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술

劍術

1 검술의 기원과 역사

검술의 기원을 명확히 잡는 것은 불가능하며, 단검의 경우 구석기시대부터 만들어 썼으니, 이때부터 단검술이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청동기 초기부터 이미 구리나 청동으로 만든 금속제 단검이 있었으며, 구리와 주석의 배합 비율의 조절과 기술의 발달에 따라 중국 진(秦)나라에서는 120cm에 달하는 양손으로 사용하는 청동검까지 만들어졌다. 또한 일리아드등에서도 영웅들이 특유의 요령과 기술로 검을 사용하는 묘사가 존재하므로, 큰 칼을 사용하는 기술 또한 무기가 등장한 시점부터 존재했으며, 단순히 휘둘러 베는 것을 떠나 하나의 체계로 정립될 만한 수준의 검술이 존재했음을 단편적으로나마 알 수 있다.

검술에 대한 묘사는 여러 매체에서 꾸준히 찾아볼 수 있다. 로마시대에 쓰여진 병법서인 베게티우스의 《군사학 논고De Re Militari》에서는 고대 로마군의 글라디우스검술 훈련 시스템을 묘사하고 있다. 또한 <롤랑의 노래>를 비롯한 여러 중세 무훈시나 북구의 영웅담인 Saga등에서도 상대의 무기를 막고 공격하거나 페인트를 걸고 공격하는 상당히 높은 수준의 검술을 시연하는 것으로 보이는 묘사가 다수 있다. 하나의 체계를 모두 알 수 있는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검술 그 자체가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단편적인 증거들이다.

각 문화권에 따라 차이는 있으나 검술의 체계가 일부나마 문서로 남거나 검술을 교습하는 무술학교와 같은 시스템이 등장한 것은 13세기경으로 볼 수 있다. 이 시대는 소드&버클러술을 기록한 유럽의 I.33문서(1280)가 존재하고, 일본에서는 넨류(念流)가 이 시대에 창시되었다고 주장한다. 본격적으로 무술 교습이 활기를 띠며 문서가 많이 남기 시작한 시점은 15세기부터인데, 서양 검술의 수많은 문서가 이 시대부터 다량 등장하기 시작하고, 일본에서는 논란의 여지 없이 최초의 유파로 인정받는 가토리신토류가 창시(1447)된 시점이기도 하다. 16세기에 들어서는 돈을 받고 검술을 비롯한 무술을 교습하는 fechtschule, 마치도죠(町道場)와 같은 무술학교 시스템이 유행하기 시작한다. 이 시대에는 귀족 평민 가릴 것 없이 검술을 배울 수 있는 길이 열렸으며, 크게 대중화되었다. 검술의 수준도 이 시대에 정점을 달렸다고 할 수 있다.

이 시대 이후로 검술은 쇠퇴하는 경향을 보인다. 전근대가 오래도록 지속된 비유럽권에서는 비교적 덜하거나 그렇지 않지만, 유럽권에서는 두드러진 현상이었다. 이렇게 된 이유는 화승총의 등장을 비롯한 무기와 전술의 변화로 칼싸움의 비중이 줄어들어 더이상 힘들여 검술을 배워야 할 필요가 없어졌으며, 특히 변화무쌍한 운용으로 무술적 가치가 큰 롱소드와 같은 양손으로 사용하는 도검류가 퇴출된 것 또한 검술의 퇴보에 큰 역할을 했다. 18세기가 되면 그러한 검술의 단순화를 두드러지게 느낄 수 있으며, 이러한 내용은 사브르 검술항목을 통해 알아볼 수 있다.

동양권의 경우는 화기로 대표되는 신식무장의 보급이 늦어져 전반적으로 냉병기 위주의 구식 전술이 상대적으로 오래 지속되었고, 사회적 요인[1]으로 의해 검술의 쇠퇴가 상당히 늦추어진 감이 있었다. 일찍부터 화기를 운용해온 대표적인 지역인 중국은 전통적인 숭문억무 사상에, 후대로 갈수록 병기분야에서의 기술이 정체되면서 아편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여전히 구식화기와 냉병기를 운용하는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2] 인도 같은 경우는 대포와 총을 운용하고 자체적으로 플레이트 아머를 생산할 기술을 가지고 있었지만, 산업화의 부족과 경직된 사회구조를 비롯한 내부적인 요인으로 갑옷과 방패, 칼이라는 전근대적인 무기의 비율도 만만치 않았고, 필리핀이나 인도네시아 같은 곳은 전술과 무기수준의 극심한 낙후 이외에도 부족적 생활상의 유지와 험악한 치안으로 인해 칼리 아르니스라는 다양한 날붙이와 봉을 사용하는 무술이 지금도 남아 있다. 일본의 경우도 전술과 무기수준의 낙후가 오래도록 지속되었으며 거기에 더해 지배계급인 무사의 정장으로 칼 두자루를 반드시 착용하도록 하였으며 무술실력이 뛰어난 사람은 출세하기도 좋았던 관계로 유파라 불리는 무술학교 시스템이 살아남을 수 있는 배경이 되었으며, 근대화 이후에도 국민 정서로 인해 그러한 사회상의 일부가 살아남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동양권 국가들도 근대화를 거치며 검술이 급격히 소멸하거나 입지를 잃었고, 유럽과 동일한 퇴보의 길을 걷거나 무형문화재화되어 개념화되는 길을 걸었다. 동양권에 유독 검술이 많이 살아남은 것은 전근대적 군사문화가 백여년 전까지 유지되던 것에 기인하며, 달리 실용성이 있어서는 아니다. 현대에 있어서는 일종의 전통 문화의 향유라는 개념이 검술 수련의 이유 중 하나가 되어 있으며, 상당한 검술 시스템이 이러한 수요 덕택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3] 그러한 이유로 유럽에서는 과거에 소멸했던 중세 검술이나 르네상스 검술등의 복원이 진행중이다.

2 검술에 대한 오해와 진실

2.1 검술과 검의 위치

현대인들은 전근대 전술과 전쟁에 대한 이해가 없고 영화나 만화, 소설 같은 서브컬쳐에 의존하므로 검과 검술에 대해 과대평가하거나 그에 대한 반발로 실제보다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무협지나 판타지를 비롯한 여러 서브컬쳐에서는 검이 주력 무기로 나오는 경우가 매우 많으며 검으로 수많은 병사를 베어넘기거나 하는 묘사가 많으므로, 일반인들도 이러한 내용에 따라 검이 전장에서 많이 쓰였고, 검술도 그만큼 중요했던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현실에서는 검은 그냥 보조 무기에 지나지 않으며, 검술도 그러한 존재에 불과했다. 실질적으로 전근대 전쟁터에서 교전은 활, 총, 대포와 같은 장거리 무기로 교전하고, 백병전에 들어서는 대열을 유지하며 창이나 할버드,나기나타같은 폴암종류의 무기로 교전했다. 검이 나서는 경우는 대열이 붕괴되던가 지형적 이유로 장병기가 나서기 어려운 경우에 한했다. 고대 로마의 경우는 매우 특이한 경우이며, 이후 그러한 예를 찾을 수 없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스페인의 경우 16세기 초까지 존속한 로델레로라는 방패검병이 있는데, 이런 경우도 산과 숲이 많은 스페인의 지형적 특성에 의한 것이다.

검과 검술이 그나마 높은 비중을 차지했던 것은 고대 로마를 제외하면 14~15세기 유럽과 일본의 경우가 그러했는데, 이 시대의 유럽과 일본은 갑옷이 발달하고 소수 엘리트 무사들간의 교전이라는 전쟁 형태를 가졌으며, 갑옷의 발달에 의해 칼날의 위력이 크게 약화되어 장병기의 간격 안으로 쉽게 들어올 수 있게 됨에 따라 보조 무기인 도검의 중요성이 강화된 시대였다.[4] 이 시대에 걸쳐 도검류의 사용 비율이 늘어나면서 검술의 수준이 그에 따라 크게 상승하였으며 이 시대 특히 15세기는 검술서나 유파의 등장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던 시대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시대 이후를 지나면 검술은 수준의 상승이 이루어지지 않고 오히려 퇴보 혹은 정체의 길을 걷게 되는데, 검과 검술이 보조적 용도일 수밖에 없던 일반적 전장환경 안에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검술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것은 민간 호신용도에서였다. 전근대, 특히 르네상스 시대까지는 치안이 매우 좋지 않았고 당시 여행은 일반인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며 여행객이란 대부분 상인, 귀족이나 중산층 같은 돈이 되는 사람들이었고, 치안이 시가지나 마을 이상으로는 통제가 되지 않았으므로 습격이나 약탈, 살해를 당할 가능성은 일상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길기 짝이 없는 창이나 폴암을 들고 다닐 수는 없는 일이고, 커다란 방패를 들고 다닐 수도 없는 일이니, 자연스럽게 아밍 소드한자루만 차고 다니던가, 혹은 작은 방패인 버클러를 들고 다니던가 하는 수밖에 없었고[5] 따라서 휴대하기 편한 검이 호신무술로써 큰 위치를 차지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검술의 유용성과 필요성 때문에 검술이 기사와 직업군인의 전유물이었던 시대에 이미 민간인 호신검술로써 작업용 도검이던 메서(Messer)를 사용하는 호신검술이 존재하여 지금도 문서가 현존하며 복원이 이루어지고 있고, 우리의 비리공무원 파울루스 헥터 마이어[6]의 문서들에 의해 나무몽둥이술, 낫술, 대낫술, 도리깨술이 존재했음이 확인되고 있다. 16세기부터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무술도장이라든가 민간인들의 검술 수요는 이러한 배경을 두고 볼 수 있다. 16세기에는 과거 기사와 직업군인, 검술 길드의 전유물이었던 Sword를 사용하는 장검술이 민간에게도 오픈되어 롱소드검술이 맨몸 전투에서의 유리함이나 높은 검술적 수준에 의해 큰 인기를 끌었으며, 좁아터진 당시의 시가지 내에서의 우발적인 싸움을 위해 레이피어라는 도검까지 등장하고 대세를 차지할 정도이니, 당시 민간인들의 검술 수요와 사용률이 매우 높고 주류 검술계에도 영향을 끼쳤다는 것과 함께, 민간계에서야말로 검과 검술의 위치가 드높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18세기부터는 도검이 실전용이 아니라 성인 남성의 정장의 필수 악세사리로 취급되어 장식성이 강한 스몰 소드가 주류가 되었으나 가볍고 약한 장식검임에도 이것을 이용해 결투나 호신을 하는 수요가 생기면서 검술 도장이 성행하였다. 18세기까지는 칼뺏기나 드롭킥(...)등 호신을 위해서 쓸 수 있는 기술은 다 쓰는 실전적인 검술이었으며, 덤으로 세이버와 같은 군용 도검, 짧은 외날도인 헌팅 소드나 쌍두 단창인 예거 스톡을 사용하는 기법도 교육되기도 했다.

19세기 유럽에서는 스몰소드가 정장의 필수 요소에서 탈락하고 지팡이가 장식 도구를 대체하면서 스몰소드 검술은 크게 쇠퇴하고 귀족의 교양으로써 형식화되어 엄격한 룰과 예절을 따르는 형식화의 길을 걸었다.

다만 민간인이 총을 가지는게 불가능에 가까웠던 일본의 경우는 막부말과 같은 치안 불안에 민간인의 검술 수요가 폭증하여 유럽의 16~17세기를 연상케 하는 도장 문화의 전성기가 일시적으로 도래하기도 했다. 물론 이는 현대의 한국도 마찬가지다(...).

2.2 검술은 정말로 배우기 어려운가?

진실과 과장이 한데 섞인, 루머이지만 루머라고 하기도 뭣한 이야기이다. 결론만 말하자면 꼭 그렇지는 않다. 검술은 배우기 어렵다는 이야기가 많이 퍼지는 바람에 검을 써서 뭘 베기만 하려고 해도 상당한 숙련과 훈련이 필요하며 몇년 이상씩 수련하지 않으면 전혀 쓸 수가 없다는 식의 인식이 현대인들에게 많이 퍼져 있지만, 기본적인 것만 가르치는 데에는 결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으며 빠르면 일주일 안으로 다 배울 수 있다. 특히 군대에서 병사들을 훈련시킬 때에는 가장 기본적인 것들만 단시간 내에 숙련시키도록 하였는데, 근현대에서 예로 들 만한 것이 바로 일본육군의 군도의 조법이다.

군도의 조법은 구 일본육군에서 검과 검술에 대한 이해가 전무한 장교와 부사관, 병들이 매우 많은 세태를 감안하여 빠르고 간단하게 군도를 사용하는 법을 교육하기 위한 속성교육 시스템인데, 기본적인 머리베기와 대각선 좌우 내려베기, 찌르기라는 4개의 공격법과 함께 거합술 7본을 통해 공방의 이어짐을 학습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훈련계획표 또한 예시로 존재하는데 하루 한시간 반, 일주일 교육으로 군도 사용법 교육을 마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이처럼 기본 사용법만 교육하는 데에는 결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또 유파별로 차이가 있을 수 있는데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강조하는 고류 검술들은 초기에 적응하기가 상대적으로 빠르다. 반면에 근대로 올수록 펜싱의 런지나 검도의 발구름처럼 특정 효과를 얻기위한 동작이 추가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 경우 초기에 자연스러운 몸놀림을 갖추는데만 해도 꽤 시간이 걸린다. [7]

반면에 군사훈련용이 아닌, 전통적인 기예로서의 검술은 거의 평생 배운다고 해도 무방하다. 검술은 보편적으로 상하좌우, 각 대각선으로 8방향의 베기가 존재하며, 양날로 되어 있는 롱소드검술에서는 베고 그대로 들어올리는 방식의 베기를 포함하여 총 16방향의 베기가 존재한다. 물론 그에 따라 8개 이상의 방어가 존재하며, 여기에 스텝과 카운터어택을 비롯하여 페인트 등의 고급기술까지 포함된다. 이러한 것을 모두 배우는 데에 몇년 이상씩 걸리고 10년 넘게 배워야 할 필요도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검술이란건 바로 이런 후자를 의미한다.

결국 어느것이나 그렇지만 기본적인 것만 가르치느냐, 상위의 고급개념과 기술까지 다 배우느냐는 원론적인 이야기이다.

2.3 검술의 교습 형태

검술은 주로 다음과 같은 교습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군대에서 훈련의 형식으로 가르치는 것
가문, 문중에서 구성원들에게만 가르치는 것
문파, 길드에서 구성원들에게만 가르치는 것
돈을 받고 가르치는 오픈된 학원의 형태
특정한 인연으로 맨투맨 교습을 받게 되는 것

군대에서 가르치는 검술은 기본적으로 병사들을 빨리 훈련시켜 바로 전쟁터로 내보내기 위한 것으로, 그 내용도 가장 기본적인 것만을 숙달하도록 된 것이 많으며, 무기의 사용법과 요령, 실전에서의 몇가지 사례를 간략화하여 숙달시키도록 하는 것 정도로 끝난다. 《De Re Militari》에서 등장하는 훈련 내용이 그렇고, 군도의 조법이라든가가 그러한 경우이며 세이버 검술시스템 등도 병사용으로 간략화하여 가르친 바 있다. 다만 그렇다고 하여 그 내용까지 폄훼하기 어려운 것이, 이러한 훈련 시스템은 뛰어난 실력의 고수들이나 고참 군인들이 연구하여 구성하는 경우가 보통이기 때문이다.

가문, 문중에서 가족 구성원, 혹은 그에 해당되는 수준의 사람에게만 가르치는 경우는 전근대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경우인데, 검술 시스템의 노하우는 얻기 어려운 반면 기술이 노출되면 곧바로 대응책이 연구되어 있으나마나한 것이 되어 버리고, 결과적으로 자신들만의 것이 아니게 되며 타인들도 비슷한 수준에 올라설 수 있게 되어 버리므로 의미를 상실하게 되므로 폐쇄적으로 기술의 유출을 경계하며 믿을 수 있는 자들에게만 가르치는 것이다. 현대 군대에서 교범이나 미사일, 대공포의 위치나 발사 코드 등을 외부로 유출하지 않는 것과 똑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중국의 경우 양가창법이라든가 태극권의 경우 진식, 손식 등 전수되는 가문의 성씨를 따서 구분하는 경우가 많이 보인다.

문파란 일본이나 중국 무술의 무술연구, 전수 집단이다. 길드는 중세시대의 동종업자들의 조합을 가리키는 것으로, 상업역사 쪽에서 전세계적으로 존재했지만 검술에도 길드가 있었다. 이러한 길드는 자신들의 검술을 보존하고 이것을 수단으로 삼아 희망자들에게 검술을 가르쳤으며, 유명한 검술길드인 막스브뢰더(Marxbrüder)나 피더페히터(Federfechter)같은 경우는 독자적인 검술과 높은 수준을 바탕으로 도시나 왕에게 인가장을 받아 정식으로 공인되어 권위를 가지기도 했으며, 검술 교실이 속속 대중화되던 16세기에도 검술 교실을 여는 데 철저한 실력 검증을 하여 그렇지 않으면 길드의 이름으로 교실을 열 수 없게 하는 등 명성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신경을 썼다. 일본의 고류 유파들도 길드와 비슷한 정서를 가지고 있다. 물론 별로 실력도 대단하지 않은 사람들이 겉핥기로만 배워 도장을 여는 경우도 없지 않았으며, 17세기의 이탈리아 검술의 경우가 특히 그랬다. 당시 이탈리아 검술은 실전성으로 명성이 높아 유럽 여기저기에 도장이 생기는 등 세가 대단했다. 영국의 마스터 조지 실버는 영국에 들어온 레이피어와 이탈리아 검술을 아주 싫어했으며 여러 차례 현피를 떠서 박살을 내기도 했다. 그의 이런 정서는 그러한 세태에 대한 반감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이건 현대도 다를 바 없다.

비단 검술뿐만이 아니라 모든 무술에도 적용되는 항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4 검술은 모든 무기술의 근본?

주로 유럽이나 일본에서 하는 이야기다. 요컨데 검술이 다른 무기들에 필요한 움직임과 운용법을 모두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검술의 원리는 모든 무술과 통하며, 검술을 배워두면 그 이치에 따라 다른 무기들도 쉽게 쓸 수 있다는 주장이다. 가령 창의 경우 찌르기와 내려치기 정도가 기본 용법이고, 폴암의 경우 찌르기와 베기, 종류에 따라 걸기나 찍기 정도가 가능하며, 무기가 크고 거대하여 자세나 궤도에 제한이 있다. 그러나 검은 크기가 적당하고 찌르기와 베기가 모두 가능하며 검술을 통해 지렛대의 원리와 카운터, 기본적인 몸의 움직임을 배울 수 있다. 즉 검이라는 무기의 융통성 때문에 훨씬 많은 움직임과 운용법을 배우게 되기 때문에, 창이나 폴암을 먼저 배운다면 배우지 못할 여러 요소들을 다 배우게 되므로 검술이 모든 무기술의 근본이며, 가장 중요하다는 주장이다.

일단 중세 이후 유럽이나 일본의 경우 이러한 개념이 그대로 무기술에 드러난다. 중세 유럽의 비리공무원 파울루스 헥터 마이어가 수집한 장서에는 낫술, 몽둥이술이 존재하는데 이것의 운용법은 중세 롱소드 검술과 별반 다를 게 없다. 봉도 롱소드처럼 다루고, 쯔바이핸더같은 대형 무기도 롱소드처럼 다루는 것이라고 하며 달리 다른 검술서가 없다.[8] 또한 한손으로 사용하는 아밍 소드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롱소드 검술과 동일한 방식으로 운용한다.

중근세 이탈리아에서 검술을 바탕으로 창작된 스탠딩 유술인 Abrazzre가 존재하거나 이탈리아 출신의 영국 마스터 빈첸티오 사비올로가 자신의 저서에서 검술을 바탕으로 한 권법을 수록하기도 했다. 칼리 아르니스의 맨손기술(Empty hands)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무기술에서 파생된 권법의 특징은 마치 무기 싸움을 하듯이 상대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자신의 팔을 이용해 상대의 팔이나 다리를 차단하고 너클파트뿐만 아니라 손바닥이나 손등까지 이용하여 자유롭게 타격하는 것이 특징. 무기술의 전투법이 맨손에서도 적용된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무기 전투와 맨몸 전투는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이런 방식의 맨손격투술이 일반인이나 뒷골목 싸움꾼에게는 통하지만, 현대의 고도로 발전된 맨몸 격투술에게는 심각하게 발리는 것이 현실이다. 맨몸 격투술에서는 근거리 아니면 장거리, 그래플링으로 승부를 내며 권법 스타일로 중거리에서 팔다리로 공격을 패리하는 식의 싸움을 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방식이 통하지가 못하게 된다. 따라서 이런 무기술 파생 권법류들을 굳이 과대 평가할 필요는 없고 무기술을 수련하면서 얻은 센스를 통해 부수적으로 얻는 것이라고 봐도 될 것이다.

일본의 경우 가시마 신류는 검술유파이나 면허개전을 받게 되면 창술을 가르치는데, 자기 유파의 검술 이치를 그대로 창술에 적용하여 다른 창술과 달리 오른손이 앞으로 가고, 창끝을 앞이 아니라 자기 측면 아래로 두어 비스듬히 대각선을 그리게 된다. 이것은 가시마 신류의 검술자세인 "오또나시노 카마에"를 창에 똑같이 적용하는 것이며, 상대가 창을 찔러오면 강하게 때려서 놓치게 하고 찌르는 것을 메인으로 구성하고 있는데, 가시마 신류의 검리와 사상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그 외에 오와리관류 창술의 경우 검술의 중요성을 인정하여 야규신음류의 검술체계인 <토노모노 타치:外のもの太刀>를 가져와 가르치고 있기도 하다.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인식의 경우 양손으로 검을 운용하는 검술이 대세가 된 지역에서 생긴다는 것이다. 유럽과 일본 모두 양손으로 검을 운용하는 검술로 유명한 곳이며 이는 한손으로 운용하는 검술로는 알 수 없는 다양한 운용의 방식이 파생되는 점이 그러한 인식을 만들어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중국무술 같은 경우는 무술의 기본을 봉술이나 창술로 보는 경향이 강했으며, 현재 남아있는 권법은 봉술이나 창술을 응용해 만들어낸 것들이 많다. 따라서 실제로 검술이 무기술의 근본이고 가장 중요하다기 보다는 그렇게 보는 관점이 과거 유럽과 일본에 존재했다는 말이 정확하다.

3 영화, 드라마의 검술

영화 등에서 등장하는 검술과 실제 검술은 프로레슬링과 올림픽 레슬링의 차이보다 더 크다. 대부분은 실제 검리와는 별 상관이 없으며 멋있고 뛰어난 외형을 보여주고 인상 깊게 연출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북미나 유럽에서는 아예 '스테이지 컴뱃stage combat' 이라고 해서 이런 남에게 보이기 위해 연출된 격투를 전문적으로 수련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떻게 보면 그저 칼싸움 놀이에 불과해 보일 수도 있지만 이것도 보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만큼 근사한 연출을 위해서는, 그리고 무엇보다 서로의 안전을 위해서 상당한 훈련을 필요로 한다.

오늘날 헐리우드 영화의 액션신은 총싸움이나 맨손싸움 위주이지만, 헐리웃 여명기의 최고 액션스타였던 에롤 플린 등은 화려한 검술 액션으로 은막을 누볐다. 당시 모험물의 클라이맥스는 대개 레이피어나 커틀러스 등의 검을 이용하는 일대일 또는 다대일 검술대결 장면이었으며, 검날을 검날로 막는 패링을 주로 구사하여 눈을 즐겁게 하는 것이 목적인지라 검으로 상대의 급소나 손목 등을 노리는 일은 거의 없다(...). 이것이 상술한 스테이지 컴뱃.

4 관련 항목

  1. 일본의 경우 신분의 상징으로써 도검 패용을 강제시키는 것 등
  2. 명조 말, 청조 초까지의 중국의 군사기술의 발전은 홍이포라는 자체 컬버린 포의 개발, 신식 화승총의 보급 등 같은 시기의 유럽 국가들에 뒤지지 않을만큼 여러 방면으로 발전을 이루었지만, 평화기의 지속과 더불어 내부혼란이 본격적으로 번져나가기 시작한 중엽 이후로는 명백하게 뒤쳐지게 되었다.
  3. 부정하는 사람도 있을 지 모르겠으나 일본의 고류나 중국무술, 태국의 크라비 크라봉 등에서 역사와 국적을 빼내어 본다고 생각해 보자. 그 매력은 크게 감소한다. 당장 어중이떠중이가 불쑥 나타나서 검술이랍시고 휘두른다고 생각하면 명확해진다. 누가 배우겠는가?
  4. 그리고 칼날이 갑옷을 뚫지 못하므로, 갑옷이 가리지 못하는 부분을 집중적으로 공략하는 갑주 검술이 등장했으며, 이는 독일검술이나 가토리신토류같은 중세검술에 그대로 남아 있다. 또한 다른 면에서는 타격력을 강화하여 대응하고자 했으며, 거대화된 롱소드인 투핸디드 소드나 노다치가 이 시기에 등장하고 많이 쓰였다. 서양 중세 도검들 중에서는 아예 육각형 검신에 폭이 비교적 좁고 2kg에 달하는 중량물도 존재하며, 날각이 둔해 갑옷에 대고 후려쳐 타박상을 입히는 용도에 치중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미 검이 아니라 둔기라는 건 신경쓰지 말자
  5. 최초의 중세 검술문서인 I.33문서가 이 맨몸 소드 & 버클러술을 보여주고 있다.
  6. 회계공무원이었는데 시 재정을 횡령하여 풀컬러 검술서를 편찬한 검사 & 무술문서 수집가였다. 이 사람이 수집한 장서는 아주 많고 엄청나서 서양검술 복원에 막대한 역할을 했다. 결국 나중에 횡령이 적발돼서 사형.
  7. 고류의 경우 공격할때 자연스럽게 뒷발이 앞으로 나오는 패싱스텝을 이용한다. 반면에 펜싱이나 검도등은 뒷발이 앞으로 나오면 안되는 것도 부자연스럽다. 그나마 펜싱은 한 손검이지만 검도는 양손검이기때문에 팔, 몸, 다리가 제 각각 따로 노는 기분을 만끽할 수 있다.
  8. 골라이어스라는 쯔바이핸더 검술서가 있기는 하나, 내용상 단직의 검술서의 구성을 똑같이 따라하고 있어 쯔바이핸더만의 독특한 내용이 아닌 롱소드 검술서 짝퉁의 의혹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