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민주당(1995년)

대한민국의 민주당계 정당
민주당(1991년)통합민주당(1995년)[1]한나라당/새정치국민회의

1 개요

1995년 9월 분당 사태 이후 잔류한 민주당(1991년)이 시민단체 계열의 개혁신당과 합당하여 같은 해 12월 21일 창당한 정당.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일부 정치인들은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하고, 잔류파는 1997년 11월 24일 신한국당과 합당하여 한나라당을 창당하면서 소멸하였다.

2 역사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당시, 경기도지사 후보 공천을 놓고 김대중 아태재단 이사장은 옛 민정계 출신의 이종찬[2]을 추천했다. 그러나 공천권을 쥐고 있었던 이기택 대표는 장경우 전 의원[3]을 고집했고 결국 생각보다 큰 표차로 민주자유당 이인제가 당선되었다.[4] 얼마나 갈등이 심했냐하면 김대중이 다른 지역 유세는 다 가면서도 정작 경기도 유세에는 다소 소극적이었을 정도#.

지방선거 결과 광역자치단체는 여5:야10으로[5], 기초단체장, 지방의회 선거에서도 민자당을 제칠정도로 민주당의 성적이 좋았으나[6] 김대중과 이기택의 갈등 심화로 인해 민주당(1991년)을 탈당한 김대중과 동교동계는 새정치국민회의로 독립하여 나갔다. 꼬마민주당 시즌 2라고 할까나.


왼쪽 끝에 노무현 전 의원, 가운데에 키 큰 사람이 이기택 총재, 오른쪽 끝에 이부영, 강창성 의원이 눈에 띈다.

이에 잔류한 민주당 파벌은 시민운동 계열을 끌어들여 "통합민주당"을 창당한다.[7] 초기에는 민주화시대의 명사나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등의 시민단체가 "개혁신당"을 창당하고 합당, 대거 합류하면서 의외로 개혁적인 민주정당으로 성공할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이는 국민회의가 대선 승리를 위해 보수온건화 노선을 탔기 때문이다.) 민주당 시절 입당했던 강창성 장군, 홍성우 변호사[8] 등도 인기를 끌었다. 경실련의 서경석 목사도 대표적.

개별 정치인들의 대중적인 인지도는 높은 편이었으나, 삼김시대(신한국-국민회의-자민련)가 정립된 상황에서 제4당이 살 길은 별로 없었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15석(지역구 9석 + 전국구 6석) 확보에 그치면서 원내교섭단체 구성에 실패, 당세가 약화되었다. 서울특별시 지역에서는 강동구 갑의 이부영을 제외한 모든 인물들이 낙선을 면치 못했고, 부산광역시에서는 이기택 대표를 포함하여 전원 낙선크리. 게다가 신한국당이 과반수 확보를 위해 황규선(이천시), 이규택(여주군), 최욱철(강릉시 갑) 등의 당선자 빼가기에 나서면서 폭망 확정.

물론 되돌아보면 성과도 없지는 않았다. 당시 경상남도 울산시에서만 5개 지역구 가운데 2개 지역구 당선, 1개 지역구 선전을 거두는 성과를 올렸다. 민주노동당 조상 기믹?[9] 또 경북 안동시갑에서 첫 도전한 권오을(경상북도의원 출신) 후보가 권씨 문중의 힘으로 깜짝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승리에도 의석이 30석에서 반토막이 난 것은 변호하기 어려웠다. 서울에서 민주당은 거의 전지역 3위의 성적을 거두었으며, 선전할 경우 국민회의 후보가 낙선하는 결과만을 낳았다. 이때 김진명이 떨어졌으니까 잘 된거다

3 합당과 소멸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조순 서울시장을 후보로 추대(=시장 사임)했다. 그러나 지지율의 부진으로 결국 1997년 11월 신한국당과 합당하면서 한나라당의 일부가 되었다. 당시 한나라당은 "전통 여당과 전통 야당의 결합"으로 선전되었다.

노무현, 김원기, 김정길 등의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 소속 대부분은 이에 반발해 새정치국민회의에 합류하여 김대중과 재회하였다. 단, '통추' 가운데 이철[10], 제정구 등의 소수파는 한나라당 창당에 참여했다.[11] 민주당 소장파였던 권오을(안동시), 이주영(창원시), 장광근(비례) 의원 등도 합당에 동참했다.[12] 조경태의 경우 합당 당시에는 한나라당으로 들어갔지만 공천 탈락 뒤 탈당하여 새천년민주당에 들어갔다가 이후 2016년 새누리당으로 다시 자리를 옮겼다,

4 의의

이 정당의 의의는 최후의 비DJ계(비호남계) 야당이었다는 점이다. 당시의 정치적 좌표가 좌우 보혁보다는 DJ(+JP 등 반 YS계)와 반DJ, 혹은 호남(+충청)과 비호남으로 나뉘었다는 점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결국 선명 야당을 내세우던 이들의 노선은 실패하였다. [13]

통합민주당이 소멸한 지 20여년이 지난 후 2016년 20대 총선에서 국민의당이 호남을 완전히 석권하고[14], 더불어민주당이 호남에서 대패하였음에도 불구하고[15] 호남 외의 지역에서는 대승하면서[16]왠지 더불어민주당이 비호남계 야당으로서 이 정당의 후계가 된 듯한 느낌이다.

5 후일담

이로서 지역구도는 격화 되었고, 우리가 알고 있는 보혁 대결은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부터 본격화 되었다. [17]

이부영 등은 한나라당 부총재를 지내고 최고위원에 선출되기도 했으나, DJ vs 반 DJ 구도가 깨지고 대북정책 중심으로 재정렬 되면서 다수가 민주당계로 돌아온다. 대표적인 사례가 이른바 이부영 김부겸 김영춘 등의 "독수리 5형제". 한나라당이 패배하고 노무현의 탈지역 개혁신당이 구체화 되면서 이들이 대거 참여한 것이다. 이들이 새천년민주당에 참여하는 건 명분상 어려웠기 때문에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의 여당 분당이 불가피했단 시각도 있다.

흥미로운 점은 통합민주당계의 합류로 김대중 정권기의 한나라당은 무조건 보수적인 정당만은 아니었다는 것. 당시의 한나라당은 이회창계 + 반 DJ계의 계파 정당, 영남 지역정당에 더 가까웠다. 도리어 민주당의 의원들이 더 보수적일 수도 있었다는 이야기다. 민주당의 보수화는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 후 시도한 "한나라당 의원 빼오기"나 새천년민주당 창당 과정에서의 "몸집 불리기"로 더욱 심화되었다.

대표적으로 신한국당과 통합 과정에서 이미경 전국구 국회의원은 의원직 상실을 원치 않았는지[18] 새정치국민회의 등으로 당적을 옮기지 않고 당적을 신한국당, 이후의 한나라당으로 옮기긴 했었다. 그런데 실제로는 한나라당에 반감을 가져서 이후 정계 활동 때 당의 노선에 전혀 따르지 않아 '내부의 적'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19] 어느 정도였냐면 1999년 동티모르 평화유지군 파병 동의안에 한나라당이 당 차원에서 반대해 표결 자체를 거부하고 회의장에서 모든 소속 의원들이 퇴장할 때도, 혼자 본회의장에 남아 반대표도 아닌 찬성표를 던졌을 정도. 결국 당에서 출당(제명) 조치되어 무소속 의원으로 남았다가 바라던 바다! 2000년에 새천년민주당에 도로 입당했다. 의원직에 대한 욕구와 개인의 정치적 소신이 절묘하게 결합해 일어난 일화이다. 참고로 이미경 의원은 민주당에서도 비례대표에 당선되어 16대 의원을 지냈으며 17대부터는 3번 연속으로 서울 은평구갑에서 당선되어 현재 5선까지 성공했다. 특히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때 서울에서 민주당이 전멸하다시피 했음에도 당선되었다! 그만큼 지역구 관리를 잘하고 있었지만 지역구 관리라면 빼놓을수 없는 정청래와 같이 컷오프를 당했다.

개혁성향을 가진 통합민주당의 전국구 의원 6명 중 과반인 3명(이미경, 이수인, 김홍신)이 이런 행보를 보였다. 이수인, 이미경 의원은 1999년 10월 제명되었는데 이미경 의원이 이듬해 새천년민주당 창당에 합류했고 이수인 의원은 무소속으로 임기를 마쳤다.[20] 김홍신 의원의 경우는 다소 행보가 복잡했는데, 1998년 3월 "거짓말을 하면 염라대왕이 입을 꿰맨다고 했듯이 김대중 대통령에게는 공업용 미싱이 필요하다."는 망언을 하는 등의 반DJ 행보로 16대 때도 비례대표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주요 관심사인 보건복지 분야에 대해서는 정부 정책에 비판적 지지를 보내면서 한나라당 지도부와 차츰 사이가 나빠졌고 참여정부 출범 후에는 노골적으로 친노 정치인들과 가깝게 지내는 바람에 결국 열린우리당이 창당된지 2개월만인 2003년 12월 의원직 사퇴 및 탈당을 선언하고 열린우리당에 입당한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종로구에 출마했으나 박진 한나라당 의원에게 밀려 낙선하면서 정계를 은퇴했다.

이건 정말 마이너해서 대부분이 모르는데 노회찬이 1996년 15대 총선을 전후한 시점에 민주당에서 당무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민중당(1990년)의 실패 이후에도 진보세력들은 계속 대중적 진보정당 건설을 주장하면서 각개약진했지만, 정작 대중적 기반은 만들지 못하고 자기들끼리 조직통합을 둘러싼 키배만 뜨는 상황이었다.[21] 시간은 흘러 15대 총선은 다가오고, 선거출마는 해야겠는데 독자 정당 창당은 힘들고 돈도 없고, 지역기반도 약하고, 유명인도 없으니까 그렇다고 무소속으로 나가자니 그냥 듣보잡 군소후보 취급 당할꺼 같고, 그래서 노회찬을 중심으로한 일부 진보인사들이 선택한게 통합민주당에 단체로 입당해서 후보로 출마하는 방법이었다. 통합민주당의 개혁적인 이미지와 인지도, 지구당 조직를 이용하자는 것이었다. 당무위원 직함을 받고 입당한 노회찬은 통합민주당 서울 강서(을) 지역구 후보 경선에서 고진화[22]를 꺾고 승리했지만, 정작 사면복권이 되지 않아서 선거 출마는 하지 못했다. 이때문에 노회찬은 다른 진보인사들한테 꼼수 부리면서 이상한 짓거리한다고 욕만 먹고, 별 성과없이 선거후에 다시 탈당했다. 함께 입당했던 다른 인사들도 조직력에서 밀리거나, 여러가지 사정이 꼬이면서 정작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건 달랑 1명뿐이었다.

6 연혁

  • 1995년 9월 5일: 김대중의 아태재단(동교동계)이 궐기하여 상당수의 민주당(1991년) 인사들을 탈당시킴. 탈당한 인원들과 김대중은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함.
  • 1997년 11월: 조순의 지지율이 점점 떨어짐에 따라, 신한국당(한나라당의 전신)과 합당 추진. 국민통합추진회의 계열인 노무현, 김원기, 김정길 등은 탈당하여 새정치국민회의에 합류함.

7 역대 선거결과

  •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15/299 11.3% [23]

8 관련 항목

  1. 우선은 민주당계 정당으로 분류되지만 일부가 현재 한나라당-새누리당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보수정당으로 종종 분류되기도 한다.
  2. 민주정의당 국회의원을 거쳐 민주자유당에서도 활동했다. 그러나 1992년 김영삼이 당권과 대권을 모두 잡게 되자 탈당해 새한국당을 결성했다가 뜬금없이 김대중의 편에 선 인물. 이후 국가정보원장을 지낸 바 있다.
  3. 이 사람도 이종찬과 함께 새한국당을 결성한 민정계 출신.
  4. 흥미로운 것은 이 때부터 이인제의 존재감이 커졌으며 불과 2년 뒤 김대중대통령 당선에 절묘한 역할을 담당했다는 점. 역사의 아이러니다.
  5. 민주자유당이 경기/인천/부산/경남/경북, 민주당이 서울/광주/전남/전북, 자유민주연합강원/대전/충남/충북, 무소속이 대구/제주를 차지했다.
  6. 특히 서울에서는 그야말로 압승을 거뒀는데 구청장의 경우 강남구서초구를 제외한 23개구에서 민주당 후보가 당선되었고 시의회는 총 133석중에 123석을 민주당이 가져갔다. 이는 원래 서울에 호남 출신 유권자가 꽤 있다는 점을 감안해도 상당히 큰 격차로, 그만큼 김영삼 정권에 대한 서울시민의 반감이 심각하다는 근거였다.
  7. 하지만 민주당의 정통 계통은 자신들에게 있다며 언론에겐 통합이란 말을 빼고 그냥 '민주당'이라고 불러달라고 했다.
  8. 배우 출신인 홍성우 전 국회의원과 동명이인으로 인권변호사. 한자 표기는 洪性宇로 같다.
  9. 참고로 5개 지역구 가운데 하나는 정몽준의 지역구(동구, 민주당 비출마 지역)였으니 결국 4개 가운데 2곳이 성공한 셈이다. 울주군(당시는 울산시 울주구)에서는 과반 득표(53.8%)를 기록했으며, 낙선한 지역구에서도 26.7%(남구갑), 35.7%(중구, 신한국당 당선자와 2.5% 격차)의 혁혁한 득표를 올렸다. (구) 창원시 갑/을에서도 15%를 넘기는 득표들을 올렸다.
  10. 민청학련 사건으로 사형 선고를 받은바 있으며, 2000년한나라당을 탈당하면서 정계를 은퇴했다가, 2002년에 다시 정몽준국민통합21에 합류하면서 정계에 복귀했으나 막판 단일화를 깬 정몽준을 비판하며 결별. 2004년 열린우리당 공천으로 부산 북구 + 강서구갑에 출마했으나 낙선한다. 그 이후 정치권에서 물러나 2005년 6월 30일 ~ 2008년 1월 21일까지 한국철도공사 사장을 역임했다. # 위백 항목 참조
  11. 굳이 드립을 치자면 경남의 경우 낙동강을 기점으로 경상좌도 쪽은 반DJ, 경상우도인 부산 쪽은 친DJ가 되었다고 보아도 좋다. (제정구는 고성, 이철은 진주 출신.) 이거 뭔가 남인 북인 나누는 것 같은데요 김해도 경상좌도 아닌가 정확히 말하면 당시 부산 출신 정치인들의 야성이 좀더 강했다는 평가.
  12. 이들은 모두 2014년 현재까지 새누리당에 남아있다.
  13. 이런 분위기는 96년 총선과 98년 지방선거의 결과가 잘 보여준다. 96년 총선은 새정치국민회의와 자민련이 지역정당임을 분명히 했으며, 98년 지방선거 결과는 영남과 강원은 한나라당이, 수도권, 충청, 호남은 국민회의와 자민련이 정확히 동서로 나눠가졌던 것이다. 텃밭 땅따먹기
  14. 호남 28석 중 23석을 차지했다. 이러한 호남의석은 동시에 국민의당이 획득한 지역구 의석 중 92%에 달한다
  15. 호남 28석 중 3석을 차지했다. 2석을 차지한 새누리당과 비교해도 나을게 없는 수준
  16. 수도권을 석권하고 충청에서 호각지세를 보이며 영남에서 이례적인 돌풍을 일으켜 선거 결과 원내 1당을 차지했으며, 영남의 의석수가 호남 의석수의 3배에 달한다.
  17. 그나마도 노무현 후보가 경선에서 패배했다면 인물, 계파, 지역 대결이 계속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18. 비례대표직은 타 정당과 합당하거나 출당 조치의 경우에만 의원직을 유지할 수 있으며, 해당 정당에서 자의로 탈당하거나 합당하는 정당이 아닌 다른 정당으로 당적을 옮길 경우 의원직을 상실한다.
  19. 이 시기 한나라당엔 통합민주당 출신으로 국가보안법 폐지에 찬성하는 인사도 많았다! 2001년에는 국가보안법 문제로 같은 한나라당인 김원웅 의원과 김용갑 의원 사이에 고성이 오갔을 정도 ㄷㄷㄷ
  20. 임기 만료 후 불과 열흘 만에 지병으로 별세. 아마도 자신의 병세가 심각하다고 판단해 사실상 정계은퇴를 결심했던 듯.
  21. PD(정파)NL(정파)한테 맨날 밀리는 이유가 이것이다. 막말로 NL은 하다못해 동네물청소라도 열심히 하면서 지역에서 인심을 얻고 있는데, PD는 맨날 자기들끼리 골방에서 강령토론, 조직노선 토론하느라 시간 보냈다.
  22. 이 사람은 2004년에 와서야 한나라당 후보로 영등포구 국회의원에 당선되지만 워낙 정체성이 안 맞아서 4년 후에는 낙천된 것도 모자라 제명당했다. 물론 어느 날 갑자기 제명된건 아니고 당시 창조한국당 문국현 대표를 지원했다가 그렇게 된 것.
  23. 당시 여당인 신한국당의 지지율은 34.5%, 새정치국민회의는 약진을 예상했음에도 25.3%였다. 민주당계 두 정당의 지지율의 합이 신한국당 지지율을 미세하게 넘기는 상황이었다. 만약 두 당이 통합했으면 과반을 넘겼을 거라는 예측도 있지만 역사에 만약은 없고.. (참고로 민주한국당신한민주당이 모두 나왔던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 통일민주당평화민주당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도 비슷한 상황. 2004년제17대 국회의원 선거 때도 새천년민주당-열린우리당 동시 출마로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