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넨베르크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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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폴란드 그룬발트(탄넨베르크) 주변에서 벌어진 전투를 지칭하는 것으로 역사적으로 유명한 3개의 전투가 있었다.

2 1410년 탄넨베르크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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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룬발트 전투(폴란드에서 지칭) 혹은 잘기리스 전투(리투아니아에서 지칭) 또는 제1차 탄넨베르크 전투(독일 및 영어권에서 지칭)는 1410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군이 독일 기사단국과 치른 전투이다.

당시 리투아니아는 로무바 신앙을 믿었던 동유럽 최후의 비기독교 왕국이었다. 따라서 종교적인 열의를 가진 튜튼 기사단에 자주 침공을 당했는데 이를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 리투아니아 대공 브와디스와프 2세 야기에우워(요가일라)는 1386년 2월 카톨릭으로 개종하고 폴란드 왕위계승자인 야드비가 피아스트 공주와 결혼하여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 왕국을 탄생시켰다. 이에 튜튼 기사단은 야기에우워가 폴란드의 왕관을 노리고 거짓으로 개종했다고 주장하고 계속 공격했으며, 야기에우워의 사촌으로 리투아니아 대공을 노리고 봉기한 비타우타스(Vytautas)와 손을 잡기도 했다.사실 종교는 중요치 않아 영토와 재산이 필요할뿐 [1] 야기에우워는 비타우타스와 협정을 맺어 리투아니아의 통치권을 사실상 그에게 넘기고 결속을 공고히 했다. 이때 리투아니아는 토크타미시와 손잡고 킵차크 칸국을 털어먹는 데 큰 관심을 두고 있었으므로 동맹을 공고히 할 필요가 있었으며, 그 때문에 튜튼기사단에 사모가티아까지 넘겨주고 우호관계를 쌓기도 했다(리투아니아의 팽창은 1399년 보르스클라 강 전투에서 킵차크 칸국에게 대패하면서 그친다). 그러나 1409년 사모가티아에서 튜튼 기사단에 대한 반란이 일어나자 리투아니아는 반란을 후원했고, 새로이 선출된 기사단장 울리히[2]가 대군을 거느리고 다시 리투아니아를 공격하여 큰 피해를 주었다. 야기에우워는 즉시 반격을 하여 튜튼 기사단군을 도처해서 요격하는데 성공했다.

일단 휴전 협정이 맺어지고, 그 기간 동안 양군은 최대한 전력을 끌여들였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군은 헝가리 국왕 지그몬드에게 황금을 보냈다. 지그몬드는 곧 이 연합군을 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다. 또한 연합군은 보헤미아얀 지슈카를 끌여들였다. 1410년 7월 9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군은 프로이센으로 진군하며 대대적인 역공을 펼치기 시작했다. 복수는 나의 것 연합군이 독일 기사단국의 수도인 마리엔부르크로 진출하자 기사단은 황급히 군대를 정비해 최종 방어선인 드레빈츠 강 유역 방어선을 강화했다. 연합군은 드레벤츠 강을 지나기 위해 좀 더 동쪽으로 우회했고, 기사단은 연합군과 평행하게 강을 따라 이동했다. 그러다 강이 급격히 북쪽으로 꺾이는 지점에서 기사단은 강을 건너 방어적인 대형을 취했다. 튜튼 기사단은 그룬발트 마을 근처에, 연합군은 탄넨베르크 마을에 진을 쳤다. 기사단은 습지로 둘러싸인 지점을 얻을 수 있었다. 연합군은 5마일을 이동했고, 숲에 병력을 매복시킬 수 있는 지점을 손에 넣었다.

이후 리투아니아 기병대의 선제공격으로 양군 사이에 격전이 펼처젔다. 석궁과 창병으로 리투아니아 기병대를 격퇴시킨 기사단은 이후 폴란드군과의 접전에 돌입했다. 양군의 기병대가 혼전을 거듭하는 와중에 폴란드 왕기가 탈취되기도 했으나 다시 폴란드군이 탈환하였고 기사단은 배후로 기병대를 진출시키기도 했으나 역시 요격 당했다.

그때 패주하던 리투아니아군이 다시 돌아와 기사단에 돌격을 가했으며 측면이 뚫리면서 기사단의 전열이 붕괴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의 총공세로 기사단은 완패했다. 이때 기사단의 주력군이 상당수 붕괴하고 기사단장 울리히를 포함하여 고위간부들도 대거 전사했다. 기사단 병력 2만 7천명 중 8천명이 전사하고 1만 4천여 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기사도 400명이나 죽었다. 말 그대로 개발살난 셈.[3]

기세를 탄 연합군은 독일 기사단국의 수도 마리엔부르크도 공격했으나 공성엔 실패하여 퇴각했다. 이후 1차 토루인 조약이 맺어져 기사단이 사모기티아와 도브리진 지방을 포기하는 것으로 결말이 났지만 기사단의 군사력은 큰 손상을 입었고 뒤이어 권위와 재정 형편도 급속히 약화되기 시작했다. 또한 이후로도 폴란드가 전쟁을 계속 벌이자 더이상 버티기 어려워졌고 봉신들이 폴란드에 가담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기사단은 마침내 굴복했다. 1466년 기사단은 제2차 토룬 조약을 맺고 포메른과 비스와 강 양안 및 바르미아(에름란트)의 주교 관할구를 폴란드에 넘겨주었다.

프로이센의 나머지 지역은 계속 보유했으나 그 지역에서 기사단장의 지위는 폴란드 왕의 봉신으로 격하되었다. 이 전투는 튜튼 기사단 몰락의 시발점으로 평가받고 있다.

3 1914년 탄넨베르크 전투

제1차 세계대전 중인 1914년 8월 26일부터 31일까지 동프로이센 지역에서 벌어진 독일군러시아군의 전투.

독일군은 개전 초, 프랑스를 먼저 친다는 슐리펜 계획에 따라 대부분의 병력을 서부전선에 집중하고 동프로이센 지역은 11개 보병사단, 1개 기병사단으로 구성된 제8군이 담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독일의 예상과는 달리, 러시아는 미흡한 병력동원 및 군수장비 생산능력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요청에 따라 신속하게 동프로이센 지역에 공세를 취하게 된다. 공세에 투입된 러시아군은 자연장애물인 마주리안 호수 북방으로 진격한 제1군, 남방의 제2군으로 병력은 30개 보병사단, 8개 기병사단에 달했다.

독일 제8군은 러시아 제1군과 초전에서 전술적인 패배를 당하게 되는데, 이에 압도당한 제8군 지휘관 프리트비츠 장군은 동프로이센을 포기하고 후퇴를 생각하게 된다. 동프로이센은 근대 독일의 정신적 고향이기도 하므로 이 곳의 중요도는 막중했다. 따라서 당시 서부전선에서의 전쟁수행을 위해 무슨 일이 있더라도 동프로이센을 사수해야만 했던 독일군 수뇌부는 프리트비츠 장군을 해임하고 지휘관에 퇴역장군이었던 힌덴부르크, 참모장에 개전 초 리에주 공략전에서 활약했던 루덴도르프를 임명한다.

제8군내에서도 전 사령관을 제외하고는 지휘부가 딱히 패배했다는 분위기에 지배당하지는 않았고, 신임 사령관 착임 전의 공백기를 활용해 제8군 작전참모 막스 호프만 중령은 후속 작전계획을 짜놓게 된다. 언뜻 보면 말도 안 되게 보이는 작전계획으로 1개 사단으로 북부의 러시아 제1군을 막는 동안 나머지 병력으로 남방의 제2군을 때려잡는다는 것.

그러나 러시아 제1군은 초전의 승리 이후 굼비넨 지역에서 진격을 정지하고 있었고, 너무 이른 동원으로 제대로 장비를 갖추지 못했던 러시아 제2군은 호수 남방의 소택지에서 진격에 난항을 거듭하고 있었다. 이런 약점을 꿰뚫어 보았기 때문에 이런 과감한 계획을 수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루덴도르프는 부임하는 기차 안에서 작전계획을 열심히 수립하고 있었는데, 도착하고 나니 애초 계획했던 작전계획이 이미 수립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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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튼 독일군은 계획대로 호수 남방에서 러시아 제2군을 때려부수기 시작한다. 병력에서 아무리 앞서 있더라도 통신장비의 부실로 평문통신을 마구 날려대던 러시아군이 승리할 가능성은 원래부터 없었을 것이다. 진격하는 러시아군을 그 지역 출신의 예비군들로 구성된 제20군단이 저지하는 동안 양 측면을 포위후 섬멸한, 이 교과서적인 포위 섬멸전으로 러시아군은 병력손실 12만 5천명, 야포 손실 500문에 달하는 피해를 입게 되고 제2군 사령관인 알렉산드르 삼소노프 장군은 자살해버린다.

전투 진행 도중 러시아 제1군이 언제 개입할지 몰라 전전긍긍하던 루덴도르프는 주력부대였던 기병사단의 이동에 사사건건 개입하고, 마침 정찰기에서 제1군이 움직였다는 보고가 수신되자(사실 이건 오보였다.) 기병사단의 기동을 취소하려 한다. 그러나 기병사단 지휘관은 상콤하게 그 지시를 씹어버리고 제2군의 포위 섬멸전에 그대로 참여하고, 루덴도르프도 사후에 이 조치를 인정하게 된다. 호프만 중령의 작전계획 수립도 그렇고, 독일군의 특징인 임무형 지휘체계가 긍정적으로 나타난 예이다.

이 탄넨베르크 전투를 통해서 동부전선에서 러시아군의 압력이 해소되면서 독일군은 서부전선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독일군부는 엄청난 실수를 저지른다. 개전 초기에 서전에서 패배하자 동프로이센 지역 상실을 과도하게 우려한 독일군 지휘부는 서부전선에서 1개 군단을 차출해서 동부전선으로 보낸다. 정작 동부전선에 부임한 힌덴부르크는 지원군이 제 시간에 도착하지 못 할 것이라면서 거부했으나 동프로이센 상실의 공포에 질린 지휘부는 막무가내였다. 그런데 한달 가까이 걸려서 기차를 타고 독일 본토를 열심히 횡단해 동부전선에 도착해보니, 이미 이 전투로 전세가 뒤집혀 병력의 추가투입이 필요없었던 상태여서 결국 그들은 다시금 한달 가까이 기차를 타고 독일 본토를 열심히 횡단해 서부전선으로 돌아갔다.(...) 힌덴부르크의 예상이 정확하게 들어맞은 것이다.

독일군부가 동프로이센 방어에 과도하게 집착해서 서부전선에서 병력을 차출하는 악수를 둔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독일군 장성들과 정재계의 보수우익 세력은 대부분 토지귀족(융커) 출신들로 동프로이센은 그들의 정치적 기반이었다. 따라서 동프로이센의 일부라도 러시아군에 내준다는 것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뻘짓으로 인해 서부전선에는 2달간의 병력 공백이 발생했고, 서부전선에서의 조속한 승리를 목적으로 한 슐리펜 계획은 완전히 실패하게 된다. 그 결과 서부전선의 양군은 참호전의 거대한 수렁 속으로 빨려들어가게 된다.(...)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는 이 전투를 계기로 독일 제국의 국민적 영웅으로 부상한다. 루덴도르프는 대전 말 독일군 참모총장에 오르게 되고, 힌덴부르크는 전후 바이마르 공화국 대통령으로까지 선출되었다. 다만 둘 다 그 자리에서 이룬 업적이랄게 없다는게... 오히려 힌덴부르크는 좌파/사회주의 세력에 대한 과도한 경계심으로 히틀러를 총리에 임명하는 희대의 병크를 터트린다. 한편 막스 호프만은 작전의 주역이었지만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에게 포커스를 빼앗겨서 제대로 인정을 받지 못했다. 호프만은 종전 후 전투 지역을 방문했을 때 사람들에게 힌덴부르크의 침대를 보여주며 '여기가 전투 중에 힌덴부르크가 잠자던 곳입니다.'라고 말하며 비난한 적도 있다.

일본군이 단기 결전에 대한 집착, 보급에 대한 무관심, 정신력에 대한 광신 등 현대전에 적합하지 않은 요소들을 강화하기 시작한 것이 이 전투에서 기인한다는 주장이 있다. 요약을 하자면 일본군은 일단 현대전의 요소가 군수 보급의 물량과 화력, 과학 기술에 달려 있다는 것 자체는 인식하고 있었지만, 일본이란 국가 자체는 이를 감당할 만한 역량이 되지 못했다. 그런데 이 탄넨베르크 전투를 통해 일본군은 양적 열세를 포위 섬멸을 통한 단기 결전으로 해소할 수 있고, 양적 열세를 '정신적 우세로 물질적 위력을 능가'할 수 있다고 믿게 된 것이다. 물론 그 결과는 다들 알다시피...더 이상의 자세한 반자이 돌격은 생략한다

사실 탄넨베르크 전투는 단순히 포위 섬멸로 이긴건 아니었다. 러시아군은 숫자는 많지만 훈련도 및 사기가 그리 높지 않았으며, 당시 지휘관간의 불화도 있었을 뿐더러, 통신보안도 제대로 이루어지 않는 등 허점이 많았으므로 독일군에게 포위 섬멸을 당한 것이었다.

이 전투에 관련된 일화로 흔히 '러시아 1군 사령관 파벨 폰 렌넨캄프와 2군 사령관 삼소노프가 러일전쟁 당시 봉천 전투의 패전 책임을 두고 주먹다짐을 벌였는데, 이를 관전무관으로 파견되었던 독일군 호프만 중령이 목격하여 렌넨캄프가 삼소노프를 도우러 오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다. 두 장군의 찌질한 모습들과, 이를 정확히 짚은 호프만의 능력이 대비되는 점 때문에 잘 알려져 있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높다. 먼저 두 장군이 봉천에서 주먹다짐을 했다는 가능성 자체가 낮다. 봉천 전투 직후 렌넨캄프는 부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해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시 호프만 중령이 관전무관으로 파견간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러시아가 아닌 일본군 측의 관전무관이었기 때문에 러시아군 진영에는 가지도 않았다. 그리고 이 이야기의 출처는 바로 호프만 본인의 자서전이라서 호프만이 자신의 전공을 부각시키기 위해 창작했을 가능성도 있다.
또한 열세에 놓인 2군을 1군이 지원하지 않은 것도, 당시 러시아군의 통신 연락망의 수준이 매우 열악해 서로의 위치조차 잘 모를 정도로 상황을 제대로 알지 못해서 벌어진 것.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상급 지휘부에서 렌넨캄프에게 지원 명령을 내렸고 렌넨캄프도 이를 수행하려 했지만, 그때까지도 1군에선 제대로 된 상황 파악이 되질 않아 병력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동하는 등 시간을 잡아먹고 결국 모든게 너무 늦었다는 것을 깨닫고 후퇴를 한 것이다.

여담이지만 위의 지도를 보면 알 수 있는 건데, 이 전투는 사실 탄넨베르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전장 대부분은 탄넨베르크에서 꽤 멀리 떨어진 곳이었으며, 독일이 패배했던 1번 항목의 탄넨베르크 전투와 대조하기 위해서 이런 이름을 끌어다가 붙였다고...

4 1944년 탄넨베르크 전투

정확히 말하자면 탄넨베르크 선 전투다. 독소전쟁 후반기인 1944년 7월 25일부터 8월 10일까지 에스토니아의 탄넨베르크 라인에서 일대에서 벌어진 독일군의 방어전.
정확히 말하면 방어선을 방어하던 독일병력의 대부분은
무장 SS 의용병으로 구성된 병사들이 었다

독일군은 1944년 1월 14일 에스토니아 나르바에 소련군을 막을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한다.
나르바 방어선에는 독일군 소속 많은 외국인 의용부대가 참가한다.
특히 에스토니아,헝가리 의용병을 주축으로 하는 독일군이 약 6개월간 소련군의 공격을 저지하며 격렬한 전투를 치른다. 그러나 소련군이 이반고르도(Ivangorod)강을 통해 공격하여 독일군을 두개로 분리시키자 독일군은 타넨베르크 라인으로 방어선을 옮긴다.

나르바 16Km 서쪽에 위치한 탄넨베르크 라인(Sinimäed Hills) 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69.9고지, 그레나디어고지(Grenadier Hill), 오퍼나게고지(Orphanage Hill) 3개의 전략적 고지에 의해 방어되고 있었다.

무장친위대 제3기갑군 (III SS Panzer Corps) 예하 제 20 무장친위대 제 1 에스토니아 척탄병사단 (20th Waffen Grenadier Division of the SS)은 1944년 7월 27일부터 오퍼나게고지(Orphanage Hill) 에서 7월 29일까지 3일 동안 소련군 전차 113대를 격파하며 지켜낸다.
그들과 전투를 벌인 소련군 중에는 1940년 6월 에스토니아를 침략 합병한 이후 강제 징집한 에스토니아인으로 구성된 '제 8 에스토니아 보병군(8th Estonian Rifle Corps)'이 포함되어 있었다.

1944년 9월 19일 독일군에 에스토니아에서 철수한다. 당시 독일군은 소련군으로 부터 조국을 지키겠다는 에스토니아 의용부대원들을 해산한다. 해산된 에스토니아 의용부대원들은 소련군에 대항하여 게릴라 활동을 벌인다.

이 내용은 에스토니아 영화인 1944에서 다뤄지며

에스토니아인 병사들이 후퇴하면서 다른 친위대사단 소속패잔병들(제 11 무장친위대 노르트란트 소속이었다.)과 마주치고 함께 후퇴한다. 후퇴도중 전차를 몰고오는 소련군들을 마주치고 교전하지만 알고보니 그 소련군들도 에스토니아인이라는것을 교전도중 알아차려 서로 사격을 멈추고 갈길을 가버리는 장면이 나온다.
  1. 다만 튜튼 기사단 입장에서는 그런 무리수라도 둬야 했다. 리투아니아를 공격하지 못하면 튜튼기사단은 정복을 할 수 없어 그대로 고사할 수 밖에 없기도 했고,리투아니아가 튜튼 기사단을 개종 가지고 낚은 것이 한두번이 아니기도 했다.
  2. 참고로 1407년 그의 형인 콘라드가 사망할 당시 콘라드는 자기 동생에게 기사단장직을 물려주지 말라고 유언을 남겼다.(...)
  3. 폴란드-리투아니아 동맹군은 병력 3만 9천명 중 5천명이 전사하고 8천명이 부상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