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해군병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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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해군사관학교. 한자로는 海軍兵學校. 해군//학교가 아니라 해군/병학/다! 병학은 현대 한국어로는 군사학의 의미로 보면 되고, 병이란 용어는 '병과'인용 오류: <ref></code> 태그를 닫는 <code></ref> 태그가 없습니다이었으며, 이들 병과사관들은 세부 특기로 항해, 포술, 수뢰 등의 특기를 받아 관련 교육을 받고 관련 전술의 전문가로 양성되었다. 육전대 전투부대도 이들이 배치됐다.</ref>의 줄임말로 쓰였다고 보면 된다. 쉬운 한자들인데 현대 한국어로 풀어쓰면 의미가 달라진다. 약칭은 해병(海兵)으로, 기수를 나타낼 때도 해병XX기 같은 식으로 불렀다.

대한민국해군사관학교도 처음 몇 달은 해군병학교란 이름을 썼다.[1] 대한민국 해군은 처음엔 병조(兵曹)라는 일본군 해군의 계급 호칭을 쓰기도 했는데 1962년에 육해공 계급 명칭이 통합되면서 오늘날의 부사관/병 호칭을 썼다.

1 개요

1876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 해군을 양성했던 사관학교이다. 과거 해군병학교의 건물은 현재 자위대 해상자위대의 해상자위대간부후보생학교로 쓰이고 있다. 히로시마구레시 에타지마(江田島)에 위치하며 1945년 이전에 에타지마는 해군사관학교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78기수를 배출했으며 총 인원은 12,433명.

일본 해군의 경우 일본 육군보다 규모가 작았고 인원풀이 좁았던 탓에 친목질이 강했다고 한다. 특히나 특기가 다르면 계급이랑 별로 상관없이 지내는 일이 많았다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귀축영미라며 영국미국과 전쟁을 벌여 영어가 적성어로 교육이 금지됐지만 해군병학교는 그냥 가르쳤다고 한다. 당시 교장 이노우에 시게요시가 "암만 적성국의 언어라지만 이 세상 천지에 국제 공용어를 못 하는 해군 장교가 어딨느냐?"며 강행했고, 우익들이 교장 탄핵 운동을 벌였지만 교장은 되려 그들을 무식한 놈들이라고 씹었다. 전후 GHQ 통치기를 거친 뒤 영어 구사력이 높은 경쟁력을 발휘하는 시대가 되자, 영어 한 마디 못 하던 육사 출신들보다 더 출세한 해군병학교 졸업자들이 교장에게 감사를 표했다고 한다.

일본 육군과는 달리 일본인 순혈 의식이 무척이나 강해서 해군병학교 출신의 조선인이나 대만인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조선인의 경우 처음부터 조선인 신분으로 입교한 사례는 사실상 없으며, 일본인 가정에 입양되는 등의 형태로 서류상으로만 일본인인 신분으로 입교한 사례가 극소수 있다. 이 때문에 광복대한민국 해군을 창설할 당시 일본 해군에서 함선 및 항해 관련 교육을 받은 인재가 없어서[2] 손원일, 박옥규, 정긍모상선사관 출신 인물들이 주축이 되었다.

해군병학교는 일본 내에서도 귀족적이고 배타적이란 평가를 많이 받았다. 이는 스페인, 이탈리아 등 비교적 1인당 소득이 떨어지는 반면 해군이 좀 있었던 나라들에서는 늘상 발생하는 보편적 현상이다. 그리고 딱히 중요한 항구도 아닌 에타지마에 소재하냐를 두고 말도 많았다. 요코스카요코하마에 위치해야 했다는 주장. 다만 이는 도시가 어느 정도 성장한 뒤의 얘기이지 일본 해군이 생길 때만 해도 도쿄의 권역은 지금과는 달랐다.

2 역사

1869년 해군조련소(海軍操練所)가 설치됐으며 도쿠가와 막부 소속의 해군의 인원을 각 번마다 운영한 해군과 합쳐 일본 해군으로 전환한다. 그 후 이름을 해군병학료[3](海軍兵學寮)로 개편하였고 도쿄 츠키지[4]에 위치했다. 1888년에 에타지마로 옮겼다.

3 생도 선발과 운영

16세부터 19세 사이에서 선발했다. 초기에 모집 인원이 적어 일본 최고의 엘리트 집단이었다. 육군유년학교와 마찬가지로 예비과정이 존재했는데 해군예비교라고 불렀다. 교육기간은 초기에는 3년이었고 1927년부턴 3년 8개월이었다. 사무라이랍시고 만 쓰고 유교 경전만 암기하던 일본육군사관학교보다는 좀 더 서양적인 기풍이었다. 영국 해군의 영향을 받았고 주말마다 카레를 먹는 관습도 생겼다. 전쟁이 터지면서부터는 교육기간이 줄어들어 1941년에 입교한 73기의 경우엔 2년 4개월이었다. 사관생도들은 일등병조(해군 상사)와 병조장(해군 준위) 사이에 해당[5]하는 대우를 받았다. 일본육군사관학교의 사관생도들이 일병에서 상병 수준인 걸 생각하면 굉장히 높은 편.

75기는 원래 1945년 10월 1일 임관할 예정이었지만, 패전 후 해군이 해체되면서 수료증만 나눠주었다고 한다. 그 이하 기수는 그마저도 없었다.

4 분교

  • 해군기관학교(海軍機関學校) : 해군의 기관장교를 양성하기 위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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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4년 해군병 분교로 요코스카에 위치했으며 1881년에 해군기관학교가 된다. 관동대지진으로 건물이 무너지면서 교토로 이전한다. 1923년부터 1925년까진 이전 작업으로 에타지마의 해군병학교에 가서 교육을 받는다. 1945년 폐쇄. 현재는 건물의 일부가 해군기념관으로 쓰인다.
  • 해군경리학교(海軍經理學校) : 주계[6] 장교를 교육하던 곳이다. 1874년 회계학사로 출발했으며 1945년 폐쇄됐다. 주계 장교들은 대부분이 육상근무를 하고, 배를 타더라도 일이 편하며 전투시엔 함교에서 전투일지를 작성하기 때문에 배가 침몰할 경우 일지를 지참하고 군의관과 더불어 제일 먼저 퇴함할 권한이 있어 생존률이 높았으므로, 학식 있거나 고위층의 자식인 이들이 전쟁 중에 많이 지원했다.

5 주요 동문

5.1 일본군 해군

사관생도로 있다가 임관하지 못 한 채 패전을 맞이했고 교토대학에 입학하여 판사로 임용, 삿포로 지방재판소에서 재직하던 중 나가누마 나이키 재판[8] 당시에 자위대가 위헌이라고 판결을 내렸다. 삿포로 고등재판소는 1심을 파기하고 원고의 청구를 기각했으며 최고재판소도 기각했다. 후속 재판으로 자위대는 위헌을 피했다. 후쿠시마는 계속 보복성 인사로 한직만을 떠돌았다고 한다.

5.2 해상자위대

자위관을 보면 해상자위대 해상막료장을 해군병학교 출신들이 독점했다는 걸 알 수 있다.

5.3 항공자위대

해군 항공대 출신 등이 일부 공자대로 들어가기도 했다.

  1. 대한민국 공군공군기본군사훈련단의 전신을 공군병학교(空軍兵學校)라고 불렀다.
  2. 일본 해군 출신 인물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순혈 의식 때문에 거의 대부분 해군 항공대나 해군 육전대 출신이었다.
  3. 료(寮)는 일본어로 기숙사를 말한다.
  4. 세계 최대의 수산시장이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5. 일본군의 하사관 계급은 3개로, 우리의 원사에 해당하는 계급은 없었다.
  6. 서무, 피복, 회계, 보급 등을 담당한 해군의 병과.
  7. 이 기수는 임관일을 당겨 러일전쟁에 참전했다.
  8. 1970년 미사일 기지 건설을 위해 농림부에서 국유림을 해제하고 자위대에 사용을 허가하였는데 주민들이 자위대는 위헌이며 국유림을 해제하는 건 불법이라고 소송을 건 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