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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휘(李東輝, 1873년 6월 20일 ~ 1935년 1월 31일). 한국의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 본관은 하빈 호는 성재(誠齋)이며 대자유(大自由)라는 이름도 썼다. 함경남도 단천 출생.
1899년에 서울의 육군 무관학교를 졸업하고 1902년 개혁당을 조직하여 개화운동을 했다. 1907년에 강화도의 강화 진위대 참령으로 근무하면서 기독교 신자가 되었고, 전등사에서 의병을 일으키려다 실패했다. 그 해 안창호 등과 신민회를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하다가 105인 사건에 연루해 투옥을 겪었다. 군대 해산 뒤에 블라디보스톡으로 건너갔고, 시베리아로 망명하여 대한국민의회를 조직했다. 1910년 로스엔젤레스로 가서 흥사단을 조직했다.
1919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군무총장, 국무총리를 지냈다. 이 때 고려공산당을 창당하고 무장투쟁을 주장하여, 외교론과 실력양성론을 주장한 기독교계 독립운동가인 이승만·안창호 등과 대립했다.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하여 사회주의 계열의 통합을 추진했으나 이동휘 자신이 중심인 상해파와 여운형이 중심인 이르쿠츠크파, 그리고 김중연의 엠엘파는 통합에 실패했다. 끝내 통합을 못본 채 김규식이 수반인 임시정부와는 별개의 한국정부를 만드는데, 소련으로 가서 인정을 요청했으나 실패했다.
그리고 1922년에 코민테른에서 독립운동을 위해 지원한 200만 루블을 받는 과정에서 측근인 한형권, 김립이 40만 루블을 고려공산당 조직 기금으로 쓴 사건인 일명 국제공산당 자금사건이 터지자 책임을 지고 국무총리 직을 사임했으며, 시베리아에서 병사했다.
오랫동안 대한민국에서는 이동휘를 공산주의자라고 해서 독립운동가로 인정하지 않았지만, 실제로는 공산주의자라기보다는 친소적인 독립운동가였다고 봐야 더 정확한 듯하다. 오히려 그런 쪽으로 큰 오해를 받은 사람은 김알렉산드라가 있다.[1] 이동휘는 경력에서 보듯이 공산주의를 체계적으로 접한 사람이 아니었고, 자신도 공산주의에서 이해가 부족하다고도 말했으며, 공산주의와는 양립할 수 없는 기독교 신자였다. 당시 정세로 소련에 기대를 건 독립운동가들이 많았고, 미국과 영국에서 공부했던 중국의 쑨원조차도 서방 각국의 제국주의의 위선을 보아 소련에 기운 입장이었다.[2] 뒤늦게라도 대한민국이 이동휘를 독립운동가로 인정해 다행이다.[3]
199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 ↑ 그리고 애초에 공산주의자이면서 독립운동가일 수도 있는 것이지, 공산주의자와 독립운동가가 배타적 개념이 아니다.
- ↑ 당시 구미열강들(미국·영국·프랑스 등)은 일본을 지지한 탓으로 중국·한국·베트남의 독립운동에 부정적이었다. 이 때 유일하게 소련은 중국·한국·베트남의 독립운동에 관심이 있었다. 이 시기 소련이 같은 '동맹 파트너'를 찾았는데, 처음에 유럽에서 나오길 바랬으나 실패했다. 그래서 소련은 눈을 돌려 아시아 약소민족 국가에 관심을 가졌고, 이 시기 아시아 민족주의자 일부는 '소련을 써 독립을 쟁취하자'는 인식이 컸다. 하지만 소련의 스탈린 이전 공산주의는 '영구혁명론'에서 보듯 민족이나 국가의 존재를 용납할 수 없었기에, 결국 친소련인사는 끝내 공산주의냐 민족독립이냐를 골라야 했다.
- ↑ 하지만 인지도에서는 여전히 안습이다. 국회에서 이동휘 기념식을 열기도 했지만 매우 썰렁했다.
덕분에 한국사에서 이 분에 대한 문제가 나오면 줄줄이 틀려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