남았고 심상정, 노회찬 등은 또 다시 정의당으로 갈라서 나가고, 나머지는 진짜 완전히 망했다.
  19. 두 후보가 지지율 1, 2위이고 여당인물이 아닌 고건 전 총리가 3위를 기록했다. 그런데 고건 총리는 그 와중에 불출마와 정계 은퇴를 선언해버린다(2007년 1월 16일).
  20. 성향으로 보면 열린우리당 의원중 가장 진보적인 성향의 의원이었다. 이지스함을 반대해서 그렇지 그래서 당내 보수성향 의원들이 그럴거면 민노당으로 가버려라라고 했는데...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안산 상록을 재보궐 선거에 민주노동당을 비롯한 진보정당 단일 후보로 출마했다가 민주당 후보로 단일화 하면서 사퇴한뒤에 민주통합당으로 돌아온 상황. 그러나 당내 경선에서 졌다..
  21. 실제로, 2007년 대통령 선거 예비후보 등록이 시작되고 열린우리당 소속 첫번째로 선관위에 공식 등록된 대통령 선거 예비후보는 바로 '허경영'이었다.
  22. 만약에 정말로 허경영 후보가 출마 했다면, 가뜩이 현실은 시궁창열린우리당의 최후가 더 비참했을것이다.
  23. 새누리당으로의 명칭 변경.
  24. 정확히는 기간당원제로, 진성당원제는 민주노동당, 책임당원제는 한나라당이었다. [#]
  25. 사실 이후 민주당은 당원의 운용측면에서는 대의원 중심으로 돌아간 다는 점에서 그 민주성이 열린우리당보다 훨씬 후퇴한 감도 있다. 한나라당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핸드폰 오픈 프라이머리도 막장인건 마찬가지
  26. 중복 제외시 9명으로 5개월. 임시 의장들을 제외하고 전당대회로 선출된 의장은 평균 5개월보다 조금 더 재임한 정도다. 가장 길게 재임한 인물은 8개월 5일을 재임한 김근태. 중복포함시 8개월 1주일한 정세균(2개월 + 6개월 1주일)과 8개월 한 정동영(4개월 1주일 + 3개월 3주일) 순이다. 정동영은 무려 두번이나 공식 전당대회(각각 2004년, 2006년)를 통해 선출되었지만 4개월씩 밖에 견디지 못했고, 도리어 비대위에서 긴급선출한 김근태 의장이 최장 재임했다는게 개그. 그래봐야 도토리 키재기지만. 거의 대부분의 인물이 재보궐 등 선거에 책임을 지고 (그것도 지도부 전체가) 사퇴했는데, 그만큼 선거에서 매번 족족 졌고(이긴 적이 없다!) 당내 권력기반이 취약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27. 문제는 이조차도 민주당 계열의 인사들이 잘해서라기보다는 여당인 새누리당박근혜 대통령이 지지율 깎아먹는 일들만 골라서 했기에 얻은 어부지리라는 비판이 많다. 심지어 야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조차도 그런 의견에 부정은 못 하는 상황. 이는 갓 창당한 국민의당이 대승리를 거둔 근거로도 사용된다.
  28. 특히 노무현의 대북송금특검 수용은 구민주당계에게는 사실상 김대중계와의 결별선언이나 마찬가지였다는 평을 받는다. 물론 먼 훗날 두 대통령간의 앙금으로 남은건 아니지만 적어도 당대에는 그러했고, 실제 김대중은 당시 병원에 입원했는데, 공공연히 화병 때문이라는 소리가 나돌 정도였다.
  29. 2016년 20대 총선에서 정동영, 천정배 등 이들 호남 신주류가 동교동계와 손잡고 안철수의 국민의당으로 이적한 걸 보면 역사의 역설이라고밖에는..
  30. 대표적으로 추미애
  31. 반대로 공천만 받을 수 있으면 민주노동당 당적으로 출마하고 싶었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는 상당수의 열린우리당 소속 정치인들이 대학교 학생운동 출신에서 충원되었다는 점에 원인이 있을 듯 하다. 물론 정말로 민노당에 입당한 사람은 붕괴후에도 별로 없었지만.
  32. 원인 역시 급속한 의석 팽창 때문이었다는게 흥미롭다. 민주당도 무려 전체의석의 3/4를 차지했다.
  33. 물론 여젼히 주된 기반은 영남, 특히 대구경북 지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