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태

구태(仇台)
생몰년도 미상[1]

1 개요

중국 정사에 속하는 역사서인 주서, 북사, 수서 그리고 책부원귀[2]백제의 시조라고 전해지는 수수께끼의 인물이다. 그 정체는 아직도 미스터리이며, 구태를 실존 인물로서 실질적인 백제의 건국자로 보는 견해부터 관념상의 건국 시조로 보는 견해까지 다양한 썰들이 있다. 일단 북사에 전해지는 구태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동명(東明)[3]의 후손에 구태(仇台)가 있으니, 매우 어질고 신의가 두터웠다. 처음으로 대방(帶方)의 옛 땅에 나라를 세웠다. 한나라의 요동태수(遼東太守) 공손도(公孫度)[4]는 딸을 시집보냈는데, 마침내 동이(東夷) 중에서 강국이 되었다. 당초에 백여 가(百濟)가 건너 왔다(濟)고 해서 백제(百濟)라고 불렀다.

ㅡ《북사》 열전 백제

이렇듯 중국 기록에서는 (동명의 후손이라고 하니까 부여 출신으로 추정되는) 구태가 대방군의 옛 땅에 백제를 세웠고, 요동태수 공손도의 사위가 되었다고 전한다. 공손도가 서기 2세기에서 3세기 초의 인물이니, 그의 사위가 된 구태 역시 그 시대의 인물일 것이며 백제의 건국 연대도 삼국사기에서 전하는 기원전 18년보다 늦은 시기라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한편 책부원구에서는 백제가 수도에 구태의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책부원귀(冊府元龜)』에 “백제는 사계절의 가운데 달마다 왕이 하늘과 5제의 신에게 제사를 지냈으며, 도읍에 시조 구태(仇台)의 사당을 세우고 해마다 네 번 제사를 지낸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ㅡ《삼국사기》 잡지 제사

2 누구냐, 넌?

구태라는 인물 자체가 다른 기록에는 전해지지 않기 때문에 오리무중인 것도 있지만, 그의 가족 관계 때문에 혼란이 더욱 가중되고 있다. 사실 공손도가 사위로 맞아들인 사람은 부여의 왕 위구태(尉仇台)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자신의 딸이 아니라 종친의 딸을 시집 보낸 것이다. 일단은 이 항목의 주인공인 구태와 부여의 왕 위구태는 별개의 인물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기는 하다. 중국의 사관들이 두 인물을 혼동하여 기록을 섞어버렸다는 것.[5][6]

2.1 정체에 대한 썰들

구태가 누구인지에 대한 썰들은 일제강점기 때부터 제시되기 시작하였다.

식민사학자 오타 료는 구태를 고구려미천왕이 대방군과 낙랑군을 축출하고 옛 군현의 땅에 파견한 군 사령관이라고 하였다. 이에 따르면 구태는 옛 군현 땅에 잔류한 중국인들을 감시 및 통제하기 위해 파견되었는데, 고구려가 전연모용황에게 두들겨 맞고 휘청거리는 사이에 옛 대방 땅에서 독립하여 백제를 건국했다는 것. 하지만 이는 백제의 초기 역사를 부정하는 불신론에 뿌리를 둔 주장이며, 오타 료의 주장을 그대로 믿자니 다른 문헌 기록들이나 고고학적 증거들과 충돌하는 부분이 있어 수용하기 어렵다.

가장 대중적인 썰은 이병도구태 = 고이왕이다. 구태(仇台)라는 이름이 구이라고도 읽힐 수 있으며, 이것이 곧 고이와 이어진다는 것이 주요 논거이다. 하지만 지나친 음상사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라 반대 의견 역시 만만치 않다.

위와 같이 구태를 실존 인물로 보는 견해 외에도 관념상의 시조로 보는 견해가 있다. 구태의 출자가 부여로 되어 있다는 점, 그리고 구태가 다른 곳도 아닌 옛 대방 땅 즉 경기도 북부에서 황해도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에 나라를 세웠다는 점에 착안한 썰이다.

이 썰에 따르면 백제가 고구려에게 대차게 발리던 진사왕아신왕 시대를 지나면서 백제 내부에서 부여 계승 의식이 확실하게 정립되었고, 개로왕장수왕의 공격으로 한강 유역과 경기도 북부 지역을 날려먹으면서 잃어버린 고토의 회복에 대한 의지를 다지는 과정에서 자기들이 바라는 조건에 딱 맞는 가상의 시조 즉 구태를 만들어낸 것이다. 달리 말하면 자위질

그 밖에 구태를 근초고왕, 우태, 비류 등과 동일시하고 있다.

3 관련 기록들

『북사(北史)』와 『수서(隋書)』에는 모두 "동명의 후손 중에 구태(仇台)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사람이 어질고 신의가 있었다. 그가 처음으로 대방(帶方) 옛 땅에 나라를 세웠는데, 한(漢)의 요동태수 공손도(公孫度)가 자기의 딸을 구태(仇台)에게 시집보냈고, 그들은 마침내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어느 주장이 옳은지 알 수 없다.

ㅡ《삼국사기》백제본기 온조왕

『책부원귀(冊府元龜)』에 “백제는 사계절의 가운데 달마다 왕이 하늘과 5제의 신에게 제사를 지냈으며, 도읍에 시조 구태(仇台)의 사당을 세우고 해마다 네 번 제사를 지낸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ㅡ《삼국사기》잡지 제사

백제(百濟)는 그 선대가 대체로 마한(馬韓)의 속국이며 부여(夫餘)의 별종인 듯 하다. 구태(仇台)란 사람이 처음으로 대방(帶方)에 나라를 세우니, 그 땅의 경계는 동쪽으로 신라(新羅)에 닿고 북쪽으로 고구려(高句麗)와 인접하며, 서쪽과 남쪽으로는 모두 큰 바다로 경계지어져 있다. 동서의 길이는 450리이고 남북은 900여리이다. 도읍은 고마성(固麻城)이다.

ㅡ《주서》이성열전 백제

동명(東明)의 후손에 구태(仇台)가 있으니, 매우 어질고 신의가 두터웠다. 처음으로 대방(帶方)의 옛 땅에 나라를 세웠다. 한나라의 요동태수(遼東太守) 공손도(公孫度)는 딸을 시집보냈는데, 마침내 동이(東夷) 중에서 강국이 되었다. 당초에 백여 가(百濟)가 건너 왔다(濟)고 해서 백제(百濟)라고 불렀다.

ㅡ《북사》열전 백제

동명(東明)의 후손에 구태(仇台)라는 자가 있으니, 매우 어질고 신의가 두터웠다. 대방(帶方)의 옛 땅에 처음 나라를 세웠다.한나라의 요동태수(遼東太守) 공손도(公孫度)가 딸을 주어 아내로 삼게 하였으며, 나라가 점점 번창하여 동이(東夷) 중에서 강국이 되었다. 당초에 백여 가(百家)가 바다를 건너 왔다(濟)고 해서 백제(百濟)라 불렀다. 그로부터 십여대 동안 대대로 중국의 신하 노릇을 하였는데, 이전 나라의 역사에 소상히 기록되어 있다.

ㅡ《수서》동이열전 백제

구태의 제사를 받드는데 부여의 후예임을 계승하였다. (중략) 괄지지(括地志)에서 말하길, 백제는 성에 그 조상 구태묘를 세우고 4계절에 제사를 지낸다.

ㅡ《한원》번이부 백제

  1. 동시대의 인물로 공손도가 언급되는 걸로 보면 2세기 후반-3세기 무렵에 활동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공손도에 비해 기록이 300년 뒤에나 나오는 인물이기 때문에 단정짓기 어렵다. 하단 참조.
  2.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조 원년의 기사에도 김부식이 북사와 수서의 기록을 인용하여 "구태라는 애도 백제 시조라는데, 잘은 모르겠다."라고 적었다.
  3. 고구려의 동명성왕 즉 추모(주몽)가 아니라 부여의 건국시조 동명을 말한다.
  4. 공손탁(公孫度)이라고도 한다. 이름 마지막의 탁(度)라고도 읽힌다.
  5. 참고로 위구태의 위(尉)를 백제의 근(近)이나 고구려의 위(位)처럼 ~2세라는 뜻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이렇게 되면 위구태는 구태라는 조상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고선 구태 2세라고 했다는 것인데...
  6. 그래서 《후한서》에 나타나는 위구태는 2C전반기에 활동한 부여왕인데, 3C에 활동하는 위구태와 별개의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