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식 명칭: 교향곡 제1번 C단조
(Sinfonie Nr.1 c-moll/Symphony no.1 in C minor)
1 개요
안톤 브루크너의 두 번째 교향곡. 후속작인 0번의 작곡시기 추정 문제로 세 번째 교향곡이라고 언급하는 문헌도 있다. 전작인 00번이 버로우탄 관계로, 1번의 영예는 이 곡에 돌아갔다.
작곡 시기는 자필보나 기타 자료를 참고하면 1865년 1월부터 이듬해 4월 14일까지. 00번보다는 훨씬 진일보한 모습이지만, 초연때 완전 개발살난 경력도 있고 해서 브루크너 자신은 이 곡을 오히려 다소 까는 입장이었다고 한다. 오스트리아 고지 독일어로 'Das kecke Beserl' 이라고 했다는데, 의역하자면 '경박한 아색히' 정도.
말은 그렇게 했다지만 버로우는 안하고 말년에까지 개정을 했던 것으로 봐서는, 나름대로 가치를 인정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 곡에서는 브루크너만의 독특한 스킬인 '브루크너 시퀀스', '브루크너 휴지' 라든가 금관악기의 강조 같은 면이 처음으로 나타나고 있어서, 최초라는 역사적 의의 외에는 별로 내세울 것이 없는 00번보다는 훨씬 높게 평가되고 있다.
2 곡의 형태
9번을 제외한 브루크너의 여타 교향곡들과 마찬가지로 4악장 구성이다. 각 악장의 형식도 00번과 대동소이한데, 주제나 악상을 내놓거나 그것을 주물러 발전시키는 스킬은 훨씬 세련된 모습이다. 다만 이 곡도 크게 보면 이후 내놓은 교향곡들과 비교했을 때 다소 튀는 인상이 강한데, 브루크너의 자아비판도 이런 점에서 나온 것이다.
음의 움직임이 그리 많지 않은 대다수의 브루크너 작품들과 달리 16분음표나 32분음표 등 짧은 음가의 음표들을 주루룩 쏟아내고 있는데, 특히 '힘차게, 불같이(Bewegt, feurig)' 라고 표기된 4악장에서는 브루크너답잖을 정도로 열혈 모드를 취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열정적인 면모 때문에, 후기 브루크너 작품을 좋아하지 않는 이들이라도 이 곡은 그럭저럭 듣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초연 때는 악단의 연주력 부족 등 이러저러한 요인 때문에 영 좋지않은 평가만 받았고, 이 때문에 크게 두 차례 직접 개정을 해서 만년에 재공연해 호평을 받았다. 다만 지금 와서는 마지막 개정 작업이 삽질로 여겨지는 안습 상황을 유발하고 있는 실정인데, 말년에 개정해서 좋은 소리를 못듣는 거의 유일한 브루크너 교향곡이다.
관현악 편성은 플루트 3/오보에 2/클라리넷 2/바순 2/호른 4/트럼펫 2/트롬본 3/팀파니/현 5부(제1바이올린-제2바이올린-비올라-첼로-콘트라베이스). 00번과는 다르게 플루트를 한 대 더 써서 세 대로 만들고 있다.
3 초연과 출판
제1차 전곡 초연: 1868년 5월 9일에 브루크너 자신의 지휘로 린츠 오페라극장 관현악단이 린츠에서 초연.
하지만 이 초연은 위에 예시한 대로 대실패로 끝났다. 이러저러한 뮤지션들로 임시 증편한 악단이 영 좋지 않은 연주력 때문에 고생하고 있었고, 브루크너 자신도 관현악 지휘가 젬병이었던 탓에 연주자들에게 자신의 곡을 제대로 이해시키지 못한 것이 큰 원인이었다. 청중들도 곡을 이해하지 못했다. 음악 외적인 문제도 있었는데, 공연 직전 린츠 시내를 가로지르는 도나우강의 다리가 무너지는 사고가 발생한 것도 간접적인 초연 실패의 원인이라고 지적되기도 한다.
제2차 전곡 초연: 1891년 12월 13일에 한스 리히터의 지휘로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빈에서 초연.
뼈아픈 실패 후 브루크너는 1877년과 1891년에 두 차례 곡을 뜯어고쳤는데, 2차 초연에서는 1891년 개정판을 사용해 공연했다. 이 때쯤이면 브루크너는 작곡가로서도 나름대로 명망있는 인물이었고, 악단과 지휘자도 당시로서는 본좌급이어서 호평을 받을 수 있었다.
1번의 악보는 크게 세 단계로 분류되는데, 1866년에 막 완성한 것과 1877년 개정을 거친 것, 그리고 1891년에 2차 개정을 거친 것으로 나뉜다. 1866년판이 1998년에야 나왔기 때문에 이전에는 1877년판과 1891년판 두 가지 밖에 없었다. 1877년판은 '린츠 판(Linzer Fassung/Linz Version)', 1891년판은 '빈 판(Wiener Fassung/Vienna Version)' 으로 불렸다. 사실 1877년에 개정할 때 브루크너는 린츠가 아닌 빈에 있었기 때문에, 엄밀히 말해 린츠 판으로 표기하는 것은 잘못된 관행이다. 1866년판이 가세한 이후 현재는 린츠판, 빈판이라는 표기보다 연도로 판본을 구별하는 쪽으로 가고 있다.
출판본으로 가장 먼저 나온 것은 1893년에 나온 악보지만, 이후 1877년판이 간행되면서 판본 선택의 대세가 린츠 판으로 옮겨가 버렸다. 개정 순서에 따른 자세한 출판 목록은 다음과 같다.
1866년 미개정판: 노바크의 후임으로 국제 브루크너 협회에 들어온 캐나다 음악학자 윌리엄 캐러건이 1998년에 편집한 악보. 로베르트 하스가 1877년판을 교정하면서 1866년판과의 차이점들을 정리해놓은 자료들에 의거해 복원함.
1877년 개정판: 1935년과 1953년에 각각 브루크너 전문 연구가들인 음악학자 로베르트 하스와 레오폴트 노바크의 편집으로 출판됨. 약칭 '1877년 린츠판' 혹은 '1877년판'.
1891년 개정판: 1980년에 음악학자 귄터 브로셰의 편집으로 출판됨. 약칭 '1891년 빈판' 또는 '1891년판'.
1893년 초판: 브루크너의 제자 시릴 히나이스의 편집으로 출판됨. 1891년판과 크게 다른 점 없음.
그 외 단편: 2악장의 미발표 단편과 3악장의 별도 버전이 볼프강 그랑장의 편집으로 1995년 출판되었다.
1866년판은 아직 미출판 상태지만, 게오르크 틴트너 지휘의 로열 스코티시 내셔널 오케스트라가 연주한 낙소스의 CD로 들어볼 수 있다.
대략 2차대전 후 1877년판으로 판본 선택의 대세가 옮겨갔는데, 가장 큰 이유로는 '두 번씩 개정하고 나니 너무 늙다리가 됐다' 는 것이었다. 혈기 넘치는 정열을 노장의 연륜으로 다스리려고 개정을 했다 보니, 곡의 생동감을 오히려 잃게 만드는 요인이 됐다는 것이 중평. 특히 최초의 브루크너 교향곡 전집을 녹음이자 동곡 최초의 정규녹음인 요훔의 음반에서 린츠판이 채택된 점도 린츠판 대세에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그래도 게오르그 솔티, 리카르도 샤이, 귄터 반트 등 몇몇 지휘자들은 빈 판을 선택해 공연과 녹음을 하고 있다. 클라우디오 아바도의 경우 1969년과 1996년에 이 곡을 빈 필과 녹음했을 때 각각 1877년 하스판과 노바크판을 사용하면서 대세를 따랐지만, 만년인 2012년에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와 만든 녹음에서는 빈판을 선택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