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국군의 참모총장 | ||||
합동참모의장 | 육군참모총장 | 해군참모총장 해병대사령관(주1) | 공군참모총장 | |
(주1) 해병대사령관은 군인사법 제 19조, 제 64조에 의해 해군참모총장의 권한을 일정 부분 위임받음. |
목차
1 개요
合同參謀議長, Chairman of the Joint Chiefs of Staff. 많은 나라 군대의 3군(육군, 해군(+해병대), 공군) 통합 의결기구인 합동참모본부의 의장이다. 보통은 줄여서 합참의장이라고 부른다.[1] 유럽 쪽에서는 '국방참모총장(Chief of the Defence Staff)'(영국)이나 '국방감찰총감(Generalinspekteur der Bundeswehr)'(독일)이라고 부른다. 중화민국군에서는 특이하게 합참의장을 '참모총장'이라고 부르고, 우리나라의 참모총장에 해당하는 직위는 육/해/공군 사령이라고 부른다. 이 기구가 보통 그 나라 군대의 가장 높은 의결기구이며 이 자리는 그 기구의 총책임자인 만큼 경험이 제일 많은 대장이 보임된다. 대한민국 국군의 대장 8명 중에서도 서열이 가장 높기 때문에 합참의장은 현역 군인의 좌장(座長)이라고도 불린다.
보통 장성들에게는 신변보호와 사무연락 등의 일을 하는 전속부관이 있다. 합동참모의장은 이 밖에도 '보좌관'이라는 직함을 가진 비서 보직이 있다. 이 보좌관은 전도유망한 국군 대령이 보임된다. 일례로 제42대 국방부장관을 지낸 김태영 예비역 대장도 대령 시절 합참의장 보좌관을 지냈다. 합참의장의 비서실장은 준장이다. 대개 공군 준장이 임명되며, 김성일, 최차규 前 공군참모총장이 비서실장을 역임한 바 있다.
참고로 국군 대장 8명의 의전서열은 '합참의장 > 육군참모총장 > 해군참모총장 > 공군참모총장 > 그외 4성장군 4명'순이다. 나머지 4성장군인 한미연합사 부사령관과 육군의 야전군사령관들 4명 중에서는 진급일이 빠른 순으로 서열이 높아진다. 국방일보 기사 정확한 서열은 대한민국 국군/장관급 장교 문서 참조. 밀리터리계통 게임을 육해공 전부 하는 사람을 장난삼아 합참의장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2 육해공의 비중
한국군의 경우 39대 이순진 합참의장까지 육군이 35명[2], 해군과 공군이 각 1명씩이다.
미군의 경우 19대 조지프 던포드 합참의장까지 육군이 9명, 해군이 4명, 해병대가 2명, 공군이 4명이다.
자위대의 경우 통합막료회의의장과 통합막료장을 합쳐 이와사키 시게루 4대 통합막료장까지 총 29명인데 이중 육상자위대가 14명, 해상자위대가 8명, 항공자위대가 7명이다.
3 대한민국 국군
현직 |
이순진 |
3사 14기 |
제복군인의 최선임이다. 국군에서 합참의장은 본래 실권이 없는 명예직이었다.[3] '국방장관을 보좌하는 현역 최고위 대장'이라는 상징성을 가졌을 뿐. 군령권(軍令權)과 군정권(軍政權)은 각군 참모총장이 갖고 있었다. 군정권은 인사를 포함한 일반 지휘권, 군령권은 작전 지휘권이다. 그 중에서도 지상군에 전력이 집중된 국군의 특성상 육군참모총장이 실세였다. 12.12 군사반란 당시 반란군의 목표가 김종환 합참의장[4]이 아닌,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점을 상기해보자. 10.26 사건 이후 합참의장이 아닌 정승화 육군총장이 계엄사령관을 맡고, 5.17 내란 당시에는 계엄사령관에 역시 이희성 육군총장이 임명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합참의장이 실세로 부상한 것은 국군조직법이 개정된 1991년부터이다. 당시 노태우 정부는 1988년 착수한 8·18계획 아래 북한의 군사위협에 효율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라는 취지 아래 합참의장이 군정권과 군령권 모두를 갖는 강력한 '통합군'으로 군을 개편하려 했으나, 소군(小軍)인 해·공군의 반발에 밀려 일단 합참의장이 군령권을 보유한 형태의 '합동군'으로 개편했다.[5] 이렇게 개정된 현행 국군조직법에 따라 육-해-공 3군의 작전부대에 대한 총괄적 작전권을 행사하게 된 최초의 합참의장은 1990년 10월 취임한 정호근 육군대장이었다.
그리고 약 2년 뒤인 1994년 12월 1일, 한미연합사령부에서 공동행사하던 전·평시작전통제권 가운데 평시작전통제권이 국군 단독행사로 변경되었다. 이에 따라 합참의장은 실권을 가진 주요보직으로 부상했다. '총을 지휘하는 대장'과 '사람을 지휘하는 대장'을 각각 의장과 각군 총장으로 분리하여, 합참의장이 국군 전체의 최고 작전지휘관이 된 셈.
합참의장은 군내 서열 1위이긴 하나, 전술한 것처럼 군령(軍令)만을 담당하기 때문에 일과 시간표나 군기, 병영내 부조리 등에 대한 통제는 권한 밖이다. 이쪽은 군내 군정(軍政)을 담당하는 각군 참모총장의 몫.
주의할 점은 합참의장은 국군의 '작전지휘관'이지 최고지휘관은 아니다. 국군의 통수권자는 엄연히 대통령이다. 작전권과 군 통수권을 헷갈리면 안된다. 그래서인지 합참의장은 중대급 부대 지휘관[6]도 다는 지휘관 견장(육/공군 한정)과 휘장을 달지 않으며, 이 때문에 지휘관이 아닌 (대통령의) 참모로 파악하는 이도 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제복 군인 중 유일하게 인사청문회를 거친다.[7][8]
합참이 처음 만들어질 때에는 영국처럼 국방참모총장이라고 부르려 했으나 헌법에 합동참모의장이라고 명시되어 있기 때문에 합참의장이라는 명칭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군인사법 제18조(합동참모의장 임명) ① 합동참모의장(이하 "합참의장"이라 한다)은 참모총장을 역임한 사람이나 장관급 장교 중에서 국방부장관의 추천을 받아 국무회의의 심의를 거쳐 대통령이 임명한다. 이 경우 국회의 인사청문회를 거쳐야 한다. ② 합참의장은 재임기간 동안 군에서 복무하는 현역장교 중 최고의 서열을 가진다. ③ 합참의장의 임기는 2년으로 한다. 다만, 전시·사변 또는 국방상 필요할 때에는 1년 이내의 범위에서 그 임기를 연장할 수 있다. ④ 합참의장에 대하여는 임기 동안 제8조 제1항 제1호에 따른 연령정년을 적용하지 아니하며, 그 직위에서 해임 또는 면직되거나 그 임기가 끝났을 때에는 현역에서 전역된다. (전문개정 2011.5.24) |
육군이 초강세인 한국군의 특성상 관례적으로 육군대장이 합참의장에 다수 보임된다. 1963년 창설 이래 50여 년이 지난 동안 非육군 의장은 단 2명 뿐.
예외는 25대 이양호 공군대장과 38대 최윤희 해군대장. 이양호 대장의 임명은 문민정부 당시, 김영삼 대통령이 하나회를 숙청하며 육군장성들을 갈아버렸기 때문에 가능했다. 최윤희 제독 또한 현 정부의 육군 위주의 인사 탈피라는 측면보다는, 인사 시기가 꼬여서 육군 장교들 중 합참의장에 보직될 만한 적합한 기수가 없었다는 점이 더 작용했다는 의견도 있다.[9]
합참의장을 보좌하는 합참차장에는 중장이 보임된다. 그동안 해공군 중장이 임명되었으나, 해군참모총장 출신인 최윤희 제독이 합참의장으로 영전하며 간만에 육군출신 합참차장들이 생겼다.
합참의장은 제복군인 서열 1위이기 때문에, 삐딱하게 본다면 육군이 초강세인 국군의 현실 속에서 육군사관학교 출신 최고 엘리트들이 별을 달고 승승장구하며 국방부장관으로 입각하기까지 군에서 밟는 마지막 퀘스트코스이기도 하다. 물론, 역대 국방부 장관이 전부 합동참모의장을 역임한 것은 아니다. 각군 참모총장이나 연합사 부사령관, 야전군사령관 출신 장관들도 많이 있다. 심지어 중장, 소장 계급으로 예편하고도 장관을 지낸 사례도 여럿 있다. 그러나 근 10년 간 국방장관들은 거의 예외없이 합참의장을 거쳤다. 노무현 정권 때부터, 합참의장 출신 장성들이 국방장관에 다수 지명되었다. 노무현 정권의 첫 국방장관인 조영길 장관부터 현임 한민구 장관까지, 모두 합참의장 출신이다. 예외는 예비역 해군중장으로 청와대 국방비서관이던 윤광웅 제독, 현역 육군참모총장에서 곧장 국방장관으로 진출한 김장수 장군 뿐이다. 굳이 국방부장관이 아니더라도 합참의장이란 경력은 현역 군인 신분으로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직책이기 때문에, 예편 후에도 각 정당의 국방·안보 분야의 전문가로 초청되는 경우가 많다.
이명박 정부에서 국방개혁을 위해 신설한 국가안보총괄회의에서 제시한 개혁안에 따르면, 합참의장은 군령권을 내놓고 대통령의 보좌와 총괄적인 군사작전 지도만을 맡게 한다. 또한 합참의장이 가졌던 군령권은 새로 신설되는 '합동군사령부'의 지휘관인 '합동군사령관'에게 넘어가며, 육·해·공군 본부를 육·해·공군 총사령부로, 각군 참모총장을 각군 총사령관으로 변경하게 된다. 그리하여 이 각군 총사령관이 합동군사령관의 지휘를 받아 군령권과 군정권을 행사하게 된다고 한다. 이렇게 되면 합동참모의장은 20여 년만에 다시 명예직으로 돌아가게 될뻔 했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헌법 조항의 문제도 있고, 군 안팎의 반발도 심해 결국 합동군사령부 신설과 총사령부 개편은 없던 일이 되었고 합참의장에게 일부 군정권을, 각군 참모총장에게 일부 군령권을 나눠주는 식으로 방향이 잡혔다.
3.1 역대 합동참모의장
대수 | 이름 | 임기 | 출신 | 군종 | 경력 |
1대 | 이형근 | 1954.02 ~ 1956.06 | 군사영어학교 1기 | 육군 | |
2대 | 정일권 | 1956.06 ~ 1957.05 | 군사영어학교 1기 | 육군 | |
3대 | 유재흥 | 1957.05 ~ 1959.02 | 군사영어학교 1기 | 육군 | |
4대 | 백선엽 | 1959.02 ~ 1960.05 | 군사영어학교 1기 | 육군 | |
5대 | 최영희 | 1960.08 ~ 1960.10 | 군사영어학교 1기 | 육군 | |
6/7/8대 | 김종오 | 1960.10 ~ 1965.04 | 군사영어학교 1기 | 육군 | |
9대 | 장창국 | 1965.04 ~ 1967.04 | 군사영어학교 1기 | 육군 | |
10대 | 임충식 | 1967.04 ~ 1968.08 | 육사 1기 | 육군 | |
11대 | 문형태 | 1968.08 ~ 1970.08 | 육사 2기 | 육군 | |
12대 | 심흥선 | 1970.08 ~ 1972.06 | 육사 2기 | 육군 | |
13대 | 한신 | 1972.06 ~ 1975.02 | 육사 2기 | 육군 | 2군사령관, 1군사령관 |
14대 | 노재현 | 1975.02 ~ 1977.12 | 육사 3기 | 육군 | |
15대 | 김종환 | 1977.12 ~ 1979.12 | 육사 4기 | 육군 | 3군사령관 |
16대 | 류병현 | 1979.12 ~ 1981.05 | 육사 7기 | 육군 | |
17대 | 윤성민 | 1981.05 ~ 1982.05 | 육사 9기 | 육군 | |
18대 | 김윤호 | 1982.05 ~ 1983.06 | 육사 10기 | 육군 | 33사단장, 1군단장, 1군사령관 |
19대 | 이기백 | 1983.06 ~ 1985.06 | 육사 11기 | 육군 | 15사단장, 1군단장, 2군사령관, 국방장관 |
20대 | 정진권 | 1985.06 ~ 1986.07 | 육사 8기 | 육군 | 교육사령관, 1군사령관 |
21대 | 오자복 | 1986.07 ~ 1987.12 | 갑종 3기 | 육군 | 6사단장, 5군단장, 2군사령관, 국방장관 |
22대 | 최세창 | 1987.12 ~ 1989.04 | 육사 13기 | 육군 | 20사단장, 1군단장, 3군사령관, 국방장관 |
23대 | 정호근[10] | 1989.04 ~ 1991.12 | 갑종 5기 | 육군 | 5사단장, 7군단장, 1군사령관 |
24대 | 이필섭 | 1991.12 ~ 1993.05 | 육사 16기 | 육군 | 9사단장, 1군단장, 2군사령관 |
25대 | 이양호 | 1993.05 ~ 1994.12 | 공사 8기 | 공군 | 공군참모총장, 국방장관 |
26대 | 김동진 | 1994.12 ~ 1996.10 | 육사 17기 | 육군 | |
27대 | 윤용남 | 1996.10 ~ 1998.03 | 육사 19기 | 육군 | 6사단장, 5군단장, 3군사령관, 육군참모총장 |
28대 | 김진호 | 1998.03 ~ 1999.10 | 학군 2기[11] | 육군 | 37사단장, 11군단장, 2군사령관 |
29대 | 조영길 | 1999.10 ~ 2001.10 | 갑종 172기[12] | 육군 | 2군사령관, 국방장관 |
30대 | 이남신 | 2001.10 ~ 2003.04 | 육사 23기 | 육군 | 7사단장, 8군단장, 3군사령관 |
31대 | 김종환[13] | 2003.04 ~ 2005.04 | 육사 25기 | 육군 | 1군사령관 |
32대 | 이상희 | 2005.04 ~ 2006.11 | 육사 26기 | 육군 | 30사단장, 5군단장, 3군사령관 |
33대 | 김관진 | 2006.11 ~ 2008.03 | 육사 28기 | 육군 | 35사단장, 2군단장, 3군사령관, 국방장관 |
34대 | 김태영 | 2008.03 ~ 2009.09 | 육사 29기 | 육군 | 23사단장, 수방사령관, 1군사령관, 국방장관 |
35대 | 이상의 | 2009.09 ~ 2010.07 | 육사 30기 | 육군 | 39사단장, 8군단장, 3군사령관 |
36대 | 한민구 | 2010.07 ~ 2011.10 | 육사 31기 | 육군 | 53사단장, 수방사령관, 육군참모총장, 국방장관 |
37대 | 정승조 | 2011.10 ~ 2013.10 | 육사 32기 | 육군 | 1사단장, 2군단장, 1군사령관, 연합사 부사령관 |
38대 | 최윤희 | 2013.10 ~ 2015.10 | 해사 31기 | 해군 | 해군참모총장 |
39대 | 이순진 | 2015.10 ~ | 3사 14기 | 육군 | 2사단장, 수도군단장, 항작사령관, 2작사령관 |
역대 합참의장 중에서 유재흥, 최영희 장군만 중장전역자다. 김종오 장군의 경우 중장계급에서 합참의장에 취임하였으나 재직 중 대장으로 진급하였다.
4 미군
재18대 미군 합참의장인 육군대장 Martin Dempsey 장군. 노래 부르는 걸 좋아하는지 구글에 martin dempsey singing이 완성된다
현직 | |
이름 | 조지프 던퍼드(Joseph F. Dunford, Jr.) |
출신 | 학군사관 '77 |
생년월일 | 1955. 12. 8 |
임관일 | 1977 |
미국 Joint Chiefs of Staff(JCS)의 최고 책임자이자 미군 내 서열 1위이다.[14] 미국-스페인 전쟁 때만 해도 미국 육군과 해군은 따로 놀았다. 그 때문에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육해군 합동위원회(Joint Board)를 설치하였으나 자문기관에 불과하였다.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 수준까진 아니었지만 미국 해군과 육군은 각각 해군부와 육군부 소속이었고 국방부가 생긴 건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일이었다. 당시 미군은 영국군과 작전을 수행했는데 영국군에 국방참모본부(Chiefs of Staff Committee)[15]가 있던 것과 달리 미국에는 상응할 만한 조직이 없었다. 미군은 영국군과 연합참모본부(Combined Chiefs of Staff)를 구성했는데 영국 국방참모총장에 상응할 만한 위치인 육해군최고사령관(Chief of Staff to the Commander in Chief of the Army and Navy)을 1942년 7월 20일에 창설했다. 이는 오늘날의 합참의장에 해당한다. 최초 합참은 네 명으로 최고사령관은 윌리엄 리히(William D. Leahy) 해군원수였고 육군참모총장 조지 마셜 원수, 해군참모총장 어니스트 킹 원수, 육군항공사령관[16] 헨리 아놀드 원수가 나머지 구성원이었다.
1947년에 국방부가 생기면서 합참은 국방부의 산하기관이 되었고, 1949년 오마 브래들리 대장이 취임[17]하면서 해당 보직의 명칭을 오늘날의 명칭(Chairman of the Joint Chiefs of Staff)으로 고쳤다.
한국군과는 달리 각군 대장들이 적어도 한 번씩은 취임한 적이 있다. 이쪽은 육·해·공군뿐만이 아니라 해병대 대장도 합참의장을 역임해왔다. 물론 역대 미 합참의장들의 출신을 거론하면 육군의 비율이 가장 높지만, 각 군별로 그렇게 크게 차이가 나진 않는다. 대충 육군이 역대 합참의장의 과반에 조금 못미치게 임명되었고 나머지 과반을 해군과 공군, 가끔 해병대가 내정되는 식.[18] 한국군 합동참모의장처럼 전군을 대표하는 제복군인의 장이지만 그쪽은 우리와는 달리 군령권이 없다.
JCS는 말 그대로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과 제복군인들 위에서 군령권을 갖고 있는 국방장관의 참모라고 보면 된다. 미군에서 작전권한을 가진 가장 높은 군인들은 각 통합군사령관들. 지역별로는 6개(중부, 태평양, 북부, 남부, 유럽, 아프리카), 기능별로는 3개(전략, 수송, 특수전) 등 총 9개 사령부가 편성되어 있다. 합동군사령관을 거친 후에 각군 참모총장이나 합참의장에 임명되는 순간부터 야전업무에 관한 직접적인 영향권(작전권)을 거의 상실한다. 이러한 지휘구조는 '장성 1인에게 군 전체의 지휘권을 맡기면 문민통제에 어긋난다'는 지적과 더불어, 전세계를 대상으로 자국 군대를 배치 및 운용하는 미국의 군사적 특수성을 반영한 결과이기도 하다(만약 미국이 자국 영토의 방어만을 신경써야 하는 평범한 국가라면, 병력 전체를 총괄 지휘하는 최고사령관 1인을 별도로 둘 수밖에 없다). 의장부대와 합참 직속 참모진을 빼고는 예하 부대도 없게 된다. 게다가 한술 더 떠서 군령 자체가 합참의장과 각군 참모총장들을 완벽하게 우회해서 대통령 → 국방장관 → 통합군사령관 → 예하 야전군으로 하달되는 형식이니 정말 실권하나 없는 직책처럼 보인다.
그러나 대통령과 국방장관의 제1보좌역이자 합동참모회의에서 각군 참모총장의 의견을 조율하는 것이 주된 업무인 데다가 명색이 제복군인의 1인자이다 보니 군에 미치는 영향은 엄청나게 크다(군령권만 없을 뿐). 같은 이유로 각군 참모총장들도 은근히 뒷방영감같아 보이지만 영향력이 생각보다 세다. 그래도 통합군사령관 보직이 확실히 제복군인으로서는 가장 간지나는 요직.
합참의장이 군령권 없이 통합사령부들의 전략 기획 및 조율을 담당하는 점이 비효율적이라며 작전권을 줘야한다는 얘기가 1980년대 중반에 나오기도 했지만 미국 의회에서 거부했다. 미국 헌법의 기본이 제복군인 1인에게 미합중국 전군의 작전 지휘권을 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 골자였다. 출처
4.1 역대 합참의장
미국 정부는 합참의장 배분에 있어서 다양한 출신을 등용하려고 애쓰는 편이다. 미군에서 대장의 70% 정도는 사관학교 출신이긴 하지만[19] 합참의장에선 비사관학교 출신들도 꽤 많다. 재임 중에 6.25 전쟁이 발발하고 원수로 진급한 오마 브래들리를 제외하면 전원 대장이다.
여담으로 미국공군사관학교는 아직 한 명도 합참의장을 배출 못 했다. 미 공군은 역대 4명의 합참의장을 배출했지만 웨스트포인트 출신이 둘, 학사 1명에 학군 1명이다. 미국공군사관학교가 의외로 꽤 늦게, 대한민국 공군사관학교보다도 늦게 생겼을 정도로 역사가 짧은 편이라... 참고로 육군에서 독립한 뒤 1959년 공사가 첫 졸업생을 배출할 때까지 10년 넘는 기간에는 미국육군사관학교와 미국해군사관학교에서 공군 장교가 배출되었다.[20]
사병 출신 장성은 네 명이다. 3대인 네이선 트와이닝과 8대인 조지 브라운은 사병으로 복무중에 사관학교에 진학했고 10대인 존 베시는 현지임관으로 장교가 됐고 13대인 존 샬리카시빌리는 병으로 복무 중에 학사사관에 지원했다.
역대 | 사진 | 이름 | 군종 | 임관경로 | 재임기간 |
1 | 오마 브래들리(Omar Bradley) | 미 육군 | 미국육군사관학교 | 1949-1953 | |
2 | 아서 래드퍼드(Arthur W. Radford) | 미 해군 | 미국해군사관학교 | 1953-1957 | |
3 | 네이선 트와이닝(Nathan F. Twining) | 미 공군 | 미국육군사관학교[21] | 1957-1960 | |
4 | 라이먼 렘니처(Lyman Lemnitzer) | 미 육군 | 미국육군사관학교 | 1960-1962 | |
5 | 맥스웰 테일러(Maxwell D. Taylor) | 미 육군 | 미국육군사관학교 | 1962-1964 | |
6 | 얼 휠러(Earle Wheeler) | 미 육군 | 미국육군사관학교 | 1964-1970 | |
7 | 토머스 무어(Thomas H. Moorer) | 미 해군 | 미국해군사관학교 | 1970-1974 | |
8 | 조지 브라운(George S. Brown) | 미 공군 | 미국육군사관학교[22] | 1974-1978 | |
9 | 데이비드 존스(David C. Jones) | 미 공군 | 학사사관[23] | 1978-1982 | |
10 | 존 베시(John W. Vessey Jr.) | 미 육군 | 현지임관[24] | 1982-1985 | |
11 | 윌리엄 크로(William J. Crowe, Jr.) | 미 해군 | 미국해군사관학교 | 1985-1989[25] | |
12 | 콜린 파월(Colin Powell) | 미 육군 | 학군사관[26] | 1989-1993 | |
13 | 존 샬리카시빌리(John Shalikashvili) | 미 육군 | 학사사관[27] | 1993-1997 | |
14 | 휴 셸턴(Hugh Shelton) | 미 육군 | 학군사관 | 1997-2001 | |
15 | 리처드 마이어스(Richard Myers) | 미 공군 | 학군사관 | 2001-2005 | |
16 | 피터 페이스(Peter Pace) | 미 해병대 | 미국해군사관학교 | 2005-2007 | |
17 | 마이크 멀린(Michael Mullen) | 미 해군 | 미국해군사관학교 | 2007-2011 | |
18 | 마틴 뎀프시(Martin Dempsey) | 미 육군 | 미국육군사관학교 | 2011-2015 | |
19 | 조지프 던퍼드(Joseph F. Dunford, Jr.) | 미 해병대 | 학군사관 | 2015- |
5 중국 인민해방군
중국인민해방군참모부의 총참모장을 말한다. 이 사람이 육해공을 지휘한다. 국방부가 아닌 중국공산당 군사위원회의 지휘를 받기 때문에 사실상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지휘관보다는 참모에 가깝다. 계급은 상장이지만 중국군은 계급이 상-중-소 3단계이므로 러시아군이나 북한군의 상장이 타국의 중장급인데 반해 중국군의 상장은 타국의 대장과 상응한다. 영어로도 Admiral/General(대장)으로 표기하며 사실상 해외 방문 등에서 대장으로 취급한다.
현직 | |
이름 | 팡펑후이(房峰辉) |
출신 | 인민해방군국방대학 68'[28] |
생년월일 | 1951. 4월 |
임관일 | 1968년 |
2016년 1월 1일에 중국인민해방군 총참모부의 명칭이 중앙군사위원회 연합참모부로 바뀌면서 팡펑후이 전 12대 총참모장이 그대로 1대 연합참모장으로 계승하였다. 이전까지는 총참모장이 육군사령원을 겸직하는 형태였으나 연합참모부로 최고 군령기관으로 바뀌면서 육군사령원이 별도의 직책으로 분리되었다. 육군사령원이란 개념과 독립한 것은 기존의 합동성 강화를 위해 역할을 명확히 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5.1 역대 인물
- 총참모부 성립 전의 총참모장
순번 | 이름 | 정체 | 간체 | 출신 | 재임기간 |
1 | 류보청 | 劉伯承(유백승) | 刘伯承 | 쓰촨 | 1930.5-1931.1 |
2 | 주윈칭 | 朱雲卿(주운경) | 朱云卿 | 광저우 | 1931.1-1931.5 |
3 | 궈화뤄 | 郭化若(곽화약) | 郭化若 | 푸젠 | 1931.5-1931.11 |
4 | 예전잉 | 葉劍英(엽검영) | 叶剑英 | 광저우 | 1931.11-1933.5 |
5 | 예전잉 | 葉劍英(엽검영) | 叶剑英 | 광저우 | 1933.5-1934.2 |
6 | 류보청 | 劉伯承(유백승) | 刘伯承 | 쓰촨 | 1934.2-1935.11 |
7 | 예전잉 | 葉劍英(엽검영) | 叶剑英 | 광저우 | 1935.11-1936.12 |
8 | 류보청 | 劉伯承(유백승) | 刘伯承 | 쓰촨 | 1936.12-1937.8 |
9 | 샤오징광 | 蕭勁光(소경광) | 萧劲光 | 후난 | 1937.8-1938.1 |
10 | 텅다이위완 | 滕代遠(등대원) | 滕代远 | 후난 | 1938.1-1940.5 |
11 | 왕뤄페이 | 王若飛(왕약비) | 王若飞 | 구이저우 | 1940.5-1941.2 |
12 | 예젠잉 | 葉劍英(엽검영) | 叶剑英 | 광저우 | 1941.2-1945.6 |
13 | 펑더화이 | 彭德懷(팽덕회) | 彭德怀 | 후난 | 1945.6-1947.3 |
14 | 저우언라이 | 周恩來(주은래) | 周恩来 | 장쑤 | 1947.3-1949.10 |
15 | 쉬샹첸 | 徐向前(서향전) | 徐向前 | 산시(산서) | 1949.10-1954.10 |
- 총참모부 총참모장
순번 | 이름 | 정체 | 간체 | 출신 | 재임기간 |
1 | 쑤이 | 束裕(속유) | 粟裕 | 후난 | 1954.10-1958.10 |
2 | 황커청 | 黃克誠(황극성) | 黄克诚 | 후난 | 1958.10-1959.9 |
3 | 뤄루이칭 | 羅瑞卿(라서경) | 罗瑞卿 | 쓰촨 | 1959.9-1965.12 |
4 | 양청우 | 楊成武(양성무) | 杨成武 | 푸젠 | 1965.12-1968.3 |
5 | 황용성 | 黃永勝(황영승) | 黄永胜 | 후베이 | 1968.3-1971.9 |
6 | 덩샤오핑 | 鄧小平(등소평) | 邓小平 | 쓰촨 | 1975.1-1976.4/1977.7-1980.3 |
7 | 양더지 | 楊得志(양득지) | 杨得志 | 후난 | 1980.3-1987.11 |
8 | 츠하오톈 | 遲浩田(지호전) | 迟浩田 | 산둥 | 1987.11-1992.11 |
9 | 장완녠 | 張萬年(장만년) | 张万年 | 산둥 | 1992.11-1995.9 |
10 | 푸취안여우 | 傅全有(부전유) | 傅全有 | 산시(산서) | 1995.9-2002.11 |
11 | 량광례 | 梁光烈(양광열) | 梁光烈 | 쓰촨 | 2002.11-2007.9 |
12 | 천빙더 | 陳秉德(진병덕) | 陈炳德 | 장쑤 | 2007.9-2012.10 |
13 | 팡펑후이 | 房峰輝(방봉휘) | 房峰辉 | 산시(섬서) | 2012.12-2015.12 |
- 연합참모부 참모장
순번 | 이름 | 정체 | 간체 | 출신 | 재임기간 |
1 | 팡펑후이 | 房峰輝(방봉휘) | 房峰辉 | 산시(섬서) | 2016.1- (현직) |
6 중화민국 국군
중화민국 국군에서는 참모총장(中華民國參謀總長)이 한국의 합참의장에 해당한다. 2015년부터 옌더파 육군상장이 참모총장으로 재직했다.
북양군벌 시절에는 당연히 육군이 강세였지만 국부천대 이후로 섬나라가 되면서 참모총장 자리를 육해공이 골고루 가져간 편이다. 대한민국 국군이 이순진 합참의장까지 39명 가운데 육군이 37명이지만, 중화민국군은 옌더파까지 24명 가운데 육군이 11명, 해군이 7명, 공군이 6명이다.
6.1 역대 인물
- 북양정부 시기(臨時、北洋政府時期)
역대 | 이름 | 한국음 | 한자 | 재임기간 |
1대 | 황싱 | 황흥 | 黃興 | 1912년02월06일 - 03월30일 |
2대 | 황싱 | 황흥 | 黃興 | 03월30일 - 04월01일 |
3대 | 쉬샤오전 | 서소정 | 徐紹楨 | 1912년04월01일 - 04월05일 |
4대 | 리위안훙 | 여원홍 | 黎元洪 | 1912년04월13일 - 1915년12월18일 |
5대 | 펑궈장 | 풍국장 | 馮國璋 | 1915년12월18일 - 1916년03월23일 |
6대 | 돤치루이 | 단기서 | 段祺瑞 | 1916년03월23일 - 04월23일 |
7대 | 왕스전 | 왕사진 | 王士珍 | 1916년04월23일 - 1917년12월01일 |
8대 | 인창 | 음창 | 蔭昌 | 1917년12월01일 - 1919년01월11일 |
9대 | 장화이지 | 장회지 | 張懷芝 | 1919년01월11일 - 1924년11월05일 |
10대 | 리례쥔 | 이열균 | 李烈鈞 | 1924년11월05일 - 1925년01월27일 |
11대 | 류루셴 | 유여현 | 劉汝賢 | 1925년01월27일 - 05월15일 |
12대 | 량센 | 양삼 | 楊森 | 1925년05월16일 - 1926년01월09일 |
13대 | 류루셴 | 유여현 | 劉汝賢 | 1926년01월09일 - 07월22일 |
14대 | 류샹 | 유상 | 劉湘 | 1926년07월22일 - 1927년06월20일 |
- 중화민국 국군(中華民國參謀總長)
역대 | 이름 | 한국음 | 한자 | 재임기간 | 계급 |
1대 | 첸청 | 진성 | 陳誠 | 1946년05월23일 - 1948년05월12일 | 2급상장(육) |
2대 | 구주통 | 고축동 | 顧祝同 | 1948년05월13일 - 1950년03월24일 | 2급상장(육) |
3대 | 저우지러우 | 주지유 | 周至柔 | 1950년03월25일 - 1954년06월30일 | 2급상장(육) |
4대 | 구이용칭 | 계영청 | 桂永淸 | 1954년07월01일 - 08월17일 | 2급상장(해) |
5대 | 펑멍지 | 팽맹집 | 彭孟緝 | 1954년08월18일 - 1957년06월30일 | 2급상장(육) |
6대 | 왕슈밍 | 왕숙명 | 王叔銘 | 1957년07월01일 - 1959년06월30일 | 1급상장(공) |
7대 | 펑멍지 | 팽맹집 | 彭孟緝 | 1959년07월01일 - 1965년06월30일 | 1급상장(육) |
8대 | 리위시 | 여옥새 | 黎玉璽 | 1965년07월01일 - 1967년06월30일 | 1급상장(해) |
9대 | 가오쿠이위안 | 고괴원 | 高魁元 | 1967년07월01일 - 1970년06월30일 | 1급상장(육) |
10대 | 라이밍탕 | 뇌명탕 | 賴名湯 | 1970년07월01일 - 1976년06월30일 | 1급상장(공) |
11대 | 쑹장지 | 송장지 | 宋長志 | 1976년07월01일 - 1981년11월30일 | 1급상장(해) |
12대 | 하오보춘 | 학백촌 | 郝柏村 | 1981년12월01일 - 1989년12월04일 | 1급상장(육) |
13대 | 첸셴링 | 진신령 | 陳燊齡 | 1989년12월05일 - 1991년12월04일 | 1급상장(공) |
14대 | 류화첸 | 유화겸 | 劉和謙 | 1991년12월05일 - 1995년06월30일 | 1급상장(해) |
15대 | 뤄번리 | 라본립 | 羅本立 | 1995년07월01일 - 1998년03월04일 | 1급상장(육) |
16대 | 탕페이 | 당비 | 唐飛 | 1998년03월05일 - 1999년01월31일 | 1급상장(공) |
17대 | 탕야오밍 | 탕요명 | 湯曜明 | 1999년02월01일 - 2002년01월13일 | 1급상장(육) |
18대 | 리제 | 이걸 | 李傑 | 2002년02월01일 - 2004년05월19일 | 1급상장(해) |
19대 | 리톈위 | 이천우 | 李天羽 | 2004년05월20일 - 2007년01월31일 | 1급상장(공) |
20대 | 훠서우예 | 곽수업 | 霍守業 | 2007년02월01일 - 2009년02월04일 | 1급상장(육) |
21대 | 린젠이 | 임진이 | 林鎭夷 | 2009년02월05일 - 2013년01월16일 | 1급상장(해) |
22대 | 옌밍 | 엄명 | 嚴明 | 2013년01월16일 - 08월07일 | 2급상장(공)[29] |
23대 | 가오광치 | 고광기 | 高廣圻 | 2013년08월08일 - 2015년01월30일 | 2급상장(해) |
24대 | 옌더파 | 엄덕발 | 嚴德發 | 2015년01월31 - | 2급상장(육) |
7 자위대
1. 방위대신의 지휘감독을 받아 통합막료감부의 소장 사무에 관한 육상자위대, 해상자위대나 항공자위대의 군무[30] 및 통합막료감부 대원의 복무를 감독한다. (자위대법 제9조 제1항) 2. 통합막료감부의 소장 사무에 관한 육상자위대, 해상자위대나 항공자위대의 군무에 관한 최고의 전문 조언자로서 방위대신을 보좌한다. (자위대법 제9조 제2항) 3. 통합막료감부의 소장 사무에 관한 육상자위대, 해상자위대나 항공자위대의 군무에 관해 부대 등에 대한 방위대신의 명령을 집행한다. (자위대법 제9조 제3항) 4. 방위대신의 지휘감독을 받아 통합막료감부의 사무를 관장한다. (방위성설치법 제21조 제3항) |
타국군의 합동참모의장에 해당하는 일본의 통합막료장(統合幕僚長)은 일본의 제복 자위관이 올라갈 수 있는 최고의 직위로 2005년까지는 통합막료회의(統合幕僚会議)의 통합부대만 관리했다. 그러나 2006년 통합막료회의가 통합막료감부(統合幕僚監部)로 개편되면서 전·평시에 상관없이 방위대신의 지휘를 받아 각 자위대를 지휘한다.
사실 일본에선 막료란 말은 참모의 대체어로 쓰이며[31] 통합막료장은 지휘관이 아니다. 막료장이란 단어는 참모총장과 동의어로 쓰인다.
현직 | |
이름 | 가와노 가쓰토시(河野克俊) |
출신 | 방대 21기 |
생년월일 | 1954. 11월 |
임관일 | 1977년 |
역대 통합막료장은 총 네 명인데, 육상자위대에 한 명, 해상자위대에 두 명, 항공자위대에 한 명이 있으며 현직인 가와노 가쓰토시는 해상막료장 출신이다.
이들이 전역할 경우에는 황거에서 파티를 열어준다고 한다.
일본의 역대 통합막료장.
통합막료회의 시절에는 통합막료회의의장(統合幕僚会議議長)이라 불렸으며 2006년 3월 27일부로 통합막료감부가 되면서 통합막료장으로 불리게 되었다.
통합막료회의의장 | ||||||||
역대 | 이름 | 한자 | 한국 한자음 | 계급 | 임기 | 출신 | 전직 | 일본군 경력 |
1 | 하야시 게이조 | 林敬三 | 임경삼 | 육장 | 1954.7.1 - 1964.8.13 | 도쿄대학 | 제일막료장 | 없음 |
2 | 스기에 이치조 | 杉江一三 | 채강일삼 | 해장 | 1964.8.13 - 1966.4.29 | 해병56기/해대37기 | 해상막료장 | 해군 중좌 |
3 | 아마노 요시후사 | 天野良英 | 천야량영 | 육장 | 1966.4.29 - 1967.11.14 | 육사43기/육대52기 | 육상막료장 | 육군 중좌 |
4 | 무타 히로쿠니 | 牟田弘國 | 모전홍국 | 공장 | 1967.11.14 - 1969.6.30 | 육사43기 | 항공막료장 | 육군 중좌 |
5 | 이타야 류이치 | 板谷隆一 | 판곡융일 | 해장 | 1969.6.30 - 1971.6.30 | 해병60기 | 해상막료장 | 해군 중좌 |
6 | 기누가사 하야오 | 衣笠駿雄 | 의립준웅 | 육장 | 1971.6.30 - 1973.1.31 | 육사48기/육대55기 | 육상막료장 | 육군 소좌 |
7 | 나카무라 류헤이 | 中村龍平 | 중촌용평 | 육장 | 1973.1.31 - 1974.6.30 | 육사49기/육대56기 | 육상막료장 | 육군 소좌 |
8 | 시라카와 모토하루 | 白川元春 | 백천원춘 | 공장 | 1974.6.30 - 1976.3.15 | 육항사51기/육대58기 | 항공막료장 | 육군 소좌 |
9 | 사메시마 히로이치 | 鮫島博一 | 교도전일 | 해장 | 1976.3.15 - 1977.10.19 | 해병66기 | 해상막료장 | 해군 소좌 |
10 | 구리스 히로오미 | 栗栖弘臣 | 율서홍신 | 육장 | 1977.10.19 - 1978.7.27 | 도쿄대학 | 육상막료장 | 해군 대위[32] |
11 | 다카시나 다케히코 | 高品武彦 | 고품무언 | 육장 | 1978.7.27 - 1979.7.31 | 육사54기 | 육상막료장 | 육군 대위 |
12 | 다케다 고로 | 竹田五郞 | 죽전오랑 | 공장 | 1979.7.31 - 1981.2.15 | 육사55기 | 항공막료장 | 육군 대위 |
13 | 야다 쓰기오 | 矢田次夫 | 시전차부 | 해장 | 1981.2.15 - 1983.3.15 | 해병72기 | 해상막료장 | 해군 대위 |
14 | 무라이 스미오 | 村井澄夫 | 촌정등부 | 육장 | 1983.3.15 - 1984.6.30 | 육사58기 | 육상막료장 | 육군 소위 |
15 | 와타나베 게이타로 | 渡部敬太郞 | 도부경태랑 | 육장 | 1984.6.30 - 1986.2.5 | 육사60기 | 육상막료장 | 육군 병장[33] |
16 | 모리 시게히로 | 森繁弘 | 삼번홍 | 공장 | 1986.2.5 - 1987.12.10 | 육사60기 | 항공막료장 | 사관생도[34] |
17 | 이시이 마사오 | 石井政雄 | 석촌정웅 | 육장 | 1987.12.10 - 1990.3.15 | 릿쿄대학 | 육상막료장 | 없음 |
18 | 데라시마 다이조 | 寺島泰三 | 사도태삼 | 육장 | 1990.3.15 - 1991.6.30 | 도호쿠대학 | 육상막료장 | 없음 |
19 | 사쿠마 마코토 | 佐久間一 | 좌구간일 | 해장 | 1991.6.30 - 1993.6.30 | 방대1기 | 해상막료장 | 없음 |
20 | 니시모토 데쓰야 | 西元徹也 | 서원철야 | 육장 | 1993.6.30 - 1996.3.24 | 방대3기 | 육상막료장 | 없음 |
21 | 스기야마 시게루 | 杉山蕃 | 채삼번 | 공장 | 1996.3.24 - 1997.9.30 | 방대4기 | 항공막료장 | 없음 |
22 | 나쓰카와 가즈야 | 夏川和也 | 하천화야 | 해장 | 1997.9.30 - 1999.3.30 | 방대6기 | 해상막료장 | 없음 |
23 | 후지나와 유지 | 藤縄祐爾 | 등승우이 | 육장 | 1999.3.30 - 2001.3.27 | 방대8기 | 육상막료장 | 없음 |
24 | 다케고치 쇼지 | 竹河內捷次 | 죽하내첩차 | 공장 | 2001.3.28 - 2003.1.28 | 방대9기 | 항공막료장 | 없음 |
25 | 이시카와 도루 | 石川亨 | 해장 | 2003.1.28 - 2004.8.29 | 방대11기 | 해상막료장 | 없음 | |
26 | 맛사키 하지메 | 先崎一 | 선기일 | 육장 | 2004.8.29 - 2006.3.26 | 방대12기 | 육상막료장 | 없음 |
통합막료장 | ||||||||
역대 | 이름 | 한자 | 한국 한자음 | 계급 | 임기 | 출신 | 전직 | 일본군 경력 |
1 | 맛사키 하지메 | 先崎一 | 선기일 | 육장 | 2006.3.27 - 2006.8.4 | 방대12기 | 통합막료회의의장 | 없음 |
2 | 사이토 다카시 | 齋藤隆 | 재등융 | 해장 | 2006.8.4 - 2009.3.24 | 방대14기 | 해상막료장 | 없음 |
3 | 오리키 료이치 | 折木良一 | 절목양일 | 육장 | 2009.3.24 - 2012.1.31 | 방대16기 | 육상막료장 | 없음 |
4 | 이와사키 시게루 | 岩崎茂 | 석기무 | 공장 | 2012.1.31 - 2014.10.14 | 방대19기 | 항공막료장 | 없음 |
5 | 가와노 가쓰토시 | 河野克俊 | 하야극순 | 해장 | 2014.10.14 - | 방대21기 | 해상막료장 | 없음 |
초기에는 일본 육사나 해병 출신들이 차지했다. 자위대의 수뇌부엔 일본군의 상당수가 유입됐음을 알 수 있다. 다만 군경력자 차원에서 생각해 본다면 경찰이 거기까지 올라가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그리고 대좌 이상의 장교에서 통합막료회의의장에 오른 사례는 없다.
다만 초대 통합막료회의의장인 하야시 게이조는 일본군 출신이 아닌 관료 출신이었다. 경찰 예비대를 거쳐 1950년에 육상자위대에 들어갔고 내무부 출신으로 구 육군 출신들과 파벌 싸움을 벌였다. 그나마 이 사람이 통합막료회의의장으로 10년, 그리고 육군막료장의 전신이자 당시 최고 선임 자위관이었던 제1막료장과 그 전신인 경찰 예비대 총감 등 14년이나 해먹은 탓에 육상자위대에 일본 육군 출신들이 덜 들어오게 되었다. 다만 방위성을 엄청난 파벌싸움으로 얼룩지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 덕분에 일본군 출신으로 첫 의장(2대)에 오른 스기에는 일본 해군 중좌 출신이었다. 장성급들은 자위대에서 힘을 쓰지 못했다.
맛사키 하지메가 통합막료회의의장에서 통합막료감으로 넘어갔으므로 총 31명이 이 자리릉 역임했다. 육상자위대 출신이 14명, 해상자위대 출신이 9명, 항공자위대 출신이 7명으로 육상자위대가 제일 주축이긴 하지만 한국군과 비교하면 비교적 골고루 한 편. 1990년대부터 방위대학교 출신들이 독점하고 있다.
7.1 주요 출신 주특기
주특기를 살펴보면 보병, 수상함, 조종 출신들이 가장 많긴 하다. 역대 통합막료회의의장 및 통합막료장 26명 가운데 경찰 관료 출신이 1명(육상자위대), 보병 출신이 5명(육상자위대), 수상함 출신이 4명(해상자위대), 조종 출신이 6명(항공자위대), 포병 출신이 1명(육상자위대), 기갑 출신이 2명(육상자위대), 통신 출신이 1명(육상자위대), 잠수함 출신이 2명(해상자위대), 항공(육상자위대 항공대(1명) 및 해상자위대 항공대(3명)) 출신이 4명, 불명확(육상자위대 3명 및 항공자위대 1명)이 4명이다.
- 통합막료회의의장(☆)
- ↑ 사실 합참의장이라는 표현이 합동참모의장이라는 정식표현보다 더 많이 쓰인다.
- ↑ 초대 연합참모본부 총장 이형근부터 셀 때, 김종오 중장~대장이 총 3번 해드셨으므로 육군 출신은 37명이 아니라 35명이 된다.
- ↑ 83년 아웅산테러 당시 합참의장이 이기백(육사11기) 대장이었는데 당시 육참총장이었던 황영시(육사10기) 대장보다 후배였다. 물론 그 당시 합참의장이 대간첩대책본부장을 겸직하는등 파워가 조금씩 세지긴 했으나 육참총장에는 미치지 못하였었다.
- ↑ 1923년생으로 육사4기 출신이다. 합참의장 역임 후 제대하였고, 최규하 과도정권에서 내무부장관(현 행정자치부 장관)을 지냈다. 2016년 2월 기준으로 현재 생존중이시다.
- ↑ 합참의장, 국방장관을 모두 육군에서 배출하는 상황에서 합참의장이 군정,군령권을 모두 행사했다면 해공군의 입지는 완전히 축소되었을 것이다. 당장 해공군 장병의 인사를 육군장성의 의지대로 배치한다는 결과가 되니...
- ↑ 보통 지휘자가 아닌 지휘관으로 분류되는 최하위 직책이라 생각하지만, 해군 소형 함정의 정장 등 부사관 지휘관도 존재한다.
- ↑ 문민통제가 강력한 미국의 경우 중장부터 인사청문회를 거쳐야 한다. 각 대장들의 직위가 의회에 의해 확정된다.
- ↑ 참모총장도 국회 인사청문회를 거치자는 의견이 있었으나, 각군의 강력한 반발로 철회되었다. 여야정쟁의 흔들기 속에 희생물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명분을 내세웠고, 각군에서 신망받는 사람이라도 정치인 무리가 작정하고 물먹이기로 흔들면 당해낼 방법이 없다는 논리에서 동의하는 여론이 많다. 그러나 이는 문민통제 내지 민주적 통제에 대한 개념이 부족하고 군사주의적 사고방식이 남아있는 탓으로 보인다. 전문성도 중요하지만 전문가 집단이 내부적으로 요직을 모두 결정할 경우에는 민주적 요청은 철저히 무시되게 되며 이것을 잘 보여주는 집단이 관료, 검찰, 법원 등이다. 물론 한국에서는 전쟁이 나지 않는 한에야 장성이 그렇게 권력이 강한
물론 군인들에게 말고직위는 아니고 미국처럼 허구헌날 전쟁을 해서 인적, 재정적으로 문민통제가 강조되는 곳은 아니기에 참모총장까지 모두 청문회를 하기에는 비효율적인 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정치문화가 미숙하기도 하지만 이는 정치성의 배제가 아니라 정당정치의 강화로 해결해야 할 것이다. - ↑ 당초 유력한 후보자는 육군총장 조정환 대장이었다고 한다. 박근혜 정부의 첫 국방장관 후보자였던 김병관 장군이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탈락했는데, 야당에서 제기한 의혹은 김병관 장군의 사단장 시절과 관련된 내용이었다. 문제는 당시 사단 참모장이 조정환 총장이었던 것. 다시금 인사청문회가 열린다면, 똑같은 의혹이 제기될 수 있었다. 결론적으론 당시 경향신문이 제기한 의혹은 사실이 아니었고, 훗날 정정보도를 냈지만...
이게 다 여야 정쟁놀음의 산물이다거기다 조정환 대장은 합동 보직을 거치지 않아서 천안함 폭침 당시에 합참의장이었던 이상의 대장처럼 그것이 문제시될 수 있단 얘기도 돌았다.근데 최윤희 제독도 합동보직을 지낸 바 없다이런 식으로 문제되는 인원을 돌려막는 이른바 '대장 돌려막기'는 2010년에 황의돈 육참총장과 한민구 합참의장 인사 당시에도 나온 적이 있었다. 관련글 - ↑ 1990년 개정된 현행 국군조직법에 따라 육-해-공 3군 작전부대에 대한 총괄 작전지휘권을 행사하게 된 첫 합참의장이다.
- ↑ 고려대 102학군단
- ↑ 병과 부사관을 모두 거쳐 국방장관까지 지낸 전설적인 인물이다.
- ↑ 15대 김종환 대장과는 동명이인이다.
- ↑ 단 군번 최선임은 아니다. 콜린 파월은 1958년 임관자였지만 합참의장으로 재직 당시에 1956년 임관자인 노먼 슈워츠코프보다 직책상 선임이었고 2014년 기준 합참의장인 마틴 뎀프시는 1974년 임관자인데 2014년 기준 해병대사령관인 제임스 에이머스는 1970년 임관자이다. 미국에선 후배 기수가 진급했다고 대장을 벗거나 후배 군번이 최고 서열에 오른다고 전역하지 않는다. 한국에선 기수제가 계급이나 직책을 씹어먹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전역시켜버리지만.
- ↑ 국방참모총장이 최선임 군인이다.
- ↑ 육군항공대는 2차대전기에도 이미 계급체계와 복제만 육군과 동일했다 뿐이지 사실상 공군으로의 분리가 거진 마무리된 상황이었다. 단지 전시상황이라서 편제에서 급격한 변화를 가져가기 어려웠다 뿐. 이후 아놀드 원수는 공군의 분리 몇 년 후까지 생존하며 공군 원수까지 되어 전무후무한 텐스타(...)가 된다.
- ↑ 임기 중 6.25 전쟁이 터지자 원수로 임명된다. 이는 미군 역사상 마지막 원수 임명 사례.
- ↑ 18대인 마틴 뎀프시 대장 이전에는 공군-해병-해군 순으로 합참의장에 내정되었다.
- ↑ 준장만 해도 학군 등이 더 많다.
- ↑ 참고로 이 시기 해군참모총장이 제독들의 반란을 이끌었던 알레이 버크였다. 해사 생도들은 공군 가기가 좀 눈치보였을 것 같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해사는 육사에는 비할 바가 못되지만 적지 않은 공군 소위들을 임관시켰지만 장교단에서의 목소리가 너무너무 작았다. 역대 육사 출신 공군 장교들은 60명 넘는 인원이 4성을 단 반면 해사 출신은 단 4명만이 4성을 달았다.
- ↑ 입학 전에 사병으로 2년 근무했다. 전시라서 2년 만에 칼졸했다. 공군으로 넘어간 건 1947년의 일이다.
- ↑ 1937년에 입학했는데 1936년에 미주리 주방위군에 입대하여 상병까지 복무했다.
- ↑ 1942년에 조종사 라이선스를 따고 대학을 졸업한 뒤 미 육군 조종장교 과정에 지원하여 임관했다.
- ↑ 1939년에 주방위군에 입대해서 제2차 세계대전에 참가, 1944년에 상사 계급으로 현지임관되어 소위가 되었다.
- ↑ 이 시기부터 합동참모차장직이 신설되었다.
- ↑ 최초의 학군 출신이자 흑인 출신 합참의장이다. 2년 선임인 노먼 슈워츠코프가 그의 지휘를 따랐다.
- ↑ 1958년에 병으로 입대했고 1959년에 사관후보생에 지원하여 소위가 되었다. 폴란드에서 넘어온 조지아계로 1958년에 미국 국적을 땄다. 참고로 한국군은 귀화자는 본인은 입대가 안 되고 자녀부터 입대할 수 있다.
- ↑ 뒤에 인민해방군 국방대학을 나온 것이지 처음엔 그냥 직업군인으로 바로 입대하였다. 팡펑후이가 입대한 1968년은 문화대혁명 시기로 중국군은 계급을 철폐하고 직책으로만 군대를 통솔했다. 1980년대에 가서야 계급이 부활하게 되고 팡펑후이는 주로 신장군구에 근무하면서 계급 없이 소대장으로 군생활을 시작했다.
- ↑ 1급상장이 사라지고 모든 제복군인의 최고 계급이 2급상장으로 정리되었다.
- ↑ 일본에선 자위대의 업무란 의미로 대무(隊務)라고 표현.
- ↑ 일본어에 참모라는 단어가 없는 건 아니지만 자위관은 군인이 아니기 때문에 그 대체어로써 막료라는 단어가 만들어졌다.
- ↑ 법무장교였다. 자위대가 초법적 상황에 대처할 수 없다고 문제 제기를 하기도 했다.
- ↑ 1945년 8월에 일본 육사 마지막 기수로 입학하는 바람에 임관하지 못 하고 병으로 종전을 맞았다. 소련에 주재한 일본대사관에서 방위주재관(무관)으로 근무했는데 소련 군에게 자위관은 군인이 아니다라고 폭언을 들었다고 한다. 훗날 고위 장성에 오르자 소련을 대상으로 한 북부 방면대를 강화했다.
뒤끝 쩌네어차피 냉전기 일본의 방위백서상 주적은 소련이긴 했다. - ↑ 위의 와타나베 케이타로와 육사 동기이다. 다만 동기와 달리 병으로 끌려가진 않은 모양.
- ↑ 일본에선 비행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