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향곡 제7번(베토벤)

루트비히 판 베토벤 교향곡
1번2번3번
(영웅)
4번5번
(운명)
6번7번8번9번
(합창)
10번
(미완성)

정식 명칭: 교향곡 제7번 A장조 작품 92
(Sinfonie Nr.7 A-dur op.92/Symphony no.7 in A major, op.92)

1 개요

베토벤의 일곱 번째 교향곡. '투쟁과 승리' 라는 도식의 5번이나 '자연에 대한 찬미' 가 중심 주제인 6번과 달리, 여기서는 리듬을 앞에 내세우고 마구 내달리는 춤곡 스타일의 아이디어를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당대건 후대던 이 곡을 평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춤이나 춤곡, 축제 등의 흥분되고 들뜬 모습을 연상케 한다고 한 바 있다.[1]

후속작인 8번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작업했는데, 대략 1811년 말에 착수해서 1812년 4월(혹은 5월)에 완성했다고 되어 있다. 이 시기 동안 베토벤은 빈이 아닌 보헤미아 지방의 테플리츠(현 체코 테플리체)에서 요양하고 있었는데, 아직도 신선도를 유지 중인 불멸의 연인 떡밥도 여기서 마지막으로 던져졌기 때문에 이 곡들과 모종의 연관 관계가 있다고 주장하는 연구가들도 있다. 헌정은 베토벤의 후원자 중 한 사람이었던 은행가 프리스 백작에게 행해졌다.

2 곡의 형태

6번에서 5악장 표제음악을 시도했던 것이 여기서는 다시 고전적인 형태의 4악장으로 돌아와 있다. 하지만 겉보기에만 그렇고, 교향곡에서 거의 필수였던 느린 악장이 여기서는 아예 버로우탄 독특한 컨셉을 취하고 있다. 물론 지휘자에 따라서는 '약간 빠르게(Allegretto)' 라고 지시된 2악장을 느리게 연주하는 경우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진중한 1악장 첫머리를 제외하고 느리게 지정된 대목은 없다.

1악장은 4번과 비슷하게 확장된 형태의 서주로 시작하는데, 마찬가지로 이 서주는 뒤에 나오는 빠른 소나타 형식의 본론 부분과는 거의 관계없는 독립적인 형태의 대목으로 되어 있다. 이어지는 주요부는 6/8박자로 상당히 빠르게 진행되는데, 플루트가 처음 제시하는 리듬 형태가 전체에 걸쳐 끈질기게 반복되면서 춤곡의 느낌을 강하게 주고 있다.

2악장의 경우 그 동안은 장조 조성이었던 것을 단조(A단조)로 만들어 의표를 찌르고 있는데, 약간 울적한 선율 진행이 주가 되지만 여기서도 비올라와 첼로, 콘트라베이스가 처음 제시하는 리듬이 줄기차게 반복된다는 점에서 춤곡의 뉘앙스도 강하게 풍기고 있다. 특별히 표기되지는 않고 있지만 ABABA 스케르초 형식인 3악장도 기존의 베토벤 스케르초보다 훨씬 빠르게 진행되고, 약간 템포를 늦추는 B부분에서는 오스트리아 순례자의 노래를 일부 인용하고 있다.

마지막 4악장도 1악장과 마찬가지로 소나타 형식을 취하고 있고, 2/4박자에서 약박인 두 번째 박에 줄기차게 텐션을 주고 있어서 곡이 계속 앞으로 튀어나가는 인상을 준다. 이렇게 전체적으로 리듬이 강한 역할을 하고 있고, 특히 트럼펫과 팀파니의 활약이 두드러지게 나타나 군악풍의 느낌도 주고 있다.[2][3] 이 때문에 적절한 리듬 감각과 힘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곡의 특성을 살리기 매우 힘든 편.

악기 편성은 플루트 2/오보에 2/클라리넷 2/바순 2/호른 2/트럼펫 2/팀파니/현 5부(제1바이올린-제2바이올린-비올라-첼로-콘트라베이스). 전형적인 고전 시대의 2관 편성이다.

3 초연

1813년 12월 8일에 빈에서 열린 자선 음악회에서 처음 연주되었는데, 하나우 전투에서 부상당한 오스트리아 병사들을 지원하기 위해 개최된 공연이었다. 베토벤 자신도 그렇고 공연을 기획한 사람들도 그렇고 꽤 공을 많이 들였는데, 이 때 관현악단에서 연주한 이들 중에는 후기 현악 4중주 보급에 크게 이바지한 바이올리니스트 이그나츠 슈판치히 등의 명연주가들 외에 당대 혹은 이후의 유명 작곡가들까지 있어서 꽤 흥미롭다.[4]

하지만 난청이 한층 심해진 데다가, 당대 악기로는 자신이 원하는 만큼의 힘과 스피드를 얻기 힘들자 리허설 때 꽤 짜증을 낸 모양이었다. 바이올린 연주자로 참여했던 루이 슈포어의 증언에 따르면, '약하게 연주해야 하는 부분에서는 아예 보면대 밑으로 기어들어갔고, 강한 부분에서는 펄쩍 뛰어올라 고함을 치기까지 했다' 고 한다. 흠좀무.

베토벤이 지휘대에서 쌩쑈를 했던 어쨌건, 음악회는 한층 고양된 애국주의 열풍과 승리감도 있어서였는지 크게 성공했다. 특히 2악장은 유별나게 인기를 얻어서 여러 형태로 편곡되었고, 초연 무대에서도 앵콜로 연주되었다. 하지만 이 7번이 유독 인기를 많이 얻어 후속작인 8번을 압도하게 되자, 베토벤은 오히려 짜증을 내며 '8번이 7번보다 더 훌륭한 작품' 이라고 출판사에 편지까지 보내 항의했다. 하지만 지금도 '베토벤 교향곡은 홀수번이 명작'[5] 이라는 낭설이 적용되고 있으니...지못미 8번. 그럼 6번은 뭐가 되지?

4 트리비아

  • 사실 이 곡은 최근까지도 1번을 제외한 홀수 교향곡 중에서는 상대적으로 이야깃거리가 더 많은 3번이나 5번, 9번에 밀려 약간 덜 거론되고 있었다. 하지만 노다메 칸타빌레에서 테마곡으로 활용되면서 지금은 (동양권 한정이지만) 이런 핸디캡을 꽤 많이 극복한 상태. 음대생이 주축이 된 스토리인 만큼, 작가가 지나치게 심오해 보이는 3번이나 5번보다는 더 어울린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다만 원작만화와 애니메이션에선 3번 교향곡으로 나왔다.
  • 곡의 넘쳐나는 에너지와 활기와는 반비례하게, 이 곡이 유명 지휘자들의 생전 마지막 콘서트에서 연주되어 음악적 유언이 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페렌츠 프리차이, 존 바비롤리레너드 번스타인이 대표적인 예. 번스타인의 경우에는 실황녹음도 남아 있는데, 음악적인 가치 보다는 폐암 말기의 호흡곤란으로 쓰러지기 일보직전에 간신히 공연을 마치는 순간이 생생히 기록되어 유명하다.
  • 비행 시뮬레이션 게임 워 썬더에도 2악장이 삽입되었다.
  1. 비슷한 맥락이지만 정 반대의 혹평으로, "술주정꾼 작품 같다." "베토벤이 술집에서 이 곡을 쓴 게 틀림없다."고 평하는 사람도 있긴 했다.
  2. 이때문인지 은하영웅전설에서 bgm으로 자주 쓰였다.
  3. 이 곡을 작곡하고 있을 때 오스트리아는 영국 등 연합국 군대와 함께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을 한창 역관광하고 있었고, 나폴레옹에 대해 애증을 갖고 있던 베토벤이 이 곡에서 그런 세태를 반영했다는 사회학 시각의 해석도 있다.
  4. 현악 파트만 봐도 루이 슈포어, 요한 네포무크 훔멜, 자코모 마이어베어, 안토니오 살리에리가 바이올린을 연주했고, 첼로와 콘트라베이스 파트에는 각각 유명 기타리스트 겸 작곡가이기도 했던 마우로 줄리아니와 도메니코 드라고네티까지 포함되었다. 그야말로 치트키 라인업.
  5. 1번을 제외한 3번, 5번, 7번, 9번.
  6. 다만 나치가 집권한 1933~45년 동안에는 바그너의 오페라 '신들의 황혼' 중 지크프리트의 장송 행진곡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