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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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훈장
대한민국장(重章) 수여자
강우규김구김규식김좌진
김창숙민영환서재필손병희
신익희쑨원쑹메이링안중근
안창호여운형오동진윤봉길
이강년이승만이승훈이시영
이준임병직장제스조만식
조병세조소앙천궈푸천치메이
최익현한용운허위박정희


金昌淑
1879.7.10~1962.5.10

"이분은 우리 민족의 스승이라면 스승 되시는 분이에요. 이분이 지금 살아서 나온다면 절을 안 하겠어요?" - 김수환 추기경[1]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정치인.
자는 문좌(文佐), 호는 심산(心山)이다. 1879년 경상북도 성주군에서 태어났다. 대한민국의 마지막 유림 계열 지도자라 할 수 있다.

2 생애

2.1 독립 운동

1905년(광무 9)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서울로 올라가 이완용을 비롯한 을사오적을 성토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이 사건으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19년 3.1 운동 후 망명을 결심, 전국 유림대표들이 서명한 한국독립을 호소하는 유림단진정서를 휴대하고 상하이로 건너가,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우송하였다. 그 해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이 되고, 이듬해 귀국하여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다가 제1차 유림단사건으로 체포되었다.

출옥 후 다시 중국으로 가서 1921년 신채호 등과 독립운동지인 《천고(天鼓)》의 발행에 이어, 박은식 등과 《사민일보(四民日報)》를 발간,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한편,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를 조직, 군사선전위원장으로 활약하며 쑨원과 교섭, 독립운동기금을 원조받았다.

1923년 의열 활동을 위해 입을 다물고 실행한다는 의미의 다물단을 조직하였다.

1927년 상하이 주재 일본영사관원에게 붙잡혀 본국으로 압송되어 징역 14년형을 선고받고 대전형무소에서 복역했었다. 일제말기 비밀결사인 건국동맹의 남한 책임자로 추대되었다가 광복 직전 발각되어 1945년 8월 왜관 경찰서에 구속 중, 광복을 맞았다.

2.2 광복 후

8.15 광복 후, 초창기 박헌영조선공산당에 반대의사를 분명히 나타냈으며 민족주의계열에서 정치활동 했었다. 1945년 12월, 신탁통치 반대운동에 참여하였다. 이듬해 2월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의원에 선출되었으나, 민주의원 구성內 친일파, 한민당 세력들이 득세하는것을 보고 바로 비난성명서 내고 민주의원 직 거부했다. 이후 정치활동 일선에서 물러나 유림계로 복귀, 유도회를 조직하고 회장 및 성균관장을 역임하였다. 이후 일제시대에 억압되었던 성균관을 계승하는 취지로 성균관대학교를 창립하여, 초대학장에 취임하였다.

지금 성균관대학교 인문사회과학캠퍼스와 자연과학캠퍼스에는 각각 심산 김창숙 선생을 기리는 동상이 건립되어 있다. 또한 성균관대학교 학내 언론 중 하나인 성균지에서는 그를 기리는, 심산 문학상을 매년 시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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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구락부 사건 - 1952년 6월 이승만의 개헌안에 반대하는 시위도중 체포되는 심산 김창숙.

6.25 전쟁 후 대통령 이승만의 하야경고문사건으로 부산형무소에 40일간 수감되고, 1952년 부산 정치파동이 일어나자 이시영, 김성수, 조병옥 등과 반독재호헌구국선언을 발표하였고, 1959년 국가보안법 개악 당시 망국의 법이라고 강력히 비난했었다. 이러한 반독재 민주화운동 행보는 독재권력비호세력으로부터 테러를 당하였다.

1962년 3월 1일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으며, 그 해 5월 10일 노환으로 별세한 뒤 사회장(社會葬)으로 예장(禮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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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의 김창숙 선생. 1962년 5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투병중인 심산 김창숙 선생의 병상을 방문하였다.# 이 사진을 가리켜 김창숙 선생이 박정희를 외면한 모습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종종 있으며, 김창숙 관련 추모단체에서도 대체로 이러한 해석을 받아들이는 편이다.[2] 반면 노컷뉴스 임기상 기자의 연재에 따르면 당시 김창숙 선생은 인사불성 상태로 병문안으로 찾아온 박정희를 알아보지 못하였다고 한다. 실제로 김창숙 선생은 병문안 며칠 뒤에 작고하셨다. 그외에도 1962년 2월 27일 경향신문 기사 "혁명정부하선 상받을터"라는 기사를 보면 김창숙 선생은 당시 박정희 정부에 대해 일부 비판함과 동시에 독립유공자 포상에 대해서는 감사의 뜻(謝意)을 표하고 있다.

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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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대 중앙학술정보관 앞에 세워진 김창숙의 동상. 단정하고 정적인 다른 유학자들의 동상과는 달리, 매우 역동적인 모습으로 조각된 것이 특색.

김창숙 선생의 항일독립운동의 애국애족 정신과 유학의 선비정신을 기리기 위해 지어진 '심산 기념 문화센터' 가 서울 서초구에 위치하고 있다.[3]# 여담으로 문화센터에서 독서실을 운영하는데 값이 싸고 시설이 좋다. 청소년 1000원, 성인 1500원에 이용 가능.

  1. 김수환 추기경이 2000년 심산상을 수여받은 후 심산상 수상자의 관례대로 김창숙 묘소에서 절을 올리며 했던 말이다. 이 때 김 추기경은 절 뿐만 아니라 음복까지 했다. 당시 영상
  2. 이러한 관점은 일생을 기득권, 지배층에 굴종하지 않고, 민족과 민주라는 가치에 충실하여 당대와 후세의 존경을 받은 분인데, 말년에 와서 쿠데타의 주동 세력과 원만하게 지냈다고 비춰지면 선생의 업적에 누가 될 수 있음을 감안된 것으로 여겨진다.
  3. 세화 3개교와 반포 종합 운동장 근처에 위치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