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교향곡 | ||||
1번 | 2번 | 3번 (영웅) | 4번 | 5번 (운명) |
6번 | 7번 | 8번 | 9번 (합창) | 10번 (미완성) |
1 구상
원래 베토벤은 두 개의 작품을 동시에 진행하는 버릇이 있었다. 교향곡도 5번과 6번이 동시에 작곡된 작품들이었고, 7번과 8번도 마찬가지. 그리고 마지막 교향곡이 된 9번을 진행하는 동안에도 이 10번의 구상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본래의 구상에 따르면 9번은 순수 기악의 교향곡, 10번은 합창을 부가한 작품이 될 예정이었다. 영국의 필하모닉 협회가 교향곡을 청탁하기도 해서 둘 중 어느 하나를 넘겨주어야 했는데, 가장 진척 속도가 빨랐던 9번을 보내기로 하고 10번에 넣을 예정이었던 합창 악장도 9번의 마지막 악장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후에 베토벤은 현악 4중주의 작곡에 집중했기 때문에 10번은 내버려둔 듯하다. 하지만 베토벤의 성향으로 봐서 영국 런던의 필하모니 협회에서 받은 위촉도 있었기 때문에 10번을 완성시켜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분명하다.
당시 베토벤은 10번 외에도 괴테의 파우스트를 오페라로 만들 계획도 세우고 있었고, 장엄미사의 후속 종교음악인 레퀴엠과 바흐의 이름(B-A-C-H)[1]을 주요 모티브로 한 서곡도 구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베토벤은 결국 간경화의 악화로 인해 이들 작품을 완성시키지 못하고 타계했다.
2 베토벤 사후
베토벤의 10번 교향곡에 대한 소문은 사후에도 계속 퍼지고 있었다. 베토벤의 비서를 자처한 안톤 쉰들러나 후기 현악 4중주를 초연한 슈판치히 4중주단의 비올라 주자 칼 홀츠가 10번 교향곡의 존재에 대한 소문의 근원지였다. 홀츠는 베토벤이 10번 교향곡을 피아노로 치는 것을 들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홀츠의 회고는 다음과 같았다.
E플랫 장조의 부드러운 도입부가 있은 후 c단조의 힘찬 알레그로가 뒤따랐다. 그러나 이 1악장은 완전하게 형태를 갖추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다음 악장들로 이어질 만한 뚜렷한 징후가 엿보이지 않았다.
이후로 10번 교향곡이 완전한 악보의 형태로 어딘가에 짱박혀 있을 것이란 소문부터 있지도 않은 곡을 가지고 퍼뜨려진 헛소문일 뿐이라는 회의적인 시각까지 다양한 의견이 설왕설래했다. 그러다가 20세기 후반 들어 영국의 음악학자 배리 쿠퍼가 쉰들러나 홀츠의 언급을 보고 베토벤의 이전 작곡 성향을 참조해볼 때 어딘가에 10번 교향곡의 스케치가 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한 뒤, 그 스케치를 찾기 시작했다.
결국 쿠퍼는 약 50여개의 10번 교향곡의 스케치이거나 혹은 관련이 있을 법한 스케치를 찾아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250여 마디의 소재를 조바꿈이나 반복 진행 등을 통해 늘리고 베토벤의 관현악법을 참조해 1악장을 복원했다고 주장했다. 이 복원 악보는 1988년 10월 18일에 런던에서 발터 벨러가 지휘한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초연되었고, 그보다 한 달 전 쯤인 9월 8일에는 윈 모리스가 지휘한 런던 교향악단의 연주로 첫 녹음이 만들어졌다.
대작곡가의 미완성 교향곡을 일부나마 복원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쿠퍼의 완성판은 그 직후 세계 각지에서 연주되었다. 베토벤빠가 엄청나게 많은 일본에서는 공개 초연이 진행된 바로 그 달에 쿠퍼가 요미우리 일본 교향악단을 지휘해 일본 초연이 행해졌고, 1991년 4월 4일에는 한국에서도 원경수가 지휘한 서울 아카데미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첫 공연을 기록했다.
쿠퍼의 복원판에 따르면 일반적인 베토벤의 교향곡과는 달리 상당히 독특한 형태로 시작된다. 1악장은 목관악기의 안단테로 시작해서 중간부에 c단조의 격렬한 알레그로를 둔 뒤 다양하게 변주되는 안단테의 반복인 A-B-A' 3부 형식의 큰 틀로 짜여져 있다. 전후반부의 주요 동기는 월광 소나타의 2악장과 흡사하다. 쿠퍼는 이러한 전개 방식에 대해 베토벤이 회고적인 태도를 보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쿠퍼의 이 작업에 대해서는 강한 찬반 논란이 있었다. 우선 쿠퍼가 찾아냈다는 악보의 단편이 정말 10번 교향곡의 단편이었는지에 대한 논란이 있었고, 그것이 10번이 맞다고는 해도 홀츠가 회고한 것처럼 베토벤이 병마로 더 이상 진척시키지 못한 지극히 단편적인 자료만 가지고 지나치게 작위적으로 만들어낸 악보라는 비판도 이어졌다.
실제로 쿠퍼가 복원한 곡의 스타일은 베토벤의 후기 작품보다는 중기 작품을 연상케 하며, 악상 전개 방식도 9번 교향곡이나 여타 후기 작품에 비하면 지나치게 클리셰적이고 베토벤이 혐오한 비더마이어[2] 스타일에 가깝다.
쿠퍼가 '베토벤의 회고적인 태도'라고 주장한 것도 의문이 남는데, 베토벤 자신이 회고적인 의미로 작곡했다는 현악 4중주 16번도 규모가 이전 4중주들보다 간소해지고 좀 더 심플한 느낌을 줄 뿐이고, 오히려 베토벤이 만년에 집착 수준으로 중시한 대위법 전개나 기존의 변주곡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환상곡풍 변주 스타일이 들어가 있는 등, 결코 쿠퍼가 보여준 것처럼 무비판적으로 과거 회귀하는 모습은 보여주지 않았다.
이 때문에 초연 지휘자인 벨러와 첫 녹음을 만든 지휘자인 모리스 정도를 제외하면 이 곡에 손댄 지휘자는 손에 꼽을 정도로 극히 적으며, 쿠퍼가 1988년에 내놓은 1악장 이래 더 이상의 후속 악장 복원 노력이나 개정 작업도 하지 않고 있는 것에 대한 비판까지 나오는 등 이 복원판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부정적인 것으로 보인다. 브루크너의 9번 교향곡 4악장의 더 완벽한 연주회용 판본을 위해 계속 이잡듯 자료를 뒤지면서 물고 늘어지고 있는 윌리엄 캐러건이나 니콜라 사말레, 벤야민 구나르 코어스 같은 음악학자들과, 죽기 직전까지 후배 음악학자들의 쓴소리를 수용하며 계속 개정판을 만들었던 말러의 10번 교향곡 보필자 데릭 쿡을 보면, 쿠퍼가 이 10번 교향곡이라는 작품에 대해 보여준 노력과 관심이라는 것이 생각보다 진지하지도 치열하지도 않다고 볼 수 있다.
어떤 음악학자들은 베토벤이 10번 교향곡에서 기독교 세계관과 고대 그리스 세계관의 융합을 추구하려 했을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이는 괴테의 영향이기도 하고, 베토벤이 10번 교향곡 외에 파우스트의 오페라화를 구상한 데서도 드러난다. 사실 9번 교향곡에서도 이미 그런 경향이 드러나기도 한다.
대작으로 유명한 교향곡 9번에 이은 곡인데다 베토벤 최후의 교향곡이란 점 때문에 만약 완성되었다면 어느 정도의 수준이었을지에 대해서 일반 대중들 사이에서도 떡밥거리로 남아 있다. 아예 이를 소재로 한 동명의 추리소설까지 있을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