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역대 라이프치히 성 토마스 교회 칸토르
요한 쿠나우요한 제바스티안 바흐고트롭 하러
엘리아스 하우스만이 그린, 61세의 바흐 (1746년)[1]
이름Johann Sebastian Bach Ji Sung Bach
출생1685년 3월 21일 작센-아이제나흐
사망1750년 7월 28일(65세) 작센 선거후 라이프치히
직업작곡가, 오르가니스트
서명


" 바흐는 모든 음악의 시작이며 끝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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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 막스 레거
" 바흐는 우리의 경애하는 음악의 주님이다. 모든 작곡가들은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그에게 기도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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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드 드뷔시
" 그는 작은 시냇물(Bach)이 아니라, 크고 광활한 바다라고 해야 마땅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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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트비히 판 베토벤

1 소개

음악의 아버지, 서양음악 최고의 거장 중 하나

1685년 3월 21일 ~ 1750년 7월 28일. 독일의 바로크 작곡가로, 일명 음악의 아버지로 불리는 서양 클래식 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음악가 중 한 명. 기나긴 서양 음악의 역사에서 음악성이나 업적, 명성 등에서 바흐에 필적할 수 있는 인물은 모차르트베토벤밖에 없다.

과거 외래 표기법이 정리되지 않았을 때는 이름을 바'하'로 표기한 서적이 많았다. 일본 서적에서는 바하(バッハ)라고 표기하기 때문.[2] 현대에도 이런 옛날 서적을 참고 자료로 쓴 글에서 가끔 '바하'란 표현이 나온다.
독일어 발음은 '바흙'이다

베토벤은 바흐를 가리켜 "그는 냇물이 아니다. 바다다."라는 표현을 남기기도 하였다.[3] 클래식 갤러리에선 바본좌로 칭해진다.

또한 제바스티안 이전에도 17세기 초엽 이래 많은 유명한 작곡가를 배출했고, 일족의 중심지이었던 중부독일의 튀링엔 지방에서는 '바흐'가 '거리의 악사'를 가리키는 대명사로 쓰였을 정도였다. 그 중에서도 제바스티안의 큰할아버지 하인리히 바흐(1615-1692), 그 아들 요한 크리스토프 바흐(1642-1703)와 요한 미하엘 바흐(1648-94)는 음악사(史)에도 이름을 남긴 뛰어난 작곡가들이었다. 바흐 집안의 음악가들은 대대로 루터교 정통파의 경건한 신자들이었고, 또 자기의 일에 강한 장인(匠人)적인 긍지를 품고 있었다. 이 '신앙'과 '장인기질(匠人氣質)'은 요한 제바스티안에게도 계승되어서, 마치 2개의 정선율(定旋律)과 같이 그의 일생을 관통하게 된다.

흔히 바로크 음악의 끝을 1750년이라 하는데, 그 이유는 이 해에 바흐가 사망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4]

놀랍게도 루터교의 성인이기도 하다.


2 생애

그의 생애는 보통 그가 옮겨다녔던 지역을 따라 구분하는데 대체로 어린 시절을 제외하고 아른슈타트 시절(1703-1707) - 바이마르 시절(1708-1717) - 쾨텐 시절(1717–1723) - 라이프치히 시절(1723–1750) 이렇게 구분한다.

최근에는 이 통상적인 구분을 좀 더 세분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아른슈타트와 바이마르 시절 사이에 뮐하우젠에 잠깐 있던 시기도 따로 구분하고 라이프치히에 정착한 시기를 종교음악 작곡기/콜레기움 무지쿰 시기/최후기 이런 식으로 세분하는 식.


2.1 초기

1685년 3월 독일의 튀링엔 지방의 소도시 아이제나흐에서 음악가인 요한 암브로지우스 바흐[5]의 아들로 태어난다. 3월 23일에 그 곳의 성(聖) 게오르크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출생한 것은 3월 21일이라는 설도 있다.). 바흐 가(家)는 200년간 유럽의 명문 음악가문으로 군림한 본좌급 집안이기에 바흐 역시 아버지나 형들의 영향을 받아 음악에 다양한 관심을 보였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에게서 바이올린을, 사촌 큰아버지한테서 오르간을 배우고, 한편으로는 교회 부속학교에도 다니면서 성가대원으로서도 활약하였다. 아이제나흐는 종교 개혁자 루터가 신약성서 번역을 한 곳이며, 이는 작센 선제후가 그를 보호해 주었기에 가능했다. 어린 바흐의 음악성과 종교적 품성의 기초는 이러한 환경에서 이루어졌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9세에 어머니를 잃고 이듬해엔 아버지를 잃었던 바흐는 불우하고 어려운 유년기를 자신보다 14살이 많은 맏형의 집에서 보냈다. 바흐는 맏형 요한 크리스토프 바흐(1671-1721)와 함께 오어드루프(Ohrdruf) 시로 옮겨간 후 형으로부터 본격적으로 작곡의 기초를 배웠다.[6] 이 형은 당시의 대 작곡가 요한 파헬벨[7]의 제자로서, 제바스티안도 형을 통해 파헬벨의 양식을 배웠으며 그의 초기작품에서는 파헬벨의 영향이 그대로 드러난다.

이 맏형은 또한 야콥 프로베르거, 요한 카스파르 케를, 디트리히 북스테후데등 당대 명작곡가의 작품 사보를 많이 소장하고 있어서 어린 제바스티안은 몰래 그것들을 달빛에 의존해서 필사해가며 공부하다가 형에게 들켰다는 일화도 있다. 또한 오어드루프의 학교에서 라틴어와 루터 정통파 신학을 배운 것도 장래의 바흐에게 있어서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다 형 부부가 아이를 계속 낳으면서 부양할 가족이 늘어나자 바흐는 자립을 해야 했다. 15세때 큰 형을 떠나 북부독일의 뤼네부르크의 고등학교에 장학생으로 들어갔으며 여기서 오르가니스트 겸 작곡가인 게오르크 뵘(Georg Boehm, 1661-1733)의 음악을 접하게 되었다. 1701년에는 함부르크로 여행을 가서 당시 북독일 오르간악파의 거두인 얀 아담스 라인켄(Jan Adams Reinken, 1643-1722)을 알게 되었다. 이 시절에 게오르크 뵘의 영향이 반영된 오르간 코랄변주곡이나 프랑스양식에 의한 클라비어의 모음곡 등이 작곡되었다.


2.2 아른슈타트 - 뮬하우젠 시절

1702년 봄에 18세로 학교를 졸업한 바흐는 고향인 중부 독일로 돌아갔다. 원한다면 동갑내기 헨델처럼 해외에서 명성을 쌓을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바흐는 자립하기 위해 1703년 4월부터 한때 바이마르 궁정의 악단에서 바이올린 주자로 일하고, 그 해 8월에는 아른슈타트(Arnstadt)의 성 보니파체 교회에 오르가니스트로 채용되었다. 하지만 20살의 패기 넘치는 청년 바흐는 교회 성가대원들의 수준이 만족스럽지 않다는 이유로 금녀의 구역이었던 성가대석에 여인을 데려오거나 맘에 안 드는 성가대원과 몸싸움도 서슴지 않는 등 고용주인 교회와 사사건건 갈등을 빚었고, 결국 자신의 직업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다.[8] 1705년, 이런 와중에 그는 당대의 대작곡가 디트리히 북스테후데(1637-1707)의 연주를 듣기 위해 4주간의 휴가를 얻어 400km 떨어진 뤼베크까지 걸어 갔다. 근데 4주 휴가라고 해놓고 갔다온 기간은 4개월... (...) 정말 교회가 스트레스기는 했던 모양이다.
어쨌든 고생한 보람이 있어서 바흐는 북스테후데(1637-1707)의 작품과 오르간 연주에 커다란 감명을 받았으며, 이 영향은 이 시기 바흐의 오르간곡에 명확하게 나타나고 있다. 유명한 오르간 곡인 <토카타와 푸가> (BWV 565)도 이때 작곡하였다.

바흐의 열정과 재능이 매우 마음에 들었던 북스테후데는 이미 70이 넘은 고령이었으므로 자신이 맡고 있던 뤼베크 교회의 오르가니스트 자리를 바흐에게 물려주려고 했다. 그러나 북스테후데의 딸 마르가리타와 결혼해야 한다는 조건이 문제였는데, 바흐는 결국 이 조건을 거부하고 뤼베크를 떠난다. 당시 마르가리타는 바흐보다 10살이나 위인 30살인데다 별로 예쁘지도 않았고 바흐는 자신의 6촌이자 한살 아래였던 마리아 바르바라와 한참 연애중이었다. 그런데도 북스테후데가 바흐와 자기 딸의 결혼을 제안한 것은 이 교회의 오르가니스트는 전임 오르가니스트의 직계 자손 즉, 전임자의 아들이나 사위만 그 자리를 승계할 수 있다는 규칙이 있었기 때문이다. 북스테후데 또한 전임 오르가니스트의 딸과 결혼하여 그 직위에 오를 수 있었다. 한편 바흐가 북스테후데를 만나기 2년 전에 헨델이 뤼베크에 와서 북스테후데에게 똑같은 제안을 받은 적이 있었다. 물론 헨델 역시 이 요청을 거절하고 뤼베크를 떠났다. [9]

바흐가 뤼베크에서 아른슈타트로 복귀한 후 교회의 감독격인 시의 성직회의(聖職會議)에서는 그가 4개월이나 자리를 비운 것에 대한 무책임을 비난했으며, 이 외에도 바흐가 오르간 연주시에 그간 들어보지 못한 이상한 악구를 많이 삽입하고 성가대의 훈련을 게을리 한다는 점 등등의 불만을 계속 제기했다.[10]

이를 견디다 못한 바흐는 결국 1707년 6월 새로운 직장을 찾아 같은 중부 독일에 있는 뮬하우젠으로 갔다. 뮬하우젠은 작은 도시로 음악환경이 열악했으며 봉급도 박한데다 바흐가 오기 얼마 전에는 큰 화재가 나서 숙소를 구하기도 쉽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바흐는 같은해 10월 10대시절부터 사귀었던 마리아 바르바라와 결혼하였다.

뮬하우젠에서는 교회 오르가니스트로서 활약하는 한편 종교음악에 대한 열의를 다지면서 칸타타 제71번[11], 제131번, 제106번 등 초기 칸타타의 명작을 작곡하였다. 특히 시 의회의 취임식 기념행사에서 연주된 칸타타 71번은 엄청난 호응을 얻었고 이 성공을 바탕으로 바흐는 시의회로부터 교회 오르간의 대폭적인 개선 약속을 받아 내었다.[12]

이렇게 뮐하우젠에서 나름 자리를 잡나 싶었는데 이번에는 뮬하우젠의 도시 분위기가 문제였다. 당시 뮬하우젠은 루터파에 속한 지역이었는데 루터파 중에서도 엄격한 교리의 준수를 중요시 여기고 종교행사에 음악을 중요시 여기는 소위 정통주의(Orthodox Lutheran)와 개인적인 신앙심을 강조하면서 인간의 마음을 타락시키는 음악과 예술을 배격하는 경건주의(Pietists)의 대립이 격해지고 있었다.[13]

그런데 뮐하우젠에서는 경건주의가 우세해져서 점차 음악활동이 위축되었으며 바흐의 직속 상관도 하필 경건주의자였다. 운신하기 어려워진 바흐는 다른 직장을 알아보기 시작했는데 마침 작센바이마르 공이 그를 데려가려고 하였고 그는 바로 승낙했다. 다만 그는 자신이 계획한 오르간의 개축이 완료될때까지 공사 감독직은 그대로 맡기로 하였으며 다음해 개축이 완료되자 뮐하우젠에 가서 기념 연주를 하기도 했다.


2.3 바이마르 시절

뮐하우젠 다음으로 바흐를 맞이한 것은 작센바이마르 공의 바이마르 궁정이었으며 1708년 7월 바흐의 나이 만 23세때였다. 한때는 악사로서 취직하였던 추억의 고장으로, 이제 젊은 대가가 된 그는 궁정 예배당의 오르가니스트로서 돌아왔으며 바흐의 능력을 높이 산 바이마르 왕실에서는 그에게 뮐하우젠 시절의 2배에 해당되는 월급을 주었다.[14]

이 바이마르 시대(1708-1717)는 바흐의 '오르간곡의 시대'라고도 불리며, 현존하는 오르간곡의 태반이 여기서 작곡되었다. 바흐는 이미 20대 초반에 오르간 연주자로서 명성이 독일 전체에 알려져 있었다. 나름 명성이 높아진 바흐는 바이마르보다 좀더 큰 곳에서 일하기를 원했으며[15] 틈이 날 때마다 마이닝겐, 드레스덴, 라이프찌히, 헨델의 탄생지인 할레 등등으로 일종의 구직여행을 다녔다. 할레 사람들은 그의 오르간 연주와 음악에 감탄해서 바흐를 오르가니스트로 맞이하려고 했으나, 처우조건이 맞지 않아 결국 결렬되었다.

바흐가 딴마음을 품고 있는 것을 알게 된 바이마르 궁정에서는 그를 붙잡아두기 위해 월급을 인상해주고 1714년에는 궁정악단의 콘서트마스터로 임명했다. 승진되면서 바흐에게는 새로운 의무가 생겼는데 바로 매달 1곡씩 새로운 칸타타를 작곡하여 선보이는 것이었다. 이에 바흐는 울며 겨자 먹기로 (...) 매달 1곡씩 교회 칸타타를 작곡하였다. 어쨌든 이 시기에 <울며 탄식하고 근심하며> (BWV12) 칸타타라든지 옆동네 영주의 생일을 축하하는 <사냥 칸타타>(BWV208) 등이 작곡되었다.

이 시기에 바흐는 오르가니스트로도 크게 활약하였는데 <오라 성령이여, 주 하느님이여> (BWV 651)같은 유명한 코랄을 주제로 한 오르간 곡들이 많이 탄생하였다. 그러나 바이마르에서 바흐의 음악적 성과는 오르간곡이나 칸타타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바이마르의 궁정은 루터 정통파에 속해 있어서 상당히 엄격한 교리를 준수했으나 음악적인 측면에서는 이 방면 선진국인 이탈리아의 음악을 받아들여 협주곡이나 오페라 등의 이탈리아 음악들이 자주 연주되고 있었다. 특히 바흐는 비발디를 비롯하여 코렐리, 토렐리 등의 기악 협주곡에 크게 주목하여 그것들을 열심히 연구하였다.[16] 이후 바흐의 작풍에는 이탈리아 협주곡의 형식과 기법(技法)의 영향이 크게 나타나게 되는데, 바이마르 후기에 작곡된 오르간 음악을 보면 이탈리아 음악의 영향이 강하게 느껴진다.

바흐는 바이마르에서 나름 행복하게 지냈으나 바이마르의 영주와 그의 조카 에른스트 아우구스트(Ernst August) 사이에 싸움이 벌어지는 바람에 양쪽 집안 사람들끼리의 교류가 금지되었고, 어느 한쪽 편을 들기 어려웠던 바흐는 난감한 상황에 처하게 됐다. 게다가 1716년 말에 궁정악장 사무엘 드레제(Johann Samuel Drese)가 죽었는데, 바이마르 영주는 섭섭하게도 바흐를 제쳐두고 처음에는 텔레만에게 후임자리를 제안했다가 거절당하자 별 경력도 없는 드레제의 아들 요한 드레제에게 덥썩 악장을 맡겨버렸다. 당시 바흐는 노쇠한 궁정악장을 대신해서 사실상 악장의 대리격으로 업무를 맡아보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자신이 후임으로 임명될 것으로 생각했는데 제대로 뒤통수를 맞은 것이다.[17]

이에 크게 상심한 바흐는 바이마르를 떠날 결심을 하게 되었고 이후 그는 칸타타 작곡 의무를 이행하지 않음으로써 노골적으로 사임의사를 내비쳤다. 이때 쾨텐의 영주이자 엄청난 음악 애호가였던 안할트쾨텐 대공 레오폴드의 귀에 이 소식이 들어가게 되었다. 대공은 바이마르 영주의 조카의 주선으로 바흐에게 궁정악단장 자리를 제안했으며 바흐는 즉시 이를 수락하고 일단 가족들부터 쾨텐으로 이주시켰다.

1717년 9월에는 드레스덴으로 가서 루이 마르샹과의 하프시코드 연주 대결을 하였는데 마르샹은 바흐의 연주솜씨를 보고 경쟁을 포기하였다고 한다.[18] 싱겁게 승리를 거둔 바흐는 사퇴 수속을 마치기 위해 바로 바이마르로 돌아왔다. 하지만 바이마르 영주는 바흐를 놓치기 싫었던데다 자신과 상의도 없이(그것도 하필 자기와 사이가 나쁜 조카의 주선으로) 급하게 이직을 추진한 젊은 음악가에게 크게 분노하여 허락 대신 구류명령을 내려보냈다. 바흐는 실제로 한달 가까이 감옥에 갇혀 있어야 했는데 바흐는 감옥에서도 작곡이랑 곡 개정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나마 12월이 되면서 영주의 마음이 풀려서 간신히 이직 허락이 떨어졌다.


2.4 쾨텐 시절

1718년 8월, 바흐는 쾨텐 궁정에 악장으로서 취임하였다. 궁정악장은 당시의 독일에서 음악가가 바랄 수 있는 최고의 사회적 지위이며, 음악을 사랑한 젊은 영주도 바흐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이례적인 후대를 베풀었다. 쾨텐의 궁정은 칼뱅파여서 교회음악을 그다지 중요시하지 않았으므로 바흐의 중요한 직무는 영주나 귀족들을 위하여 세속적인 합주곡이라든가 실내악을 작곡하는 일이었다. 그래도 영주의 탄생일과 신년 등의 기념행사에는 1곡 정도의 칸타타나 종교음악이 연주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에 나름 많은 수의 종교음악을 작곡했을 것으로 보고 있으나 현재는 3곡의 세속칸타타만 전해질 뿐이고 이 때 작곡된 종교음악은 아쉽게 모두 유실되었다.

여튼 쾨텐 궁정에서 바흐는 6곡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BWV1046-1051),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와 파르티타(BWV1001-1006), 무반주 첼로 모음곡(BWV1007-1012)을 비롯한 그의 대표적인 기악곡의 대다수가 작곡되었다. 정신적으로도 물질적으로도 풍성한 생활을 반영하는 것처럼 그것들은 밝고 즐거운 표현으로 넘쳐 있었다. 아내가 죽기 전까지는 사생활도 평온해서 바흐는 아내와의 사이에서 7남매를 얻었다고 한다.[19]

바흐의 첫 번째 부인인 마리아 바르바라는 가정을 꾸려나가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였다. 바흐는 아내에게 집안의 거의 모든 일을 맡겼고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1720년 아내가 사망하자 바흐는 크나큰 상심을 했다고 한다. 자신이 쾨텐 공작 레오폴드를 따라 연주 일정을 소화하고[20] 집에 돌아올 때쯤 아내의 부고를 듣고 황급히 집에 와보니 이미 장례까지 치른 뒤였다고 한다. 장의사가 청구서를 내밀자 바흐는 무심한 말투로 "아내에게 물어보시오..."라고 말했다.

다음해인 1721년, 그는 16세 손아래인 소프라노 가수 안나 막달레나와 재혼하고, 13명의 아이를 얻었다. 합계 20명의 자녀 가운데서 약 절반은 어렸을 때에 사망하였는데, 나머지 아이들은 모두 선천적으로 뛰어난 음악적 재질을 지니고 있었으며, 특히 장남인 빌헬름 프리데만(1710-1784), 차남인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막내아들 요한 크리스티안(1735-1782)[21]은 음악사(史)에 이름을 남기는 뛰어난 작곡가로 성장하였다. 두 번째 부인 안나 막달레나 바흐는 바흐 사후 그를 회고하는 수기를 남겼다.

쾨텐시절에는 이들 아이들이나 또는 바흐의 명성을 흠모하여 모여든 제자들을 위하여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 제1권(BWV846-869), <인벤션>(BWV772-801)을 비롯한 수많은 클라비어곡도 작곡하였다. 대단도 하시다 바본좌...

바흐는 모처럼 행복한 음악생활을 하게 된 쾨텐에서 여생을 보내려고 했던 것 같다. 하지만 후술하다시피 그는 6년만에 라이프치히로 옮기게 된다. 그가 약속의 땅 쾨텐을 떠난 이유는 그간 '교회음악에 대한 욕심' 때문이라는 종교적인 관점으로 이해하는게 대세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좀더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는데, 후에 그가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 보면 쾨텐의 영주가 결혼한 후 음악에 대한 관심이 많이 사그러들었다는 것, 아들들을 대학에 보내고 싶은데 쾨텐에는 대학이 없었다는 것, 라이프찌히의 급여제안이 상당히 좋았다는 것 등등을 쾨텐을 떠난 이유로 들고 있다.[22]

다행히 대인배였던 쾨텐의 영주는 바흐가 사임의사를 밝히자 바이마르 영주처럼 지저분하게 굴지 않고 깨끗하게 바흐를 놓아주었으며 큰 도시 라이프치히로 떠나는 바흐의 건승을 기원해 주었고, 심지어 추천서까지 써준다. 하지만 바흐의 선택은 그리 현명했다고 볼 수는 없는데......


2.5 라이프치히 시절과 말년

2.5.1 참 힘든라이프치히 칸토르 발탁

1722년 6월 라이프치히의 성 토마스교회의 칸토르[23]였던 요한 쿠나우의 사망으로 시 참사회는 그 후임을 찾았다. 당시 가장 유명한 작곡가이자 함부르크 오주(五州)교회 감독이었던 게오르크 필리프 텔레만이 첫번째로 물망에 올랐으나 그는 함부르크를 떠날 생각이 없다며 라이프치히의 제안을 고사했다.[24][25]

다음으로 역시 만만찮은 당대의 인기작곡가였던 다름슈타트 공국의 궁정악장 크리스토프 그라우프너가 직접 이 자리를 원했으나 다름슈타트에서 그를 적극 붙잡는 바람에 그라우프너도 결국 오지 못했다. 이에 라이프치히 시 참사회는 '우수한 인물은 데려오기 어려우니 2류급 작곡가라도 데려오자.'라고 제안했는데 그 2류 작곡가가 바로 바흐(...).[26]

라이프치히의 제안을 받기 몇 개월 전에 바흐는 라이프찌히 시의 의뢰로 요한 수난곡(St John Passion BWV245, 1723)을 작곡했으나 텔레만이나 그라우프너보다 낮은 평가를 받았다.[27] 하지만 두 사람의 고사로 인해 바흐에게 기회가 주어졌으며 1723년 5월 중순에 라이프치히 교회의 칸토르직 취임이 결정되었다.


2.5.2 1720년대

바흐는 이 라이프치히 칸토르에 취임한 후 평생 이 자리에 있었다. 하지만 결코 라이프치히의 음악환경이 평온했던 것은 아니었다. 청운의 뜻을 품고 과감하게 행복한 쾨텐생활을 정리하고 온 바흐였지만 라이프치히의 생활은 기대했던 것과 너무나 달랐다. 라이프치히시는 쾨텐의 영주처럼 자신을 조용하게 음악일에 전념하도록 내버려두지도 않았고 급여도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적었다.[28] 게다가 라이프치히의 합창단과 악단은 제대로 훈련되지 않았으며 규율도 엉망이었다.

자기의 이상을 끝까지 관철코자 했던 원칙주의자 바흐는 시의 당국자나 교회의 책임자들과 자주 충돌하다가 점차 교회음악 일에 열의를 잃었다.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이 시기의 대표작이자 종교음악의 절정을 이룬 마태 수난곡(BWV244), B단조 미사(BWV232),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BWV248), 160여곡의 교회 칸타타 등의 작품들은 대부분은 라이프치히 시대의 최초의 수년간에 작곡된 것이며 1730년 정도를 기점으로 교회음악 작곡빈도는 급격하게 줄어든다.


2.5.3 1730년대

충돌을 거듭하던 바흐와 시참사회는 결국 1730년 8월 시 참사회가 바흐의 직무태만과 바흐가 건의한 개선안의 불경함 등을 문제삼아 감봉을 결정하고 바흐는 바흐대로 죽마고우였던 에르트만에게 다른 직장을 구해달라고 부탁하는 편지를 쓰는 등 다른 직장을 알아보기 시작한다. 하지만 직장을 옮기는 일은 그리 만만치 않았으며 설령 옮긴다고 해도 라이프치히보다 사정이 나을 거라는 보장도 없었다. 결국 그는 이직을 단념하는 대신 과외활동에 눈을 돌린다. 그가 에르트만에게 보낸 편지를 보자.

혹시 이 편지가 당신을 성가시게 하더라도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주십시오. 당신이 내 편지에 답장을 준 것이 어느덧 4년 전의 일이 되었군요. 당신이 나의 안부를 궁금하게 여기실 것 같아 송구스럽지만 몇 자 적겠습니다.

당신은 나의 젊은 시절부터 카펠마이스터로 쾨텐으로 옮기기까지의 일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나는 그곳에서 음악을 사랑하는 공을 만나 평생을 지내리라 마음먹었습니다. 그런데 공이 음악을 따분하게 여기는 베렌부르트의 공녀와 결혼한 뒤로는 음악에 대한 관심이 영 시들해져 버렸답니다. 그래서 나는 주님의 뜻을 따라 성 토마스 교회의 음악감독과 칸토르로 부임하여 라이프치히로 오게 되었습니다.

사실 한때 카펠마이스터였던 내가 칸토르가 되었다는 건 지난 석 달 동안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적절치 않아 보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자리에 그나마 호감을 가진 것은 내 아이들이 이곳에서 학업에 열중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다 주님의 뜻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라이프치히에 자리를 잡고 생활에 변화를 주기로 결심했습니다. 그 이후 나는 주님의 뜻을 받들어 이곳에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이제 나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습니다. 첫째, 이 자리는 그렇게 보수가 높지 않고(사람들이 내게 얘기해준 것처럼), 둘째, 또 이 자리는 너무나 많은 일들로 묶여 있고, 셋째, 이 지역은 물가가 너무 비싸며, 넷째, 이곳의 높으신 분들은 훌륭하지만, 음악에는 별로 흥미가 없기 때문에, 나는 항상 불쾌감을 느끼며, 시기와 박대를 받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내 운명을 하나님의 도움으로 다른 곳에서 찾을 필요를 느끼고 있습니다. 귀하께서 계신 도시에 이 진실한 옛 종을 위해 적당한 자리를 알거나 발견하신다면 나를 가장 좋은 말로 추전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귀하께서 나를 위해 최고의 중재를 해준 것에 대해 최선을 다해 만족스럽게 갚아드리며, 그 은혜에 보답하는데 결코 소홀히 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의 현재 일자리는 약 700탈러[29][30] 정도 수입을 가져다 준답니다. 물론 평소보다 장례식이 더 많으면 그에 비례하여 보수도 오르지요. 하지만 좋은 공기에서는 반대로 보수도 떨어지는데, 지난해에는 장례식이 보통 수준에 머물러 100탈러 이상이나 감소했답니다. 사람이 죽지를 않아 돈이 안된다는 바흐의 위엄튀링겐에서는 400탈러만 되어도 여기 라이프치히에서 거의 두 배 되는 돈으로 사는 것보다 훨씬 낫습니다. 이곳의 아주 비싼 생활비 때문에 그렇답니다......

바흐는 1729년부터 1742년까지 일종의 아마추어 악단인 대학생 연주단체(콜레기움 무지쿰, Collegium musicum)의 비공식 음악책임자로 부임해 악단을 위해 많은 칸타타와 클라비어협주곡을 작곡했다.[31]

한편으로는 드레스덴에 있는 작센 선거후(選擧侯)였던 프리드리히 크리스티안의 궁정과 이런저런 인맥을 타고 인연을 맺은 후 그에게 많은 곡을 작곡하고 헌정하여 환심을 사려고 했다. 작센 선거후는 바흐의 충성심과 음악을 마음에 들어했고 그에게 '폴란드왕[32] 겸 작센 선거후의 궁정작곡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라는 거창한 칭호를 하사한다. 이 칭호는 단순히 상징적인 의미만 있는 게 아니라 현실적인 이점도 있었다. 바흐가 작센 선거후의 후광을 입고 있는 작곡가로 확인되자 라이프치히의 찌질이들이 예전처럼 바흐에게 멋대로 굴지 못하게 된 것이다. 바흐도 분명 이런 점을 노리고 작센 선거후에게 줄을 대려고 했던 것 같다.

종교음악에 흥미를 잃은 바흐는 1730년경부터 교회의 칸토르로서 의무적으로 작곡/연주해야 했던 종교음악은 자신이 과거에 작곡했던 곡을 재탕하거나 조금 수정해서 연주하는 식으로 때우면서[33] 콜레기움 무지쿰을 위한 음악 작곡에 더 많은 공을 들였다. 한편 1736년경부터는 기존에 작곡한 것을 고치거나 몇 편의 작품을 묶어 곡집 형태로 정리하여 출판하는 작업에 힘을 썼다. 이 작업은 그가 죽기 얼마전까지 계속되었는데, 클라비어를 위한 파르티타(BWV825-830, 1731)[34], 이탈리아 협주곡과 프랑스 서곡(각각 BWV971, BWV831, 1735), 골트베르크 변주곡(BWV988, 1742), 오르간 미사곡( BWV552, BWV669~689, BWV802~805, 1739),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 제 2권(BWV 870~893, 1744) 등이 그 예이다.


2.5.4 1740년대

1744~45년부터 바흐는 눈에 띄게 노쇠한 모습을 보였으며 작곡빈도도 크게 줄었다. 하지만 이 말년에 작곡된 소수의 작품들은 모두 바로크 음악의 최정점에 서 있는 중요한 곡들이다.

1747년 5월 바흐는 아들을 잘 둔 덕에 포츠담의 궁정으로 프러시아 왕 프리드리히 2세를 방문할 기회를 얻는다. 포츠담의 궁정에서 바로 자신의 차남 칼 필립 엠마누엘 바흐가 쳄발로 연주자로 재직하고 있었던 것. 바흐는 초대받은 자리에서 왕이 제출한 주제를 바탕으로 클라비어로 즉흥적으로 6성의 푸가를 연주하는 묘기를 보였다. 이것이 동기가 되어 작곡한 것이 대왕에게 헌정한 음악의 헌정(BWV1079)이다.

한달 뒤에는 내과의사이자 작곡가였던 로렌츠 미츨러(Lorenz Christoph Mizler)가 창립한 음악협회에 가입했다.[35] 바흐의 이 협회 가입은 두 가지 측면에서 유명한데 한 가지는 협회를 위해 오르간곡 중에서도 난곡으로 손꼽히는 캐논 변주곡 '나는 높은 하늘에서 왔도다'(Vom Himmel hoch da komm' ich her, BWV 769)가 작곡되었다는 것이고 또 한 가지는 이 항목의 맨 처음에 나오는 특이한 악보를 들고 있는 바흐의 초상화가 그려졌다는 것이다.

이어 1748년부터 다음해에 걸쳐 최후의 대작 푸가의 기법(BWV 1080)의 작곡이 진행되었으나, 1749년 5월에 뇌일혈로 졸도하여 시력도 잃어서[36] 완성을 보지 못했다.[37]

바흐는 1750년 7월 28일 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조용히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향년 65세.


2.6 총평

지금은 음악의 아버지라는 칭호까지 받을 정도로 칭송받는 바흐이지만 막상 죽은 직후에는 점점 사람들에게서 잊혀져 갔고 그의 음악은 당대에 인정받지 못하며 사장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이야기는 다소 과장된 측면이 있다. 바흐 사후 그의 아들들(특히 C. P. E. 바흐)과 제자들을 중심으로 바흐 음악을 출판하고 보급하려는 노력이 있었고 이 노력들은 바흐 사후에 그의 음악이 알려지고 전수되는데 나름의 역할을 했다. 그래서 바흐는 바로 다음세대인 고전파의 작곡가들에게도 음악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는데, 예를 들어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의 음악에 나타나는 대위법과 합창법 등의 작곡기법들은 모두 바흐(와 헨델)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연주회 직전에 매번 바흐의 평균율을 연주했다던 쇼팽의 유명한 일화와 당대의 가장 위대한 아이돌 음악가 리스트가 작곡한 수많은 바흐 편곡들은 무엇인가?

다만, 18세기 동안 대중적으로 바흐의 음악이 그다지 많이 알려지고 연주되지 않은 것은 사실이며 바흐의 음악은 작곡가나 악보 수집가, 출판업자 등 주로 음악 종사자들에게만 알려져 있었다. 사실 18세기 중반을 기점으로 고전주의 양식이 대세가 되면서 바로크 음악은 시대에 뒤떨어진 음악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따라 바흐뿐만 아니라 모든 바로크 작곡가들이한동안 비슷하게 홀대를 받았으며, 헨델의 메시아를 비롯한 극소수의 바로크 음악만이 시대 조류에 휩쓸리지 않고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래도 바흐는 동시대에 살았던 비발디, 텔레만, 라모, 도메니코 스카를라티 등의 작곡가에 비하면 일찍 복권이 된 편이다. 20세기가 될 때까지 바흐와 헨델을 제외한 대부분의 바로크 작곡가들은 대중들에게 거의 잊혀지는 수모를 당해야 했다.[38]

여하튼, 바흐가 대중적으로 알려지게 된 계기는 1802년 독일의 음악사학자인 포르켈(Johann Nikolaus Forkel)이 바흐에 대한 최초의 연구서인 "바흐의 생애와 예술, 그리고 작품(Über Johann Sebastian Bachs Leben, Kunst und Kunstwerke,1802)"을 발표하면서 부터이다. 이 책 덕분에 그의 사후 50여년 만에 전 유럽적 바흐 광풍이 몰아닥쳤으며 대중들의 바흐에 대한 재인식에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하였다. 1827년 베토벤 사망 시 프란츠 그릴파르처가 작성한 추도문을 보면 베토벤 이전의 위대한 음악가로 헨델, 바흐, 하이든, 모차르트가 언급된다.[39] 당시 이미 바흐가 음악 사상 최고의 음악가 중 한 사람으로 인식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여기저기 흩어졌던 바흐의 악보가 다시 수집되고 앞다퉈 출판되었으며 바흐 사후 약 80년의 시간이 흐른 1829년, 열렬한 바흐 팬이자 바흐 음악의 복원자였던 멘델스존이 마태 수난곡을 복원하면서 다시 한번 바흐 열풍을 일으켰다.

이렇게 바흐가 음악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받는 위치 올라섰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바흐가 작곡한 많은 음악들이 분실되었거나 불완전하게 복원되어 있으며 종종 그간 알려지지 않았던 바흐의 악보가 발견되어 화제가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무반주 첼로를 위한 모음곡은 1889년 첼로의 거장인 파블로 카잘스가 발굴한 것이며[40] BWV 1090-1120 번호가 붙은 31곡의 뉴마이스터 오르간 코랄(Neumeister Chorales)은 1985년 예일대학교 고서적 장서관에서 악보가 발견되었다. 이처럼 바흐를 비롯한 바로크 작곡가들의 음악 발굴작업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며 또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2.7 일화

바흐는 상당히 건장한 체격을 지녔다고 전해지며, 그의 유골을 분석해본 결과 키는 180cm[41]로 꽤나 후덕하시다. 또한 바흐는 춤과 노래에도 꽤나 솜씨가 좋아 종종 자신이 즉홍적으로 작곡한 곡을 연주하면서 지인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바흐 자신과 여러 동시대 음악가들의 작품을 기록해 둔 안나 막달레나 바흐를 위한 공책(Notenbüchlein für Anna Magdalena Bachin) 같은 작품집은 이런 용도로 사용된 것으로 여겨진다.

경건한 신앙심과 작곡기법에서의 장인기질, 음악의 아버지라는 별칭 등등 여러가지 때문에 바흐를 어렵게 생각하는 이들이 많지만, 사실 바흐는 쾌활하며, 왕성한 대식가라 미식을 즐기며, 다혈질적인 면도 있었다. 한 번은 악단 소속의 바순주자의 연주실력이 형편없다고 면박을 줘서 크게 다툰 적이 있다고 한다. 이 일로 바순주자는 바흐와 싸움이 붙었고, 바흐는 도중에 칼(!)을 바순주자에게 정당방위로 이용하게 된다. 이 일로 바흐의 일자리가 위태로워지는 일이 발생한다.

또한 이런 이야기도 전해 내려오는데, 음악학자인 크리스티안 프리드리히 다니엘 슈바르트가 1772년에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한테 들었다는 이야기이다.

"사람들은 그의 위대한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했고, 그는 아버지가 작곡한 것을 연주할 능력이 없다고 자인했다. 그는 클라비어로 무심히 즉흥 연주를 하다가 4. 6화음으로 마친적이 있었는데, 그때 침대에 누워 잠들어 있다고 생각했던 아버지가 갑자기 일어나 그의 따귀를 때리고 나서 그 화음을 해결해주었다는 말을.......

2.8 후대의 평가

"바흐는 모든 음악의 시작이며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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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막스 레거
"바흐는 우리의 경애하는 음악의 주님이다. 모든 작곡가들은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그에게 기도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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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로드 드뷔시
"만일 베토벤이 인간 중의 거인이라면, 바흐는 바로 신의 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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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아키노 안토니오 로시니
"그는 작은 시냇물(Bach)이 아니라, 크고 광활한 바다라고 해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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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트비히 판 베토벤
"바흐는 마치 로도스 섬의 거인과 같다. 모든 음악가들이 그의 아래를 지나야 한다. 모차르트는 가장 아름답고 로시니는 가장 천재적이다. 하지만 바흐는 가장 포괄적이다. 그는 말해야 할 모든 것을 말했다. 만약 바흐 이래로 쓰여진 모든 음악이 사라진다고 해도 바흐의 음악을 토대로 다시 재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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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샤를 구노
"신을 믿지 않는 음악가는 있어도 바흐를 믿지 않는 음악가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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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우리치오 카겔
"음악의 최고중재자이자 입법자이며, 위상의 위대함에서 철학아리스토텔레스, 미술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견줄 수 있는 거장(the supreme arbiter and lawgiver of music, a master comparable in greatness of stature with Aristotle in philosophy and Leonardo da Vinci in 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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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어도어 베이커, 《베이커 음악 인명사전》의 '바흐' 항목 도입부 中

3 바흐의 일족

바흐 집안이 B의 일족음악가 집안이라,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 외에도 음악으로 유명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큰할아버지인 하인리히 바흐, 삼촌인 요한 크리스토프 바흐와 요한 미하엘 바흐의 작품도 J. S. 바흐만큼은 아니지만 종종 연주되고 있는 편.

J. S. 바흐의 아들 중에서는 아버지의 명성에 필적할 만한 사람은 없지만 차남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가 그나마 유명한 편. 장남 빌헬름 프리드만 바흐와 요한 크리스토프 프리드리히 바흐, 런던의 바흐라고 불린 막내 아들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도 고전파 초기에 이름을 떨친 음악가들이다. 그러나 불쌍하게도 앞시대에는 아버지 J. S. 바흐와 헨델이 버티고 있고, 뒤에는 모차르트, 베토벤이(보너스로 하이든까지...) 대기하고 있어서 묻혀버린 감이 있다.[42]


3.1 빌헬름 프리데만 바흐

3.2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

항목 참조


3.3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

항목 참조(항목 보강 예정)


3.4 J.S. 바흐의 둘째 아내 안나 막달레나 바흐

안나 막달레나 바흐(Anna Magdalena Bach, 1701– 1760)의 본명은 안나 막달레나 빌케(Anna Magdalena Wilcke)로 아버지는 금관악기 연주자였고 어머니는 오르가니스트의 딸이었다. 어렸을 때의 삶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 언젠가부터 성악교육을 받고 가수가 되었으며, 1721년 초에 쾨텐 궁정에 취직하면서 바흐와 인연을 맺었다.[43] 당시 아내를 잃고 상심하고 있던 바흐는 막달레나와 금세 가까와졌으며 16살차이의 두 사람은 1721년 12월 3일에 결혼식을 올렸다.
막달레나 바흐는 바흐의 첫째 아내 마리아 바르바라 바흐 못지 않게 내조에 충실하였으며 결혼 후에도 어느 시기까지는 가수로 계속 활동하였다. 외적으로는 이런저런 풍파에 시달렸던 바흐지만 가정생활만큼은 행복했던 덕분에 바흐와 막달레나 바흐는 왕성한 생산력을 자랑하여 무려 13명의 자녀를 두었다. 다만 이 중 6명(3남 3녀)만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았으며 6명의 자녀 중에 요한 크리스토프 바흐와 요한 크리스찬 바흐가 중요한 음악가로 성장하였다.
생활 뿐만 아니라 음악적인 측면에서도 안나 막달레나 바흐는 남편에게 중요한 인물이었는데 그녀는 남편의 창작력의 원천이자 충실한 필사가였다. 바흐는 그녀를 위해 여러 작품, 특히 성악작품을 많이 썼는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안나 막달레나 바흐를 위한 음악노트(Notenbüchlein für Anna Magdalena Bach) 1, 2권이다. 또한 막달레나 바흐가 남편의 악보를 부지런히 필사해둔 덕분에 그의 많은 음악들이 현재까지도 실전되지 않고 보존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행복했던 그녀의 삶은 1750년 남편이 죽은 후부터 급전직하했다. 그녀의 의붓자식들과 친자식들 사이에서는 유산상속을 비롯한 이런저런 이유로 분쟁이 일어나 각자 뿔뿔이 흩어졌다. 장성한 의붓자식들은 그녀를 일절 도우려 하지 않았으며 친자식들은 아직 어려서 홀로서기도 급급한 상황이었다. 이렇게 생계대책이 없는 상황에서 그녀는 홀로 어린 두 딸 캐롤리나(Johanna Carolina)와 수잔나(Regina Susanna)를 맡아 키워야 했기 때문에 생활은 점점 어려워졌으며, 죽기 얼마전에는 라이프치히 시 당국의 자선행정에 의존해서 생활해야 했을 정도로 비참한 지경에 이르렀다. 그녀가 환갑도 넘기지 못하고 죽은 데에는 이런 생활고가 큰 원인이 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편 마틴 야비스(Martin Jarvis)라는 음악학자가 6곡의 무반주 첼로 소나타를 비롯한 몇몇 작품[44]의 실제 작곡가가 바흐가 아니라 안나 막달레나 바흐라고 주장한 적이 있다. 이 주장은 해당 작품들이 바흐의 자필악보나 작곡기록이 없이 그녀가 필사한 사본만 남아 있는 점에 근거하고 있는데, 이와 같은 야비스의 주장에 동의하는 전문가는 거의 없다.[45]


4 주요 작품

바흐의 작품들은 기법적인 측면에서 보면 바로크 대위법의 정점에 선 작품들이며, 대위법 작법의 끝판왕격인 푸가를 포함한 작품들이 상당히 많다. 장르 측면에서 보면 유럽 역사상 최고의 종교음악 작곡가이자 최고의 오르간 음악 작곡가이다. 물론 다른 분야에서도 어마어마한 업적과 영향을 남겼지만 다른 장르는 필적할만한 작곡가들이 있는 반면 이 두 분야만큼은 양으로 보나 수준으로 보나 따라올 사람이 없다.[46] 다만 오페라나 극음악은 남기지 않았다.

바흐의 대위법은 자기 아들들을 비롯하여 이후의 모든 작곡가들에게 끊임없는 연구, 모방 또는 도전의 대상이 되었으며 이런 경향은 심지어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사실 끊임없는 연구의 대상이 되는 작곡가가 한두명이 아니다 모차르트베토벤의 후기작품에 나타나는 대위법적인 경향도 바로 바흐와 헨델의 대위법을 연구하여 터득한 것이다.

4.1 바흐의 작품번호 BWV

  • 바흐의 작품 목록은 장르별 구분에 따라 BWV로 정리되어 있다.
  • 아래 주요 작품목록은 BWV 번호 순서대로 정리하여 작성하였다.
  • 중요한 작품, 인지도가 있는 작품은 굵은 글씨로 표시하였다.
  • 아래는 부분적인 내용만 서술하고 있으므로, 자세한 내용을 원한다면 BWV 항목으로.


4.2 성악곡/종교음악(BWV 1-524)

  • 1-224 : 칸타타 - BWV200번까지는 교회칸타타이고 201-224는 세속 칸타타이다.
    • Christ lag in Todes Banden(예수께서 죽음의 속박에 놓여 계신다), BWV 4
    • Wachet auf, ruft uns die Stimme(깨어나라고 우리를 부르는 소리), BWV 140
    • Herz und Mund und Tat und Leben (마음과 입과 행동과 삶으로) BWV 147[47][48]
    • 결혼 칸타타 BWV202
    • 커피 칸타타 BWV211(가장 유명한 세속 칸타타)
    • 농민 칸타타 BWV212
  • 225-231 : 모테트(Motet) [49]
    • Jesu, meine Freude(예수는 나의 기쁨) BWV 227[50]
  • 232-243 : 미사곡 및 가톨릭 전례음악[51]
  • 244-247 : 수난곡
    • 마태오 수난곡 BWV 244
    • 요한 수난곡 BWV 245
    • 루카 수난곡 BWV 246
    • 마르코 수난곡 BWV 247[52]
  • 248-249 : 오라토리오
    •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 BWV 248[53]
    • 부활절 오라토리오 BWV 249
  • 250-438 : 코랄(합창곡)
  • 439-524 : 독창곡(가곡, 찬송가, 아리아 등)

4.3 건반음악(BWV 525-994)

  • 525–771 : 오르간 음악
    • 토카타 D단조(Toccata in D minor) BMV 538
    • 환상곡 푸가 G단조(Fantasie und Fugue in G minor) BWV 542[54]
    • 전주곡과 푸가 A단조(Prelude and Fugue in A minor) BWV 543
    • 전주곡과 푸가 E플랫 장조 "성 안느"(Prelude and Fugue in E-flat Major, "St. Anne") BWV 552
    • 토카타와 푸가 D단조(Toccata und Fugue in D minor) BWV 565 [55]
    • 작은 푸가 G단조(Fugue in G minor) BWV 578
    • 파사칼리아와 푸가 C단조(Passacaglia and Fugue in C minor)BWV 582 :바흐 오르간 작품 중에는 토카타와 푸가 D단조 다음으로 유명하며 또한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곡이다. 후에 레스피기 등이 관현악으로 편곡했다. 디트리히 북스테후데와 마찬가지로 바흐도 파사칼리아는 딱 한 곡만 작곡했다.[56]
    • 코랄 전주곡 1집 : 소 오르간곡집(Little Organ Book) BWV 599-644
    • 코랄 전주곡 2집 : 쉬블러 코랄(Schübler Chorales) BWV 645-650
    • 코랄 전주곡 3집 : 라이프치히 코랄 전주곡 (Leipzig Chorale Preludes) BWV 651-668
    • 코랄 전주곡 4집 : 독일 오르간 미사(German Organ Mass, part of Clavier-Übung III) BWV 669–689[57]
    • 코랄 전주곡 5집 : 키른베르거 코랄 전주곡(Kirnberger chorale preludes) BWV 690–713
    • 캐논 변주곡 "하늘로부터 땅으로 내가 왔도다"(Canonic Variations on "Vom Himmel hoch da komm' ich her") BWV 769[58]
    • BWV 1090-1120 뉴마이스터 코랄(Neumeister Chorale)[59]
  • 772–994 : 하프시코드 음악
    • 인벤션과 신포니아[60] (Inventions and Sinfonias) BWV 772–801
    • 영국 모음곡(English Suites) BWV 806–811
    • 프랑스 모음곡(French Suites) BWV 812–817
    • 건반악기를 위한 파르티타(Partitas for keyboard) BWV 825–830
    • 프랑스 서곡(French Overture) BWV 831
    •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 1(The Well-Tempered Clavier I) BWV 846–869
    •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 2(The Well-Tempered Clavier II) BWV870–894
    • 반음계적 환상곡과 푸가 d 단조 BWV 903
    • 토카타(Toccatas) BWV 910-916
    • 이탈리아 협주곡 F장조 BWV 971 [61]
    • 골드베르크 변주곡 G장조 BWV 988
    • 친애하는 형의 이별에 붙이는 카프리치오(Capriccio sopra la lontananza del suo fratello dilettissimo) BWV 992[62]

4.4 독주악기 음악(BWV 995-1013)

4.5 실내악/관현악(BWV 1014-1071)

  • 1014-1040: 실내악(건반악기 반주가 있는 소나타, 트리오 소나타): 작품성과 별도로 바흐의 작품중에 가장 인기 없고 가장 알려져 있지 않고 가장 연주되지 않는 장르이다.
  • 1041–1071 : 관현악곡(협주곡, 모음곡)
    • 바이올린 협주곡 1번 A단조 BWV 1041
    • 바이올린 협주곡 2번 E장조 BWV 1042
    •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 D단조 BWV 1043
    • 플루트, 바이올린, 하프시코드를 위한 3중 협주곡 A단조 BWV1044
    •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BWV 1046-1051 [65]
  • 건반악기를 위한 협주곡 BWV 1052-1065[66]
    • 4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 A단조 BWV1065
  • 관현악 모음곡 1~4번 BWV1066~9
    • 관현악 모음곡 1번 C장조 BWV1066: 오보에2, 바순, 바이올린 2부, 비올라, 통주저음
    • 관현악 모음곡 2번 B단조 BWV1067: 플루트, 바이올린 2부, 비올라, 통주 저음
      • 플루트의 활약이 큰 편으로 이 중 '폴로네즈'는 그룹 로스 차코스가 안데스의 악기로 연주하게 편곡하였는데, 분위기가 어둡다.[들어보기]
    • 관현악 모음곡 3번 D장조 BWV1068 : 오보에2, 바순, 트럼펫3, 팀파니, 바이올린 2부, 비올라, 통주저음
    • 관현악 모음곡 4번 D장조 BWV1069 : 오보에3, 바순, 트럼펫3, 팀파니, 바이올린 2부, 비올라, 통주저음
      • 4개의 곡 중 규모가 가장 크다.

4.6 대위법 실험(?)작품(BWV 1072-1080)

  • 음악의 헌정(Musikalisches Opfer) BWV 1079 [67]
  • 푸가의 기법(Die Kunst der Fuge) BWV 1080 [68]

5 함께 보기

  1. 이 그림에 있는 악보를 자세히 보면, 6성부 3중으로 된 카논이다. 재미있는 점은 거울상으로 이 악보를 보면 또 다른 3성부가 보인다는 점이다.
  2. 이는 정확히는 밯하같은 느낌으로 발음된다. 실제 독일어 발음의 ch가 '흐'와 '허'의 중간쯤 되는 음가를 지닌다. 오십음에 끼워맞추는 일본어 표기의 특성상 '하'로 표기된다.
  3. 독일어로 실개천이 bach라는 점을 이용한 말이라고 한다. 항간에는 제바스티안 바흐의 아들(!)인 바흐에게 한 말이라고도 한다. 이 아들들도 그들의 시대에 뛰어난 음악가로 이름을 날렸기 때문이다.
  4. 사실 음악사적 시대 구분을 칼로 무 자르듯 정확하게 할 수는 없다. '1750년 바로크 시대 종결'이라는 시대 구분은 바흐가 바로크를 대표하는 작곡가라 존경의 차원에서 나온 말이긴 한데, 따지고 보면 그보다 더 오래 살았던 헨델이나 라모같은 쟁쟁한 바로크 작곡가들도 있다. 심지어 바로크 양식의 음악은 다음 세대인 모짜르트 하이든이 한참 활동하던 시기에도 작곡되었다. 다만 18세기 중반을 기점으로 그 이전의 대세였던 바로크 음악이 점점 주류에서 밀려나 퇴조하게 되고 그 뒤를 이어 당시로써는 새로운 양식이었던 고전파 음악이 부상하기 시작하여 결국 세대교체가 이루어졌다는 점에서는 충분히 근거 있는 시대구분이라 할 것이다.
  5. 궁정이나 교회에 소속된 전문적인 음악가는 아니었고 거리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했다고 한다.
  6. 한편 바흐의 작은 형 요한 야콥 바흐는 스웨덴에서 활동하였다.
  7. 캐논과 지그로 유명한 그 파헬벨이다.
  8. 이처럼 자신의 음악 스타일과 원칙을 고집하는 바흐의 성향은 나이 들어서도 계속된다. 당연히 고용주들과 갈등도 많이 빚었다.
  9. 북스테후데는 결국 큰 딸이 결혼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었고, 북스테후데의 근심이었던 큰 딸은 북스테후데 사후에 요한 크리스티안 쉬페르덱커라는 작곡가 겸 오르가니스트와 결혼함으로써 북스테후데의 후임자는 정해지게 되었다.
  10. 그렇지만 현재 아른슈타트에도 작은 규모이긴 하지만 바흐 기념관과 젊은 시절의 바흐 동상이 있다. 그리고 기차역에서 내리면 바로 앞에 있는 관광안내판에 '바흐의 도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고 쓰여 있다. 아마도 바흐가 관광객들이 이 도시...라기보다는 마을을 찾는 유일한 이유일 것이다.
  11. 이 칸타타 71번(하나님은 나의 왕이시도다 - Gott ist mein König)은 바흐의 생전에 출판된 유일한 교회 칸타타이다.
  12. 당시 바흐는 1급의 오르간 연주자인 동시에 뛰어난 오르간 제작자이기도 했다.
  13. 바흐의 집안은 음악가 집안답게 대대로 정통주의에 속했다.
  14. 공식적으로 그는 바이마르궁전 예배당의 오르가니스트이면서 궁정 악단의 연주자이기도 했다. 월급도 높아진 건 바이마르 영주의 배려도 물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투잡을 뛰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15. 바흐 당시 바이마르는 인구 5000명 정도의 아주 작은 도시였다.
  16. 악보를 손수 베끼면서 공부했다고 한다. 흠좀무. 그리고 이 시기 바흐는 비발디의 바이올린 협주곡 다수를 오르간이나 하프시코드용 협주곡으로 편곡하였다.
  17. 바흐를 궁정악장에서 배제한 이유는 명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은데, 대체로 바이마르 영주와 조카의 알력때문으로 추정하고 있다. 즉, 영주 입장에서는 자기 조카와 절연하지 않고 계속 친교를 유지하는 바흐가 괘씸했던 것이다.
  18. 그런데 현대의 바흐 연구가들은 이 일화의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드레스덴에서 경연 대회가 벌어진 것 자체는 맞지만 마르샹이 바흐의 연주를 듣고 패배가 두려워 달아났다는 세간의 속설은 근거가 없다. 이 대결의 진실에 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바흐는 생전에 마르샹을 높게 평가했으며 종종 그의 작품을 연주했다는 기록도 있다.
  19. 그 시절에는 아이들이 일찍 죽는 경우가 많아서 되도록 아이를 많이 낳는 게 흔했다.
  20. 공작의 휴가에 따라갔었다.
  21. 이 사람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와도 친하게 지냈다.
  22. 쾨텐 기차역에 내리면 관광안내판에 '바흐의 도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고 쓰여있다. 한국인 입장에서는 거의 마을에 가까운 작은 도시이지만 바흐의 일생에 있어 상당한 중요성을 갖는 곳이기에 매 2년마다 [바흐음악축제]가 열린다. 미리 콘서트표와 숙소를 구할 수만 있다면 조그만 도시에서 한적하고 여유롭게 바로 그 쾨텐궁정 또는 교회에서 열리는 세계적인 음악가들의 공연을 상대적으로 소수의 인원들과 함께 즐길 수 있다. 관객들 중에서 유일하게 혼자만 검은 머리에 노란 피부 동양인이라는 부담감만 이겨낼 수 있다면. 간혹 동양인이 더 있어도 높은 확률로 품위가 넘쳐나보이는 어르신들이다...
  23. 칸토르는 직책 이름으로만 보면 교회 부속학교의 음악교사이지만 실제로는 음악교육뿐만 아니라 교회음악을 작곡하고 연주하는 도시 교회음악의 총책임자였다. 라이프치히에서는 성토마스와 성니콜라이 두 교회에서 일요일마다 교회 칸타타가 연주되었고, 금요일에는 대규모의 수난곡이 연주되었다.
  24. 텔레만은 이 제안을 함부르크시에 역으로 활용해 월급을 올려받았다. 한편으로 쿠나우와 텔레만은 이미 악연이 있었는데, 텔레만은 라이프치히 대학에 다니던 1700년대 초반대에 이 도시의 합창 지휘자와 오페라 하우스 감독 등의 자리를 장악하면서 그 당시부터 라이프치히의 음악감독이었던 쿠나우의 입지를 많이 약화시켰다. 오히려 라이프치히 대학 졸업생이라든가 하는 점이 라이프치히의 시의회의 마음에 들었을 것이다.
  25. 더 정확히는 이미 1722년 8월 11일에 텔레만은 라이프치히 칸토르로 임명되었으나 함부르크가 연봉을 올려주겠다는 약속을 하였고 텔레만은 1722년 11월에 칸토르직을 거절하였다. 당시 텔레만은 쾨텐을 몇 번 지나갔는데, 그때 바흐를 만나 라이프치히 칸토르직에 지원하도록 부추겼을 수도 있다.
  26. 오늘날 바흐를 2류라고 여기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지만 당대의 바흐는 텔레만이나 헨델 그라우프너 등에게 유명세에서 한참 밀렸다. 그 당시 바흐는 알아들을 수 없는 어렵고 이상한 음악을 짓는 괴짜 작곡가 정도로 여겨졌다. 게다가 고집이 세고 다루기 힘든 음악가로도 악명이 높았다.
  27. 물론 지금은 바흐의 요한수난곡은 이 분야의 최고 명작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는 반면 두 사람의 수난곡은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조차 거의 없는 상황.
  28. 라이프치히의 음악행정은 시참사회, 성직회의, 라이프치히 대학 등 세 곳의 협의로 이루어졌는데 문제는 이 셋이 사이가 아주 안 좋아서 심심하면 싸워댔다는 것(...). 바흐는 라이프치히에서 이들의 이전투구와 등쌀에 계속 시달려야 했다.
  29. 현재 한화로 약 6천만원.
  30. 이것이 칸토르 연봉이라 생각하면 곤란할 것이다. 칸타타 의뢰비, 연주비 오르간 감정비, 장례 연주비 등 잡무가 주는 돈이 칸토르 수입보다 더 많았다.
  31. 유명한 커피칸타타(BWV211)도 이 악단을 위해 작곡되었는데 제목처럼 커피숍에서 연주하기 위해 작곡된 음악이다.
  32. 당시 폴란드는 왕을 선출했으며, 작센선거후는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1733~1738)을 치르고 폴란드 왕위에 선출됐다.
  33. 재탕 수준은 아니지만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의 경우도 과거에 사용했던 음악을 많이 차용한 작품이다.
  34. 바흐 생전에 출판된 곡 중 하나.
  35. 1738년 만들어진 단체로 서신을 통해 음악이론과 창작수법등을 교환하고 토론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 협회의 명의로 음악이론과 관련된 많은 논문이 발표됐으며 오늘날 봐도 재미있고 참고할 만한 논문들이 많다. 이 협회는 1750년대 중반때까지 활동을 유지하였다.
  36. 존 테일러라는 돌팔이 안과 의사에게 백내장 치료를 받아 더 악화되었다고 한다. 이 존 테일러는 엉터리 치료로 헨델도 실명시킨 아주 몹쓸 인간이었는데, 자세한 것은 조지 프레드릭 헨델 항목 참고. MBC서프라이즈에서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다루었다].
  37. 이 푸가의 기법은 바흐가 죽기 직전까지 쓰였다고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바흐가 죽기 1년이상 전에 작곡을 중단하였다. 따라서 처음 출판된 푸가의 기법 악보의 마지막 악장에 나온 말(사실 아들이 서술한 것)은 사실과 다르다. 실제로 죽기 직전에 작곡한 곡은 간단한 코랄곡이었다. 푸가의 기법을 쓰다가 시력을 잃은 바흐는 한동안 구술로 아내인 안나막달레나에게 대필시켜서 악보를 작성했는데, 이 푸가의 기법을 보면 후반부로 갈수록 복잡해져서 나중에는 사실상 대필이 불가능한 수준에 이른다.
  38. 헨델도 그간 메시아를 비롯한 일부 오라토리오와 몇몇 기악곡만 알려져 있었고 자신의 주종목이었던 오페라를 비롯한 다수의 건반음악 등은 20세기 후반이 되서야 제대로 발굴되기 시작했다.
  39. "작고한 베토벤의 묘지 곁에 서서, 우리는 전 독일과 독일 민족을 대표하여, 이제는 사라져 버린 우리 민족 예술의 광휘며, 우리 조국의 완전한 영적 만개로서 높이 추앙받던 그의 죽음을 애도하노라. 독일 운문의 영웅은 아직도 살아있고, 그의 삶은 영원하리라, 그러나 아름다운 노래의 최후의 거장이며, 영혼이 담긴 협화음의 오르간이며, 헨델과 바흐, 그리고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불멸의 명성의 계승자이며 증폭자인 그는 이제 가고 없으니, 우리는 이제 여기 침묵하는 운명의 끊어진 현을 애도하노라..."
  40. 파블로 카잘스가 9살 때 고악보점에 들렀을 때 바흐의 작품 번호에 포함되지 않은 첼로 모음곡을 발견하고 이를 연주해서 알렸다고 한다. 하지만 이 일화에 대해 진위 논란이 있다.
  41. 당시 유럽인의 평균 신장은 161cm 정도였다.
  42. 최근에 이 아들들의 업적이 재평가되고 있기는 하다.
  43. 안나 막달레나 빌케는 쾨텐에 오기 전에 이미 바이젠펠스(Weißenfels)라는 곳에서 바흐와 만난 적이 있었다고 한다.
  44. 예를 들면 골드베르크 변주곡의 주제에 해당되는 아리아. 막달레나 바흐의 음악수첩에도 이 아리아가 포함되어 있다.
  45. 막달레나 바흐는 전문적인 작곡교육을 받은 적이 없으며 작곡과 관련해서는 남편의 작곡을 곁눈질로 지켜본 것이 전부이다. 이런 사람이 무반주 첼로 모음곡과 같은 난해한 대위법과 복잡한 기교를 요구하는 작품을 썼다면 그녀가 천재인 것을 넘어서 아예 기적이 일어났다고 봐야 할 것이다. 현재 무반주 첼로 모음곡은 바흐가 막달레나 바흐와 결혼하기 전부터 씌어졌다는 것이 정설이다.
  46. 바흐 이후 한정으로 종교분야는 아예 독보적이고 오르간 분야에서는 그나마 양적인 측면에서 프랑스의 오르가니스트이자 작곡가였던 샤를-마리 위도르(Charles-Marie Widor)가 다수의 오르간곡을 남겼다.
  47. 1716년 바이마르에서 작곡되었는데 1723년 라이프치히 취임을 위한 방문 기념으로 큰 규모로 개작하였다. 1716년에 작곡된 원곡은 BWV 147a로 따로 표기하는데, 현재는 147a는 거의 연주되지 않는다.
  48. 이 칸타타에 나오는 합창 〈예수, 인류 희망의 기쁨이여〉가 유명하다. 일반에는 조지 윈스턴이 피아노로 편곡한 〈Joy〉라는 제목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Willem van Twillert의 오르간 연주) (Alon Goldstein의 피아노 연주) (킹스 컬리지 합창단) (George Winston 편곡 "Joy") 사실 이 곡은 순수한 바흐의 작품은 아니고, 바흐가 다른 음악가의 선율을 빌려 온 것이다.
  49. 225-230 6곡의 모테트는 합창음악 분야의 걸작이다. 231은 바흐 작품이 맞는지에 대해 논란이 있다. 후에 바흐/텔레만/하레의 공동작품으로 추정되는 모테트가 발견됐는데(BWV-Ahn 160)이 231이 이 모테트의 2부에 포함되어 있다.
  50. 바흐가 라이프치히 칸토르로 부임한 직후인 1723년 7월 이 도시의 우체국장 부인의 장례식을 위해 작곡된 일종의 장송 모테트이다. 6곡의 모테트 중에서도 가장 길고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바흐의 팬이라면 반드시 들어봐야 할 명작이다.
  51. 바흐 당시 라이프치히의 루터파 교회에서는 라틴어로 진행되는 가톨릭 전례의식도 종종 수행되었다. 다만 미사용 전례음악은 전체 미사(Missa Longa)가 아니라 키리에와 글로리아로만 구성된 소위 짧은 미사(Missa Brevis)가 사용되었다. 바흐가 라이프치히에서 작곡한 미사곡도 대부분 미사 브레비스 또는 상투스(Sanctus, 거룩하시도다)이다. 다만 232의 B단조 미사는 미사 브레비스가 아니라 미사 롱가로서 기존에 작곡되었던 곡들을 다수 포함시켰다. 바흐는 이 미사곡 뿐만 아니라 규모가 큰 종교음악(수난곡/오라토리오)을 작곡할 때에는 거의 예외없이 기존에 작곡된 칸타타나 코랄 등을 많이 차용하여 전체 곡을 구성하였다.
  52. 이 마르코 수난곡이 1731년 3월 23일에 초연되고 1744년에 재연됐다는 기록이 있으나 현재 악보는 분실되고 피칸더(Picander, 본명은 크리스티안 프리드리히 헨리치Christian Friedrich Henrici)가 쓴 대본만 남아있다. 기록을 볼 때 이 곡은 다른 수난곡과 달리 기존의 곡을 조합해서 만든 일종의 패러디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학자들은 칸타타 54번의 아리아와 칸타타 198번 전체,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의 합창, 바흐가 자기 작품에 인용했던 카이저(Reinhard Keiser)의 곡 등 기존의 곡을 인용한 것으로 보고 있다. 오늘날에는 대본에 기초하여 여러 곡으로 이 마르코 수난곡을 재구성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으며 학자와 연주자에 따라 여러 판본이 존재한다.
  53. 형식상으로는 6부로 구성된 오라토리오이긴 한데 실제로는 6개의 칸타타를 모아놓은 칸타타 모음곡에 가깝다. 물론 각 칸타타는 음악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결코 따로 노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규모가 큰 바흐의 종교음악이 항상 그렇듯이 이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도 기존의 곡들을 많이 차용하였는데 특히 BWV 213-215의 세속칸타타 3곡을 많이 인용했으며 6부의 경우 현재는 악보가 분실된 칸타타 BWV 248a에서 많은 곡이 차용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 외에도 여러 작품에서 차용한 선율들이 많은데, 예를 들면 마태오 수난곡의 O Haupt voll Blut und Wunden(오, 피와 상처가 가득한 머리여)나 Wo ist der neugeborne König(새로 태어나신 왕은 어디 계신가)의 주 선율이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에 많이 활용되고 있다.
  54. 프란츠 리스트에 의해 피아노로 편곡되었다.(S.463)
  55. 바흐의 오르간곡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오르간곡 가운데 가장 유명한 작품일 것이다. 오르간곡에 아무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이 곡의 맨 앞소절인 빠바밤~~ 빠바바바밤빰~ 하는 부분을 들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다만 인기를 떠나서 작품성 측면에서만 보면 바흐의 오르간 작품 가운데 이 565에 못지 않거나 오히려 능가하는 작품들이 많다.
  56. 주제 부분이 꽤 인상적인데, 이는 바흐가 만든 주제는 아니고 앙드레 레종(André Raison)(1640경-1719)의 것을 차용한 것이다.
  57. 이 독일 오르간 미사는 바흐의 오르간곡 중에서도 가장 복잡하고 음악적으로 심오한 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형식은 전형적인 프랑스식의 오르간미사를 따르고 있으며 전례적으로는 이 독일 오르간 미사에 앞부분에 BWV 552의 전주곡파트를 서곡으로 연주하고 연주가 끝난 후에는 BWV 802-805의 네 곡의 듀엣과 같은 곡의 BWV 552 푸가파트를 종곡으로 연주한다.
  58. 이 - 변주곡의 다른 버전인 BWV 769a도 있으며 769 못지 않게 자주 연주된다.
  59. 1080번까지 BWV번호가 정리된 후 1985년에 예일대학 장서관에서 악보가 발견되어 1090번 이후의 번호가 붙어 있다.
  60. 인벤션과 신포니아는 자기 아이들과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작곡된 일종의 연습곡으로 당연히 3성부 신포니아가 난이도가 높다.
  61. 건반악기 독주를 위한 음악이지만 특이하게 '협주곡'이라는 타이틀이 붙어 있는데, 이 제목에는 이탈리아의 협주곡 양식을 독주악기로 구현해보고자 했던 바흐의 실험정신의 담겨 있다. 즉 통상적인 이탈리아 협주곡 양식처럼 빠름-느림-빠름의 3악장 형식을 가지고 있으며 리토르넬로 형식(협주와 독주가 되풀이되는 형식)을 건반악기로 구현하기 위해 독주부처럼 단선율(및 통주저음) 위주로 전개되는 부분과 협주부분처럼 여러 성부가 같이 연주되는 부분이 반복적으로 구현된다.
  62. 특이하게 이탈리아어로 제목이 붙어 있는 이 곡은 바흐의 초기 작품중 가장 유명한 곡이다. 바흐가 19살 경에 그의 작은 형 요한 야콥 바흐가 스웨덴 궁정에 취직하여 스웨덴으로 떠날 때 석별의 정을 나누기 위해 씌어졌다고 하는데, 이 작곡배경은 아직 확실하게 확인된 것은 아니다. 또한 현재 보존되어 있는 바흐의 초기작품 대부분이 후에 수정이나 개작을 거쳤다는 것도 감안하자.
  63. 해당 곡들은 다른 악기로 자주 편곡된다.
  64. 소나타 2번 d단조(BWV 1004)의 마지막 악장이 그 유명한 샤콘느이다.
  65. 쾨텐시절 초기에 작곡된 일종의 콘체르토 그로소(합주협주곡)이다. 기본적으로 바이마르에서 익힌 이탈리아 협주곡 형식을 차용하고 있지만 통주저음 위에서 단순하게 전개되는 이탈리아식 협주곡과 달리 곡마다 악기 편성이 달라지고 각 악기들이 대위법적인 성부의 개념으로 호흡을 맞추기 때문에 이탈리아식 협주곡보다 훨씬 정교하고 복잡하다.
  66. 피아노로 연주될 때는 피아노 협주곡으로, 하프시코드로 연주될 때는 하프시코드 협주곡으로 쓴다. 곡마다 하프시코드의 개수가 1~4대로 다르다. 예를 들어 1065는 하프시코드가 4대 쓰인다.
  67. 음악의 헌정과 푸가의 기법 두 작품은 대위법을 이용한 음악 가운데 지존무상의 경지에 올라 있는 작품으로 바로크 대위법의 종착역으로 볼 수 있다. 이 음악의 헌정은 무한히 상승하는 순환 고리를 가지고 있어 마치 끝나는 것처럼 보이는 종지부가 다시금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도입부로 연결되는데, 이 음악에 사용된 각종 기법에 대해 제대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따로 항목을 만들어야 할 정도로 대단히 복잡하다.
  68. 이 푸가의 기법은 어떤 악기로 연주되어야 하는지는 바흐의 아들 C.P.E.바흐가 출판한 원본 악보에도 표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연주 방법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었다. 그러나 이 작품은 기본적으로 건반 악기 독주로 연주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에(바흐는 독주용이 아닌 작품은 정말로 독주로는 절대 연주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게 썼다) 대체로 오르간이나 하프시코드(또는 피아노)용으로 작곡된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워낙 뛰어난 작품인 탓에 여러 분야의 연주자들이 이 작품의 연주를 시도하고 있으며, 현재는 건반악기 외에도 현악 3중주 또는 4중주, 관악 앙상블, 관현악 등 여러 편성으로 연주된다. 사실 이 작품은 악기 편성에 대한 정답이 없기 때문에 현재까지 행해진 모든 연주를 편곡이 아닌 정격 연주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