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미국 대통령 | |||||||
20대 | ← | 21대 | → | 22대 | |||
제임스 에이브럼 가필드 | ← | 체스터 앨런 아서 | → | 그로버 클리블랜드 |
공식 초상화 | |
풀네임 | Chester Alan Arthur |
출신 정당 | 공화당 |
생몰년 | 1829년 10월 5일 ~ 1886년 11월 18일(57년 1개월 13일) |
재임기간 | 1881년 9월 19일 ~ 1885년 3월 4일 (3년 5개월 13일) |
서명 | |
키 | 188cm |
1865년 리즈 시절.
"나는 대통령직에 있으면서 체스터 앨런 아서와 미합중국의 대통령은 완전히 서로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소."[1]
1 대통령이 되기까지
1829년 버몬트 주에서 태어났다. 1848년 뉴욕 유니언대학을 졸업하고 1851년부터 이듬해까지 강의를 했으며 1854년에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후 뉴욕에 변호사 사무소를 개업했다. 변호사로 재직하던 당시 쟁점이 되었던 노예 문제에서 폐지론을 주장했던 인물로 당시 백인 전용차에서 흑인 여성을 강제로 내리게 한 브루클린 전차 회사를 기소하는 성과를 올렸으며 인종 차별이 없는 대중교통제도를 도입하는 데 노력했다.
이런 성과로 뛰어난 변호사로 명성을 얻어 공화당에 입당하여 정계에 입문했으며 당시 공화당 최대 파벌의 영수격인 로스코 콩글링 (콩까지마..) 계파에 속했다. 율리시스 S. 그랜트 정권 시절에 마침내 뉴욕항 관세징수관에 임명되었다. 이 직책은 당시 뉴욕에서 제일 큰 영향력을 지닌 인물이 갖는 권한이었는데, 그 후임인 러더퍼드 헤이스가 대통령이 되자 부패혐의로 해임되었다. 뇌물을 먹기는 했지만 이 조치는 당시 헤이스가 당내 최대 파벌인 콩글링을 견제하기 위한 조치로 비쳐졌다고 한다.
이후 제임스 가필드가 1880년 선거에서 공화당 후보로 지명되자 계파 실세인 콩글링과 가필드의 정치적 타협으로 콩글링 계파의 아서가 부통령 후보로 출마하여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2 대통령으로서
그러나 1881년 7월에 가필드가 저격당했고 두 달 반의 투병 끝에 사망하자 대통령이 되었다. 이 때문에 아서의 후견인이나 다름없던 콩글링 일파의 발호가 우려되었지만 아서는 과감하게 콩글링파와의 관계를 끊었고 공화당 내부의 파벌 사람들을 요직에 등용하지 않음으로써 편파적 인사관행의 고리를 끊는 데 성공했다. 비록 콩글링파에게는 평생 '배신자'라고 비난받았지만.
아서 정권 최대의 업적은 바로 '펜들턴법(Pendleton Civil Service Act)'의 제정이다. 이것은 당시 판을 치던 연줄이나 계파에 따른 관직 등용, 엽관제나 매관매직을 금지하고 정치적 거래 대신 공개시험을 치르게 한 것이며[2] 공직을 희망하는 사람들이 정당 조직에 내는 정치헌금을 금지시켰다. 아서 자신은 이러한 엽관제나 계파에 따른 관직 등용의 수혜자였지만 이런 법안에 서명함으로써 많은 정치적 동료들을 격분시켰다. 이 법안은 공직의 청렴도를 높였다는 의의가 있어서 미국 공무원제도의 마그나카르타로 일컬어진다.
또한 당시 큰 쟁점이 되고 있던 관세 논쟁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해 위원회를 구성했다. 이 위원회는 공화당과 반대되는 의갼인 관세율의 대폭 인하를 주장했지만 의회는 관세율을 조금만 인하할 것을 주장했다. 아서는 이 두 의견 중 고민하다가 의회의 법안에 서명했다.
그 외 업적으로는 미 해군을 강화하려고 노력했으며 전세계의 시간(표준시)을 통일된 기준에 맞추기 위해 표준시간 체계를 만드는 국제협의회를 조직했다. 외교적으로는 니카라과를 관통하는 태평양과 대서양을 연결하는 운하 건설을 위해 니카라과와 협상했지만 이 계획은 상원에서 통과되지 않았다. 그리고 중남미에서 금융거래를 보다 원활하게 하기 위해 남미와 북미의 단일통화를 개발하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이렇듯 여러 자잘한 일들을 했지만 펜들턴법 제정 외에는 크게 눈에 띄는 업적이나 효과를 본 업적이 없어서 그다지 존재감이 있는 대통령으로 기억되지는 않는 인물이다.
3 퇴임 후와 평가
1885년 퇴임할 때 "퇴임 대통령이 할 일은 시골로 내려가 큰 호박을 키우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일이 없다."라는 말을 남겼지만 그렇게 하지는 않았고 뉴욕에서 다시 변호사 일을 시작했다. 하지만 지병이었던 신장병이 점점 악화되었고 이후 변호사 일을 그만두고 자택에 칩거해 있다가 고작 퇴임 1년 8개월 만인 1886년 11월 18일에 생을 마감했다.
대통령으로써의 그는 당시 부패가 만연하던 미국 정계의 부패를 끊고자 노력했고 특히 펜들턴법 제정으로 엽관제도의 고리를 끊었으며 그랜트 이후 떨어지던 대통령의 권위를 어느 정도 회복한 대통령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임기 동안 미국은 남북전쟁의 영향에 얽매이지 않게 되었다. 이렇듯 능력은 그럭저럭 무난한 대통령으로 평가받지만 미국인들 기억에는 그다지 뚜렷하게 기억되는 대통령은 아니다.
28대 대통령인 우드로 윌슨은 그를 "구레나룻 빼고는 남는 게 없는 사람"이라고 혹평했지만 당대 외교관이자 훗날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고 국무장관까지 지낸 거물 정치가 엘리후 루트는 "정직하고 현명한 정치가. 선을 목적으로 한 대의는 친숙하지만, 선이 아닌 나쁜 조치들은 그의 불굴의 의지에 의해 소멸되었다."라고 높이 평가했다.
4 인물됨과 일화
미국 대통령 중 윌리엄 태프트, 그로버 클리블랜드의 뒤를 이은 세 번째로 뚱뚱한 대통령으로 키 188cm에 몸무게 112kg의 당당한 풍채를 자랑했다. 취임식 이후에 제일 먼저 한 것이 완전히 개판으로 전락한 백악관 수리였다나... 이런 풍채에다가 개인적 취향도 대단히 고급스러운 멋을 좋아하던 사람이라서 옷도 항상 화려하게 입고 다녔다고 한다. 그리고 사진에서 보이다시피 독특한 수염과 짧은 구레나룻이 당시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다고. 그래서 붙은 별명이 '신사 보스(Gentleman Boss)'. 옷 뿐만 아니라 입맛 까다로운 미식가라서 백악관에 있을 때 손님이 오면 14가지 코스의 만찬에 8가지 종류의 와인을 대접하여 식사를 즐겼다. 그래서 이원복은 먼나라 이웃나라 미국 대통령 편에서 아서가 그랜트 이후로 완전히 실추된 대통령의 권위와 위엄을 되살리는데 일조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대단한 귀차니스트였는지 하루에 절대로 6시간 이상 일을 하지 않았다고 하며 대부분 아침 10시에 집무를 시작하여 오후 4~5시 사이에 업무를 마치고 개인시간을 가졌다. 당시 백악관 서기는 "대통령께서는 내일로 미룰 수 있는 일을 절대 오늘 하지 않으십니다."라고 말했으며 아서 본인은 "일하는 곳과 같은 집에서 사는 것이 얼마나 피곤하고 우울한 일인지 여러분은 모르실 겁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또한 사람이 덩치나 화려한 외양에 어울리지 않게 소심한 면모가 있었는지 언론과의 기자회견이나 인터뷰를 매우 싫어했다. 그래서 언론은 항상 아서에 대해 우호적인 보도보다는 '하라는 일은 안하고 놀기만 하는 게으른 대통령' 등으로 혹평했다. 그래도 당시 국민들은 이렇다 할 불평은 하지 않았던 모양.
대통령 시절 퍼스트레이디(영부인)는 없었다. 원래 1859년에 엘런 헤른던과 결혼했지만 그녀는 아서가 대통령이 되기 1년 전인 1880년에 사망했다. 대통령이 된 후 백악관에 아내의 초상화를 걸어두고 매일 신선한 꽃을 가져다 놓으며 죽는 날까지 재혼도 안 하고 아내를 그리워했다고 한다. 화려한 외향과는 달리 의외로 섬세한 남자. 실제로도 책을 읽으면서 주인공이 불쌍하다 자주 울었단다.
영화 <다이하드 3>의 키워드가 되는 인물. 이 영화를 제대로 봤다면 이 대통령의 이름을 알고는 있을 것이다. 폭탄을 설치한 위치를 알려주는데 42-21 이라는 문제만 던져주고 끊어버린다. 결국 이리저리 구르다가 트럭기사에게 21대 대통령의 이름을 알아내고 위치를 이야기해주지만 알고보니 사무엘 L. 잭슨이 분한 전기수리공 '제우스'의 조카가 다니는 공립 초등학교였다. 체스터 A. 아서 공립학교(..). 영화 이야기지만 이렇게 아서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 자체가 그의 존재감이 미국인들 사이에서 어느 정도인지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폭탄을 설치했다는 것은 구라였다. 사이먼은 "난 군인이지 괴물이 아니야."라면서 아이들이 있는 학교에 진짜 폭탄을 설치할 정도의 미친놈은 아니라고 변명(?)했다.깨알같이 가끔 미친놈 밑에서 일하긴 한다고 이죽대긴 한다만
잠옷바람으로 대통령 선서한 사람이다. 또 다른 대통령이 생각나면 지는 거다1881년 9월 20일 제임스 가필드 대통령이 새벽에 죽는 바람에 사람들이 자고 있던 그를 깨워서 선서를 시키고, 이틀 뒤에 정식으로 취임하면서 다시 선서했다고...
5 한국과의 관계
보빙사 일행을 접견하는 아서
한국과는 의외의 접점이 있는 인물인데 바로 한국 외교사절을 최초로 받은 미국 대통령이다. 1882년 고종 시절에 파견된 보빙사(단장: 민영익) 일행은 미국을 방문하여 뉴욕의 피프스 애비뉴 호텔에서 아서에게 인사를 올렸다. 이때 보빙사는 조선의 왕을 대하는 식으로 아서에게 큰 절을 올렸고 고종의 친서를 전했는데, 이때 아서는 이 생소한 인사법에 대해 매우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멀뚱멀뚱 서 있었다고 한다. 천조국의 황제 폐하께 절을 올린거라 카더라 하지만 곧바로 보빙사 일행이 미국식으로 악수를 청해 분위기는 다시 좋아졌다고. 예가 끝나고 간단한 소개를 마친 후 민영익은 다음과 같은 부임사를 읽었다.
사신 민영익, 홍영식 등은대아미리가(大亞美里加: America의 음차) 합중국 대백리새천덕(大伯理璽天德: President의 음차)께 아뢰옵니다. 사신 등이 대조선국 대군주 명을 받자와 대신으로 대백리새천덕과 미합중국 모든 인민이 한 가지로 안녕을 누리시기 청하오며, 두 나라 인민이 서로 사귀고 우의를 돈독히 하기를 바라나이다.
친서를 전해 받자 아서는 보빙사 일행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 미합중국은 과거 역사에서 보듯이 타국의 영토를 점령, 지배할 의도가 없소. 오로지 상호 우호관계와 교역을 통해 이익을 나누기를 바라오."
사실 미국 역사에 비추어 본다면 '타국의 영토를 점령, 지배할 의도가 없다'라는 아서의 말은 어폐가 있지만[3] 그런 사실과는 상관없이 아서의 이런 발언은 조선 정부에 깊은 인상을 주었다.
한편 아서 대통령과 보빙사의 만남 때는 통역 과정이 참 복잡했다. 조선어-영어의 직접 통역이 가능한 사람이 없어서 아서가 영어로 말하면 중국어-영어 통역이 중국어로 옮기고, 중국어-조선어 통역이 조선어로 옮기는 식으로 진행되었다고 하며, 통역에 만전을 기하기 위한(?) 조치였는지 일본어-영어 통역과 일본어-조선어 통역을 따로 두어 이 통역도 활용했다고 한다. 궁금한 위키러는 여기서 확인하도록 하자!- ↑ 1883년 펜들턴법 서명에 대해 항의하는 공화당 의원들에게 한 말. '공(公)은 공, 사(私)는 사' 정도의 의미.
- ↑ 간단히 말해서 미국판 과거 제도 혹은 행정고시를 도입했다고 이해하면 된다.
- ↑ 애초에 미국 자체가 독립 이후에 원주민들의 땅을 대거 강탈하고 원주민을 외딴 오지로 이주시키고 그 땅에 백인들을 정착시킨 나라라는 점과, 1840년대 멕시코에 속해 있던 서남지역의 영토를 미국이 어떻게 얻었는지를 생각해 보면...
아서가 침략 전쟁을 주도한 적이 없어서 그렇지 안그랬으면 이 항목은 개소리 집어쳐!로 도배가 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