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예도보통지

1 개요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는 조선시대 군용 무술 교본이다. 조선판 FM 끊어서 읽는다면 '무예도' '보통지'가 아니라 '무예'(무술) '도보'(그림과 해설) '통지'(종합서적)로 읽어야 한다.

조선에서 1790년(정조 14년) 정조의 명으로 규장각 검서관인 실학자 이덕무, 박제가와 장용영 소속 장교이자 무인인 백동수 등의 도움을 얻어 편찬한 조선시대 군용 무술 교본. 임금의 명으로 만들어졌다 하여 어제무예도보통지(御製武藝圖譜通志) 또는 어정무예도보통지(御定武藝圖譜通志)라고도 불린다.

2 편찬 배경

파일:Attachment/무예도보통지/horse korea 04.jpg

무예도보통지의 6가지 마상무예

전통적으로 조선은 궁시 기예는 알아주는 나라였지만 단병접전에는 극도로 취약했다. 임진왜란에서 그 문제점이 그대로 드러나자 선조의 명으로 척계광(戚繼光)의 기효신서(紀效新書)와 대왜구 전법인 《절강병법》을 참고하여, 속오법(束伍法)[1]과 삼수기법(三手技法)[2]을 도입하는 군제개혁을 한다. 또한 기효신서를 분석하고 명나라 병사들의 훈련을 참관하여 1598년(선조 31년) 한교(韓嶠)[3]가 곤봉, 등패, 낭선, 장창, 당파, 쌍수도(장도)의 무예육기를 담은 《무예제보》(武藝諸譜)를 편찬했다. 그리고 임란이 끝나고 1604년 광해군 때에는 선조의 뜻을 받들어 《무예제보》에서 빠진 부분을 추가하고 일본에서 구한 서적의 번역을 덧붙인 《무예제보번역속집》을 내놓는다.

영조 시대에는 청나라를 거쳐 모원의(茅元儀)의 《무비지》(武備志)를 수입해서 크게 영향을 받았는데, 1759년(영조 35년)에 무술에 관심이 많았던 사도세자가 대리청정을 하던 시기 《무예제보》에 12종을 더 늘려 곤봉, 등패, 낭선, 장창, 당파, 쌍수도, 죽장창, 기창(旗槍. 깃발 달린 창), 예도, 왜검, 교전[4], 월도, 협도, 쌍검, 제독검, 본국검, 권법, 편곤의 18가지 보병무예로 《무예신보》(武藝新譜)를 편찬했다. 이렇게 정해진 18종의 무술을 십팔기(18기, 十八技)라고 부르는 것이다. 애석하게도 《무예신보》는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무예도보통지에 실린 내용으로 미루어보아 무예도보통지의 구본격으로 짐작하고 있다. 유물이 남아있기만 했다면 무예제보번역속집에서 무예도보통지 사이의 징검다리로 무술적 학술적 가치가 클 것이라 많은 안타까움이 있다. 어디서 또 벽지로 도배돼있는건 아니겠지?

그리고 정조14년(1790년)에 이르러 《기효신서》와 《무비지》, 《무예제보》와 《무예신보》 등등을 기초로 하여 십팔기에 기창(騎槍. 마상창), 마상월도, 마상쌍검, 마상편곤, 격구, 마상재를 추가해 24기(技)를 갖추어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한다.

3 내용 구성

이렇게 완성된 무예도보통지는 4권의 한문본에 1권의 언해본(한글 해석본)으로 구성된다.

무술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무기 만드는 법, 한중일 동일 무기의 형상 비교와 무기의 규격 등이 기록되어있다. 기효신서 같으면 무술을 아는 사람이 보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어서 각 자세에 대해 정확한 서술이 없고 단순히 세법과 형의 명칭만 나열하고 있으며, 책에 나온 내용과 명나라 병사들이 실제로 익히는 세법이 서로 다른 등의 문제가 있었는데 무예제보에서 무예도보통지까지의 편찬 과정에서 그런 부분을 세세히 조사해 그림으로 검보의 흐름을 표시해주고 있는 상세함이 돋보인다.

무예도보통지의 내용 상당수가 해외의 무술을 수입 분석하여 만든 것이다보니 그 기원이 중국 무술이나 일본 무술에서 유래한 것이 많다. 예를 들어…

  • 권법 - 송태조 장권 32세를 기초로 하여 중간에 상실한 부분이나 의미없는 부분 등을 추려내어 전하고 있다. 권법은 무예제보가 나오던 시절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았으나 무예제보번역속집이 나오던 때에 수록되었고 이것이 무예도보통지까지 이어졌다.
  • 곤방 - 정종유의 소림곤법천종에서 차용한 것을 담아왔다.
  • 장창 - 양가육합팔모창법 즉 양가창법에서 따온 것이다.
  • 예도 - '조선세법'이라고도 하며 무비지에서는 조선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적고 있다. 조선의 검술이 중국으로 건너갔다가 다시 돌아온 셈.
  • 본국검 - 이름 그대로 조선의 고유 검술이다.
  • 쌍수도(장도) - 왜구가 노다치를 들고 쳐들어온 것에 영향받아 만든 중국의 장도(묘도)술을 가져온 것. 현대 게임 등에서 나오는 '쌍수'가 보통 쌍검을 뜻하는데 반해 이것은 양 손으로 큰 칼 하나를 쥐는 것을 뜻한다.
  • 왜검 - 숙종김체건이라는 군관이 일본에 건너가서 얻어온 토유류, 운광류, 천류류, 류피류의 네 유파의 검술이다. 무예신보에는 네 유파가 아니라 8개의 유파다. 교전은 이것을 기초로 김체건이 창안한 것.
  • 제독검 - 왜란 시절 명나라 장수에게 군사를 파견보내어 익혀온 검술. 명나라 제독 이여송의 검술이 아닐까 싶어서 제독검이라고 이름붙였다고 한다.

임란기부터 정조대왕대까지의 200여년의 조선 군용 무술의 변천을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의 무술까지 포함하고 있는 삼국 무술의 집대성.

원래 조선시대부터 궁시는 선비의 교양으로 높게 쳐주었지만, 단병접전 무술은 그다지 높게 평가하지 않았고 민간에서 검술연습하면 모반을 획책한다는 눈으로 보기도 했다. 칼들고 설치던 조폭 겸 무술연습하던 도당인 검계(劍契) 같은 것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며, 일본처럼 폐도령으로 무기를 압수하지는 않았으나, 무과 지원을 위해 수련하는 것이 아닌 이상 칼든 자들이 뭉치는 경우 가만히 놔둘 이유가 없었다. 이런 이유로 조선땅에는 일본이나 중국처럼 무술 문파가 세워질 수 없었다. 중국의 경우는 하도 땅덩이가 넓은 관계로 각 지역의 가전무술 같은 것에 세세한 신경을 쓰지 않았고 중앙집권이라는 개념이 그렇게까지는 강하지 않은데다 오히려 그런 명사들을 군의 교관으로 썼기에 무술이 내려져올 수 있었고 청 말기에 이르러 사회가 불안정해지며 폭발적으로 문파가 크게 중흥했다. 일본의 경우도 각 지역을 번이라고 불러 하나의 나라 취급을 하고 툭하면 전쟁을 벌이는 관계로 각 번마다 검술이나 창술등의 무술이 성행할 수 있었고 도쿠가와 막부 이후에도 지역색이 짙어 각 번마다 무술이 내려올 수 있었다.

그러나 한반도의 국가들과 한민족은 거의 천년을 내려오는 중앙집권의 역사를 자랑하기에 중국이나 일본과는 무(武)의 개념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고려 시대에는 불안한 국가 정세로 인해서 각 지역마다 수박(手搏)[6]이 성행하였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서며 거의 완벽에 가까운 중앙집권체제가 갖추어지고 치안이 안정되면서 그런 수박은 놀이, 즉 스포츠의 형태로 탈바꿈하게 된다. 조선 초에도 충청과 전라 양 도의 백성들이 명절에 모여 수박을 즐겼다는 기록도 나올 정도다.

이에 대해서 이게 무슨 우리 나라 무술은 다른 나라 무술에 비해 약해빠진 놀이라고 인식하는 경우가 있는데, 원래 맨손 무술은 스포츠로 일반에 퍼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고대 레슬링이나 복싱, 판크라티온등도 그렇고 전 세계적으로 씨름같은 것들은 어느 곳이던지 있었다. 무술의 강함과 스포츠인것과 크게 관계가 없다. 오히려 스포츠화 된 무술이 그 저변이 넓어져서 더 강력해질 개연성이 있다. 고대 판크라티온이나 현대 MMA 등은 스포츠지만 돈이 되고 사람이 모이니 그 어떤 무술보다도 실전적이다.

혹자는 가전 무술이나 산중 일인전승, 불문 전승으로 이어지는 무술이 있었다고 하는데, 어떤 이들은 일제시대 탄압을 받아서 사라졌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런 주장들은 하나같이 근거를 내놓지 못한다는 공통점이 많다. 사실 일제시대 탄압을 받은 무술이 없는 것은 아니다. 태껸이라고… 하지만 태껸은 하던 사람이 있고, 목격한 사람이 있는 근거가 있는 무술이다.

그렇다보니 한국의 자칭 전통무술가들은 절반 정도는 수상한 사이비 무술을 하는 사람이거나, 반은 실제 택견 같은 전통무술. 나머지는 무예도보통지와 같은 군용 무술서를 연구 복원하고 있다. 사실 사이비 무술이든 아니든간에 한국 토종 무술을 한다면 무예도보통지를 거쳐가지 않기가 힘이 든다. 한국에서 이것 이상으로 확고하게 전통의 근거가 있는 무술은 없기 때문이다.

물론 무예도보통지만으로는 확실한 정통성을 확보할 수는 없기 때문에, 주제의 특성상 민족주의에 호소하게 된다. 구체적으로 한국무예원은 환단고기[7], 경당은 대학 운동권, 검도는 화랑도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거나, 정통성의 근거로 내세우고 있다.

4 현대의 무예도보통지

무예도보통지의 무술을 연구하는 단체는 꽤 여러 곳이 있다.

1969년에 대한십팔기협회 도장을 세웠고 대한민국에 무예도보통지의 무술을 보급한 단체 중에서 가장 유서가 깊은 곳으로 추정된다. 처음 협회 이름이 쿵후십팔기협회였는데, 원래 중국무술이 유행하던 시기에 중국무술을 하던 무술가들이 무예도보통지를 연구하여 전통무술의 기치를 내걸었기 때문이다.[9] 이러한 연유로 이 단체에서는 왜검 4가지와 마상무예를 다루지 않는데 왜검에 경우, 대외적으로는 '전수받지 못해서'라고 한다. 즉 복원이 아니라 전수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 역사왜곡 1
마상무예에 대해선 놀이, 부록이라 주장하며 십팔기를 익히고 기마술을 배우면 그것이 마상무예라는 주장을 한다.[10] 역사왜곡 2
김광석 씨는 현 대한쿵후협회 황주환 회장의 제자인 최상철 사범에게서 쿵후 십팔기를 전수 받았다. 이는 팔괘장 6대 전인인 한병철 씨의 저서 고수를 찾아서에도 실려있는 에피소드. 참고로 김광석 씨는 최상철 사범에게 쿵후를 배우기 전엔 무술을 경험해 본 바가 없다고. 단체 자체가 서울대 출신이 많아서 영향력이 높은데, 중국 무술가 출신이었던 사람을 무예 18기 전통문화재로 등록하려 한다거나, 십팔기를 전통무술이자 조선의 국기(國技)라고 소개하거나[11][12] 무예도보통지의 무술은 십팔기가 적통이라고 타무술단체들을 비방한다거나, 김광석 씨가 한국 무술계의 지존으로 숭앙받고 있다고 주장하여 거의 모든 무예도보통지 단체들과 대립하고 있다.[13]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 데 자기들끼리만 지존이란다. 무수한 까임을 받지만 월도마왕의 역사 블로그에서는 보다 상세하게 근거를 들어서 까이고 있다.
한국무예원은 대한십팔기협회의 도장인 셈. 여담으로 출판사 동문선 대표[14]이자 십팔기보존회 회장인 신성대 씨가 극우 보수언론인 데일리안에 칼럼을 연재하였다. 신성대의 무예이야기 [15]
최근에는 십팔기보존회의 박금수 사무국장[16]이 한 잡지 인터뷰에서 십팔기를 삼국시대때 부터 전해져 내려온 실전무예라고 주장하기도 한다.해당 인터뷰 역사왜곡 3[17]
  • 민족도장 경당(24반무예): 민족운동하던 임동규 씨가 남민전 사건 연루 등으로 시국사범으로 복역하던 중에 무예도보통지를 연구하여 만든 단체. 임동규 씨가 원래 무술인이 아니라서 초창기 복원의 무술적 완성도가 좀 의문스러웠다. 특히 어깨에 칼을 지고 있는 자세나 투로가 엉성하여 큰 비판을 받았다. 이후 대학교 동아리 중심(임동규씨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대체로 사회주의 성향이 강하다)으로 퍼져나갔으며 연구회를 통해서 꾸준히 개선되고 있는 듯 하다. 특기할 만한 점으로 경당의 목검 길이는 130cm 정도로 상당히 길다. 무예도보통지에서 요도 규격을 4척 3촌으로 적고 있는데, 주척으로 재면 90cm 정도의 좀 짧은 물건. 경당의 목검은 쌍수도를 할 때나 어울릴텐데? 이에 대해서 당시 성인 남성의 평균 체격을 고려하여 현대인의 체격에 맞게 검의 길이를 늘렸다고 한다.[18] 어쨌든 목검만 보면 경당은 티가 확실히 난다. 그리고 지역에 따라 중시하는 분야가 다른 것도 특징. 현재의 경당은 (사)24반무예경당협회를 비롯해 몇 개의 단체가 독립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그 중 (사)24반무예경당협회 - 총재: 임동규, 회장: 김성하, 사무총장: 임한필 - 가 가장 큰 조직으로 여전히 전국적으로 임동규 총재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한 때 많이 사용했던 130cm짜리 목검은 지금은 사용하고 있지 않으며 일반적으로 시중에서 판매하는 목검으로 수련하고 있다. 더불어 경기도 화성시에 위치한 한국전통마상무예학교를 중심으로 마상무예를 복원, 훈련하고 있으며 여러 시범이나 지역축제 등에서 실연하고 있다. 1989년 창립된 경당은 2014년 창립 25주년을 맞아 제주도에서 기념행사를 개최하였다.
  • 대한검도회 : 세계의 IKF(International Kendo Federation) 산하 검도 단체들은 모두가 일본이 종주국임을 인정하고 있는데, 한국의 대한검도회만은 검도가 한국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기묘한 단체다.[19] 심지어 검도라는 단어도 본래명칭인 켄도(Kendo)가 아니라 한국식인 검도(Kumdo. 일본이나 서양에서는 저 단어를 쿰도라고 읽는다) 라는 표기법을 쓰고 있다.
검도는 명백한 일본 무술이지만, 일제 치하에서 검도를 배워 대한검사회를 거쳐 대한검도회로 이어오고 있는 검도계의 높으신 분들께서는 검도가 일본무술이라고 공식적으로 인정하기를 껄끄러워한다. 그래서 검도에서 왜색을 없애고 한국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무수한 삽질을 하고 있다. 하카마에서 요판을 떼거나, 시작 시에 하는 준거를 없애며, 시합시 홍백기가 아니라 청백기를 써서 파벌 싸움을 벌이기도 한다.
무예도보통지를 복원한 검술을 대한검도회 커리큘럼 안에 포함시키는 것도 이런 작업의 일환. 조선세법(예도)과 본국검법 같은 것은 대한검도회에서도 하고 있으며 별도의 단을 딸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검도하러 온 사람들은 조선세법 하러 온 것이 아니라 죽도 스포츠인 켄도를 하러 온 것이므로 그냥 하지를 말던가 거합이나 추진해줬으면 하는 이야기도 있지만, 대한검도회에서는 조선세법이 거합도의 원류라는 해석 하에 거합도도 한국이 원조라는 논리에 따라 대한검도회의 커리큘럼에 넣으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이 주장도 반대 세력에 의해 대립하고 있음.[20]. 실제 관련 책자도 서점에서 판매중이고 쉽게 구입 가능. 현재 대한검도회의 조선세법이나 본국검법은 일본 고류검술의 검리를 이용한 해석을 따르고 있으나, 일본 검술의 검리를 과감히 무시하여 해석하였다. 결국 정체성도 없고 검리도 맞지 않는 이상한 형태의 검술을 가지고 있는 것이 대한검도회 전통검법의 현실이다.[21]
  • 해동검도 : 해동검도가 고구려 사무랑과 아무 관련이 없으며, 창건자인 나한일과 김정호의 법정공방을 통해 기술의 상당수가 심검도와 기천문에 영향받아 만들어낸 창작무술임은 만천하에 드러나있다. 해동검도에서 가르치는 검술 상당수는 심검도와 기천에서 따온 것이고, 일부는 둘을 혼합해서 나한일 김정호가 창작한 것, 그리고 본국검법은 무예도보통지를 기반으로 나름 재현해낸 것이다. 즉 본국검법은 초창기부터 수련했었다. 하지만 쌍수검법이나 해동검법 같은 해동검도 커리큘럼 내의 나머지 검술들은 무예도보통지가 아니라 심검도나 창작검술이다.[22] 해동검도 검술 중에 예도검법이라는게 있어서 이것이 무예도보통지의 예도(조선세법)이 아닌가 착각할 수도 있는데, 해동의 예도검법 1~9번은 나한일과 김정호가 창작한 검술이다.
해동검도는 사범급 연수를 짧고 빠르게 해줘서 도장을 쉽게 세울 수 있게 하는 것으로 빠른 시간 내에 세력을 끌어모았는데, 해동검도 브랜드가 한창 인기를 끌던 시기에 다른 무술 도장을 하던 사람들이 짧은 연수를 받고 간판만 갈아치우는 일이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무예도보통지를 연구하던 사람들도 해동검도에도 흘러들어간 듯 최근에는 무예도보통지의 조선세법도 하고 있다[23]. 날조한 전통이 법정공방으로 드러나버렸으니 그것을 보충하기 위해 진짜 전통 검술인 무예도보통지의 연구를 본격적으로 하게 된 셈. 하지만 도장이 세워진 시기나 해동검도 협회마다 커리큘럼이 제각각이기에, 모든 해동검도 단체가 무예도보통지를 연구하지는 않는 듯 하다.
  • 한민족전통마상무예격구협회(구 충혼당) : 무예도보통지의 마상무예만을 복원하여 수련, 보급하는 단체. 1994년 김영섭 회장에 의해 강원도 속초시에 설립되었다. 이 단체 주도로 세계기사(騎射)연맹(World Horseback Archery Federation, WHAF)라는 국제 단체도 설립했다. WHAF는 2004년부터 세계무술연맹(World Martial Arts Union·WoMAU)라는 단체와 공동으로 세계기사선수권대회(World Horseback Archery Championship)를 해마다 개최하고 있으며 각국에서 활동하는 기사 수련자들이 대거 참가한다.
"마상무예"란 단어를 최초로 사용한 무술단체이며, 이에 대한 지적재산권 논쟁으로 김영섭 회장은 무예24기 보존회의 최형국 사범과 한국전통마상무예학교 김광식 총괄팀장[24]을 저작권법 위반 혐의로 고소하여 법정공방까지 간 적이 있었다. 역사의 산물을 개인의 재산으로 생각하는 아이러니한 맨탈의 소유자 결과는 저작권법 위반 혐의없음으로 판결. 이에 김영섭 회장은 항고, 결국 고등법원까지 갔으나 2013년 4월 19일자로 항고 각하처분 되었다.
참고로, 마상무예라는 단어는 경향신문(1989년 6월 9일자 13면)에 최초로 등장하였다. 이는 김영섭 회장이 마상무예를 복원 발표하기 훨씬 전의 일이다.

어째 문제점이 하나씩은 있는 것 같다

5 패러디

[1]
게임으로 재해석 되었다.
포탈건(捕奪巾), 빠루(발우拔于), 플라즈마 커터(불라주마 고타佛羅朱魔 鼓打)가 등재되있다.
투 머신건도 있다

6 관련 항목

  1. 부대 편성을 사(司) → 초(哨) → 대(隊) → 오(伍)로 하여 상하 명령체계와 편성을 명확히 하는 것.
  2. 병사를 포수, 사수, 살수의 삼수병으로 분류해서 멀리서 포수로 쏘고, 접근해오면 사수로 쏘고, 단병접전에서 살수가 칼들고 싸우는 형식.
  3. 이 사람의 5대조가 그 유명한 한명회다.
  4. 왜검을 기초로 만든 검술 대련법이다.
  5. 흔히들 왜검교전이라고 이야기하나 무예도보통지에는 '교전' 이라고만 되어 있다.
  6. 특정 무술이라기보다 무술의 총칭
  7. 무예도보통지주해의 주석을 참고하기 바람.
  8. 세 단체를 합쳐 편의상 '십팔기협회'라고 하기도 한다.
  9. 대표적으로 대한쿵후협회 황주환 회장이 한국의 전통무술을 조사하던 중 십팔기란 이름을 발견하고 이를 사용하였다. 이것이 해방이후 대한민국에서 가장 먼저 십팔기란 이름을 사용하였고, 대한쿵후협회의 전신이 되는 "중국무술 십팔기협회"이다.
  10. 이는 마상무예에 대한 이해도가 전무하다는 증거이다. 기병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술 보다는 말을 이용한 기마술이다. 마상무예는 이러한 기병의 환경속에서 체계화된 무술이므로 엄연히 십팔기와는 그 결이 다르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십팔기와 마상무예는 역사적으로 공통점을 찾아 볼수 없다. 월도마왕의 역사 블로그 참조.
  11. 조선에 국기라는 표현은 없었을 뿐더러 굳이 국기를 꼽자면 국궁이 되어야 맞다.
  12. 또한 특정 기관, 특정 직군 만이 독점하다시피 한 활동을 국기라 하기엔 어폐가 있다.
  13. 십팔기협회가 주장하는 십팔기에 대한 개념정리 같은 면에서도 사실 엉망에 가까워서 다른 단체들의 비웃음을 사기도 하고 태껸에 대해서도 비천한 문화 같은 개드립을 날렸다가 개망신을 당하기도 했다.
  14. 이 때문에, 동문선에서 출판한 무예도보통지 번역본은 십팔기협회의 시각에서 출판되어 있다.
  15. 택견이 비천한 문화라는 개드립도 이 칼럼 <신성대의 무예이야기14, 태권도와 택견은 무예가 아니다> 에서 나왔다. 글도 단체이름에 걸맞게 18스럽게 쓴다.
  16. 십팔기로 체육학 박사학위를 받은 인물.
  17. 십팔기의 실제 역사는 길어야 명나라 때부터 시작되므로 삼국시대 기원설은 명백한 역사왜곡이다.
  18. 하지만 이것은 척도를 잘못 잰 오류일 뿐이라는 것이 연구 결과 통설이 되어 있다. 실제로 조선시대에서 오늘날 전하는 환도들은 모두 길이가 짧은 것이고 이것은 주척으로 재는 것이 타당하다. 역사는 상상이 아니라 유물로 말한다.
  19. 비슷한 사정의 유도계는 유도가 일본의 무술임을 정확히 명시한다.
  20. 대표적인 예가 이종림 대한검도회 부회장의 거합도식 조선세법과 김재일 경기도검도회 회장의 조선세법
  21. 한때 일부 전통무술단체들은 이러한 대한검도회의 정체성을 비난하며 "국제켄도연맹 한국지부"라는 단어를 사용했었다.
  22. 그러나 쌍수검법 중 12번은 무예도보통지의 쌍수도를 복원한 것.
  23. https://www.youtube.com/watch?v=dkg7i9b_Fy0
  24. 전 무예24기 보존회 시범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