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술국적

1 개요

庚戌國賊

을사오적, 정미칠적에 이어 1910년[1] 8월한일 병합 조약 체결에 찬성 또는 협조한 매국노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10131120150736(0).JPG
경술국적 중 한명인 윤덕영의 대저택이다. 이름은 벽수산장. 광복 이후에는 UNCURK의 본부로 사용되다 1973년에 철거되었다. 다만 여전히 터 주변은 UNCURK에서 따와 엉컹크길이라고 부른다.

2 명단

총 여덟. 특히 이완용을사오적, 정미칠적에 이어 여기에도 이름을 올리는 삼관왕을 달성했다. 실질적으론 기유각서까지 포함해서 4관왕이다. 을사오적에만 참여하지 않은 고영희는 2관왕, 그나마 5적 중에 당시엔 부끄러움은 알았던 박제순도 2관왕이다. 이로서 박제순은 일말의 옹호[2]도 불가능해졌다.

이들은 모두합방의 공을 인정받아 일제로부터 귀족작위를 받았으며,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과 '광복회'가 공동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당연히 모두 수록되었다.

당시 이들이 일제강점기에 받은 은사금은 엄청났다. 일단, 이완용은 15만 엔(30억 원)을 받았다. 여기까지 보면 이완용 혼자만 나라를 팔아먹은 돈으로 호의호식한 것 같지만, 이지용은 10만 엔, 송병준과 고영희는 자작이지만 10만 엔을 받았다. 왕족 출신의 후작, 이재각과 이재완은 16만 8천 엔을 받았다. 최고액 수령자는 궁내부 대신인 이재면으로, 83만 엔을 받았다. 순종의 장인인 윤택영은 50만 엔을 받았고, 신궁봉경회 총재이자 대원군의 손자인 이준용은 16만 3천 엔을 받았다. 귀족은 아니지만, 이용구는 10만 엔을 받았다.

3 경술국적 명단에 들지 않은 이들

참고로 이 당시 조약 테이블에 같이 앉아 있던 학부대신 이용직은 비록 조약 후에 중추원 간부를 지냈고 일본에게 자작 지위를 받았으나, 조약에 결사 반대하였고[3], 이후 3.1 운동 당시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하여 결국 지위를 박탈당했기 때문에 친일파에 포함되지 않는다.

이용직과 같은 길을 걸은 사람이 바로 온건 개화파로 한국 근·현대사에서 김홍집만큼 이름을 뿌리는 김윤식이다. 둘 다 친일파 소리를 들었던 적도 있지만, 애시당초 일본의 힘을 빌어 국가를 근대화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던 이들이기 때문에 매국노와는 근본이 다르다. 실제로 대한제국이 멸망을 피할 수 없게 된 시점에 매국노의 반열에 접어든 자들이 아닌 개화파들은 모두 돌아섰다. 그들의 목적인 조국의 근대화지, 매국이 아니었으니까.[4]

4 관련 항목

  1. 60갑자로 따지면 경술(庚戌)년이다.
  2. 을사조약 당시 민영기는 반대했으나 자구 첨삭에 참여하고 훗날 훈장•작위를 받았으며, 이하영도 찬성자로 분류되었다. 반면 박제순은 "시대와 대세를 안다"라는 언급으로 이토에 의해 찬성자로 분류되었으나 조약 당시엔 묵묵부답이었다.
  3. 그러나 혼자 반대해 봤자 대세를 뒤집을 힘 따윈 없었다.
  4. 근데 김윤식은 좀 애매한게 자작 박탈 이후에도 조선총독부 부의장으로 임명되기도 했으며 민족운동의 분열에 기여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