源田実. 1904-1989
1 개요
일본의 군인, 자위관. 3대 항공막료장을 지냈다. 전임자는 사나기 사다무였고 후임자는 마쓰다 다케시였다.
좀 더 상세한 정보는 이 글을 참고할 것.
2 생애
1904년 히로시마에서 태어났다. 1924년에 일본해군병학교 52기로 졸업했다. 1928년에 19기 비행학생으로 입과하여 파일럿이 된다. 요코스카 항공대 분대장, 제2연합항공대 참모, 요코스카 항공대 비행대장, 제1항공전대 참모 등을 지냈다. 1932년부터 겐다서커스(源田サーカス)라 하여 곡예비행을 다니기도 했다.
젊은 시절의 겐다 미노루.
기존의 거함거포주의에 부정적이라 해군 전력 모두 항모를 위해 이용되어야 한다는 극단적인 항공제일주의자였다. 그 때문에 항공기의 위력을 높게 평가한 야마모토 이소로쿠 장관에게 중용되었다. 하지만 독선적인 성격과 급한 성격 때문에 대놓고 야마토등을 건조하는 건함계획을 비난 했기 때문에 군내부에서 평가가 갈리는 편이었다. 영식함상전투기(A6M) 개발에도 참여하였고, 엔진의 성능이 떨어진다면 장갑을 희생해서라도 비행성능을 향상시키는 것이 생존성 및 전력을 향상 시키는데 도움이 된다고 주장하여 이 의견이 반영 되었다.
자살특공병기인 오카의 개발을 최종적으로 승인 했기 때문에 특공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특공 전법을 수행하는데 있어 영향을 끼쳤을 확률은 높으나, 정작 겐다 자신은 T공격부대(어둑해질 무렵 항공공격을 가하는 야간공격부대) 창설을 주장했고, 자살특공을 거부하고 야간 공습을 주장한 미노베 타다시 소좌를 전폭적으로 지원하여 631항공대(통칭 '후요 부대') 창설 한데다 자신의 부대에서 특공을 내보내는 일은 없었다. 전쟁말기에 시덴으로 활약한 343항공대의 사령관이기도 했고, 파일럿들의 편의를 봐주었기 때문에 스기타 쇼이치, 칸노 나오시등 343항공대의 에이스들에게 존경 받는 한편, 343항공대와 사이가 나빴던 사카이 사부로에게 강력한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살아있을때는 친한척했다
종전후 연합국이 천황에게 위해를 가할 경우 거사를 일으킨다는 황통호지(皇統護持)작전의 지휘관이기도 했다. 343항공대의 에이스였던 시가 요시오 소좌를 포함해 총 23명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나 실제로 작전이 실행되는 일은 없었다. 최종 계급은 해군 대좌.
전후에[1] 1954년 방위청에 들어가 항공막료감부 장비부장[2], 항공총대 사령관 등을 지내고 사나기 사다무에 이어 항공막료장이 되었다.[3] 곡예비행을 하던 경력이 있던 터라 블루임펄스의 창설을 돕기도 했다. 1962년까지만 해도 자위대의 4대 막료장들은 중장 계급장을 달았는데 미군을 방문하던 자리에서 중장 취급을 당하자 빡돈 겐다는 미국에서 계급장을 대장(계급)으로 고쳤다. 규정 위반 문제가 떠올랐지만 겐다의 행동은 사후 승인을 받아 1962년 12월 1일부터 통합막료회의의장, 육상막료장, 해상막료장, 항공막료장은 대장으로 대우받게 되었다. 차후 미국에서 공개된 문서를 통해 F-104를 도입하는데 있어 뇌물을 받은 것이 확인 되었다.
1962년에 퇴직했고 자민당 참의원으로 활동했다. 정치 활동에 대한 소회로 "국회만큼 일본어가 통하지 않는 곳은 없다"란 말을 남겼다.
중국이 핵을 갖추자 일본의 핵무장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리고 1976년에는 "야마토 민족은 핵 3, 4방 맞아도 항복할 민족이 아니었다며 전쟁에서 항복한 천황의 성단 덕분이니 천황에 의해 구원받은 우리는 천황제를 수호해야 한다." 같은 말을 남겼다. 히로시마에서는 겐다의 사임을 요구했다.
1978년에 일본이 중화민국과 단교하고 중국과 수교할 때 유일하게 반대한 5인의 의원으로 대만에서 추켜세워줬다.
1986년에 국회의원을 은퇴했다.
FX기종선정 과정에서 뇌물을 받은 것이나 커티스 르메이에게 욱일대수장을 수여한 것 때문에[4] 비난하는 목소리도 많고, 일본에선 평가가 크게 갈리는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