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상

李龍祥. 베트남어: Lý Long Tường, 리롱뜨엉/ 李龍祥, 1174년 ~ ?

1 개요

베트남 리(李) 왕조의 왕자. 고려의 화산군(花山君). 화산 이씨의 시조.

2 생애

2.1 망국의 왕족

이용상은 1174년 베트남 리 왕조의 수도 탕롱성(昇龍)(현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에서, 베트남 리 왕조 제6대 황제 아인똥(영종, 英宗)의 7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황후 여씨(여미아, 皇后 黎美娥)이다.

1213년에 조카 혜종이 즉위 후에 평해공 이군필, 진일조(陳日照)과 함께 삼공(三公)으로 되어 국정을 위임받았다. 혜종의 외척 전전지휘사 쩐투도(陳守度, 진수도)가 정계에 진출해서 혜종을 협박하여 혜종의 딸인 소성공주를 양위시킨 다음에, 조카인 태종과 결혼시켜 여제가 남편에게 선양하는 방식으로 태종이 황제에 자리에 올라 리 왕조가 멸망하고 쩐 왕조가 건국되었다.

진수도는 통국태사(統國太師)가 되어 전권을 장악하여 정적들을 죽이고 리 왕조의 모든 왕족들을 죽이는데, 몇 가지 다른 이야기가 전해온다. 하나는 혜종의 장례식에 종친들과 왕족들이 다 모였을 때, 진수도가 황족의 피붙이들을 도륙했다. 이 위기를 예견한 이용상은 병을 핑계 삼아 나오지 않다가 배를 타고 최측근과 함께 도피했다. 또 다른 이야기는 진씨 일족 측에서 이용상을 회유하려 했으나 그가 마음을 돌리지 않자 그를 제거하려 했고 이를 눈치챈 이용상이 난을 피해 왔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진 왕조는 권신 진수도가 리 왕조를 멸망시키고, 진 왕조를 건국을 하고 후에 권신 호계리(胡季犛)가 등장하여 진 왕조는 리 왕조가 멸망한 과정을 똑같이 밟아 왕조가 멸망하고 만다.

그렇게 이용상은 리 왕조에서 쩐 왕조 교체기에 일족이 새로운 왕조에 숙청당하는 가운데 1226년 일족과 부하들을 데리고 바다로 도망갔다. 이렇게 베트남 사에서 그의 이름은 사라지고, 베트남 리 왕조는 멸족했다.[1][2]

2.2 고려로 망명

베트남 역사에서 사라진 이용상의 이름은 뜬금없이 고려 역사에 등장하게 된다. 바다로 도망친 이용상의 일족과 부하들이 배를 타고 계속 간 끝에 도착한 곳은 고려황해도 화산(花山)이었다. 지금의 옹진반도 북쪽에 위치한 산, 옹진군 북면 화산동리에 있다. 이용상이 화산에 도착했을 때 마침 도적들이 백성을 잡아가는 걸 보고 도적떼를 퇴치하고 사람들을 구해주었고, 옹진현령은 이 사실을 조정에 상주했다.

안남국(베트남의 별명)의 왕자가 표류했다는 것을 보고받은 조정에서는 크게 환영하며, 이용상이 고려에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고종은 이용상을 그의 처지를 가련히 여기고 극진히 대우했다. 고종은 이용상이 "망국의 왕자를 이리도 과하게 대우하시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라고 고마워하자, "망국이라는 건 어느 나라도 피할 수가 없다. 내가 언제 망국의 왕이 될지 누구도 모르는 일 아닌가?"라 대답했다고. 그리고 이용상에게 식읍을 하사하고 화산군(花山君)으로 봉했다. 그런데 이용상의 행적을 기록한 다른 사적인 「수항문기적비(受降門紀蹟碑)」에서는 이용상이 몽고군을 격퇴한 뒤에 그 상으로서 식읍을 하사받았다고 전하고 있어 기록상의 차이가 보인다.

재미있는 건 화산 이씨 족보에 적혀 있는 이야기. 이용상이 고려에 들어올 쯤에, 고종이 어느날 내전에서 잠이 들어 꿈을 꾸었는데 그 꿈에 큰 새 한 마리가 남쪽에서 날아와 사해 바닷가로 날개를 치고 앉았다고. 꿈에서 깨어 사람을 시켜 찾아보았더니, 안남국 왕자 이용상이 왔다고 한다.

그런데 그로부터 6년 뒤에 고려원나라의 침략을 받았고, 고종은 47년의 재위기간 중 30년 가까이를 원나라의 침략에 시달리다가 결국 개경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피난지 강화도에서 세상을 떠났으니…

2.3 몽골군과의 전투

본격 제갈량못지 않은 신묘한 계책
전반적인 내용은 화산이씨 족보에 서술하는 내용이라 다소 객관적이지는 않을 것이니 참고하자.

1253년 12월 이용상은 옹진성 동쪽 화산에 살고 있었는데, 고을 수령이 그에게 달려와서 몽골군이 쳐들어왔다고 위급을 호소하며 이를 물리칠 계책과 도움을 요청한다. 이에 이용상은 수락하여 위효관이라는 사람과 함께 부대를 나누어 성을 지키는 수성전략을 세웠다. 삼면에 토성으로 성벽을 쌓고 전면에 목책을 높이 세웠다. 현재 옹진에 있는 화산성이 그것이다. 이용상은 동굴을 파서 땔감과 나무를 비축하고 몽골군이 대포[3]를 쏘면 함께 쏘고, 성벽을 넘으면 돌과 뜨거운 물을 부어서 철저히 방비하였다. 몽골군이 5달 이상 공격했지만 함락되지 않았다.

전투가 오래 계속되자, 몽골 장수는 꾀를 내서 항복하는 체하고 화친을 요구한다며 황금을 가득 담은 상자 5개를 선물로 보내왔다. 이용상과 마을수령은 망대를 높이 쌓아 위엄을 보인 가운데 항복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몽골군이 상자를 보내오자, 이용상은 이에 의심을 하여 상자를 묶고 구멍을 뚫게 명령을 내린다. 구멍을 뚫어보니 한 사람의 자객이 있었다. 이용상은 그 구멍에 펄펄 끓는 물을 붓도록 명하였다. 자객이 죽고 그 상자를 금종이로 바르고 적진에 도로 던져주라고 하였다. 몽골 장수는 상자를 도로 받은 후에 깜짝 놀라고 군사를 급히 돌렸다. 그러나 이용상의 지시로 매복한 고려 병사들이 기습하여 몽골군을 격파하고 수백명의 포로를 사로잡았다

상당히 비슷한 이야기가 중국 남북조시대에 존재한다. 당시 동위는 서위와 맞서 중국 대륙을 통일할 야욕을 갖고 40만을 이끌고 서위의 요충지를 공격하여 서위의 기세를 끊으려 했는데, 군사 기지이자 교통의 요충인 옥벽(玉壁)을 지키는 수문장이었던 서위의 장수 위효관에 의해 좌절된다. 위효관의 방어전술과 이용상의 방어전술에 비슷한 점이 많고 동위의 항복계략과 몽골의 항복계략이 서로 일치한다. 이로 보아 위효관이라는 인물의 일화를 차용해서 이용상 왕자의 후손들과 추종자들이 업적을조작질미화하여 용맹과 냉정함을 과시한 것이 확실해 보인다. 심지어 나중의 곽재우도 비슷한 일화를 남겼으니... 다만 당시의 논공행상 관련 기사가 남아 있으므로 이런 신묘한 방식은 아니더라도 큰 공을 세우긴 세운 듯. 이를 근거로 베트남판 환빠(...)들은 몽골의 침략을 고려가 버텨낼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이용상의 공이라고 주장한다. 문제는 베트남인들의 역사 인식 수준이 과거 환빠가 판치던 한국의 수준으로 국수주의적인 편인데, 이런 주장을 믿고서는 여러 곳에 퍼뜨리는 경우가 많다는 것.

고종은 보고를 받고 이용상을 포상하여 관직을 높이고 옹진 화산 지방 30리 인근과 식읍 2천호를 하사받았다. 조상의 제사를 지내도록 제수를 많이 내리고 화산관의 문미에 수항문(受降門)이란 글자를 써서 내렸다.

2.4 화산 이씨의 시조, 이용상

1253년, 이용상은 몽골 침략 당시 화산에서 몽골군을 물리치는데 큰 공을 세워 화산군(花山君)의 작위를 받았다. 간혹 금천군의 옛 지명인 화산(花山)과 헷갈리는 경우가 있다. 금천군의 옛명인 화산군과 옹진군내 지명인 화산은 별개다. 참고로 금천군 화산에도 본관이 있는데 한자마저 비슷한 화산 단씨(花山 段氏)가 그것이다. 다만 워낙 희귀 성씨이다 보니 자료가 부족하다.

더불어 영지도 하사받아 살아가는데에는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지만 늘상 저 멀리 있는 조국을 그리워해서인지 조국 방향으로 해마다 제사를 지내 망향의 아픔을 달래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와 후손들의 흔적이 여전히 북녘 옹진군에 남아 있다. 왕자가 고향을 보며 그리워하던 망국단(望國壇)과 적과 싸우기 위해 화산에 쌓은 성인 화산성, 조정이 이용상에게 수여한 수항문(受降門)과 그의 망명 및 귀화 사실을 기록한 수항문기적비가 이 사실을 증명하는 유적으로 남아있다.

그의 후손들은 그를 시조를 삼아 본관은 화산으로 삼았다. 그의 맏아들 이간(幹)은 삼중대광, 도첨의 좌정승과 예문관 대제학을 역임했고, 둘째 아들 이일청(一淸)은 안동부사를 지네고 안동 내성면 토곡리에 정착했다.

현재 화산이씨는 옹진을 포함한 황해도 남부에 밀집되어 있고, 경상도 안동시, 밀양시, 진주시에도 많이 거주하고 있다. 혹시라도 주변에 화산 이씨 친구가 있다면 30대손 이후의 친구[4]일 것이다. 화산이씨는 리 왕조 건국조 이공온을 1대조로, 중시조를 이용상으로 본다.[5]

2.5 한편 베트남에서는

베트남에서는 19세기까지 요상한 전설이 내려오고 있었는데 조선에 표류한 베트남 황태자 일행을 조선인들이 약탈하고 죽였다.(...)라는 내용이었다. 실제로 17세기에 태풍때문에 표류하다가 베트남까지 떠내려와버린 제주도 어민들을 본 베트남 지방 관리가 저 전설을 언급 하면서 내가 그 원수를 갚아야겠다고 말하는 바람에 제주도 어민들이 두려움에 떨었다. 물론 베트남 정부의 호의와 노력으로 어민들은 별탈 없이 조선으로 돌아왔다.[6] 그도 그럴게 조선과 베트남은 중국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교류하던 사이였고 사이가 나쁜 편이 아니었다. 이 전설의 근원이 이용상으로 여겨지는데 바다로 도망친 이용상에 대한 이야기가 베트남에서는 이런 식으로 와전된 듯 하다. 그리고 어쩌면 쩐 왕조가 리 왕조의 부흥 운동을 차단하기 위한 음모를 꾸미고, 첩보로 이용상이 고려에 망명을 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리 왕조를 부흥을 도모하는 세력이 이용상과 접촉을 막기 위해, 쩐 왕조 조정이 이용상이 고려 사람들에게 살해당했다는 조작된 전설을 퍼트린지도 모른다.

2.5.1 북베트남

그런데, 1959년에 이 전설을 확인하려고 북한을 방문한 (북)베트남의 역사학자가 있었다. 베트남의 슐리만 당시 (북)베트남의 문화사절로서 북한을 방문한 역사학자 쩐 반 지압이 북한 학자의 도움을 받아 황해도 옹진의 망국단과 수항문 기적비 등을 답사하여 이용상의 전설이 사실임을 확인한 뒤 보고서를 남기면서, 서문에 이용상은 (북)베트남과 북한의 우호 관계를 상징한다고 기록하였다.

2.5.2 남베트남

베트남전쟁으로 북베트남에서 더 이상 이용상에 대해서 연구하지 못 하던 1967년에, 남한에 사는 화산 이씨의 25대 후손인 이훈이 (남)베트남 대사관을 방문하여 자신이 베트남의 왕자 이용상의 후손임을 밝혔다. 그 뒤 이훈은 (남)베트남과 한국을 오가며 자신의 뿌리찾기 활동을 하였고, 이훈의 활동은 1226년 리 왕조가 멸망한 뒤 741년 만의 귀향이라는 제목으로 (남)베트남과 한국의 언론에 자세히 소개되었다. 당시 (남)베트남의 대통령까지도 관심을 보였지만, 1975년 (남)베트남이 패망하고 이훈이 1976년 화병으로 사망하면서 화산 이씨의 뿌리찾기는 실패로 돌아가는 듯 했으나...

3 8백년 뒤

KBS일요스페셜에서 화산 이씨의 귀향을 다뤘다.베트남 대사의 유창한 한국어

3.1 금의환향

1990년 한국이 베트남과 외교관계를 수립한 뒤, 이훈의 조카인 화산 이씨 26대 이창근이 베트남 대사관을 방문했을 때 베트남 대사가 직접 대사관 문 밖에 나와 이창근을 맞이하였다.[7] 그리고 1995년 3월, 이창근을 비롯한 화산 이씨 종친회 대표들이 선조들의 고향 베트남을 찾게 된다. 이 때 도 무오이 공산당 서기장을 비롯한 베트남 정부의 3부요인이 모두 나와 한국에서 찾아온 화산 이씨 종친들을 맞아 깍듯이 왕손으로 예우했다.

화산 이씨 후손들이 이토록 열렬한 환영을 받은 이유는, 외세의 침입을 물리치고 독립국가를 세워 베트남의 정통성을 확립한 리 타이토(李太祖)와 리 왕조에 대한 향수가 지금도 강하기 때문이었다. 쩐 왕조에 의해 리 왕조의 후손들이 멸족된 이후 베트남에서는 현재까지도 리 왕조에 대한 제사를 지내고 있는데, 화산 이씨가 베트남으로 돌아오기 전까지는 리 왕조의 후손이 없었기 때문에 탕롱시장이 제주를 대행해 왔다. 이런한 때 화산 이씨 종친의 방문은, 리 왕조의 혈통이 800년 세월을 뛰어넘어 3,600여 km나 떨어진 한국에 온전히 남아 있음을 확인한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당시 현지 언론이 800년 만에 끊겼던 리 왕조의 혈통이 부활했다고 대서특필할 정도였다. 지금도 해마다 리 왕조 건국 기념식에 종친회 대표들이 초청된다.

3.2 전설이 실현되다

하노이 북부 박닌성 딘방에는 1천 동 주화에 새겨질 정도로 베트남 국민이 신성하게 여기는 리 왕조의 종묘가 있어, 리 왕조의 역대 왕 8명을 모시고 있다. 이곳은 1019년에 세워진 이래 1952년 프랑스에 의해 전소되었다가 1989년에 재건되었다.

1952년 훼손 당시 종묘에 있던 제기들 중 신성한 향로의 행방이 묘연해졌는데, 1995년에 베트남을 찾은 화산 이씨 26세손인 종손 이창근이 여기서 첫 제사를 지낸 뒤 종묘의 땅속에 묻혀 있던 우물에서 그동안 찾지 못했던 그 향로가 발견되었다. 촌로들은 "나무 숲이 사라지고 따오케 강물이 마를 때, 리 왕조가 다시 돌아온다는 전설이 실현되었다"며 감격했다고 한다. 그때 그 지방의 나무 숲은 사라져 있었고, 따오케 강이 흐르던 곳은 농토로 변해 있었기 때문이다. 1995년 MBC 방영자료에서 현지인의 얘기에 따르면 이 전설은 리 왕조를 멸망시킨 쩐 왕조의 시조가 한 얘기라고 한다. 즉 다시는 리 왕조는 부활할 수 없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인데, 공교롭게도 그의 호언장담이 현실로 되어버렸다는 의미.

현재는 그 우물이 복원되어 거기서 길어낸 물로 제사를 지내고 있으며, 방문 당시 화산 이씨의 종손이었던 이창근 씨가 베트남에 귀화해 리 왕조의 후예로서 선조의 제사를 봉행하고 있다.

화산 이씨의 DNA를 조사한 결과도 베트남인의 DNA와 유사한 것이 많아 과학적으로도 증명되었다. 따라서 화산 이씨 후손들은 아예 베트남인으로 인정받아, 이들이 베트남에 거주하기를 원할 경우 베트남에서 까다로운 외국인의 건물 및 토지 구입 제한을 적용하지 않는 우대를 해주고 있다. 베트남에서 리 왕조의 국왕 리 따이 또가 월남판 세종대왕처럼 여겨지며 존경을 받았고, 외세의 침략이 많았던 베트남 역사에서 그나마 리 왕조가 점했던 시기가 그나마 편하고 안락했고 전성기로 여겨지기 때문.

4 베트남에서의 인식

드라마틱한 사연 때문인지 베트남에서도 나름대로 유명한 인물인듯.

  • 2002년도에 이용상의 일대기를 주제로 한월 합작으로 제작된 오페라가 공개되었다.
  • 베트남의 어떤 기사에 따르면 이승만 대통령이 1958년 11월 6일, 베트남 공화국을 방문했을 때 사이공 지방지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이용상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일단 이승만은 조선의 왕통인 전주 이씨이며 화산 이씨는 절대 아니다. 아버지가 전주 이씨라 주장하는 몰락한 양반인 이경선이었고 어머니는 김해 김씨 출신이지만 여전히 베트남에서는 이를 믿는 것으로 보인다.해당 동영상은 월남 유사사학자로 추측되는 사람이 올린 것이므로 함부로 맹신해서는 안되며, 설령 안남이씨의 후손이 본다면 가려서 보자. 올렸다 내렸다 반복하는 걸보니 자기도 떳떳하지 않은가보다. 월남판 환빠?? 프린스 리맞네 지방지 기레기와 통역이 이승만의 '나는 조선왕조의 후예'라는 주장을 통역이 조선왕조의 다른 명칭인 이조(李朝)로 통역했고, 통역의 말을 들은 지방지 기레기가 이조를 베트남 리왕조로 오해를 하여서, 이 주장이 오역때문에 일어난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정선 이씨의 25대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심지어는 이용상의 망명루트를아니 그걸 어떻게 알고? 통해 보았을 때 대만에 후손을 남겼던 것으로 보아 그 후손이 지금도 있다는데 그 중 한 사람이 리덩후이. 물론 이 신문의 주장에 대한 진위여부를 파악하기는 어려우며 그것도 지방지에서 주도한 인터뷰이기 때문에 그 신뢰성과 관련 자료나 원본이 현재까지 남아 있을지도 의문이라 현재도 미궁 속에 빠져 있다.
  • 하나 더 라고 하기는 뭣하지만, 이용상이 이성계와 같은 李씨이므로 조선 왕조는 베트남사에 포함된다고 주장하는(...) 베트남판 넷우익들이 은근히 있는 편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인터넷 상에서만 주장한다는 점. 다른 가문이고 시조가 다르다는걸 설명해주면?

5 여담

  • 사실 화산군은 현재는 북한의 통제하에 지역이고, 화산 이씨의 본래 집성촌도 대부분 북한 황해도 지역에 있다. 일부 월남자와 경상도 지역에 살고 있는 일부 후손들이 있다고 해도 화산 이씨 혈통은 북한 지역에 가장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 정작 같은 공산주의 국가였던 북한계 화산 이씨는 베트남과 접촉 관계가 없고 남한에 남은 화산 이씨만이 베트남과 접촉한 것은 기묘하게 여겨질 수 있다. 이는 북한이 김일성 일가인 백두혈통 이외에는 족보를 불태우는 등 조상 계승 의식을 봉건 잔재라며 강력하게 억압하는 등의 정책이라고 하지만 실은 병크을 펼쳤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1959년에는 자기네들이 베트남의 역사연구를 도와주었으면서 북한 사람들은 본관이 뭔지도 모른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북한 지역의 화산 이씨는 자신의 세계(世系)를 모르거나, 알아도[8] 스스로 자칭하고 나서지 못할 상황인 것이다. 참조. 그래서 이용상을 연구를 위해서 북한을 방북한 북베트남의 학자 쩐 반 지압이 북한의 화산 이씨들을 접촉하지 못 하였다.[9]
  • 베트남 리 왕조의 후손인 가문은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화산 이씨 외에도 정선 이씨가 있다. 리 왕조의 4대 왕인 인종 이건덕의 셋째 아들이자 5대 왕 신종 이양환의 아우가 되는 이양혼(李陽焜)이 조상이다. 이양혼은 신종과 왕위를 두고 다투다 북송으로 망명했고, 이후 북송이 쇠락하면서 고려로 와 경주에 정착했고, 그 9대손인 이우원이 정선으로 옮긴 이래 본관을 정선으로 삼아 지금에 이른다. 나라가 망해가는 가운데 탈출한 이용상의 이야기가 워낙 드라마틱해서 이쪽은 좀 묻힌 감이 있지만 사실 이쪽이 더 먼저 정착했다. 좌우간 리 왕조의 후손인 것은 명백하기 때문에, 1995년에 화산 이씨와 함께 베트남을 방문해 왕손으로서 인정 받았다. [10]
  • 최근에 이용상 씨의 후손중 유명한 사람이라면 이우일 형제가 있다.
  • 또한 위와 같이 6.25 전쟁으로 옹진에서 또다시 고향을 잃고 실향민이 된 후손들도 다수 있다. 어쩌면 이도 운명일까?

6 같이 보기

  1. 고려가 조선으로 바뀌면서 왕씨를 죽일 때 왕씨의 후손이 성을 바꿔서 목숨을 보전했듯이, 쩐 왕조의 시대에 리 왕조의 후손은 '응우옌'으로 성을 바꾼 채 목숨을 보전했고 오늘날까지 남아있다.
  2. 오늘날 베트남에 남아있는 리 왕조의 계보는 쩐 왕조가 기록한 것으로, 여기에 이용상은 등장하지 않는다. 이에 대해 베트남 학계는 쩐 왕조가 리 왕조의 계보를 기록하면서 이용상 뿐 만 아니라 황제가 아닌 많은 왕손들을 누락한 것으로 보고 있다.
  3. 이 시기 대포는 화약을 쓰는 대포가 아니라 투석기다.
  4. 화산 이씨는 베트남을 방문하기 전에는 이용상부터 계수했다. 뒤에 나오는 26대 이훈이나 27대 이창근도 모두 이용상으로부터 계수한 것이고, 베트남에서 리 왕조의 후손으로 인정받은 뒤에는 이공온부터 계수하여 31대 이훈, 32대 이창근으로 한다. 따라서 30대손 이후라는 것은 이공온으로부터 계수한 것.
  5. 이용상은 망명할 때 리 왕조의 계보를 챙겼고, 이 내용은 이용상의 후손이 화산 이씨 족보에 남김으로써 오늘날까지 전해졌다. 화산 이씨의 족보에 기록된 리 왕조의 계보와 쩐 왕조가 기록한 리 왕조의 계보가 일치함으로써 화산 이씨가 리 왕조의 후손으로 인정받는 근거가 되었다.
  6. 다만, 이 부분은 말 그대로 전설이라 정확한 내용은 알기 어렵다. 베트남에 표류한 제주도 어민들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는 주영편의 내용을 보면 '예전에 베트남의 왕자가 조선인들의 손에 죽었으니 나도 너희를 죽여서 그 원수를 갚아야겠다'는 말을 한 것은 지방 관리가 아니라 당시의 국왕이었다. 그리고, 통역을 통해(한자를 이용한 필담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말을 전해듣고 통곡하는 조선 어민들의 모습을 본 왕비가 농담이었으니 너무 놀라지 말라고 달랜 것을 보면 해당 전설을 진짜 진지하게 믿어서 한 소리라기 보다는 그냥 개드립(...)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목숨으로 치는 드립! 실제로 조선에서 비슷한 일이 있기는 있었는데 여기서는 베트남이 아닌 류큐였다나. 이것이 또 와전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7. 베트남 대사가 한국으로 부임할 당시에, 베트남의 역사/문화학자들이 한국에 가면 이용상 왕자의 후손을 찾아보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8. 그래봐싸 막연히 시조가 이용상인 걸 아는 정도일 것이다.
  9. 허를러깅 처이발상을 보면 알겠지만 인민이 세계(世系)를 모르게 하는 반달리즘은 공산 정권에서 꼭 벌이는 일이다. 이런 거 보면 마르크스를 증오하지 않을 수 없잖아. 통일되어도 북한에 사는 화산 이씨가 뿌리를 정확하게 찾을 가능성은 제로다.
  10. 하지만 이의민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이쪽 집안의 족보는 신빙성이...
  11. 다만 이걸 마냥 농담으로 치부할 수 없는 것이, 고국을 떠난 이용상의 후손으로서 고국을 다시 찾은 이창근을 띄움으로써 보트피플이 다시 본국으로 돌아오도록 선전한다는 시각도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