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프레드릭 헨델

판타지 소설 '다크 문'의 등장인물에 대해서는 헨델 니세스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1 개요

독일어: Georg Friedrich Händel
영어: George Frideric Handel
1685년 2월 23일 ~ 1759년 4월 14일

▲ 헨델의 사라방드(Sarabande), 영화 배리 린든에도 쓰였다.[1]

▲ 수상음악(Wassermusik) 中 "Alla Hornpipe" HWV.349. 톤 쿠프만 지휘, 암스테르담 바로크 오케스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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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프레드릭 헨델의 초상화
발타자르 데너,1726~1728



2 생애

독일 출신의 영국의 바로크 작곡가 중 한 사람. 바흐와 동갑이고 같은 독일 태생이나 단 한번도 만나지 못 했다. 헨델이 유럽 여러 지역을 돌아다녔던 것과 대조적으로 바흐는 독일에서 평생 살았기 때문.[2] 독일어로는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이며, 영어식으로는 "조지 프레드릭 헨델"로 읽는다.
영어식 표기법상 핸델이어야 할 텐데 헨델로 표기된 것으로 봐서는 독일식 표기를 따른 듯하다.

일명 음악의 어머니라고 불린다. 그런데 알아둘 점은 이 명칭은 오직 이름붙이기 좋아하는 일본과 일본 베끼기를 좋아하는 한국에서나 통하는 이야기이다. 정작 유럽 쪽에서는 이런 칭호를 쓰지 않으며 헨델을 영국인으로 생각하는 영국에선 "남자인데 뭔 어머니야?" 라면서 이상하게 여긴다. 이런 표현은 쓰지 말자.

동갑내기 바흐, 2년 일찍 태어난 장 필리프 라모, 7년 일찍 태어난 안토니오 비발디와 더불어 바로크 후기의 가장 중요한 음악가이다. 특히 헨델과 바흐를 흔히 쌍벽으로 여기는데, 인생역정이나 음악 스타일은 두 사람이 완전히 다르다.

2.1 초기

헨델은 1685년 2월 23일, 독일 중부 작센 지방의 할레라는 작은 도시에서 태어났다. 이발사 겸 궁정외과 의사인 아버지 밑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음악에 관심과 두각을 나타냈다. 특기할 것은 헨델을 낳았을 때 아버지가 자그마치 63살! 헨델의 아버지 게오르크 헨델은 당시로선 긴 수명인 75살까지 장수했으나 이 때 헨델의 나이는 고작 13살.....
아버지가 죽기 전에 이미 할레의 영주였던 요한 아돌프 공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오르가니스트인 차하우의 문하에 들어갔으며, 11세 때에는 베틀린 궁정을 찾아가 아리오스티에게서 이탈리아와 프랑스 음악을 익히기도 했다. 하지만 헨델의 아버지는 음악을 단순한 위안거리나 오락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여 음악가의 길을 걷고자 하는 아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죽기 직전 아버지는 헨델에게 '법관이 되라'는 유언을 남겼기에 할레 대학의 법학과에 진학한다, 하지만 자신의 적성에 따라 할레 대성당의 오르간 주자로 들어가며 음악가의 인생을 시작한다.

그러다 1703년 18살때 당시 오르가니스트의 거장 북스테후데를 만나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천재적인 헨델의 오르간의 연주솜씨와 작곡능력에 마음에 들어했던 북스테후데는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였으므로 헨델에게 자신의 교회의 오르가니스트 자리를 물려주려고 했다.

하지만 문제는 조건이었는데 자신의 딸인 마르가리타와 결혼해야하는 것이었고 헨델은 이 조건을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말하며 뤼베르크를 떠난다, 당시 마르가리타는 헨델보다 10살이나 위인 28살인데다 별로 예쁘지도 않았다. 북스테후데가 헨델과 자기 딸의 결혼을 제안한 이유는 이 교회의 오르가니스트는 전임 오르가니스트의 직계 자손 즉, 전임자의 아들이나 사위만 그 자리를 승계할 수 있다는 규칙이 있었기 때문이다. 북스테후데 또한 전임 오르가니스트의 딸과 결혼하여 그 직위에 오를 수 있었다. 한편 헨델이 떠난지 2년후에 바흐가 뤼베크에 와서 북스테후데에게 똑같은 제안을 받은 적이 있었다. 물론 바흐 역시 6촌이자 한살 위였던 마리아 바르바라와 한참 연애중이 었으므로 이 요청을 거절하고 뤼베르크를 떠났다.

그후 할레에 살면서 자신의 음악성을 알리기에는 할레가 너무 좁다고 느꼈고 헨델은 함부르크 등을 다니면서 오페라를 관람하면서 오페라 작곡에 전념하게된다. 20살에는 오페라 알미라[3]를 작곡한다. 21살이 되던 1706년에는 본격적으로 오페라와 극음악을 공부하기 위해 아예 오페라의 본 고장인 이탈리아로 유학을 갔으며 이듬해에 피렌체에서 최초의 이태리어 오페라인 '로드리고(Rodrigo)'가 성공을 거두면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4]


2.2 본격 음악인생의 시작과 1차 왕립 아카데미

1710년 헨델은 하노버왕국의 왕실 악장이 되었고 휴가를 얻을 때마다 런던으로 갔다. 1711년 2월 런던에서 오페라 리날도가 대성공을 거두면서 런던에서도 인기작곡가의 반열에 오르게 되며 영국 왕실의 관심도 얻게 되었다. 핸델은 당시 영국 국왕이었던 앤 여왕을 위해 '앤 여왕의 탄생일을 위한 송가' 등의 어용 작품을 작곡하고 앤 여왕은 그에게 연금을 하사한다. 하노버보다 훨씬 큰 무대인 런던에서의 성공을 확신한 헨델은 결국 하노버로 돌아가지 않고 영국에 정착해 버리는데, 이 배신 행위가 그를 곤경에 빠뜨리게 된다.
즉, 헨델을 적극 후원했던 영국의 앤 여왕이 1714년 사망하자 하필 자신이 뒤통수를 때렸던 하노버 공국의 게오르그 루드비히 선제후(選帝候)가 영국 왕(조지 1세)으로 선출되어버린 것이다. 당연하게도 대공, 아니 조지 1세는 약속을 어긴 헨델에게 크게 분노하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이 분이 영국왕이 되다니! 지옥까지 쫓아올 태세 조지 1세의 복수를 두려워한 헨델은 1717년 조지 1세가 영국을 방문하자 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음악을 작곡해서 연주했는데, 이 곡이 바로 헨델의 기악음악의 대표작이 된 수상 음악이다. 이 수상음악은 말 그대로 물위(水上)에서 연주하기 위해 작곡된 음악으로 헨델은 자비를 들여 악사들을 배에 태워서 배에서 이 음악을 연주시켰다.[5] 다행스럽게도 조지 1세는 악사들에게 세 번이나 더 연주하도록 명령했을 정도로 이 수상음악을 크게 마음에 들어했고 딱히 헨델을 처벌하지도 않았다. 즉 자신의 배신행위가 부메랑이 되어 곤경에 빠졌는데 오히려 명작을 만들어 위기를 극복한 것이다.[6]세상만사 새옹지마

이 해프닝 이후 헨델을 비롯한 대륙의 유명 오페라 작곡가들이 런던에 속속 진출하면서 런던에서 오페라 세리아[7] 유행이 일어난다. 그래서 오페라를 안정적으로 공급(?)받고 공연을 통한 수익도 얻기 위해 돈과 시간이 남아도는 영국의 귀족들이 주축이 되어 오페라 악단들이 창립된다. 이런 분위기를 타고 1719년 유럽 각지에서 가수와 관현악단을 모아 왕립 음악 아카데미(Royal Academy of Music)를 설립하게 되며 전속 오페라 작곡가로는 헨델 외에 지오반니 보논치니(Giovanni Bononcini), 아틸리오 아리오스티(Attilio Ariosti)가 있었다.[8]

헨델은 이 시기에 라다미스토, 무치오 세볼라, 쥴리어스 시저, 로델린다 등의 작품을 무대에 올렸으며 왕립음악원의 엄청난 재력으로 카스트라토 가수인 세네시노(Senenino)를 필두로 소프라노 마르게리타 두라스탄티(Margherita Durastanti) , 프란체스카 쿠초니(Francesca Cuzzoni), 파우스티나 보르도니(Faustina Bordoni)등 당대 최고의 가수들을 거의 사재기 수준으로 데려왔다. 이 시기는 헨델의 오페라인생에서도 가장 황금기였고 런던에서 본격적인 유명세를 타고 돈도 많이 벌었다.

헨델의 애증의 소프라노 프란체스카 쿠초니

그런데, 흥행을 위해 비싼 몸값을 주고 모셔온 쿠초니와 보르도니는 음악 외적으로도 (주로 좋지 않은 쪽으로) 갖가지 화제를 뿌렸으며 두 사람의 유명세는 공교롭게도 왕립 음악 아카데미의 몰락에 일조를 하게 된다. 바로 두 사람의 라이벌의식이 문제였는데, 연배가 비슷한 두 사람의 경쟁의식이 너무 강했던 탓에 헨델을 비롯한 오페라 작곡가들은 두 사람을 같이 무대에 올리기 위해서 등장시간이나 배역의 비중, 음역 심지어 음표 수까지도 똑같이 맞춰야 했다. 배역 균형을 억지로 맞추다 가뜩이나 지리멸렬한 오페라의 스토리가 아예 산으로 가버리는 것은 덤.[9]
더 큰 문제는 런던에서 이 두 가수에 대한 팬덤현상이 일어나 가수 뿐만 아니라 팬들도 두 패로 나뉘어서 심심하면 싸워댔다는 것.

이 콧대 센 두 가수의 불화와 두 가수를 둘러싼 팬들의 동요는 결국 보논치니의 아스티아나테(Astianatte) 공연 무대에서 쿠초니와 보르도니가 서로 머리끄덩을 쥐어뜯고 싸우는 사태로 비화된다. 어찌어찌 당일 공연은 끝냈지만 두 사람은 공연 내내 서로 눈을 흘기고 기싸움을 해댄데다 여기에 가세하여 두 가수의 팬들까지 싸움이 붙는 바람에 공연장은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 된다. 설상가상으로 이 공연장에는 캐롤라인 왕세자비(Princess of Wales)[10]를 비롯한 왕실 인사들이 다수 참석해 있었기 때문에 이 사건의 파장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왕립 음악 아카데미의 오페라 공연은 무기한 중단되었고 공연수입을 얻지 못하게 된 아카데미는 휘청거리게 되었다.[11]

이런 악재도 모자라서 이탈리아 오페라의 몰락에 확인사살을 가하는 일종의 오페라 패러디 작품이 등장하였다. 바로 존 게이(John, Gay)라는 성적 취향이 게이는 아니다 시인이자 극작가의 기획으로 두 가수의 싸움을 모티브로 이태리 오페라를 비꼬는 일종의 패러디 음악극인 거지의 오페라(The Beggar's Opera)가 상연된 것이다. 이 악극은 무려 62회나 반복 공연될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끌면서 오페라 열풍에 확실하게 찬물을 끼얹어 버렸다. 당시 영국인들은 천편일률적인 내용과 영국사람 입장에서 알아듣기 힘든 이태리어 가사로 되어 있는 오페라 세리아에 점차 식상하고 있었던데다 어설픈 애국주의자들이 가세해서 이태리오페라를 비난해 대기도 했다. 그런대 이 거지의 오페라는 영어 가사라서 이해하기가 쉬울 뿐만 아니라 내용도 시사성이 있어서 폭발적인 반응을 얻은 것이다.[12][13]

이 거지의 오페라 덕분에 이태리 오페라는 음악 선진국의 고상한 문화장르에서 젠체하는 귀족들이나 즐기는 위선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태리 오페라위상의 추락은 악단의 급격한 수익감소를 초래하게 되었고 이는 도미노식으로 쿠초니와 보르도니를 비롯하여 몸값이 비싼 연주자들의 이탈로 이어지게 된다. 결국 1728년 말 왕립 오페라 아카데미는 문을 닫는다.


2.3 2차 왕립 음악 아카데미

2차 아카데미의 프리마돈나 안나 마리아 스트라다(1732)
심하게 미화된 그림으로 실제로는 훨씬 뚱뚱하고 못생겼다고 한다 그림 뽀샵

그러나 헨델은 좌절하지 않고 소프라노 안나 스트라다를 프리마돈나로 영입하고 이듬해에 곧바로 2차 왕립 음악 아카데미(The New or Second Academy)를 창립한다.

헨델은 전술한 두 가수 쿠초니/보르도니보다 이 안나 스트라다를 훨씬 좋아했다. 쿠초니와 보르도니는 몸값도 비싼데다 지나친 자존심과 라이벌의식 때문에 악단의 분위기를 망치기 일쑤였으며 심심하면 곡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서 곡을 거부하거나 멋대로 바꿔 부르는 바람에 작곡가들과(심지어 다혈질로 악명높은 헨델과도) 자주 충돌했다. 반면 안나 스트라다는 두 가수에 비해 훨씬 유순하고 헨델에게 충성했던 가수이다. 실제로 스트라다는 2차 왕립 음악 아카데미의 온갖 풍파 속에서도 헨델의 거의 모든 오페라의 주연을 맡았다. 그녀는 보논치니의 오페라는 수준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연주를 거부했고 귀족극단의 회유에도 꿋꿋이 헨델편에 있었다. 노래실력도 두 가수보다 나으면 나았지 결코 떨어지지 않았다. 다만 당시 안나 스트라다에 대한 기록을 보면 한결같이 노래솜씨는 탁월하지만 뚱뚱하고 못생긴 외모가 몰입을 방해한다고 되어 있다.[14]

헨델의 열정과 고집으로 2차 아카데미가 출범한 이후 그는 왕성하게 오페라 작곡에 착수해서 파르테노페(Partenope), 올란도(Orlando), 포로(Poro), 소사르메(Sosarme) 등을 무대에 올린다.[15] 하지만 이 2차 아카데미도 대항마격으로 만들어진 귀족극단(귀족 오페라단, Opera of the Nobility)에 밀려 1734년에 문을 닫게 된다. 이 귀족극단은 당시 국왕 조지 2세와 사이가 매우 나빴던 왕세자 프레데릭공의 주도로 1733년에 창립되었는데, 당시 조지 2세 부부는 명목상이긴 했지만 2차 아카데미의 후원자였기 때문에 왕세자 프레데릭이 아버지와 기싸움을 벌이기 위해 따로 오페라단을 만들어 대립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 귀족극단은 음악적인 성취보다는 오직 2차 아카데미와 대립하기 위해 만든 악단이었고 결국 2차 아카데미는 이 공세를 견디지 못하고 와해된다.[16][17]

그러나, 의지의 사나이 헨델은 이런 고초를 겪고 2차 아카데미가 와해되는 상황에서도 자신의 음악활동을 포기하지 않는다. 2차 아카데미가 문닫은 직후, 그는 당시 런던의 여러 극장을 소유한 극장주이자 연출가였던 존 리치(John Rich)와 손잡고 리치 소유의 코벤트 가든 극장(Covent Garden Theatre)을 중심으로 세 번째 오페라 악단을 창립한다. 존 리치는 상당히 뛰어난 연출가였으며 코벤트 가든 극장에는 합창단과 발레리나 겸 안무가인 마리 살레( Marie Sallé)를 주축으로 한 발레단까지 소유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 시절에 작곡된 헨델의 오페라 아리오단테(Ariodante)나 알치나(Alcina)에는 합창과 발레가 포함되어 있으며, 발레단을 위한 음악 "Terpsichore"도 작곡되었다.
그러나 이런 리치와 헨델의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거지의 오페라 이후 급격히 몰락해버린 이태리 오페라의 인기는 더 이상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18] 이 시기에 작곡된 오페라들은 발레를 삽입하는 등의 참신한 시도가 있었고 음악적으로도 헨델 오페라의 정점을 찍은 명작들었지만 정작 흥행에는 실패했다. 설상가상으로 1737년 헨델은 급성 발작을 일으키며 쓰러졌으며, 오른손의 4 손가락에 마비가 왔고 한동안 정신도 오락가락했다. 모두들 헨델의 음악인생은 이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했지만 건강체질 헨델은 독일의 아헨지방으로 치료차 휴가를 갔다온 후 정말 놀라울 정도의 회복력을 보였다. 발작을 일으킨지 1년만에 건반악기 연주도 가능해질 정도로 회복이 되었고 오페라 세르세(Serses 또는 Xerxes)도 작곡하였다.


2.4 오라토리오와 말년의 헨델

런던에서 오페라가 몰락하면서 헨델에게 대안으로 새롭게 떠오른 음악장르가 바로 오라토리오. 오라토리오는 오페라와 달리 가사가 영어로 되어 있어 청중들이 이해하기 쉽고 장르의 특성상 오페라보다 공연비용과 준비시간이 훨씬 적게 소요된다는 장점이 있었다. 헨델은 20대 초반 로마 유학시절에 이미 시간과 진실의 승리(Il trionfo del Tempo e del Disinganno)나 예수의 부활(La resurrezione)과 같은 이태리어 오라토리오를 쓴 적이 있었으며[19], 런던 생활 초반인 1718년 영어 오라토리오인 에스더(Esther)를 작곡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본격적으로 오라토리오를 작곡하기 시작한 것은 코벤트 가든 극장의 악단 창립 이후이며[20] , 1742년에는 헨델의 대표작이자 당시 최고의 흥행작이었던 메시아(Messiah)가 창작되었다.[21] 이 메시아가 당시부터 얼마나 유명했냐면, 당시의 음악들은 보통 초연 후 5~10회 정도 공연하고 끝나는게 관행이었는데 이 메시아는 더블린 초연때부터 지금까지도 공연이 중단된 적이 없이 주기적으로 연주되고 있을 정도.[22]
이후 헨델은 죽을 때까지 주기적으로 오라토리오 작품을 내놓았다. 이 작품들은 헨델의 명성을 회복시켜 주었을 뿐만 아니라 음악적으로도 상당히 중요한데, 합창음악의 대가로서 헨델의 역량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기 때문이다.

1749년에는 수상음악과 더불어 그의 가장 유명한 기악음악인 왕궁의 불꽃놀이가 당시 영국왕 조지 2세의 요청으로 작곡되었다.[23]

헨델의 말년은 불운의 연속이었는데 1750년 독일여행에서 돌아오던 중 네덜란드에서 마차사고로 큰 부상을 입는다. 설상가상으로 1751년에는 백내장으로 한쪽 눈의 시력이 급격히 나빠지는데 그를 눈을 치료한 의사돌팔이였던 탓에 오히려 반대쪽 까지 나빠져서 결국은 실명하고 만다.[24]

하지만 1751년 실명 후에도 그는 좌절하지 않고 작품활동을 계속 하였고, 8년 뒤인 1759년에 사망하였다. 향년 74세. 사망 후에는 영국에서도 본좌들만 안장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되었다. 뉴턴다윈 등과는 분야가 달라서 그런지 성당 내에서도 안장된 위치가 다르다. 변변한 대작곡가가 없는 영국에서 헨델의 위상은 매우 높다.


2.5 총평

지금까지 보았다시피 헨델은 타고난 체력과 열정을 바탕으로 일평생 음악에 매진했으며 어려운 여건에서도 고군분투하며 세 번이나 오페라 극단을 창립했을 정도로 초인적인 의지를 가진 사람이었다. 협잡배들 때문에 자신의 오페라단이 온갖 수모를 당하면서도,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손가락이 마비되면서도, 돌팔이 의사 때문에 실명을 당하면서도 결코 그의 음악에 대한 열정과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음악에 대한 재능과 업적은 차치하고 그 의지력만으로도 음악사에 남았을 수준.
이렇게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 답게 상당한 다혈질의 소유자였으며 급하고 과격한 성격때문에 자주 (주먹) 싸움을 벌였고 심지어 결투를 벌인 적도 있었다. 이 결투와 관련해서는 아래 마태존과 벌어진 이야기 참조. 이렇게 남에게 굽힐줄 모르는 강인한 성격 덕분에 그 풍파 많았던 런던의 음악판에서도 1급의 작곡가로 살아남을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많은 적을 만들었고 그로 인해 상당한 고초를 겪어야 했다.

사실 그가 음악에 대한 열정이 넘쳤다고 말한 것은 좋게 표현한 것이고, 좀더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명예욕/권력욕/금전욕이 넘쳤던 사람이었다.[25] 생전의 헨델은 명예욕과 돈욕심으로 악명이 높았으며 이로 인해 많은 비난을 받았다. 전술했다시피 하노버에서 런던으로 야반도주하다가 낭패를 겪은 적이 있었는데 그 이후에도 고쳐지지 않은 그의 출세욕과 물욕은 스스로를 자주 곤경에 빠뜨렸다. 하지만 위기에 처할 때마다 훌륭한 음악성을 가진 작품으로 이를 극복했으니 후세의 클래식팬들은 오히려 그의 속물근성을 고마워해야 할 지도 모르겠다.

한편으로 헨델은 작곡속도가 빠르기로 유명했다. 헨델 시절만 해도 음악이 정형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당시의 작곡가들은 모두 다작을 하는 경향이 있긴 했지만 헨델은 역대 1,2위를 다툴 수 있을 정도로 빠른 작곡속도를 자랑했다. 유명한 메시아도 고작 40일만에 씌어졌을 정도. 이렇게 양산형 작곡가였음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장르에 고퀄의 작품들을 남겼다는 점에서 그의 천재성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그의 몇몇 음악에서 기존에 썼던 곡을 재탕하거나 남의 작품을 표절한 의혹이 나오기도 하는데, 이는 당시 작곡가들 대부분에 해당되는 사항이므로 시대상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26]실제로 그의 곡을 쭉 듣고 있다 보면, 응? 난 할렐루야 안틀었는데? 라는 착각이 몇 번이나 들 정도로 모티브가 비슷한 곡이 많다


3 음악

3.1 작품 개요

헨델의 작품목록은 위키에 잘 정리되어 있으니 아래 링크를 참조하자.
헨델의 작품번호는 HWV(Händel-Werke-Verzeichnis, 말그대로 헨델 작품 번호)로 표기한다.
바흐의 작품번호를 BWV(Bach-Werke-Verzeichnis)로 표기하는 것과 마찬가지.

[헨델의 작품목록]

오늘날 헨델의 음악은 메시아, 이집트의 이스라엘인과 같은 오라토리오나 수상음악, 왕궁의 불꽃놀이 같은 기악곡들이 널리 알려져 있는데, 사실 헨델이 일평생 심혈을 기울였던 장르는 바로 오페라이다. 그는 평생 46개나 되는 오페라를 남겼다(악보가 현존하는 것은 42개). 하지만 정작 그의 주종목이었던 오페라는 최근까지도 몇몇 아리아나 간주 음악 정도만 연주됐을 뿐 오페라 자체는 잘 연주되지 않았다. [27] 그나마 최근에 이렇게 묻혀 있던 바로크 오페라들이 학구적인 연주자들을 중심으로 다시 발굴되어 공연되고 음반으로도 만들어지고 있는데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다. 헨델의 오페라도 현재 모두 음반이 나와 있다.


3.2 주요 작품

3.2.1 오페라

리날도 (Rinaldo, 1711) - 헨델의 출세작, 현재는 1731년 개작버전이 주로 공연된다
라다미스토(Radamisto, 1720)
플로리단테(Floridante, 1721)
오토네(Ottone, 1723)
줄리오 체자레 (Giulio Cesare, 1724)
타메를라노(Tamerlano, 1724)
파르테노페(Partenope, 1730)
아리오단테(Ariodante, 1735)
알치나(Alcina, 1735)
세르세(Serse, 1738)
데이다미아(Deidamia, 1741) - 헨델의 마지막 오페라

3.2.2 오라토리오

알렉산더의 향연 (Alexander's feast, 1736)
이집트의 이스라엘인(Israel in Egypt, 1738) - 합창음악 분야의 명작
메시아(Messiah, 1741) - 헨델의 대표작
세멜레(Semele, 1743)
제전 오라토리오(occasional oratorio, 1746)
유다스 마카베우스(Judas Maccabaeus, 1746) - 메시아에 버금가는 오라토리오의 걸작
여호수아(Joshua, 1747)
솔로몬(Solomon, 1748)
테오도라(Theodora, 1749) - 헨델 자신이 가장 좋아했던 오라토리오
예프타(Jephtha , 1752) - 사실상 그의 마지막 오라토리오. 시간의 진실의 승리는 젊은 시절의 작품을 개작한 것이기 때문이다.
시간과 진실의 승리(The Triumph of Time and Truth, 1757)

3.2.3 기악음악

수상음악(1717)
왕국의 불꽃놀이(1749)
하프시코드 모음곡 제1집(총 8곡, 1718-1720) - 모음곡 제 5번의 마지막 곡이 유명한 유쾌한 대장간(Harmonious Blacksmith) 이 외에도 모음곡 제 7번의 마지막 곡 Passacaglia도 알려져 있다.
하프시코드 모음곡 제2집(총 5곡, 1722, 1733 재출판) - 모음곡 제 4번의 Sarabande가 유명하다. 다들 한번씩은 들어본 적 있는 멜로디.
하프시코드 모음곡 제3집(총 2곡, 1733)[28]
6곡의 오르간 협주곡 Op. 4(1735~36)
하프협주곡 B플랫 장조 Op.4-6[29]
6곡의 오르간 협주곡 Op. 7(1740~50, 헨델 사후 출판)
발레음악 Terpsichore

3.2.4 종교음악

찬도스 앤섬(Chandos Anthems, 총 19곡 1717~18)[30]
조지 2세를 위한 대관식 앤섬(Coronation Anthems for George II, 1727)
캐롤라인 왕비를 위한 장송 앤섬(Funeral Anthem for Queen Caroline,1737)
데팅겐 앤섬(Dettingen Anthem, 1743)
데팅겐 테 데움(Dettingen Te Deum, 1743) [31]


3.3 바흐의 및 다른 작곡가와의 관계

동갑내기였던 헨델과 바흐는 사후에도 운명적으로 서로 비교를 당하는 처지가 되었는데, 두 사람의 음악 스타일은 완전히 다르다.
바흐가 대위법에 기반한 각 성부간의 치밀한 움직임에 주안점을 두었다면 헨델은 화성을 바탕으로 한 전체적인 울림에 주목하고 있고 특히 선명하고 명쾌한 선율처리가 특징이다.
이런 차이가 발생하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두 사람의 음악적 개성의 차이 때문이겠지만, 각자 처해있던 음악환경의 차이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요소중 하나이다.

바흐는 평생 독일밖을 벗어나지 않았고 주로 도시의 교회나 궁정음악을 담당하였다.[32]
하지만 헨델은 30대에 런던에 정착하여 평생 거기서 살았다. 런던은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대도시답게 헨델을 비롯한 유럽 각지의 유명 음악가와 연주자들이 몰려들었다. 특히 성악쪽에서는 당대 유럽 최고 수준의 가수들이 모두 런던을 거쳐갔다.[33]

이런 분위기에서 헨델도 최고의 가수들과 일할 수 있었고, 오페라를 비롯한 헨델의 성악작품은 이런 뛰어난 가수들의 역량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작곡되었다. 때문에 헨델의 음악은 바흐처럼 치밀하고 복잡한 구축법 대신 극음악에 맞는 선명한 선율선, 화려한 울림, 그리고 극적인 표현을 중시하고 있다. 이런 작곡수법은 그의 기악곡에서도 잘 나타난다. 헨델의 하프시코드 모음곡과 바흐의 영국모음곡이나 건반악기를 위한 파르티타 등과 비교해보면 두 사람의 음악성향의 차이를 명확하게 알 수 있다. 가끔 헨델과 바흐를 비교하면서 두 사람의 우열 논쟁이 벌어지기도 하는데, 모두 각자의 특성을 지닌 위대한 음악가이므로 이러한 비교는 무의미하다고 할 수 있다.(실제로 바흐는 헨델을 높이 평가하여 2번에 걸쳐 만나고자 하였으나, 서로 길이 엇갈리거나 부득이한 사정으로 인해 만나지 못했다. 다만 헨델이 바흐를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알려진 것이 없다.)

후배 작곡가인 모차르트베토벤은 대위법을 비롯한 바로크 음악을 연구하면서 자신들의 음악에서 진일보를 이루었는데 이 때 두 사람은 헨델의 수법을 많이 참고하였다. 자세한 것은 해당 작곡가의 항목 참조. 특히 베토벤의 후기작품을 보면 헨델식의 대위법 성향이 두드러진다.

4 일화

1. 바흐와는 달리 평생 독신이었으며 사생활이 꽤나 어지러운 편이었다고 한다. 그런데다 자신의 사생활을 대부분 비밀로 묻어두어 후세 사람들이 헨델의 일생을 이해하는 데 꽤나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2. 식탐이 굉장한 양반이었다고 한다. 이 분이 원래 욕심이 없는 분야가 없다

헨델이 하루는 어느 식당에 들러 식사를 하게 되었다. 식당의 웨이터에게 이것저것 주문을 시작했는데 테이블 3개 분량에 이르는 주문을 하자 웨이터가 주문을 받고선 머뭇거리는 것이었다. 그것을 본 헨델은 "왜 그렇게 꾸물대는가?" 라고 묻자 웨이터는 혹시 일행 분들이 오시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헨델 왈 "일행은 바로 여기있잖는가?" 하며 주문을 하고선 차려놓은 음식을 모조리 먹어치웠다고 한다.

3. 헨델은 불같은 성격으로 유명하였는데 젊은 시절엔 꽤나 현피를 많이 했다고 한다. 심지어 결투를 하다가 죽을뻔 한 적도 있었다.

결투를 한 사연은 이렇다. 헨델이 영국으로 가기 전 함부르크 오페라 하우스에서 하프시코드 반주를 맡고 있었는데, 헨델보다 4년 선배인 요한 마테존의 오페라 <클레오파트라>를 공연하는 도중에 헨델이 작곡가가 요구하는 템포를 영 지키지 않고 제멋대로 반주를 했다. 그러자 마테존은 헨델을 하프시코드 의자에서 밀어내려고 했는데 헨델이 밀리지 않고 버티는 바람에 두 사람은 난투극 직전까지 갔다.
그럭저럭 공연이 끝났지만 분이 풀리지 않은 두 사람은 결투로 끝장을 내려고 했다. 헨델도 헨델이지만 마테존도 성질이 장난이 아니었던 모양. 결투가 시작되서 칼을 꺼내들고 휘두르기 시작했는데 마테존의 칼이 헨델의 가슴에 꽂혔다. 그런데 두 사람은 물론이고 이들 사후의 음악 애호가들에게는 정말 다행스럽게도 마테존의 칼끝이 헨델의 조끼단추를 찌르는 바람에 칼이 구부러지고 말았다. 둘은 결투를 중단했으며 곧 화해하고 평생동안 친구로 지냈다.[34]

4. 영국에서 콧대 높은 가수를 혼내준 일화도 유명하다.

영국 시절 자신의 신곡 리허설을 하던 1721년 어느 날, 소프라노 프란체스카 쿠초니가 헨델이 지시한 방식으로 부르지 않고 오묘한 애드립을 치며 지멋대로 불러댔다. 그러자 헨델은 화를 내면서 "이년아 그 따위로 부를 거면 창문밖으로 내던져 버리겠다."고 했다. 쿠초니는 이 말을 허세로 생각하고 계속 자기 식대로 불렀는데 뚜껑이 열린(?) 헨델이 진짜로 그녀를 잡아서 창밖으로 던져버리려고 했다! 다행히 주변의 다른 단원들과 지인들의 만류로 헨델은 노여움을 풀었고 다시 리허설이 진행됐다는 후새드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5 매체에서의 등장

  • 영화 파리넬리에서는 당대 최고의 작곡가로, 기교 중심의 얄팍한 음악만 작곡하는 파리넬리의 친형 리카르도와 대립해서 예술성을 추구하는 자부심 강한 음악가로 묘사된다.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초상화 속의 모습과는 달리, 영화 속에서는 첫번째 등장 씬을 제외하면 편안하게 가발을 벗은 모습으로 주로 등장.[35]
  • 헨델이 작곡한 대관식 찬가 신부 사독(Zadok the Priest, HWV 258)은 현재 유럽 최대의 축구대회인 UEFA 챔피언스 리그의 주제가로 사용되고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편곡을 한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Ligue Des Champions 참고
  1. 원곡은 하프시코드 곡이다.[#].
  2. 사실 독일에서 한 번 만날 기회가 있었으나 서로 길이 엇갈렸고 다시는 만나지 못 했다.
  3. 그의 최초의 오페라이자 그의 초기 독일어 오페라 가운데 유일하게 악보가 전해지는 작품이다. 그 외에 네로나 플로린도 등의 독일어 오페라는 현재 악보가 모두 또는 거의 모두 실전되었다. 이 알미라는 음악 자체의 공연가치보다도 대작곡가 헨델의 초기 작품성향을 엿볼 수 있는 몇 안되는 자료로서 가치가 더 높다.
  4. 로드리고 이후 헨델의 모든 오페라는 이태리어로 작곡되었다.
  5. 이런 이유로 수상음악에는 당시 관현악에서 박자를 맞출 목적으로 사용되었던 하프시코드가 빠져 있다. 하프시코드는 부피가 커서 배에 싣기 어렵기 때문이다.
  6. 이 이야기는 1761년에 출판된 첫 헨델전기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신빙성이 거의 없다.
  7. 보통 정가극이라고 번역하는데 이태리어로 되어 있으며 보통 신화나 영웅의 전설 등에서 취한 내용을 주제로 한다. 분위기는 대체로 서정적이고 비극적이지만 결말은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세리아보다 좀더 가볍고 우스꽝스러운 내용을 주제로 하는 오페라 장르도 있는데 이를 오페라 부파라고 한다.
  8. 보논치니와 아리오스티는 헨델보다 각각 15살, 20살이나 나이가 많았으며 아리오스티는 전술했듯이 소년시절의 헨델을 가르쳤던 적도 있다.이 세 사람은 일종의 직장동료였지만 점차 명성과 악단 내에서의 주도권을 놓고 라이벌관계가 형성되었다. 하지만 이 둘은 창작력 측면에서나 인기 측면에서나 젊은 헨델을 당해내지 못했는데, 아리오스티는 왕립 음악 아카데미 설립 당시 이미 고령이어서 10년 뒤에 사망했으며 보논치니는 다른 사람의 마드리갈을 자기 작품이라고 속여서 발표하는 추태를 벌였다가 발각되서 영국에서 쫓겨난다.
  9. 이 부분을 조금 설명하자면, 당시의 오페라(다른 음악장르도 마찬가지)는 일종의 공장 양산형으로 굉장히 빠르게 작곡되었기 때문에 비슷한 음악과 비슷한 스토리가 재탕 삼탕되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다. 게다가 당시에는 저작권의 개념도 없었기 때문에 남의 음악이나 대본이 좀 팔린다 싶으면 대놓고 마구 표절했으며 이미 연주되었던 자신의 음악이나 가사를 재활용하는 자기표절도 횡행했다(헨델 본인도 결코 이런 관행에서 자유롭지 못한 작곡가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작곡가나 대본작가들은 자기 작품에 대한 애착이 별로 없었고, 곡과 대본은 작가의 역량과 소신이 아니라 가수나 극장주, 높은 분들, 관객들과 같이 그 방면의 전문가가 아닌 사람들의 요구와 입맛에 따라 제멋대로 변경되기 일쑤였다. 당시 자신의 자존심과 경쟁의식에 눈이 멀어 있던 쿠초니와 보르도니 입장에서는 애초 중요하게 취급되지도 않은 오페라의 스토리 따위는 당연히 안중에도 없었을 것이다. 여튼 이런 지저분한 관행들은 자연히 오페라장르 자체의 질적 하락을 초래했으며 영국에서 이태리 오페라가 몰락한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한편, 이런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헨델의 오페라 상당수가 오늘날에도 상연되기 충분한 퀄리티들을 갖고 있는데 이는 정말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10. 당시 왕세자였던 조지의 부인. 남편은 후에 조지 2세가 된다.
  11. 다만 이 사건은 두 가수가 실제로 크게 싸운 것이 아니라 단지 팬들이 소란을 일으킨 것이 와전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사실 두 사람의 라이벌관계 자체도 언론과 팬덤에 의해 과장된 측면이 있다. 오늘날에도 박찬호와 노모의 경우처럼 호사가들이 서로 큰 적의가 없는 사람들을 굳이 라이벌로 포장하는 경우가 많은데, 쿠초니와 보르도니의 라이벌 관계에 대한 풍문도 완전 거짓말은 아니겠지만 어느 정도는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12. 헨델 당시에 62회 공연횟수는 유럽을 전역을 통틀어 거의 최고 수준이라고 보면 된다. 심지어 이 거지의 오페라는 오늘날에도 종종 상연된다. 당시 오페라나 연극과 같은 극 장르는 양산형으로 빨리 만들어져 공연되다 내려졌던 탓에 대체로 공연횟수가 10회를 넘기기 힘들었다. 청중들로부터 별 반향이 없으면 초연으로 끝나는 경우도 빈번했다.
  13. 거지의 오페라가 성공한 이유는 적절한 시사성 뿐만 아니라 패러디 작품치고는 의외로 괜찮은 작품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작품의 제목은 '오페라'이지만 기획자인 존 게이는 전문 작곡가가 아니었기 때문에 음악의 비중이 그렇게 높지는 않으며 부수 음악도 순수한 창작곡이 아니라 당시에 유행했던 음악이나 민요(유명한 스코틀랜드 민요인 푸른 옷소매도 나온다)를 짜깁기한 것들이다. 이런 이유로 학자에 따라서는 이 거지의 오페라를 뮤지컬의 효시로 보고 있다. 전반적으로 딱히 걸작이라고 하긴 어렵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급한 3류 작품도 결코 아니며 음악극으로서 나름의 독창성과 매력을 갖고 있다. 기본적으로 어떤 작품이 큰 파급력을 가지려면 최소한의 작품성은 담보되어야 한다는 것을 상기하자.
  14. 한편 그녀는 1738년 홀연 이탈리아로 돌아가버리는데 그 이유는 확실하지 않지만 가수로서 자신의 커리어가 얼마 남지 않은데다 런던에서 오페라의 인기가 몰락하자 더이상 성공하기 어렵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스트라다는 이태리로 떠난 후에는 활동실적이 그리 많지 않으며 3년만에 은퇴한다.
  15. 특히 파르테노페는 코믹 오페라로서 헨델의 오페라 중에서도 상당히 특이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기억해둘만 하다.
  16. 이 귀족극단의 행각은 정말 막장이었다. 라이벌 악단으로부터 인기 가수와 연주자들 빼내오기, 관객 빼돌리기, 상대 극단의 공연에 대해 온갖 흑색선전 퍼뜨리기, 인기있는 곡 표절하기 등등 온갖 지저분한 짓을 저질렀다. 헨델은 이 귀족극단의 횡포때문에 엄청나게 마음고생을 해야 했고 운영이 어려워지면서 단원들과의 불화도 심해진데다 건강까지 해치고 말았다. 헨델과 오랫동안 함께 일했던 카스트라토 가수 세네시노도 이 때 헨델과 크게 싸우고 귀족극단으로 적을 옮겨버렸다. 헨델은 당시 기준으로 나름 장수해서 74세까지 살았는데, 이 분이 타고난 건강체질이었던 만큼 이런 고초를 겪지 않았다면 훨씬 오래 살았을 것이다.
  17. 애초에 이 귀족극단은 철저하게 정치적인 이유에서 만들어진 탓에 음악적으로는 정말 거론할 가치가 없는 악단이었다. 막상 2차 아카데미가 와해되자 자신들도 방향성을 잃고 지지부진하다가 창립 4년만에 문을 닫는다. 그나마 챙겨볼만한 점은 전설의 카스트라토 파리넬리가 귀족극단 소속으로 활동했다는 것 정도.
  18. 회복이 문제가 아니라 이미 흥행대상으로서 이태리 오페라의 수명은 끝난 상황. 헨델도 결국 1741년 자신의 최후의 오페라가 된 데이다미아(Deidamia)를 끝으로 오페라 장르에 대한 미련을 접고 더이상 작곡에 손대지 않았다.
  19. 시간과 진실의 승리는 그의 최초의 오라토리오이면서 또 최후의 오라토리오이기도 하다. 다만 1757년 작곡된 시간과 진실의 승리(The Triumph of Time and Truth)는 당연히 영어 오라토리오이다.
  20. 사실 이 코벤트가든극장 시기에는 오페라보다 오라토리오 창작이 더 활발했다.
  21. 너무나 유명한 나머지 이 메시아 의 한 부분인 할렐루야가 시작될 때는 기립하는 전통까지 생겨났다. 이 전통은 초연에 참석했던 영국 왕 조지 2세가 이 부분에서 감격에 못 이겨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이래 현재까지 지켜져오고 있다고 알려져 왔다. 그런데 일부 연구자들에 의하면 사실은 조지 2세가 이 곡의 초연에 제 시간에 도착하지 못하고 지각해서 할렐루야 시작할 때 딱 왔다고 한다. 왕이 도착하면 전원 기립을 해야하는 룰에 따라 극장에 있던 모든 이들이 기립을 했고, 이게 왕의 지각에 대해 실드를 치려다보니 저런 설로 와전된 것이라 한다.
  22. 특히 유명한 할렐루야 코러스는 각 교회나 성가 합창단들의 크리스마스 단골메뉴이기도 하다. 초연때에는 열댓명 정도의 합창단 규모에 10명 수준의 챔버 앙상블이 반주를 맡았는데, 이게 점점 규모가 커져서 나중에는 연주시에 2000명에 가까운 합창단이 동원되기도 했다. 현재는 다시 헨델시절의 단촐한 규모로 돌아가자는 분위기가 생겨서 적은 규모로 연주하는게 대세이다.
  23.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전쟁이 끝나고 엑스라샤펠 조약이 체결된 기념으로 의뢰된 것이다. 이 곡의 초연때에는 불꽃놀이를 보기 위해 1만2천명 정도의 청중이 왕궁 근처에 몰려들었다고 한다.
  24. 헨델을 장님으로 만든 존 테일러("Chevalier" John Taylor, 1703~1772)라는 자칭 안과의사는 헨델의 눈을 망쳐놓기 몇 년 전에 바흐도 엉터리 치료로 실명시킨 전과가 있다. 애초에 이 존 테일러는 실력도 없는 주제에 유럽 각지에 영국왕실의 주치의로 행세하고 다니면서 이 두 위대한 음악가 뿐만 아니라 수백명을 실명시킨, 말그대로 악질 돌팔이였다. 이 사기꾼이 얼마나 악명이 높았는지 지금까지도 안과 분야에서 돌팔이의 대표주자격으로 거론될 정도. 우습게도 그런 그도 천벌인지 늘그막에 병으로 인해 두 을 못 보게 되었다.
  25. 식욕 또한 남달랐다고 한다. 인생사의 모든 면에서 끝판왕격의 성격을 가진 인물로 볼 수 있다.
  26. 바흐의 경우도 규모가 큰 작품들, 특히 수난곡이나 오라토리오 등의 대규모 종교음악에서는 예전에 썼던 곡을 손질하거나 그대로 인용해서 작품화하는 경우가 많았다. 굳이 나쁘게 말하면 일종의 자기표절인 셈인데, 다만 인용한 음악들이 따로 놀지 않고 절묘하게 새로운 음악으로 재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표절로 보지는 않는다.
  27. 헨델의 오페라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바로크 오페라가 이런 대접을 받았다. 몬테베르디, 비발디, 라모, 알렉산드로 스카를라티 등의 중요한 작곡가들의 작품들이 모두 무관심 속에 한동안 완전히 잊혀졌었다. 오페라는 공연에 돈과 노력이 많이 소요되는 장르인 만큼 유행이 지나서 흥행하기 힘든 과거의 오페라로 수지타산을 맞추기 상당히 어렵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28. 런던이 아니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출판되었다.
  29. 원래는 하프였다가 오르간으로 편곡한 것이다.
  30. 앤섬은 영국 성공회의 예배에 쓰이는 합창음악으로 순수하게 합창만 있는 풀 앤섬, 독창부분이 있는 파트 앤섬이 있다. 카톨릭으로 치면 미사 전례음악에 해당되는데 미사와 형식은 많이 다르다.
  31. 테 데움은 Te Deum Laudamus(하느님, 저희는 당신을 찬미하나이다)로 시작되는 전통적인 성가를 의미한다. 가톨릭 교회의 시간전례에서 쓰이며, 주로 감사드릴 일이 있을때 불린다. 종교개혁 이후에도 영국 성공회와 일부 루터파 교회가 계속 사용한 덕분에 헨델에 의해 작곡될수 있었다. 데팅겐 테 데움은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전쟁 중 데팅겐 전투에서 조지 2세가 지휘한 영국군의 승전을 기념하여 작곡되었으며, 가사는 전통적인 가사를 그대로 따르지만 라틴어가 아니라 영어다.
  32. 바흐가 소도시의 작은 교회의 악장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많은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바흐가 1723년부터 칸토르로 있었던 라이프치히는 유명한 라이프치히 대학이 있을 정도로 학문의 중심지이고, 결코 소도시도 아니다. 독일 밖을 벗어나지 않았다고 해도 바흐는 독일의 주요 도시에 오르간 감정 등의 이유로여행을 많이 다녔다.
  33. 파리넬리라는 예명으로 잘 알려진 카스트라토의 전설 카를로 브로스키도 전성기의 상당기간을 런던에서 활약했다. 다만 파리넬리는 헨델과 라이벌 관계에 있던 귀족 오페라단( Opera of the Nobility) 소속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헨델과 같이 공연을 하지는 않았다.
  34. 오늘날 마테존은 정작 음악보다 이 일화로 더 유명한 인물이 되어 버렸다. 사실 마테존은 생존 당시에도 작곡가보다 음악이론가로 더 유명했으며 그가 남긴 다수의 음악이론서들은 현재에도 종종 인용이 될 정도. 음악 전문가들에게는 나름 중요한 인물이다.
  35. 이 영화는 당시 생소했던 바로크식 벨칸토 창법이 화제를 끌었으나 정작 영화 자체는 연출수준이 별로라서 크게 흥행하지 못했다. 영화는 망하고 영화음악만 뜬 전형적인 케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