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성 패미콤


1982년의 FC-100 TV 광고.

1984년의 FC-150 TV 광고. 故 고우영 선생이 모델로 출연하셨다. 다만 목소리는 성우 김세한.

1 소개

1982년부터 금성사 (현 LG전자)에서 판매한 8비트 개인용 컴퓨터 시리즈. 1982년에 전두환 정권에서 1983년을 '정보산업의 해'로 선언하고 그 시작으로 5000대의 컴퓨터를 각급학교에 보급하는 계획을 세우면서 5개 민간업체를 선정했다. 삼보전자엔지니어링(현 TG삼보)의 '트라이젬 30'(애플 II 호환기종), 삼성반도체통신(현 삼성전자)의 SPC-1000, 한국상역(현 한국컴퓨터)의 '스포트라이트 1', 동양나이론(후의 효성컴퓨터)의 '하이콤8'과 함께 금성사의 금성 패미콤이 선정되었고 각급 학교에 보급되었다.[1]

가장 처음 발표된 모델이자 당시 정부의 교육용 컴퓨터로 선정된 기종은 FC[2]-100. 금성사는 자체 개발인 것처럼 홍보했지만 사실은 일본 산요전기의 PHC-25와 NEC의 PC-6001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FC-100 에뮬레이터 개발을 진행 중인 분의 코멘트에 따르면 기본 베이스는 PHC-25이고 일부 6001의 기술을 유용하여 만든 컴퓨터라는 듯하다. 당대의 경쟁기인 삼성전자의 SPC-1000은 일본 샤프전자의 MZ-80K를 기반으로 했고 조금 뒤늦게 개인용 컴퓨터 시장에 뛰어든 대우전자의 IQ-1000은 일본에서 만들어진 MSX 규격을 채용한 기종이기 때문에 초창기 우리나라 개인용 컴퓨터, 특히 대기업 컴퓨터들의 기반기술은 대체로 일본의 것을 이식한 것이다고 할 수 있다.

출시 처음에는 금성사에서 의욕적으로 보급에 나섰으나 그 당시의 국산 PC가 다 마찬가지이지만 소프트웨어 부족으로 판매 부진에 빠진다. 출시 초기부터 마케팅과 분위기 확산에서 우위를 가진 삼성전자의 SPC-1000, 미국 애플사의 하드웨어를 그대로 복제해서 적어도 가격경쟁력과 소프트웨어의 다양성에서 우위를 보인 세운상가제 애플 II와의 경쟁에서 밀리는 분위기였다. 당시에 개인용 컴퓨터는 쉽게 구매하기엔 고가의 제품이었기 때문에 보급이 쉽지 않았는데 삼성과 금성 모두 컴퓨터 전시장을 설치하는 등의 방법으로[3] 많은 이들이 새로운 문물인 '컴퓨터'를 체험할 수 있게 하는 홍보전략을 택했는데 삼성에서는 그에 더하여 소프트웨어 공모전을 비교적 적극적으로 개최해 소프트웨어 부족을 타개해보려는 시도를 하였고, 견학과 특판 등의 마케팅을 통해 학교·학원·개인(특히 구매력이 있는 학교와 학원)에 어필하였으며, 컴퓨터 경진대회를 개최하는 등의[4] 다양한 전략을 가졌다. 그리고 그 결과 금성 패미콤은 1984년 무렵에는 경쟁에서 두드러지게 밀리기 시작하여 사실상 1985년 초반이 되면 거의 마케팅도 안 하고 제품은 재고나 파는 수준으로 전락했으며 실질적으로 패미콤 시리즈의 마지막 제품인 GFC-1080에 이르면 아예 '패미콤' 브랜드를 내다 버리고 모델명만 표기하기 이른다. 금성사(현 LG전자) 개인용 컴퓨터 부문의 사실상 흑역사. 이후 금성사는 1989년 교육용 PC 사업IBM PC 호환기종으로 다시 개인용 컴퓨터 시장에 뛰어들때까지 사실상 리타이어 상태가 되었다.[5] 결국 이로 인해 오늘날 금성 패미콤을 기억하는 것은 나이 지긋한 40대 이상의 컴덕(...) 사이에서도 좀 하드코어한 사람들 밖에는 거의 없는 수준.

2 패미콤이라는 명칭에 대하여

본 제품의 영문 표기인 FAMICOM은 Family Computer를 줄인 말이다. 공교롭게도 닌텐도패미컴과 동일한 표기. 금성 패미콤의 인지도는 바닥을 뚫는데다 닌텐도의 패미컴은 전 세계적으로 히트한 브랜드고[6] 저 시절엔 일본 브랜드나 상표명을 슬그머니 베껴오는 일이 적지 않았던 터라 이쪽도 그렇게 생각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반전이 있는데, 패미콤의 첫 모델인 FC-100은 1982년 초에 나왔고, 닌텐도 패미컴보다 적어도 1년은 먼저 나온 기종이다. 말하자면 기막힌 우연의 일치. 법적 문제가 있을 법도 싶은 상황이지만 패미컴은 한국에서 한참 나중인 80년대 말엽에야 다른 이름(현대 컴보이)으로 발매되었고, 당시 일본에서 굳이 한국제 PC를 수입할 이유도 없었기에 딱히 법적인 트러블은 없었다.

여담으로 금성사는 브랜드명인 'FAMICOM'을 공식적으로 패미콤이라고 표기했는데 저 시절 표준어로는 computer가 콤퓨우터(...)였기 때문이었다. 사실 새로운 문물이다보니 표기 자체가 상당히 다양해서 당시에도 '컴퓨터'라는 표기를 사용한 예도 언론에서 흔하게 볼 수 있었고 컴퓨터, 콤퓨우터, 컴퓨우터 등등 표기 자체가 좀 중구난방. 현재의 '컴퓨터'로 표기가 통일된 것은 1986년에 와서였다.

3 모델

패미콤 시리즈의 라인업은 다음과 같다. 말이 좋아 '시리즈'지 제각각 호환성이 없고 딱히 같은 회사의 제품이 베이스라거나 하는 일관성도 없는 기괴한 라인업이다. 이는 경쟁사인 삼성전자도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MSX 규격에 몰빵해서 호환성을 확보할 수 있었던 대우전자가 오히려 예외 케이스였다고 할 정도. 물건너 일본만 해도 같은 회사의 라인업이라도 호환성이 없는 경우가 비일비재했고 미국에서도 애플 II애플 III 같은 사례가 있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드문 일은 아니었다.

굳이 일관성을 따지자면 CPU만은 전부 Z80이라는 정도. FC-100만 NEC μPD780C-1(Z80A 상당품)이고 나머지는 그냥 자일로그 Z80A다. 이는 당시 국내의 낮은 기술수준과 당대 CPU 채용 상황 때문이었다. 당시의 국내 기업들은 낮은 기술수준 때문에 외국, 특히 주로 일본의 이 회사 저 회사 제품을 복제 및 짜깁기해서 그때그때 발매했다. 원본의 제조사가 다르니 라인업간 호환성이 없을 수밖에 없었는데 이는 당시 국내 모든 PC 제조업체가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당시에 일본계 8비트 컴퓨터는 후지츠 FM7이나 토미 퓨타 같은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이 Z80을 사용하고 있었다. Z80 자체가 당시에 8비트 CPU 시장을 제패하다시피 했고 성능도 잘나왔기 때문. 결국 어느 회사 제품을 들고 오던 CPU는 Z80이 걸리기 마련이었다. 참고로 일본에서도 자사 제품끼리도 라인업이 다르면 서로 호환 안 되는 경우는 흔했으며 1980년대 당시 일본의 PC기기종은 수십여가지가 있었는데 거의 대부분이 소프트웨어가 호환되지 않았다.[7][8] 괜히 MSX 규격이 히트를 친 것이 아니다.

3.1 FC-100

금성 패미콤 시리즈의 첫 작품이자 주력라인. 주력라인인 것 치고 의외로 보급률은 다른 시리즈들에 비해 높지 않았던 듯 싶다. 꽤 오랜 기간동안 어느 컴퓨터를 베이스로 삼았는지가 의문이었는데 근년에 들어서야 몇몇 능력자분들이 분석해본 결과 산요 PHC-25를 기본 베이스로 그래픽 등의 부분에서 NEC PC-6001의 설계를 차용해온 듯 하다고. 이런 마이너한 태생 덕분에 소프트웨어 발매도 엄청 저조했고 게임 같은 것도 거의 없었다고 한다. PHC-25 자체가 일본에서도 PC 시장 초창기에 조금 나오다 만 마이너한 기종이고 산요는 곧 자체 개발을 때려치고 MSX 규격에 참가해버렸으니 소프트웨어도 적었다. 그나마도 그래픽 부분의 설계를 변경했으니 호환성도 없었을 것이다. 일본에서 소프트웨어를 실어나를 만한 게 있었을 리가 만무하다. 이러니 보급률이 높을 리가 있나 대신 교육기관 납품용으로는 꽤 풀렸기 때문에 학교에서 이 기종을 본 70년대생들이 있을 것이다.

3.2 FC-30

보급형 라인업. 1981년 등장한 영국산 컴퓨터인 싱클레어 ZX81의 클론이다. 컴팩트한 사이즈[9]에 10만원대 초반이라는 다른 모델들의 1/3 조금 넘는 가격으로 패미콤 라인 중에 가장 저렴한 모델이었다. 원본인 ZX81의 컨셉트가 저가형 홈컴퓨터였기 때문에 같은 ZX81 클론인 삼성 SPC-300 역시 비슷한 가격대였다. 사족이지만 '저렴한'의 의미는 다른 컴퓨터보다 저렴하다는 것이며 그래도 1983년 발매당시 10만원대 초반의 가격이었다. 동시대의 다른 컴퓨터들은 대체로 30만원대 내외였는데, 10만원대 초반이라고 하더라도 지금 화폐가치로 본다면 웬만한 게이밍 컴퓨터를 번듯하게 맞출 수 있는 가격인 100만원 정도에 맞먹을 것이다. 당시 대기업 신입사원의 초임이 약 20만원, 소형 승용차인 현대 포니2가 350만원 정도 했었다.

ZX81 클론답게 키캡마다 베이직 명령이 새겨져있는 것이 특징인데, 원판인 ZX81이 저렴한 멤브레인 키보드를 써서 악평을 받았지만 키보드는 평범한 스위치형(기계식) 키보드로 변경되었다. 그래픽 성능은 꽤 후달리는 편으로 모노크롬/저해상도 출력만 가능하여 사실상 그래픽 성능은 없다고 보는 것이 좋다.

3.3 FC-80

MSX규격. 메인 RAM 64KB로 MSX1 스펙으로는 풀스펙. 삼성 SPC-800, 대우 DPC-200과 같은 스펙이다. 패미콤 시리즈 중에서 결국 가장 많이 팔린 모델도 이 녀석이었다. 게임이 많잖아 마이너 체인지 버전인 GFC-1080/A도 있는데, GFC-1080은 패미콤 타이틀을 떼고 나왔다. GFC-1080은 FC-80과 같은 사양에 스프레드시트 프로그램 '파소칼크'와 모니터 프로그램을 내장한 기종이었고 1080A는 내장 소프트웨어를 제거한 버전.

3.4 FC-150

최상위 라인업. 1982년 등장한 일본제 게임 퍼스컴 Sord M5의 클론이다. 패미콤 시리즈 중 최상위 모델로 '전문가용'이라는 컨셉트로 판매했으나 원본인 M5가 3만엔대의 게임 퍼스컴이었기 때문에 딱히 전문가용답진 않다(...). 전문가용이라면서 저가형 모델인 FC-30에서도 안 쓰는 고무 멤브레인 키보드를 쓰고 있는 것부터가 싹수가 노랗다. 원본인 M5가 멤브레인 키보드를 쓰고 있었기는 한데 FC-30은 교체해놓고 정작 비싼 150은 교체하지 않은 이유를 알 수 없다. M5가 원래 저렴하고 컴팩트한 홈컴퓨터인데 이걸 전문가용 컨셉트로 팔아먹으려는 속셈에서인지 덩치도 MSX에 준하는 사이즈로 불어나있지만 내부 기판은 M5와 동일한 컴팩트 사이즈라 내부 공간이 꽤 헐렁하다(...). 네이놈 골드스타

당시의 대세와 달리 BASIC이 내장되어있지 않고 카트리지 형식으로 제공되는데, 기본으로 제공되는 정수 베이직인 BASIC-I, 부동소수점 연산을 지원하는 수치계산용 BASIC-F, 그래픽 커맨드를 지원하는 BASIC-G의 3종류로 나뉘어있었으며 BASIC-F와 G는 별매.[10] 참고로 카트리지를 꽂지 않으면 컴퓨터가 아예 켜지지 않는다. M5가 원래 MSX와 아주 유사한 하드웨어 구조를 가진 녀석인지라[11] 게임 성능은 괜찮은 편이었으나 문제는 MSX에 비교하면 타이틀 수가 시망...

당대의 인기 만화가였던 故 고우영 선생이 FC-150의 광고모델로 나오셨던 적이 있었다.

4 토막상식

  • 금성 패미컴 시리즈의 최상위 라인이었던 FC-150과 동일한 M5 클론 중에 고려시스템의 '타미컴'이라는 제품이 있었다. 실제 시판이 되기는 했지만 극히 마이너한 시장점유율을 보였는지라 지면광고조차 찾기 힘들고 현재로서는 엄청난 레어품이지만 소장자가 존재한다. 소장자도 처음 출시때 우연히 구입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모습이 궁금하면 이쪽으로[1]
  • 금성 패미콤 시리즈는 삼성 SPC 시리즈와 라인업이 유사했는데 이게 모델명이 심상치않다. SPC-300은 싱클레어 ZX81의 클론이고 SPC-500은 Sord M5 클론, SPC-800은 MSX 규격이다. SPC-1000은 첫 발매기종이자 플래그십 모델. 뭐가 심상치 않냐는 의문이 들거든 위의 패미콤 시리즈 라인업과 모델명을 다시 확인하기 바란다. 짰네 짰어 참고로 삼성에는 패미콤 시리즈에는 없는 싱클레어 ZX 스펙트럼 클론인 SPC-650이라는 기종도 존재했다.
  1. 이 중 스포트라이트1 과 하이콤8은 일찍 철수했기 때문에 어느 기종의 클론인지 정보가 부족한 상태. 이미 1980년대 중반에 매체에서 흔적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상세한 정보를 아는 위키러가 추가 바람.
  2. Family Computer의 약칭. 일단 약칭 자체는 닌텐도의 패미컴과 동일하다.
  3. 금성은 종로와 서초동 등지, 삼성은 신사동 등지에 컴퓨터 전시장이 있었고, 각사의 컴퓨터 판매장 역시 어느정도는 전시체험이 가능한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다. 여담으로 MSX 호환기종을 내놓은 후발주자 대우 역시 논현동(위치는 삼성의 신사동 전시장과 가까웠다. 훗날 역삼동으로 이전.)에 전시장을 설치했던 적이 있다.
  4. 컴퓨터 경진대회 개최는 대우 쪽이 더 적극적이었다.
  5. 80년 중반부터 금성 마이티 시리즈라는 브랜드로 IBM PC 호환기종 사업을 하긴 했지만 당시에는 제조사를 막론하고 IBM PC는 업무용 시장을 타겟으로 했다. 금성은 교육용 PC 사업 이후에도 상당기간 '마이티' 브랜드를 유지했다.
  6. 다만 북미쪽에서는 NES(Nintendo Entertainment System)라는 이름으로 발매되었다.
  7. 하지만 대부분 CPU가 같고 기능의 차이가 크지 않다 보니 소프트웨어 제작사들은 약간의 수정으로 여러 기종의 소프트를 내놓을 수는 있었다. 이시절 한 기종으로 내놓은 소프트를 다른 기종용으로 변환하는 것을 이식이라고 불렀다.
  8. 이 수많은 기종들의 목록을 보려면 당시 나왔던 일본 컴퓨터 잡지인 마이컴 베이직 매거진(베-마가)을 보면 된다. 1985년 8월호를 보면 51개 기종 소프트웨어 게재라고 나와 있다. 참고로 그 잡지는 이미 80년대 초중반에 일본 전국 오락실전일기록들을 수록하고 있었다.
  9. 서류봉투에 들어가고도 남을 수준이었다.
  10. 당연하지만 같은 VDP를 사용하는 FC-80에 내장된 MSX-BASIC은 이거 하나로 정수연산, 부동소수점 연산, 그래픽 묘화 전부 된다(...). 이러니까 안팔리지 FC-150에서 부동소수점 연산과 그래픽을 동시에 사용하려면 별매품인 확장슬롯을 사서 BASIC-F와 BASIC-G를 같이 꽂아야했다고.
  11. CPU, VDP는 완전히 동일한데, M5가 1년 먼저 나왔다. 사실 MSX의 컨셉트는 저렴한 기성부품을 끌어모아 3만엔대 선에 맞추는 홈컴퓨터였기 때문에 당시에 이미 비슷한 구조를 가진 하드웨어가 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