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정종(10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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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역대 국왕
9대 덕종 왕흠10대 정종 왕형11대 문종 왕휘
묘호정종(靖宗)
시호홍효안의영렬문경용혜대왕
(弘孝安毅英烈文敬容惠大王)
군호평양군(平壤君)[1]
능묘주릉(周陵)
왕(王)
형(亨)
신조(申照)
절일장령절(長齡節)
배우자용신왕후(容信王后), 용의왕후(容懿王后), 용목왕후(容穆王后)
아버지고려 현종
어머니원성왕후(元成王后)
생몰년도음력1018년 7월 14일 ~ 1046년 5월 18일
양력1018년 8월 31일 ~ 1046년 6월 24일 (29세)
재위기간음력1034년 9월 17일 ~ 1046년 5월 18일
양력1034년 10월 30일 ~ 1046년 6월 24일 (11년 8개월)

1 소개

현종의 둘째 아들이자 덕종의 동생. 어렸을적부터 총명하여 5세때인 1022년에 내사령 평안군에 책봉되었고, 1027년에는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사 겸 내사령이 되었다.

2 업적

고려의 최고 전성기이자 황금기인 문종 시기를 완성하는 주요 정책들이 만들어지고 준비된 시기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재위 기간이 짧지는 않은데 이미지는 가장 희미하다. 고려의 황금기라 할 수 있는 태평성대의 시기인데, 안정된 시기여서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왕위에 오른 정종은 선대왕인 덕종의 정책을 계승했다.1035년 5월에 거란에서 "너네형때 싸우고 나서 너네랑 우리 사이 안좋은거 알지? 근데 넌 너네 형보다 더 적대적이다? 자꾸 이런식으로 나오면 너네 x되는 수가 있어"라는 일방적인 화친 요구를 해오자 정종은 "너네가 똑바로 하면 사이가 좋을 텐데? 왜 자꾸 딴소리를 하시나?"라며 되돌려받지 못한 고려사신 6명의 송환과 압록강에 건설한 다리를 철거하라는 덕종의 요구를 재차 강조했다.

그와 더불어 거란의 침입을 막기위해 그해 서북로에 장성을 쌓고 군사들에게 토지를 지급하여 사기를 진작시키는 등 국방력강화에도 힘을 썼고 1037년 10년 거란이 해군을 동원해 압록강을 침범했을 때 오히려 고려정부는 자신감을 내비쳤고 결국 거란 해군의 침입은 아무 성과도 없이 물러나게 되었다. 이후 거란측에서 고려가 강경하게 나오자 억류했던 고려사신 6명을 모두 풀어주는 등 고려의 요구를 모두 수용, 정종도 거란과의 국교를 다시 정상화 한다.

그러나 국방을 강화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1044년 천리장성을 완성시켰으며, 예성강의 병선 180척으로 군수물자를 운반하여 서북계 주진의 창고에 보관하게 하는 등 국방 정책에 힘을 기울였다.

외교 문제가 정리된 후 내정에 힘을 쏟은 그는 노비종모법을 제정했고[2] 1046년에는 장자상속과 적서의 구별을 법으로 정하기도 했다.

3 사망

재위기간 동안 자연재해가 끊이지 않았고 나라를 이끄는 것이 부담이 되었는지 재위 12년만에 29살의 나이로 승하한다. 죽기 직전 정종은 자신이 사망할 것을 예상하고 낙랑군 휘를 불러 왕위를 물려준 후 그 다음날인 5월 18일에 사망한다.

4 기타

  • 덕종과 정종의 할아버지이자 현종의 친아버지 왕욱(王郁)은 안종으로 추숭되었으나, 주요한 신주에 오르지 못했다. 그보다는 성종의 아버지 왕욱(王旭)이 대종으로 추숭되어 신주에 올랐다. 이후 덕종 사후 덕종을 신주에 올리느냐라는 문제에서 바로 한국 역사상 첫 예송논쟁이 벌어졌는데, 이미 태조-혜종-정종-광종-대종으로 5묘가 가득찼기 때문이었다. 여하간 조용한 시대였다
  • 강력한 지진크리를 맞기도 했다. 1035년 6월에 개경에서 지진이 일어났고 8월과 9월에는 개경동경(현 경주시) 지방의 19개 주에서 지진이 일어났다. 다음해인 1036년 6월에는 서울, 동경, 상주, 광주에서 지진이 일어나 가옥들이 무너졌으며 이중 동경에서 일어난 지진은 3일동안 지속되었다고.

그리고 그의 재위기간 동안 비가 제때 내리지 않아 죄수를 사면하거나 본인의 반찬수를 줄이는 등 자연재해로 인한 피해가 만만치 않았던 시기이기도 하다.[3]

  • 광종 이후 처음으로 왕실사람과 결혼하지 않은 왕이다. 첫번째 부인 용신왕후, 두번째부인 용의왕후는 재상이었던 한조의 딸이다.
  1. 즉위 전
  2. "노비는 어머니의 신분을 따라야 한다."라는 내용. 사실 이건 악습이라고 볼 수 있는데 대부분 남성 양민이 여성 노비와 관계를 맺고(대부분이 강제였을 것이다)아이를 낳았기 때문. 이후 조선태종이 노비종부법으로 개정해 아비의 성과 신분을 유지토록 하려 했으나 그의 아들 세종(훈민정음을 만든 분 맞다.)이 다시 노비종모법을 유지하는 쪽으로 선을 그으며 조선조가 멸망할 때까지 노비는 어미의 신분을 따라야 했다.세종대왕의 유일한 실책
  3. 참고로 자연재해는 기록이 부족하거나, 의외로 왕들이 정치를 잘했을때 자주 나온다는 견해도 있다. 왜냐하면 사관들은 정치가 시끄러우면 자연재해보다 그 것에 중점을 둬서 기록하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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