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엄미사

라틴어 : Missa solemnis
영어 : Solemn mass

1 가톨릭의 전례인 미사의 한 양식

부제 복사를 대동하고[1] 향, 행렬용 십자가와 초가 사용되며 성대하게 거행되는 미사를 일컫는다. 보통 부활 · 성탄 대축일이나 다른 대축일이면 왠만한 본당에서 거행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주교급 성직자가 거행하면 특별히 주교 장엄미사(Missa solemnis pontificalis)라고 부르기도 한다.

자세한 것은 미사 항목 참조

2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작품

2.1 개요

정식 명칭은 장엄 미사 D장조(Missa solemnis in D-dur) Op. 123.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두 번째이자 마지막 미사곡. 흔히 이 곡과 교향곡 제9번, 피아노 소나타 제29번, 디아벨리 변주곡 네 곡을 베토벤의 후기 작품 세계를 본격적으로 보여주기 시작한 작품이라고 평하기도 한다.

베토벤은 이미 중기 시절이었던 1807년에 하이든이 오랫동안 봉직했던 에스테르하지 가문을 위해 미사 C장조를 작곡해준 적이 있었지만, 이 곡은 초연 때도 그랬고 그 이후에도 '뭔가 2% 부족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결국 그 뒤로 베토벤은 종교음악을 한 동안 쓰지 않았는데, 생애 후반기에 가서 다시 미사곡을 쓰기 시작한 것에는 나름대로 복잡한 사연이 있었다.

베토벤의 가장 중요한 귀족 후원자들 중에는 당시 신성로마제국 황족의 황태자였던 루돌프 대공이 있었는데, 비록 선천적인 간질병 때문에 형인 프란츠 2세에게 황제 자리를 넘겨주기는 했지만 황족이자 가톨릭 성직자로 갖는 권위 덕에 종종 싸이코 혹은 또라이로까지 여겨지곤 했던 베토벤을 자주 실드 쳐주던 인물이었다.

루돌프 대공은 1820년에 올뮈츠(현 체코 올로모우츠)의 대주교로 착좌하게 되었는데, 이미 전년도에 이 소식을 들은 바 있었던 베토벤은 착좌 미사에서 연주하게 할 목표로 이 미사곡의 작곡에 착수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고, 이후 특정 전례를 위해 작곡한다기 보다는 자신만의 의도로 창작하는 대작 개념으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9번 교향곡과 거의 병행해서 작곡했는데, 두 곡 모두 그 동안 이 분야에서 찾아보기 힘든 복잡한 구성과 장대한 규모를 지니고 있었으므로 작곡 속도는 대단히 더디게 진행되었다. 최종 완성한 해는 1823년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 당시 베토벤은 굉장히 신경이 날카로운 상태였으며, 한창 작곡 중에 약속이나 연락도 없이 찾아오면 시중들던 하녀든 절친한 친구든 귀족 나으리든 간에 욕설을 퍼부으며 내쫓아버렸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였다(...).

2.2 곡의 형태

일단 예나 지금이나 대개 엄격하게 지켜오고 있는 다섯 개 섹션으로 구성되는데, 물론 종교음악인 탓에 가톨릭 전례 형식을 준수하는 대목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도 꽤 된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모든 대목의 규모가 팽창되어, 전곡 연주에 70~90분 가까이 걸리는 대작이 되었다.

악기 편성은 플루트 2/오보에 2/클라리넷 2/바순 2/콘트라바순/호른 4/트럼펫 2/트롬본 3/팀파니/오르간/현 5부(제1바이올린-제2바이올린-비올라-첼로-콘트라베이스). 성악진은 소프라노-알토-테너-베이스(혹은 베이스바리톤) 독창과 혼성 4부 합창(소프라노-알토-테너-베이스)으로 구성된다.

1악장은 자비송(Kyrie)이며,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Kyrie eleison)'가 양 가에 놓이고 중간부에서는 단조로 조옮김된 '그리스도님 자비를 베푸소서(Christe eleison)'이 오는 ABA' 아치형 3부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는 대부분의 미사곡 자비송 대목에서 지켜오던 고전적인 규칙이지만, 전체 연주 시간이 10분 이상이라 단지 한 줄의 가사로 구성한 음악이라고 하기에는 굉장히 규모가 커졌다.

2악장은 대영광송(Gloria)이며, '하늘 높은 데서는 하느님께 영광(Gloria in excelsis Deo)'으로 시작하는 첫머리에서는 다소 금욕적이고 장중한 자비송과 대비를 이루도록 트럼펫과 팀파니 등을 앞세워 빠르고 화려하게 진행된다. 중간중간 미사 원문에 맞추어 경건하고 침착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부분도 있지만, 전반적으로는 첫머리가 기본 주제마냥 계속 모습을 조금씩 바꿔가며 등장한다.

이어 중간부로 볼 수 있는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Qui tollis peccata mundi, miserere nobis)' 대목으로 들어간다. 대부분의 미사곡에서처럼 베토벤도 이 부분의 템포를 느리게 잡고 단조로 조옮김해 진행시키고 있다. 자비를 갈구하는 이 대목이 끝나면 팀파니의 트레몰로와 함께 '홀로 거룩하시고, 홀로 주님이시며, 홀로 높으신 예수 그리스도님(Tu solus Dominus, Tu solus Altissimus, Jesu Christe)'으로 시작되는 마지막 섹션에 들어간다.

이 부분의 후반부는 '아버지 하느님의 영광 안에 계시나이다(in gloria Dei Patris)' 가사가 계속 반복되는 복잡하고 정교한 푸가로 구성되어 있다. 이미 후기 피아노 소나타와 변주곡 등에서 보여진 바 있는 푸가빠의 면모가 여기서도 나타나고 있는데, 베토벤이 존경했던 헨델의 오라토리오 '메시아'의 영향도 느껴진다.

3악장은 신앙고백(Credo)으로, 여타 라틴어 미사곡들처럼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경을 생략 없이 그대로 쓰기 때문에 대영광송과 함께 텍스트 분량이 많은 대목이다. 다만 베토벤은 이 모든 텍스트를 같은 비중으로 다루지 않았는데, 이는 선배 작곡가들 중 어느 누구도 시도하지 못한 파격이었다. 음악적으로도 주목할 만한 대목이 많은데, '또한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에게서(Et incarnatus est de Spiritu Sancto Ex Maria Virgine)'에서는 선법(도리아)을 사용하고 나지막하게 낭창하는 기법을 사용해 상당히 옛스러운 느낌을 주고 있다.

곧바로 이어지는 인류의 창조나 예수의 고난과 처형, 나흘 만에 부활하고 승천하는 모습을 서술한 부분에서는 각각 장조와 단조, 그리고 다시 장조로 복귀해 가사의 의미에 음악을 최대한 맞춰주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도 만년에 집착했던 대위법 기술에 대한 배려도 아끼지 않고 있다.

하지만 이 다음에 오는 대목에서 베토벤은 제대로 뒷통수를 치는데, 첫머리 선율이 다시 돌아오면서 '크레도'가 각 합창 파트에서 주고받으며 반복되는 가운데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를 믿나이다(Et unam, sanctam, catholicam et apostolicam Ecclesiam)' 부분을 다른 파트들에서 빨리 읊어버리듯 지나치게 하고 있다. 이 부분은 실제 공연이나 녹음에서도 크레도를 소리높여 부르는 파트에 가려 잘 들리지 않는데, 베토벤이 기독교에 대해 갖고 있던 복잡한 긍정과 부정의 자기 견해를 의도적으로 내비친 것으로 여겨져 키배논쟁 떡밥으로도 사용된다.

이렇게 구체적인 교회에 대한 신앙고백을 후다닥 끝내버린 뒤에는 '내세의 삶을 기다리나이다. 아멘(Et vitam venturi saeculi. Amen.)' 부분에 맞추어 두 번째로 거대한 푸가 대목이 나온다. 대영광송 후반부의 푸가와 마찬가지로 이 대목도 단순히 바로크 식의 푸가가 아니라, 그 안에서 나름대로의 형식과 발전을 지니고 생장하는 베토벤만의 푸가 개념으로 구성되어 있다.

4악장은 거룩하시도다(Sanctus)로, 흔히 다른 미사곡에서처럼 '높은 데서 호산나!(Hosanna in excelsis)'를 경계로 두 섹션으로 나뉜다. 처음에는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온 누리의 주 하느님(Sanctus, Sanctus, Sanctus. Dominus Deus Sabaoth)'을 조용한 관현악의 연주 위에서 독창자들이 아주 나지막하고 여리게 부르고, 이어 '하늘과 땅에 가득찬 그 영광! 높은 데서 호산나!(Gloria sunt caeli et terrae. Hosanna in excelsis)'를 합창이 전 관현악의 성대한 연주를 곁들여 빠르고 화려하게 부른다.

이 대목이 마무리되면 다시 첫머리의 경건한 분위기를 살린 관현악 간주 부분이 이어지고,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 받으소서(Benedictus qui venit in nomine domini)'[2]를 합창과 독창자들이 서정적으로 부르기 시작한다. 특히 이 부분에서는 바이올린 독주가 곁들여지기 때문에, 청자들은 마치 바이올린 협주곡 혹은 바이올린 독주를 동반한 합창곡 같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는다. 흔히 앞에서 나온 텍스트라서 앞의 음악을 그대로 반복하는 마지막 구절인 '높은 데서 호산나!' 도 이 분위기를 그대로 이어가 새롭게 작곡하고 있다.

마지막 5악장은 하느님의 어린양(Agnus Dei)으로, 3악장 못지 않게 음악과 텍스트의 규칙 파괴로 논쟁의 대상이 되곤 한다.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Agnus Dei, Qui tolis peccata mundi, Miserere nobis)'가 반복되는 첫머리는 단조 조성으로 작곡되고 전체적으로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로 일관해 '대영광송'의 중간부에서 보여준 자비를 갈구하는 신자들의 심정을 묘사하고 있다.

이 분위기는 중간부에서 '평화를 주소서(Dona nobis pacem)'라는 전례문 마지막 텍스트가 합창에 의해 불려지기 시작하면서 밝고 전원적인 분위기로 바뀐다. 하지만 이 대목은 갑자기 팀파니와 트럼펫의 기상나팔 스타일 연주가 멀리서 들려오듯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중단되는데, 독창자들이 다소 긴장된 낭창조로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를 번갈아 부르면서 갑자기 텐션이 높아진다. 특히 테너 독창자는 '자비를, 자비를,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대단히 절박하게 노래한다.

이러한 극단적인 악상 대비는 이후에도 한 차례 더 반복되는데, 결국 마지막에서는 '평화를 주소서'의 대목이 주도권을 얻어 밝은 분위기를 회복하며 끝맺는다. 하지만 최후반부에 가서도 팀파니가 간간이 연주하는 솔로가 '과연 평화가 주어질까?' 하는 식의 의문점과 불길함을 계속 남기고 있다.

신앙고백 후반부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보통 이전 텍스트는 반복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깨져 있고, 게다가 극적으로 등장하는 타악기와 금관악기, 전 관현악의 강한 행진곡 리듬은 '평화를 주소서'라는 바로 앞의 텍스트와는 완전 상반된 전쟁의 이미지를 강하게 각인시키고 있어서, 종교적인 미사곡에 세속 음악의 구성 원리를 도입한 것으로 여겨져 많은 비판을 받았다.

교향곡 9번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미사곡의 가창 난이도는 극악이다. 대영광송과 신앙고백 후반부의 푸가는 특히 심한데, 전자는 헨델 풍의 빠른 대선율 처리가 특히 힘들고 후자는 한술 더 떠 베이스 파트에서 엄청나게 길게 끄는 음[3]이 등장하는 등 웬만한 범인들은 이해 못할 목소리 처리가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이 때문에 브람스독일 레퀴엠과 함께 최상급 합창단의 역량을 확인할 수 있는 곡으로 손꼽히는데, 물론 독창자들에게 주어지는 가창 대목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지만 아무래도 합창의 비중이 좀 더 높은 편이다.

2.3 초연과 출판

1824년 4월 7일에 러시아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전곡 초연이 이루어졌는데, 다만 이 때는 미사곡이 아닌 오라토리오로 소개되었다. 하지만 베토벤은 이 장르 파괴 소식을 듣고도 화를 내지 않았고, 오히려 한 달 뒤인 5월 7일에 빈에서 개최된 교향곡 9번의 초연 무대에서 1부 연주곡으로 이 곡의 자비송과 신앙고백, 하느님의 어린 양 세 개 악장을 발췌해 공연하기까지 했다.

다만 이것은 일종의 고육책이었는데, 당시 미사곡은 대중 음악회에서 그대로 연주할 수 없다는 검열 당국의 규정 때문이었다. 실제로 당시 프로그램을 보면 이들 발췌 악장은 '독창과 합창이 수반된 세 곡의 대규모 찬송가'라고 개명되어 인쇄되어 있다.

베토벤은 교향곡 9번과 마찬가지로 이 곡을 여러 음악 출판사에 중복 계약해 인세 수입을 몇 배로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는데, 다만 어느 출판사도 이 계약을 반기지 않았고 이 과정에서 오랜 지인들과도 사이가 틀어지는 등 개인적인 인간 관계 면에서 심한 타격을 입기도 했다.

또 이 과정에서 베토벤이 이 곡을 '오직 가톨릭 전례를 위해' 쓴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는 에피소드도 있는데, 자신이 교섭한 출판사들 중 짐로크 출판사에는 라틴어로 된 미사 통상문에 의거한 원본 외에 독일어로 번역한 가사를 사용한 판본을 출판해도 된다고 편지에 쓰기도 했다. 당시 가톨릭 교회들에서는 오직 라틴어로만 미사를 봉헌하고 있었기 때문에, 독어판을 만들었다는 것은 곧 성직자와 평신도들의 모국어로 예배를 집전하는 개신교 종단에도 이 곡의 사용을 허락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2.4 평가

하지만 이 곡은 그 때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로 가톨릭이든 개신교든 일반적인 기독교 종단의 예배에 쓰기에는 너무 규모가 큰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게다가 연주 난이도도 높다 못해 극한을 추구하는 수준이니 전문 연주자들이 아니며 엄두조차 내기 힘든 것이 현실. 실제로 이 곡의 연주는 대부분 콘서트홀이나 오페라 하우스 등 '세속적인' 공연장에서 행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만약 종교 시설에서 연주한다고 해도 예배의 한 부분으로 취급되는 경우는 전무하다.

음악적으로만 따져보면 교향곡 9번에 맞먹는 최상급의 완성도를 갖고 있다고 보는 견해가 많은데, 다만 곡의 곳곳에서 보여지는 전통과 당대 어법의 혼용, 미사 전례문에 대한 도전적인 재해석이나 자의적인 비중 변경 등은 20세기에 가서까지도 테오도어 아도르노를 비롯한 음악비평가나 음악학자들의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파울 베커 같은 경우에는 이 곡을 미사곡이라기 보다는 교향곡으로 분류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실제로 이 곡에서 관현악이 꽤 강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점에서 9번 교향곡의 쌍둥이 작품이라고 보는 견해가 이상하다고 볼 수는 없다. 다만 베토벤이 오로지 기악적 관점에서 이 곡을 작곡했다고 본다는 것도 언어도단이고, 미사곡과 교향곡의 양식이 혼입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좀 더 균형잡힌 주장으로 여겨지고 있다.

베토벤 자신이 일기나 편지 등에 남긴 작곡 경과를 보더라도, 그 자신도 이 곡을 쓰면서 꽤 여러 면에서 고심하고 때로는 갈팡질팡한 것을 알 수 있다. 작곡 초기에는 그레고리오 성가에서 당대 전례 음악까지 모든 성가의 전례문과 운율, 음악적인 기법을 연구할 것을 자기 자신에게 요구했고, 이 과정에서 팔레스트리나조스캥 데 프레, 기욤 뒤파이, 요하네스 오케겜 등 중세 시대의 성가나 미사곡 악보까지 뒤져가며 작곡에 응용하기 위해 애썼다.

물론 이러한 옛 음악에 대한 탐구는 대영광송의 후반부 푸가나 신앙고백의 중간부에 나오는 그레고리오 성가풍 가창과 후반부 푸가 등에서 응용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베토벤이 옛 음악의 굴레에만 얽매여 있었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대위법 기교만 하더라도 만약 16세기나 18세기 대위법 숙제로 제출하면 최하점을 받을 만큼 이곳저곳에서 규칙을 무시하고 있지만, 이런 규칙 파괴는 실력이 모자라서가 절대 아니라(..) 철저하게 음악적인 효과를 노리고 의도한 것으로 베토벤 자신의 정밀한 설계와 음악적인 기복의 배치가 훨씬 효과적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이거 가지고 태클을 거는 이는 거의 없다.

신앙고백과 하느님의 어린양에서 나타나는 이전 가사의 재활용이나 가사와 대비되는 악상의 갑툭튀도, 베토벤이 이 곡을 단순히 종교 전례에 복종하고 예속되는 음악으로 보지 않았다는 반증도 된다. 물론 베토벤은 이 곡이 '청중들에게 종교적인 감정을 일깨우고 또 영원히 하도록 작곡되었다'고 주장했고, 후대 음악학자들도 이 곡이 특정 종파에서 주장하는 '영성'을 담고 있지는 않더라도 종교음악으로서 가지는 특성도 분명히 갖고 있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다만 여기서 베토벤 자신이 기독교에 갖고 있던 독특한 관점을 발견할 수 있다. 공식적으로 베토벤은 태어난 직후 가톨릭 유아세례를 받은 인물이었고, 죽기 직전에도 신부에게 병자성사를 받고 장례식도 가톨릭 의례에 맞춰 치러졌다. 하지만 그는 평생 종교 그 자체에 무조건 복종하는 자세는 취하지 않았고, 가끔 감정이 격해지면 '그저 예수십자가에 매달린 유대인일 뿐'이라는 신성모독성 발언까지 할 정도였다. 이 때문에 베토벤은 당시 비밀경찰의 사찰 대상으로 지정되기까지 했다. 물론 정치적으로 극단적인 발언을 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물론 베토벤이 자신의 종교관을 직접적으로 밝힌 자료는 없어서 평가는 가지각색으로 나오고 있지만, 베토벤이 당대 유럽을 휩쓸었던 계몽주의와 종교에 대한 신심을 연관시켜 해석했다는 것은 사실로 인정되고 있다. 그리고 고대 그리스인도 신화에 심취한 적도 있음을 들어 범신론자였을 것이라는 추측도 제기되고 있다.

이러한 종교관을 집약해 보자면, 베토벤은 가톨릭 전례문을 토대로 하고 있는 이 곡에서 특별히 어떤 종파나 전례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만의 방법으로 신과 소통하려 하는 곡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동시에 이 곡에서 오랫동안 서구 사회와 사상을 지배해 온 영성과 신성이 시민 혁명과 산업 혁명으로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한 과학과 이성에 심각한 도전을 받기 시작하던 과도기의 사회상을 엿볼 수 있다는 음악사회학자들의 견해도 제시되고 있다.

여담으로 신 다음으로 베토벤을 존경했다는 푸르트뱅글러는 친구와 길을 걷다 바흐의 미사 B단조와 베토벤의 장엄미사 중 어느 곡이 더 훌륭한가 의견을 나누었는데, 친구가 바흐의 작품이 보다 간결하고 종교적 본질에 충실하다는 뜻을 피력하며 손을 들어주자 "자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더 이상 친구로 지낼 수 없겠는 걸." 이라 말하며 홱 토라지는(...) 모습이었다고. 그 외 브루크너의 미사곡을 격찬하며 이에 견줄 작품은 베토벤의 장엄미사와 바흐의 미사 B단조 뿐이라고 평하는 당대 평론가도 있었을 정도로 이미 이전부터 바흐와 베토벤의 두 작품은 상반된 성격을 지녔으면서도 그 완성도와 깊이 덕분에 자주 비견되곤 했으며 단순히 미사곡의 준거기준을 넘어 서양음악 사상 최고봉에 위치한 작품들이라 평가받았다.

하지만 정작 푸르트뱅글러 본인은 숱하게 연주한 교향곡 9번과 달리 장엄미사 녹음은 전혀 남기지 않았는데 젊은 시절에는 몇 차례 연주한 듯 하나 이후로는 좀체로 자신이 원하는 형태로 구현할 수가 없었기에 결국 포기했다는 식의 발언을 남겼다. 위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장엄미사의 연주 난이도가 얼마나 극악한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현재도 장엄미사의 결정반은 찾을 수 없고 실연에서도 완벽한 연주를 성사하기란 불가능하지만 연주자가 도달하기 위해 분투하는 과정[4] 그 자체에 의의가 있고 또 그렇게 의도되었다는 평가도 있을 정도다.

  1. 트리엔트 미사에서는 차부제도 대동한다.
  2. 이 미사 뿐 아니라, 몇몇 음반들에서는 '거룩하시도다'의 후반부에 해당하는 이 부분을 아예 '베네딕투스(Benedictus)' 로 독립시켜 한 트랙으로 나누곤 한다. 물론 미사 전례문에는 그러한 분리가 없다.
  3. 쉽게 구할 수 있는 브라이트코프 운트 헤르텔의 베토벤 구전집 총보 151~152쪽에서 확인할 수 있다. Et vitam의 tam을 무려 여섯 마디 반이나 쭉 끌고 있는데, 셈여림도 스포르찬도(sf)라서 작게 부를 수도 없다! 어지간한 폐활량을 가진 가수가 아니라면 숨이 턱에 받혀 주저앉는 대목. 베토벤의 S속성이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4. 반농담이지만 하느님의 어린 양 대목에서 '자비를 베푸소서' 간구하는 알토 독창자의 뺨이 붉어지고 숨결이 거칠어지는 것을 안쓰럽게 지켜보자면 단번에 텍스트의 의미와 함께 인간의 무력함과 절박함을 몸으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