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미국 대통령 | |||||||
21대 | ← | 22대 | → | 23대 | |||
체스터 앨런 아서 | ← | 그로버 클리블랜드 | → | 벤저민 해리슨 | |||
23대 | ← | 24대 | → | 25대 | |||
벤저민 해리슨 | ← | 그로버 클리블랜드 | → | 윌리엄 매킨리 |
역대 뉴욕 주지사 | |||||||
250px | |||||||
30대 | ← | 31대 | → | 32대 | |||
알론조 B. 코넬 | ← | 그로버 클리블랜드 | → | 데이빗 H. 힐 |
공식 초상화 | |
풀네임 | Stephen Grover Cleveland |
출신 정당 | 민주당 |
생몰년 | 1837년 3월 18일 ~ 1908년 6월 24일(71년 3개월 6일) |
재임기간 | (22대) 1885년 3월 4일 ~ 1889년 3월 4일 (24대) 1893년 3월 4일 ~ 1897년 3월 4일 |
서명 | |
키 | 180cm |
위풍당당한 체구! 실제로 체격과 배짱이 정비례한 인물이다.
저 눈매가 매의 눈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1907년 가족과 함께.
1908년 촬영. 사망하던 해에 촬영된 사진이라서인지 많이 해쓱해졌다.
"Though the people support the government; the government should not support the people."(국민이 정부를 돕더라도, 정부가 국민을 도와서는 안 된다.)[1]
1 소개
미국의 제22대, 제24대[2] 대통령. 원래 이름은 스티븐 그로버 클리블랜드(Stephen Grover Cleveland)였는데, 소년 시절에 스티븐이란 이름을 버리고 죽을 때까지 '그로버 클리블랜드'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또한 미국 대통령 중 유일하게 임기를 나누어서 수행한 사람이기도 하다.
2 대통령이 되기까지
그의 집안은 뉴저지주 콜드웰의 장로교 목사 집안이었는데, 대대로 이 지역에서 목사로 유명했던 집안이다. 클리블랜드는 이 집안에서 9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원래 공부를 좋아했지만[3] 16세 때 아버지가 사망하는 바람에 학업을 포기하고 숙부와 함께 살면서 잡화점 점원으로 일하고 한동안은 뉴욕의 한 맹인학교에서 교사로 일했다. 꽤 바쁜 삶이었지만 숙부의 배려로 버팔로의 변호사 사무실에서 법학을 독학으로 공부했고 1859년 변호사가 되었다. 미국사의 '독학 대통령' 중 한명.
그는 과부인 어머니와 어린 동생들을 부양해야만 했기 때문에 남북전쟁 기간에도 돈을 벌어야 했다. 변호사만으로는 수입이 부족했는지 부지방검사, 보안관(뉴욕주 에리 카운티 셰리프국장), 버팔로 시장 등을 지냈다. 남북전쟁 당시의 징병법에는 본인이 병역에 응하지 못하면 대리인에게 돈을 주고 병역을 치르게 하고 자신은 면제받을 수 있었는데, 클리블랜드는 형 두 명이 군대에 가 있어서 혼자 가족을 부양해야 했기 때문에 당시 법안에 따라 150달러에 폴란드 출신 이민자를 대리인으로 내보내고 병역을 면제받았다. 이 점은 훗날 대권을 노릴 때의 그에게 조금 위기를 주기도 했다.
어쨌든 정치에 입문한 이후에는 민주당에 입당했고 여러 공직을 거치면서 정직과 성실, 원칙과 소신에 따른 행동으로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고 1883년 뉴욕 주지사가 되었다. 주지사로써도 공직사회의 부패를 일소하고 개혁을 실시하여 꽤 성과를 거두었는데 이렇게 얻은 인기와 명성에 힘입어 대권 후보로 크게 부상, 결국 1884년 대선에서 민주당의 후보로 지명되었다.
클리블랜드의 스캔들을 풍자한 만평. 당시 공화당에서는 울고 있는 아기의 대사를 약간 바꿔서 "우리 아빠 어디 갔어요!"라는 선전 구호로 클리블랜드를 비하했다. 민주당에서는 이에 맞서서 "백악관에 가셨단다. 하하하!"라는 구호를 만들었다고.몰라 그거 뭐야 무서워
상대였던 공화당에서는 지도자인 제임스 블레인이 나왔는데, 당시 민주당과 공화당의 당론은 관세법에 대한 견해[4] 외에는 거의 차이가 없어서 이 때의 선거운동 양상은 상대 후보의 흠집잡기와 개인적 도덕성을 물고 늘어지는 데 주력이 되었다. 공화당은 클리블랜드의 병역 문제를 두고 '병역 기피자'라고 몰아세웠고, 급기야 공화당 지지 언론들이 클리블랜드가 버팔로의 젊은 과부와 불륜 끝에 아이까지 가졌다는 폭로성 기사를 썼다. 하지만 클리블랜드는 그 여인과 불륜을 가졌음을 인정했고, 비록 그 아이가 자신의 아이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책임감을 느끼고 아이의 양육비를 지불했다. 또한 병역 문제에 있어서는 블레인도 병역을 치르지 않고 대리인을 보낸 처지라서 병역 문제는 그다지 클리블랜드의 발목을 잡지 못했고 오히려 이 스캔들에 대처하는 그의 모습이 유권자들에게 '정직한 인물'이라는 인상을 심어 주었다. 개표 결과 간발의 차이(뉴욕 주에서 고작 575표/0.05% 차)로 승리하여 백악관에 입성.
3 대통령으로서
그가 대통령이었을 때 주된 문제는 관세무역과 노동운동이었는데, 클리블랜드는 당론인 관세인하정책에 따라 관세를 낮추고 자유무역을 장려하여 시장을 확장하는 정책을 펼쳤으며 금본위제를 정착시키는 데 노력했다. 또한 행정부를 효율적으로 조직하였고 그 강직함으로 공직사회의 부패를 일소한 점은 그의 업적 중 하나이다. 이 점으로 첫 번째 임기를 수행할 무렵에는 제법 인기가 있었다.
이 인기에 힘입어 1888년 재선을 노리고 공화당의 벤저민 해리슨과 격돌했는데 이 때 클리블랜드는 득표수에서는 해리슨을 5만 표 차이(0.6%)로 눌렀지만 선거인단 수에서 뒤지는 바람에 백악관을 해리슨에게 내 줘야 했다. 여기에는 주미 영국 대사였던 라이놀 웨스트의 발언 탓이 컸다. 공화당 측 선거참모가 웨스트에게 "영국 입장에서는 어떤 후보가 되기를 원함?"이라고 묻자 지지리도 눈치 없는 웨스트는 "우리는 영국에 호의적이고 자유무역과 관세인하를 모토로 하는 클리블랜드를 원한다!"이라고 말했다. 공화당 측에서는 이 발언을 가지고 대대적으로 "영국은 클리블랜드를 원한다!"고 퍼뜨렸고 이것은 인구가 많은 뉴욕 주에서 영국을 혐오하던 아일랜드계 유권자들이 클리블랜드의 표에 타격을 주었다. 이 해의 승부에서도 뉴욕주에서 고작 7187표(0.54%)로 승부가 갈렸다.
4년 동안 와신상담하며 백악관 탈환을 준비하던 클리블랜드는 1892년의 Revenge Title Match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지명되어 결국 당선에 성공했고 두 번째 대통령직을 수행했다. 그러나 그의 두 번째 임기는 그야말로 악순환이었다. 당시 악화되던 경제상황이 결국 공황으로 확산되면서 경기는 더욱 침체되었고 실업률은 증가했으며 물품의 가격이 떨어지고 농업은 거의 붕괴 상황에 이르렀다. 경제 공황에 힘입어 압도적 다수당을 4년간 차지했던 민주당은 중간선거에서 다시 대패하여 전체의석의 1/3 이하로 쪼그라들고 만다.
이런 배경 속에서 노동자들의 노동운동이 가장 격렬하게 일어났던 시기가 바로 클리블랜드의 임기였다. 1886년 미국노동총연맹이 결성된 이래 노동운동은 조직화, 거대화되어갔으며 특히 같은 해인 1886년 일어난 헤이마켓 사건은 그의 재임기에 일어난 최대의 노동운동 중 하나였다. 그러나 클리블랜드의 정강정책은 시장의 자유를 추구하여 정부의 개입을 막고 있었고 노동자에게도 우호적이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또한 여러 정책을 펼쳤으면서도 국민의 교육과 복지를 위한 조치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어서 이 점도 비판을 많이 받았다.
두 번째 임기에는 6백개의 은행이 파산하는 사태가 발생했고 1895년에는 국가보유금이 거의 바닥나다시피 하여 그는 급히 거대 은행그룹에 돈을 빌려야 했다. 광산과 철도 노동자들의 파업이 다시 일어났으며 클리블랜드의 강경진압에 여당의 인기는 더욱 곤두박질 쳤다. 결국은 이런 불경기 속에서 허덕이다가 두번의 대통령 임기를 마쳤다.
4 평가와 인물됨
대통령으로써의 평가나 인기 순위는 나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좋지도 않은 편으로 그저 무난한 수준이다. 높이 평가받는 점은 원칙과 소신, 강직함으로 부패를 근절했다는 업적이지만 위에서 언급된 노동운동 탄압과 경제 위기를 초래한 점에서 평가가 많이 깎인다. 또한 민주당 인물에 개혁적 대통령이란 평가에 행정부에서는 지도력을 발휘했지만, 여소야대 의회와의 사이는 좋지 않았다. 지나치게 강직했던 나머지 다소 독선적인 면도 보여서 비전 없는 정책을 밀어붙이기도 했고 의회의 가결 법안을 임기 중 414개나 거부했다. 독학의 한계였는지 연설과 글은 서툴렀으며 개혁 정책을 내세운다고는 했지만 그 정책도 장기적인 비전이 없었고, 융통성이 없다는 점에서 평가가 깎이는 편. 사실 경제위기는 그가 초래했다기보다는 쌓이고 쌓이던 것이 그의 재임시기에 터진 것이지만, 그렇다고 그가 공화당의 경제정책을 수정한건 아니었다.
뒷날 28대 대통령인 우드로 윌슨은 "링컨 사망 이래 1894년 사이의 대통령들 중에서 미국에서 가장 주도적이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유일한 대통령"이라고 높이 평가했으며, 미국의 역사가들도 대체적으로는 링컨부터 시어도어 루스벨트 사이의 대통령들 중 가장 중요하고 뛰어난 대통령으로 평가하고 있다. 실제로 학자나 연구자에 따라서는 그를 꽤 높이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강직하고 완고한 성품이었으며 세련됨과는 거리가 먼 거칠고 투박한 스타일이었다. 하지만 뒤집어 말하면 가식이 없는 솔직한 인물이었다는 소리. 자신의 스캔들을 인정하는 것만 봐도 정직함은 그의 장점이라고 볼 수 있다. 비록 정치적으로는 다소 실패한 면이 많았지만 자신의 모든 정책 결정에서 도덕적 기초를 생각했고 정직함과 근면함은 정말 모범적이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또한 권위나 공직을 이용해서 사리사욕을 추구하지는 않은 인물이다.
그가 미국 대통령 사이에서 세운 기네스가 몇 있는데 유일하게 임기를 두 번으로 나눠 수행한 인물 외에 미국 역대 대통령 중 두 번째로 뚱뚱했다는 점인데 몸무게가 125kg에 이르렀다. 1위는 부동의 윌리엄 태프트(175kg). 더불어 3번째이자 가장 처음으로 취임한 뚱뚱한 대통령 아서에 이어 취임한지라 그 당시로선 뚱보 대통령을 2연속으로 보게 됐다.
여담으로 FDR이 어린시절, 그의 아버지와 같이 만난 일이 있었다. 이자리에서 FDR의 아버지는 클리블랜드에게 자신의 아들을 위해 덕담을 해 줄 것을 요청했는데 이때 클리블랜드는 "얘야, 매일 밤 잠자리에 들기 전 기도할 때 '하나님, 부디 절 대통령이 되지 않게 해주세요.'라고 하거라."라고 했다한다.
5 한국과의 관계
한국 역사상 최초의 주미공사인 박정양이 미국에 파견된 것이 바로 그의 재임기였다. 1888년 1월 17일 박정양은 백악관에 가서 클리블랜드를 만나고 국서를 제출했다. 이 때 박정양은 사모, 관대를 착용하고 신하의 대례복인 흑단령을 입은 채로 백악관을 방문했다고 한다. 고종의 이름으로 된 당시의 국서는 이러했다.
대조선국 대군주는 대아미리가(大亞美里加, America의 음차)합중국 대백리새천덕(大伯理璽天德, President의 음차)에게 글월을 올린다. 짐은 본국과 귀국이 먼저 조약을 체결, 우의가 돈독하고 두터워 사절이 왕래한 지 여러 해가 되었다. ...(중략)... 이에 짐은 신애하는 종2품 협판내무부사 박정양을 뽑아 전권대신으로 임명하여 귀국에 파견, 바라건대 성실히 서로 믿고 종우접대하기 바라며, 아울러 수시로 입관하여 짐의 간절하고 애틋한 마음을 대신 아뢸 것이다. - 개국 496년(서기 1887년) 8월 7일
이에 클리블랜드는 다음과 같은 답사를 했다.
"미합중국 정부는 양국이 조약에 규정된 바와 같이 상호외교교섭관계의 확립을 확인함으로써 양국이 바라던 우호적 교섭을 하게 되어 크게 만족하는 바입니다."오오 역시 뭔가 달라
6 아내
위의 사진의 여성은 클리블랜드의 아내 프랜시스 폴섬 클리블랜드 Frances Folsom Cleveland. 1864년 7월 21일 ~ 1947년 10월 29일
미인이다! 그것도 현대의 미인들 처럼!
이 사람의 행적에서 가장 이색적인 것은 키잡에 성공하여 백악관에서 결혼식을 올린 최초의 대통령이라는 점이다. 위의 생몰연도를 보면 알겠지만 클리블랜드와는 27세 차이다.
둘이 처음 만난 것은 1864년 그녀가 처음 태어난 해. 클리블랜드와 그녀의 아버지인 오스카 폴섬은 동료 변호사 사이로 친밀한 사이였다. 클리블랜드는 그녀가 태어나자 선물로 유모차를 선물했다[5]고. 그런데 1875년 그녀가 11세가 되던 해 오스카 폴섬이 마차 사고로 사망하자클리브... 내 딸을 부탁해. 그가 직접 폴섬가의 재산을 관리하고 가족을 부양했다. 그는 프랜시스를 어린 시절부터 '프랭크'라는 애칭으로 부르며 마수를 뻗쳤고 귀여워했고 프랜시스의 교육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프랜시스도 이 뚱뚱한 아저씨를 '클리브 아저씨(Uncle cleve)'라고 부르며 따랐다고 한다. 그녀가 대학에 들어가자 클리블랜드는 프랜시스의 어머니인 엠마 폴섬에게 "따님과 계속 연락해도 될까요?"라고 물었고 그날 이후 그녀의 방에는 클리블랜드가 보낸 꽃다발로 넘쳐 흘렀다나.
1885년 대통령에 당선된 클리블랜드는 48세였다. 그런데 그가 이 때까지도 총각이었기에 영부인 역할은 여동생인 로즈가 대신했다.
그러나 이 해에 프랜시스에게 청혼하여 곧 이듬해 6월에 백악관에서 결혼했다. 미국 역사상 최연소 영부인으로 뉴욕의 웰스 칼리지를 졸업한 그녀의 나이는 21세. 가히 키잡의 모범적 사례다. 당시 언론들은 대통령이 결혼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후 클리블랜드와 폴섬가의 친분을 알고 있어서인지 '분명 폴섬 가문의 미망인인 엠마 폴섬(당시 45세로 클리블랜드보다 3살 연하라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하는게 전혀 이상하지 않다.)이 상대겠지!'라고 예상했지만 정작 대통령 결혼식날에 대통령의 딸뻘 되는 아가씨가 나타난 것을 보고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다. 그래서 삽화 속 사람들 표정이 저 모양이로군
영부인으로서 그녀는 이후로도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계속해서 받았고 인기와 평판이 꽤 좋은 편이었는데 제법 당돌한 면도 있었던 모양이다. 1888년 해리슨에게 백악관을 내어 주었을 때 직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가구와 장식들을 잘 관리해 주세요. 4년 뒤에 다시 돌아올 테니까요."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또한 클리블랜드가 아내를 구타한다는 정적들의 모함에 대해 직접 언론에 나서서 사실이 아니라고 해명하기도 했다. 이로써 그녀는 최연소 영부인이라는 것 외에 직접 언론에 나서 공식해명을 한 최초의 영부인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나이 차이가 꽤 나는 결혼이었지만 두 부부의 결혼생활은 매우 행복했으며 1897년 두 번째 임기를 마친 후 뉴저지의 프린스턴에서 살았으며 때 클리블랜드는 프린스턴대의 이사를 지냈는데 이 당시 학교 회장이었던 우드로 윌슨과 마찰이 심했다고 한다. 1908년 71세의 클리블랜드는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클리블랜드가 죽고 6년 뒤 그녀는 프린스턴 대학 교수 토마스 프레스턴 2세와 재혼했으며[6] 1947년까지 살았다.- ↑ 먼나라 이웃나라 미국편에서는 클리블랜드의 이 발언을 케네디의 주장(국가가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묻지 말고...)과 일맥상통하다고 했지만 잘 씹어보면 케네디의 말과 클리블랜드의 말은 어감이 약간 다르다.
- ↑ 1950년대까지는 클리블랜드를 그냥 22대 대통령으로만 쳤다고 한다. 즉 24대 대통령으로 행정부를 이끈 시절도 '22대 대통령'으로 인식했다는 소리. 그래서 후임인 매킨리는 24대, 테디 루스벨트는 25대... 이런 식으로 대수가 올라갔다고 한다.
- ↑ Fayetteville Academy와 the Clinton Liberal Academy를 다녔다. 흔히 무학으로 알려졌는데, 최소 고졸은 된다고 봐야 옳다고 한다. 확인바람.
- ↑ 민주당은 관세 인하, 공화당은 높은 보호관세 지지.
- ↑ 덧붙여, 이것은 최초의 유모차로 알려져 있다.
- ↑ 미 대통령의 미망인이 재혼한 첫번째 사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