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 ||
파일:Attachment/unesco-memoryoftheworld.gif | ||
이름 | 한글 | 고려대장경판 및 제경판 |
영어 | [1] | |
프랑스어 | [2] | |
국가·위치 | 대한민국 경상남도 합천군 | |
소장·관리 | 해인사 | |
등재유형 | 기록유산 | |
등재연도 | 2007년 | |
제작시기 | 1237~1248년 |
대한민국의 국보 National Treasures Of Korea | ||
공식명칭 | 한글 |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 |
한자 | 陜川 海印寺 大藏經板 | |
영어 | [1] | |
분류번호 | 국보 32호 | |
소재지 | 대한민국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해인사길 122, 해인사 | |
분류 | 기록유산 / 서각류/ 목판각류/ 판목류 | |
시설 | 81,258매 | |
지정연도 | 1962년 12월 20일 | |
제작시기 | 고려, 1237년∼1248년 |
1 개요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伽倻面) 치인리(緇仁里) 해인사 경내의 2동(棟)의 장경판고(藏經板庫)에 보관되어 있는 약 8만여장의 대장경판.
정식명칭은 '해인사 대장경판'이나, 보통 '팔만대장경'이라고 알려져있다. 대장경판은 종이에 불경을 인쇄하기 위해 만들어진 목판으로써 책이 아니다. 해인사의 수다라장 다락방과 강원도 평창의 오대산 월정사 그리고 부산의 동아 대학교에는 해인사 대장경판을 인경하여 만들어진 대장경 판본 책들이 소장되어 있다.
팔만대장경의 경판 숫자는 1915년 조선총독부가 처음 8만1258판으로 집계했다. 정부가 1962년 국보 지정 당시 별도의 확인 작업 없이 이 숫자를 그대로 적용하면서 그동안 정확한 숫자, 훼손 여부 등을 둘러싸고 논란이 일기도 했다. 문화재청은 이에 따라 2000년부터 실시한 ‘해인사 고려대장경 디지털 영상화 및 기초자료 데이터베이스 사업’, 2014년에 수립한 ‘해인사 대장경판 중장기 종합 보존관리계획’에 따른 조사 등을 통해 최종적으로 8만1352판으로 밝혀졌다.[3]
2 역사
이 대장경은 고려 고종 24∼35년(1237∼1248)에 걸쳐 간행되었다. 이것은 고려시대에 간행되었다고 해서 고려대장경이라고도 한다. 판수가 8만여 개에 달하며 인간의 8만 4천 번뇌에 해당하는 8만 4천 법문을 실었다고 하여, 8만대장경이라고도 부른다.
팔만대장경을 만들게 된 동기는 고려 현종 때 거란군의 침입을 막기 위해 초조대장경을 만든 것에서 유래되었다. 초조대장경은 대반야경 6백 권, 화엄경, 금광명경, 묘법연화경 등 6천여 권을 포함하고 있었다. 초조대장경은 원래 흥왕사에 보관되어 있다가, 후에 부인사와 대구 그리고 팔공산으로 옮겼다. 그러나 초조대장경은 몽골의 침략으로 불타 사라졌으며, 현재 일본 교토 난젠지(南禅寺)에 일부분인 1,715권의 인경본만이 전하고 있다. [4] 이 외에 대마도의 한 신사에 500권이 있었으나 모두 도난당했다. 그 외에 국내 수집가나 국가기관에서 인출본을 꽤나 많이 역수입하여 현재는 국내에도 상당한 양의 초조대장경을 보유하고 있고, 이들은 대부분 국보나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초조대장경을 조판한 후 거란군이 물러갔듯이 불력으로써 몽골 군을 쫒아내기 위해인용 오류: <ref></code> 태그를 닫는 <code></ref>
태그가 없습니다 서여 민영규(2005년 작고) 박사는 1996년에 발표한 《고려대장경 신탐 - 바로 잡아야 할 그리고 새로운 몇 가지 사실들》이라는 논문에서 대장경 조판의 의미를 재조명하고자 했는데, 그는 고려 최씨 무신정권이 불교계를 회유하기 위한 결과물이 바로 재조대장경 조판이었다고 주장했다. 선종 불교와 이어져 상대적으로 기존의 왕실이나 귀족들과 커넥션을 가졌던 교종 불교계와 거리가 있던 무신정권(특히 최충헌 이래 최씨 무신정권)이 몽골 침공이라는 초유의 국난으로 부인사에 있던 초조대장경이 불타버리는 지경에 이르자, 그 기회에 그때까지 사이가 소원했던 교종 불교계를 회유해 정권에 대한 반발 세력을 아군으로 끌어들이고 이를 통해 최씨 정권 및 이를 중심으로 하는 국가 결속을 강화하기 위해서 재조대장경이라는 16년에 걸친 불교 사업을 주도하게 되었다는 것.</ref> 다시 대장경을 조판하게 된 것이며, 이러한 이유 때문에 팔만대장경을 재조대장경이라고도 부른다. 당시 이러한 조판은 국가적인 사업이었으며, 따라서 최우는 이를 위해 강화도에 대장도감이라는 임시기구를 설치하였다. 판각은 경상남도 남해에 설치한 분사대장도감이 담당하였다.[5] 본래 강화성 서문 밖의 대장경판당에 보관되어 오고 있던 경판들을 선원사를 거쳐 태조 7년(1398) 5월에 합천 해인사로 옮겼고, 이는 오늘날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8만장에 달하는 경판의 서체가 모두 일정하며, 오탈자가 거의 없는 것으로 유명하다. 서체가 일정한 것은 글씨를 담당한 사람들의 글씨체를 모두 일정한 모양으로 만들게 하기 위해 거의 1년에 가까운 훈련을 했기 때문이라 알려져 있다. 발견된 오탈자는 5200여 만자 중 단 158자, 그것도 현대에 와서 겨우 찾아냈다. 오탈자율이 0.0003%.이것이 어느 정도의 오타율이냐면, 지금 당신이 200자 원고지 1645장 분량[6]의 글을 쓰면서 그 안에 있는 오탈자를 1글자 이내로 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전설에 따르면 한 글자를 새길 때마다 세 번씩 절을 했다고 한다.
장경판고는 원활한 통풍을 위해 건물 앞뒤와 위아래에 위치한 창의 크기를 달리하는 등의 과학적 건물 설계가 돋보인다. 이러한 장경판고는 1995년에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장경판고는 세계의 도서관 건축을 다룬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건축사 교수 제임스 W.P 캠벨의 저서 <세계의 도서관> 첫머리에 언급된다.[7]
이어 2007년 6월에는 고려대장경판과 제경판을 한대 묶어 유네스코의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3 위기의 순간
여담으로 사라질 뻔한 위기의 순간이 3번 있었다.
첫 번째는 바로 조선의 세종 대에 벌어진 일이었다. 당시 일본은 조선에 꾸준히 팔만대장경판을 달라고 요구해왔다. 그 당시의 일본의 의도는 조선은 숭유억불이 기조였기 때문에 억지로 달라고 하면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었고, 이를 파악한 조선 조정에서는 대장경은 나라에서도 귀한 것이라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하지만 일본은 이에 굴복하지 않고 계속해서 대장경을 청구하였으며[8], 세종은 대장경판을 넘겨 주려고 하기도 했으나 대신들의 항의로 철회된 후 그러한 방침을 고수했다.
임금이 대장경판은 무용지물인데 이웃나라에서 청구한다 하여, 처음에는 이를 주려고 하매 대신들이 논의하여 말하기를, “경판은 비록 아낄 물건이 아니오나, 일본이 계속 청구하는 것을 지금 만약에 일일이 좇다가 뒤에 줄 수 없는 물건을 청구하는 것이 있게 된다면, 이는 먼 앞날을 염려하는 것이 되지 못하옵니다.” 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임금이 일본의 청구에 응할 수 없다고 답한 것이다.ㅡ 세종 22권, 5년(1423 계묘 / 명 영락(永樂) 21년) 12월 25일(임신년) 1번째 기사.
다시 말해 경판이 소중한 물건은 아니지만, 그것을 요구한다고하여 주었다가 나중에 일본 측에서 주어선 안되는 물건까지 요구할 것을 경계 했다는 이야기이다. 대신 경판들을 인경한 대장경본들을 보내는 식으로 일본의 요구를 무마시켰다. 한편 세종은 직접 지시를 내려서 서울로 대장경판을 가져올 것을 검토하였지만 예산상의 문제로 기각되었다.
임금이 승지들에게 이르기를, “일본국에서 매양 대장경판(大藏經板)을 청하니, 우리 나라에서 불교를 숭상하지 아니하여, 이 판이 밖에 있기 때문에 억지로 청하면 반드시 얻을 것이라고 생각한 까닭이다. 지난 날에 이 판을 구하기에, 대답하기를, ‘우리 나라에서 전해 내려온 국보를 가벼이 남에게 줄 수 없다. ’ 고 하였더니, 저들이 얻지 못하고 돌아갔다. 이 판을 도성 근방인 회암사나 개경사(開慶寺) 같은 곳에 옮겨 두면, 저들도 이를 듣고 우리 나라의 대대로 전하는 보배라는 뜻을 알고 스스로 청구하지 않겠지만, 단지 수송하는 폐단이 염려되니, 그것을 정부에 논의하라.” 하니, 모두 말하기를, “수송하는 폐단이 있사오니, 그 감사로 하여금 검찰하여, 그 수령으로 하여금 맡아서 더럽히거나 손상시키지 못하게 하고, 수령이 갈릴 때에는 장부에 기록하여 전해서 맡게 함이 마땅하옵니다.” 하므로, 그대로 따랐다.ㅡ 세종 77권, 19년(1437 정사 / 명 정통(正統) 2년) 4월 28일(정해) 3번째기사
참고로 세종은 한양으로 옮겨 보관할까 했지만 비용이라든지 여러 준비 문제가 걸려 흐지부지되었고 되려 이게 팔만대장경에게 좋게 되었다... 6.25라든지 여러 참극을 생각하면 서울로 옮겼다면 남아있지 않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전해내려오는 기록물들을 살펴보면, 일본뿐만 아니라 류큐 왕국도 시시때때로 사신을 보내서 조공하고 팔만대장경판의 인경본을 받아갔다. 류큐에서는 여러번 팔만대장경판의 인경본을 받아가다가 아예 원판을 달라고 요구하기도 했었지만, 조선이 이를 거부해서 인경본을 받아갔고, 슈리성 옆의 엔가쿠지(円覚寺)에 보관했다. 그러나 1609년 사츠마번의 침공 당시 소실되고 말았다.이때 류큐에 줬다면 역시 캐발살났던가 일본에 넘어갔을 듯
그러나 인쇄본으로 만족하지 못한 일본은 팔만대장경을 노리고 별별 짓을 다 저질렀는데 듣보잡 가짜 나라를 내세워 조선과 우애를 위하여 달라고 하는 짓까지 벌였다. 1484년 이천도국이라는 가짜 나라 사신을 내세워 요구했다가 거부당했고 1741년에는 구변국이라는 또 가짜 나라를 내세워 같은 짓을 하려다가 거부당했다. 급기야는 해인사로 무장 군대를 보내 약탈하려다가 무산된 적이 있다고 한다.[9] 진짜 가지가지한다
이후 일제강점기 때도 시도때도 없이 노리려다가 해인사 승려들이 차라리 장경을 불태워서 같이 타죽겠다고 하며 죽을 각오로 막았기에 일본도 번번히 일본 반출에 실패했다.[10] 심지어 한 승려는 칼을 가져와 자해하면서 대장경을 가져간다면 내 피로 더럽히고 내 원한을 묻혀 보관하는 일본 어디라도 저주를 내리겠다고 할 정도로 목숨바칠 각오로 막았다고 한다. 오죽하면 매천야록에서 황현도 대한제국 말부터 왜놈들이 대장경을 그렇게 노린다고 한탄할 정도였으니 남은 게 기적이다.
두번째는 해인사에 벌어진 화재였다. 그것도 7번에 걸쳐 해인사 여기저기가 불타는 꽤 큰 피해였음에도 대장경은 하나도 타지 않았다! 이 정도면 거의 신...아니 부처님의 가호를 받는다고 생각될 수준.
숙종 21년(1695) : 동쪽의 많은 요사와 만월당, 원음루 화재.숙종 22년(1696) : 서쪽의 여러 요사와 무설전 화재.
영조 19년(1743) : 대적광전 아래 수백칸 당우 화재.
영조39년(1763) : 화재
정조 4년(1780) : 무설전 화재.
순조 17년(1817) : 수백칸 당우 화재.
고종 8년(1871) : 법성요 화재.
세 번째로 경판들이 소실될 뻔한 일은 한국전쟁 때였다. 미국의 공군의 공습 때문에 소실될 뻔하였으나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전쟁 중에 빨치산들이 해인사에 숨어들자, 미군 군사고문단이 한국군 F-51 조종사였던 김영환 장군(당시 대령)에게 빨치산 소탕을 위해 해인사 폭격을 명령[11]한다. 하지만 김영환 장군은 문화재 소실을 우려해, 빨치산은 금방 빠져 나갈 것이나 문화재를 잃으면 복구할 길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명령을 거부했다. 당시 군법에 의해 전시 명령불복종으로 군사재판에 회부되었고, 이승만은 총살도 아닌 포살하라며 대노했으나 배석하고 있던 공군참모총장 김정렬(김영환의 형)이 팔만대장경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그간의 전공으로 즉결처분은 모면했다고 한다.
결국 그의 말은 적중하였는데, 빨치산들은 곧 해인사를 빠져나갔고 덕분에 대장경은 무사히 보존될 수 있었다. 이 공로로 대한민국 정부는 2010년에 김영환 장군에게 금관훈장을 추서하였다.
3.1 현재의 보관 문제
대장경 일부가 세월 흔적에 훼손된 게 있다.아주 극소수이긴 하지만. 그 중에는 벌레먹은 듯한 흔적도 있어서 흰개미 같은 나무에 해충이 되는 벌레가 노릴까 하여 해인사 측이 흰개미가 둥지를 지을만한 근처 나무를 미리 자른 적도 있다. 하지만 곤충학자들에 의하면 흰개미는 오래된 경판을 먹지 않으니 큰 걱정이 없다는 태도이다.
다음은 먼지. 이 먼지도 오래 쌓이면 경판에 해가 된다. 예전에는 승려들이나 불자들이 자발적으로 하나하나 붓으로 천천히 먼지를 털었지만 이젠 관광객이 많아져서 먼지가 더더욱 많이 쌓여지고 저렇게 털 틈도 없다. 진공청소기를 쓰자면 경판에 해가 될 거 같기에 한 청소기 업체에서 6달이 넘게 바람을 최대한 적게하고 나무에 해가 안가게 연구하면서 특별히 만든 청소기를 쓰지만 역시 사람 손으로 터는게 낫다고 하여 주기적으로 관리하며 수작업으로 털기도 한다.
그리고 화재에 대비하여 해인사 측은 아예 소방차를 보유하고 있다. 소방차에 해인사라고 적혀있으며 승려들이 몰고 자주 화재 대비 훈련을 갖출 정도이다. 일부 의견으로 극성 종교 광신도들의 테러를 염려하고 있다. 카더라가 아니라 이는 해인사 측에서도 뭐 종교 광신도라든지 정신이상자같은 만일의 일을 대비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4 2011 대장경 천년 세계문화축전
2011년 9월 23일부터 11월 6일까지 45일간 대장경 간행 천년을 기념하여 소재지인 합천에서 열린 행사.
이전에도 매년 팔만대장경 이운 행렬 재현 등의 관련행사가 열렸지만, 이 행사가 특히 유명해진 이유는 팔만대장경 진본 2점이 공개되었기 때문이다. 해인사를 방문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장경판전 안에 꽂혀있는 모습을 한번씩 봤겠지만, 실제 판 전면이 일반에 공개된 사례는 이전 두차례뿐이었다. 무엇보다 사람들이 몰린 이유는 해인사 측에서 다음번 진본 공개는 100년 후에나 다시 고려해볼 것이라 공언했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지금 안보면 죽기전엔 다신 못본다는 것. 언론에서는 '100년 마케팅' 이라고들 칭한다. 그 덕에 전국에서 관광객이 몰리는 진귀한 현상을 보여주었다.
- ↑ 1.0 1.1 Printing woodblocks of the Tripitaka Koreana and miscellaneous Buddhist scriptures
- ↑ Les tablettes de bois du Tripitaka Koreana et d’autres textes sacrés du bouddhisme
- ↑ 하지만 8만1352판이라는 숫자에는 일제강점기인 1915년, 1937년에 제작, 추가된 36개 경판이 포함되어있는 수치이다. 이에 대한 문화재적 가치의 견해들이 전문가는 물론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엇갈리는만큼, 학문적,사회적 합의가 절실한 상황이다.
- ↑ 초기 문서에는 난레이지(南禮寺)에 소장되어 있다고 하는데 교토에는 그런 절이 없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이렇게 기제되어 있는데 그 오류를 그대로 이어오고 있는 것 같다.
- ↑ 이케우치 히로시의 지적에 따르면 남해분사대장도감 조조(혹은 개판)의 간기를 구비하는 것은 모두 정안의 투자로 이루어졌는데, 이 정안은 당시 무신 정권의 집권자 최이의 처남이었다.
- ↑ A4용지에 10포인트 글자로 빼곡하게 200페이지 정도 된다.
- ↑ 팔만대장경에 가려 다들 잊고 있는 경향이 있는데, 팔만대장경을 모신 장경판전 역시 엄밀한 의미로 도서관이다.
- ↑ 사신이 단식까지 했다고 한다.
남의 물건 달라는 주제에 단식까지. 가지가지한다 - ↑ 일본이 대장경 요구한게 80번은 된다고 한다.
- ↑ 참고로 이런 식으로 상대를 기죽게 만든 사례는 스위스에서 자주 일어난 일이기도 하다.
- ↑ 6.25 와중에 많은 전국 절들이 이런 이유로 바로 한국군이 알아서 불태워버려서 무수한 불교유적과 유물이 재로 사라지는 참극이 있었다... 일부에서는 극단적인 반불교인인 이승만이 더 명령했다고 하는 주장(고려원에서 나온 만화 불교에서도 이승만이 전쟁을 기회로 이런 짓을 벌였다고 강력하게 비난한 바 있다.)도 있긴 하다. 물론 전쟁 와중이라 이승만 탓만 할게 아니지만
몇십년 뒤 중국에서는 전쟁이 아닌데도 이 짓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