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대왕릉비

洞溝古墓群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공포
분류고묘장(古墓葬)
시대고구려
일련번호1—168
소재지린 성 지안 시
등재196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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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 의해 새단장 된 "호태왕 비." 그 탁본은# 여기

1 개요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는 고구려 19대 광개토대왕에 대해 다루고 있는 비문이다.

414년에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이 세웠다(장수왕 3년). 중국 지린성(길림성) 퉁거우에 위치해있다. 고구려 멸망 이후 남북국시대에는 이 비석이 어떻게 여겨젔는지 알수없으며 고려,조선시대까지만 해도 금나라 황제의 비 정도로 여겨젔다. 조선 말기에 가서 봉금제도가 해제되고 이 비문이 발견되면서 고구려 왕의 비문이라는걸 알아챈다.

크기가 엄청나게 큰데, 높이가 6.39m이다.

내용은 고구려 왕실의 연원에 대한 수사, 광개토왕의 정복활동, 이하 수묘인 규정으로 이루어저있다.

2 발견과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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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천년 이상의 세월동안 개무시, 아니 아예 잊혀졌다(...). 조선조 용비어천가에서는 '성의 북쪽 7리 떨어진 곳에 비가 있고, 또 그 북쪽에 돌로 만든 고분 2기가 있다'고 전하지만 이것을 금나라의 유적으로 오인했다. 전술한 바와 같이 본격적으로 관심의 대상이 된 계기는 일본의 연구다.

광개토왕비가 소재한 지역은 청나라 시조의 성지라는 이유로 오랫동안 봉금되었으나 1876년 봉금의 해제로 그 존재가 중국의 금석학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당시 만주로의 이주가 많았기 때문에 개간 등 과정에서 훼손이 가해졌다.

본격적인 연구의 시작은 일본이었다. 육군 참모본부의 밀정 사코 가게아키가 탁본을 확보하였고 2년만에 참모부에서 도본이 나왔다. 이 자료가 이후 일본 뿐만 아니라 한국의 학자들의 연구의 기초가 되었다. 1970년대 이후 재일 사학자 이진희에 의해 '사코가 신묘년조 기사를 변조한 탁본을 제작하였고 이를 은폐하기 위해 비석 표면에 석회를 도포하였다'라며 조작설(일명 석회도말론)을 주장하여 센세이션을 일으키기도 했다. 석회를 바른 이유가 글자가 훼손됐다는 것인데 글자를 알아볼 수 없다고 해서 아예 글자를 가려버리는 행위 자체가 상당히 논란을 불러일으킬 수 밖에 없으므로 여전히 일본군이 광개토대왕릉비를 훼손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광개토대왕릉비 관련한 박물관에서의 소개에서도 탁본을 비교하고 있듯이 최소한, 당시 일본 만주군이 석회로 대왕릉비에 손을 댔다는 건 사실이 맞다고 인정하는 쪽이다.

3 내용

높이 6.39m의 응회암에 정방형 예서로 각자하였는데 암석에 특별히 가공을 가하지 않았다. 각면 외곽에 윤곽선을 긋고 다시 세로선을 그어 행을 구분하였으며 글자의 크기는 11~16cm로 대개는 14~15cm 정도다. 44행 1775자 중 150여자는 현재 훼멸되어 판독이 불가능하다.

물리적으로는 4면으로 되어 있지만 내용상 3부로 나눈다. 제1부는 시조 추모왕의 건국설화로 시작하는 고구려 왕실의 연원과 광개토대왕 업적에 대한 칭송 등, 제2부는 연대순으로 기록한 광개토대왕의 훈적, 제3부는 그 수나 출신 등 수묘인에 관한 사항과 수묘인 제도와 법의 공표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비문의 내용상 왕릉에 세워졌던 것으로 추정하지만 정작 아직까지 광개토대왕의 능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인근에 위치한 태왕릉이나 장군총 중 한 곳으로 추측할 뿐이며 두 무덤도 피장자의 신원은 불명이다.

2부 훈적 부분은 모조리 굴복하지 않거나 쳐들어온 적을 쳐부순 무훈의 열거로 이뤄진 점에 특색이 있다. 연대순으로 나열하고 있으며 1.왕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친정한 경우와 2.군사를 파견하여 벌한 경우로 나뉘어 확실하게 명시했다. 그리고 각 기사는 모두 토벌 대상 세력이 어떠어떠한 잘못을 저질러 구실을 제공하였으니 이에 벌하였다는 구조로 되어 있다. 이러한 구성은 3부의 수묘인 부분과 결부하여 전체를 하나의 맥락으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광개토왕 이래 수묘인을 정벌한 세력에서 끌어온 속민으로 두도록 했으므로 광개토대왕의 정복전쟁은 곧 수묘역 제도를 지탱하는 토대였기 때문이다.

1775자 중 이른바 신묘년(391년) 기사 32자에 지난 1세기동안 집중적으로 조명이 가해졌다.

而倭以辛卯年來 渡海破百殘□□□羅 以爲臣民

(그래서) 신묘년(391년)에 왜가 와서 바다를 건너 백잔[1],□□□라를 깨뜨리고 신민으로 삼았다.

일본은 당대부터 꾸준히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와 신라,가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라는 해석을 밀었지만 한국이나 북한 학계는 이를 부정해왔다. 정인보의 경우는 '왕의 훈적을 나열한 비에서 유독 고구려에 불리한 기사를 실을 까닭이 없다'는 이유로 의도적인 생략이 있는 것으로 보고, 오히려 주어를 고구려에 두어 '왜가 신묘년에 침공하니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 토벌하였다'는 식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저 문장의 앞에는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라는 문장이 나온다. 즉 정인보식으로 해석하면 '백제와 신라는 원래 속민으로 조공하고 있었다.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왔기에 (고구려가) 백제를 격파하고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혹은 왜를 격파하고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라는 뜻이 된다. 맥락상 왜가 오자 박살내고 백제와 신라를 좀 더 낮은 예속 단계였던 속민에서 종속국 수준인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한 것으로 보인다. 전략적으로 볼 때도 왜가 백제와 신라를 '깨뜨리고' 신민으로 삼았다는 해석이 납득이 안 가는 게, 강대한 고구려가 남하하고 있는 시점에서 신라뿐만 아니라 동맹 관계였던 백제까지 공격해서 신민으로 삼는 것은 삼국 전체를 적으로 돌리는 짓이다. 하지만 이후에도 백제와 왜는 멀쩡히 협력관계를 유지한다.

혹은 저 문장의 뒤에 고구려가 왜를 물리치는 내용이나 후퇴했던 왜가 신라를 포위했는데 그것을 고구려가 물리치는 내용 등이 써있기 때문에, 일본이 바다를 건너 백제와 신라를 깨뜨렸다는 것은, 고구려가 왜를 물리치기 전의 상황에 대한 설명, 다시말해 고구려에 유리한 기사를 싣기 위함이었다고 추측하는 경우도 있다. 너무나 이상하게 생각될 백제, 신라에 대한 왜의 강성은 송서, 수서 등의 기록 또는 삼국사기에 기록된 신라의 조공기사나 볼모기사 등에서 뒷받침 되곤 한다. 하지만 중국사서 쪽의 기사들은[2] 대체로 왜국에서 나온 일방적 주장인 경우가 많고 신라 조공의 경우 왜의 침공에 신라가 왜의 침공을 항시 잘 격파해왔다는 군사학적 연구도 존재하기도 하며 또한 정녕 신라가 볼모를 보낸 왜가 야마토 정권인지에 대한 논란도 많은 편이다. 거기다 중요한것은 광개토왕릉비 자체가 역사서가 아닌 왕의 업적을 찬양할 목적을 지니기 때문에 고구려인들의 왜곡이 들어갔을 가능성이 적지않아 의도적으로 적대세력의 주체인 백제의 격을 의도적으로 깎을 요량으로 왜를 높였다고 보기도 한다. 한편 송서나 수서의 경우 다른 사료와의 비교검증이 필요한 실정이다.

또한 애초에 사료가 다 맞는 것은 아니다. 현실과 전혀 맞지 않는 사실이 사서에 적혀있는 일은 굉장히 흔하다. 볼모의 경우는 일반인들의 인식과는 달리 까놓고 말해 꼬봉이 상전에게 갖다 바치는 개념이 절대로 아니다. 신라 이상으로 볼모를 보낸 것으로 나오는 백제의 경우 그 성격이 인질이 아닌 외교관적 역할을 했다고 보는 견해가 정설이다. 애초에 왜와 백제의 관계도 백제가 왜를 식민지로 삼았다는 식의 환빠식 망상이나 왜가 백제를 식민지로 삼았다는 일본 극우식 망상과는 달리 동등한 혈맹관계로 보는게 학계의 정설이다. 어느 한쪽의 국력이 약해지고 강해지고에 따라서 서로의 발언권이 세지고 약해지고가 있었을 뿐이다. 일본쪽만 하더라도 일본이 한반도남부를 먹었다는 식의 학설보다는 한반도남부에 일본인 집단거주지 정도의 개념으로 가는 추세이다.[3]

한국이나 북한 학자들의 이후 해석도 조금씩 내용은 다르지만 정인보식 해석과 크게는 궤를 같이 한다.

중국 학자 왕건군은 초균덕이 탁본을 하려고 최초 석회를 바르기전 비문을 모필하여 초록을 쓴것을 발견했다 왕건군 저서에는 부록으로 이 초록의 저본이 있는데 거기서 백잔 다음에는 동쪽 동자가 적혀있다 그리하여 김진명 작가는 그걸 근거로 백잔 다음 한자 동이 나온다면 그다음 문장은 정 벌 침 이 있을껏이고 그렇게되면 백제가 동쪽으로 신라를 정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가 되고 그후 나오는 글 그리하여 고구려가 (왜국이아닌)백잔을 토벌했다와 내용이 연결된다고 주장하였다 자세한건 김진명 대한민국 7대 미스터리 2화에 나오는 왕건군 저서 부록의 초균덕 모필 초록 저본 참고 링크

3.1 일본의 접근

제국주의 일본은 이 비문을 크게 두가지 방향에서 써먹었는데 첫째는 신묘년 기록을 자기들 입맛대로 해석해서 임나일본부설을 지지하는 근거로 써먹었으며 둘째는 광개토왕비문의 내용중 고구려와 의 대립에서 왜가 패한 점을 부각시켜 과거에는 북방세력에게 패배했으니 이번 러일전쟁에는 북방세력을 이겨야 한다고 강조하는데 이 비문을 활용하였다.

당시 역사학자들은 이 1500여년 전의 고구려-왜 관계에 19세기말 러시아-일본의 긴장상태를 투영하여 '옛날 왜가 고구려에 패해 한반도 경영이 좌절되었듯 지금 전 국민이 합심하여 러시아를 물리치지 못하면 제국의 대륙진출도 어려워질 것이라는 경각심을 고취시킬 수 있을 것'이라며 노골적이고 공공연하게 목적의식을 드러냈다. 심지어 공식적으로 비석을 구입해서 일본 내로 반입하려는 기획까지 있었다.

임나일본부설 자체는 1960년대 이후 일본 학계에서조차 주류에서 밀려난 폐기되다시피 한 논의지만, 어쨌든 한반도 남부에 군사를 진출시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해석은 일본 입장에서는 중대한 의미를 가진 것으로 평가된다. 야마토 정권이 체제를 굳히고 외부로 군사력을 투사할 정도의 기반을 마련했다는 비현실적인 주장의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결과적으로 왜가 패했으니 일본에 불리한 기사가 되는 셈이지만.
  1. 백제의 비하적 표현이다. 여기서 잔은 殘(잔인할 잔)자이다.
  2. 특히 송서 왜 5왕 기사 같은
  3. 사실 요서경략설만 하더라도 의외로 뒷받침하는 사서도 꽤 있고 학계에서도 꽤 진지하게 연구하는 중이다. 하지만 사료의 비교검증 등을 통해서 점점 힘을 잃었고 한국학계의 정설은 '잘해봐야 백제인 집단 거주지 정도'로 굳어졌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한국인들이 그것을 사실이라고 믿고 있고 국정 국사교과서에서도 '백제가 요서에 진출했다'는 식의 애매한 표현으로 이 설을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가슴으로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식의 마인드를 보여준다. 고대 일본의 한반도 남부 경영설도 이런식으로 이해하면 편하다. 즉 뒷받침 하는 사서는 있는데 비교검증 상 근거가 희박하고 일본학계에서도 인정 안하는 분위기인데, 학계가 아직 미련을 버리지는 못했고 대중들 중 의외로 믿는 사람이 많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