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양

대한제국의 역대 총리대신
1대 김홍집2대 박정양3대 김홍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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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定陽, 1841년 ~ 1905년 11월)

1 개요

조선 후기의 문신, 외교관, 대한제국의 정치가이다. 온건개화파의 대표인물이며 조선 최초의 주미대사다.

2 생애 초반

정조 후궁인 수빈 박씨의 일족으로 박규수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유대치 문하에서 김윤식, 김홍집, 김옥균 등과 교우하였다. 1864년 생원시에 입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하고, 1866년 문과에서 급제하였고 온건개화파의 일원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3 관직 생활

1881년 조사시찰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방문하였으며, 이후에도 관직에서 승승장구하여 성균관 대사성, 한성부 좌윤, 사헌부 대사헌 등을 지냈다. 1887년 주미 특파 전권대사가 되어 워싱턴에 부임했으며 당시 미국 대통령 그로버 클리블랜드에게 신임장을 받기도 하였다. 당시 그는 백악관에서 대통령 클리블랜드에게 큰 절을 해서 미국인들이 당황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1889년 귀국하여 홍문관 제학, 호조판서, 한성부 판윤 등을 지내고 1894년 갑오개혁으로 제1차 김홍집 내각이 수립되고 군국기무처가 설치되자 회의원이 되었다. 이 해 11월 제2차 김홍집 내각 때는 학무대신이 되었고, 1895년 삼국간섭 등으로 제2차 김홍집 내각이 무너지자 총리대신이 되어 과도내각을 세웠다가 을미사변 때 수구파의 대대적인 탄핵을 받고 파면되었다. 다시금 제3차 김홍집 내각이 수립되자 내부대신이 되어 을미개혁을 진행하다가 아관파천으로 김홍집이 살해당해서 제3차 김홍집 내각이 무너지자 내부대신, 총리대신 서리, 궁내부대신 서리를 겸임하여 정국을 주도했다.

1897년 독립협회 설립을 주도하였고 만민공동회에 정부 측 인사로 참가하였다. 독립협회가 폭력적으로 탄압당하자 사직서를 올렸으나 곧바로 고종에 의해 내무부 대신이 되었다.

4 최후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을사오적을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 해 9월 표훈원 총재가 되었고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훈장도 받았으나 병이 악화가 되어 11월 사임하였고, 곧바로 사망하였다. 순종 때 문익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5 평가

개화에 앞장섰으나 온건개화파를 보호하는 역할을 자임해서 정쟁에 자주 휘말렸다. 당장에 김홍집의 세 번의 내각에 모두 참가하였으면서도 제3차 김홍집 내각 전후로 총리대신 서리를 맡았다는 점에서 그의 정치역경을 잘 알 수 있다. 한 마디로 당시 정치적 문제에 대한 수습은 죄다 이 사람이 맡았다는 것이다.

친일적인 측면이 엿보였다는 평도 있으나,[1]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정부 측 인사로 계속 참가했다는 점과 을사5적에 대한 처벌을 주장했다는 점 그리고 이상재 등 젊은 개화파의 정치적 후견인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개화기 때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음에는 틀림없다고 볼 수 있다.
  1. 본래 개화파 치고 친일 의혹 안받아보는 사람이 없다. 19세기에는 어느 국가와 가까운지에 따라 파당 이름이 결정되는 일이 많았고 오히려 친일파 보다는 친청파, 친러파로 불리는 이들이 국가에 끼친 해악이 더 많았다. 때문에 친일파라고 해서 이완용 등과 동급으로 생각하면 곤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