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의 역대 국왕 | ||||
2대 해부루왕 | ← | 3대 금와왕 | → | 4대 대소왕 |
시호 | 금와왕(金蛙王) | |
성 | 해(解) | |
휘 | 금와 | |
생몰년도 | 음력 | ? ~ 24년 |
재위기간 | 음력 | 60년 ~ 20년 |
1 개요
해부루왕의 아들이며 대소왕의 아버지.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을 바탕으로 한 계보에 따르면 부여의 3대 왕이다.
부여의 건국 설화와 고구려의 건국 설화에 모두 등장하는 인물로, 대소왕의 아버지이며 또한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성왕과 그 어머니 유화부인을 거두어준 인물로도 유명하다.
남당유고의 추모경에 의하면 아들이 5명이다.그중에서는 온조와 비류의 아버지라고 추측되는 우태도있다. 그러나 남당 박창화가 남긴 책들이 그렇듯이 사료로서의 가치는 심히 의심되는 기록이기에 믿기 힘들다.
2 일생
2.1 출생 설화
삼국유사에서는 금와왕의 탄생설화를 다루고 있다. 금와왕의 아버지인 해부루왕은 나이가 들어도 후사를 이을 아들을 얻지 못해 고심하던 중에 산천에 제사를 지내며 아들을 점지해줄 것을 빌었다.
그랬더니 해부루왕이 탄 말이 곤연(鯤淵)이라는 곳에 이르어 큰 돌을 마주보고 눈물을 흘렸다. 해부루왕이 이를 괴이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 돌을 치웠더니 금빛 개구리 형상의 아이가 나타났다.[1]
이에 해부루왕은 하늘이 자신에게 아들을 주었다고 기뻐하며 아이를 거두어 금와(金蛙)라는 이름을 붙이고 아들로 삼았다. 후에 금와는 장성하여 태자가 되었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부여의 왕이 되었다.
2.2 유화부인과 만나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재위에 오른 금와왕은 태백산 남쪽의 우발수를 지나다가 유화부인을 만나게 되었다. 유화부인은 스스로를 강의 신인 하백의 딸이라 소개하였으며, 자신이 천제의 아들인 해모수와 야합하였다가 중매도 없이 외간 남자와 놀아났다며 벌을 받아 우발수로 쫓겨났다고 말하였다.
금와왕은 유화부인을 거두어 방에 두었는데, 햇빛이 계속해서 유화부인을 비추더니 유화부인이 임신을 하여 큰 알을 낳았다. 금와왕은 이를 괴이하게 여겨 알을 짐승들에게 던져주었으나 짐승들이 이를 먹지 않고 오히려 감싸돌며 지켰다. 결국 알을 깨뜨리려고 하였으나 알이 깨지지 않아 다시 유화부인에게 돌려주고 말았다. 이 알에서 태어난 사람이 바로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이었다.
금와왕의 장남인 태자(太子) 대소는 주몽의 재주를 시기하여 죽이려 하였으나 주몽은 유화부인의 도움을 받아 엄사수를 건너서 졸본 땅으로 달아나 그 곳에서 고구려를 건국하였으니 기원전 37년의 일이었다.
이후 기원전 24년, 부여에 남아있던 유화부인이 죽었는데 이에 금와왕은 태후의 예로써 장사를 지내고 신묘(神廟)를 세웠다.[2]
2.3 죽음과 사후
금와왕이 언제 죽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금와왕에게는 7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훗날 금와왕이 죽자 장남이었던 대소가 그 뒤를 이어 부여의 왕이 되었다.
대소왕은 훗날 고구려와 대립하던 중에 대무신왕과의 싸움에 패하여 서기 22년에 죽었는데, 그 막내 아우가 나라가 혼란한 틈을 타서 추종세력을 이끌고 부여를 빠져나와 갈사국을 세웠다.
3 대중매체에서의 모습
사극 주몽에서는 전광렬이 열연하였다. 본작에서는 설화적인 기록에 상상력을 입혀 금와왕이 유화부인을 깊이 사모했던 것으로 묘사한다. 유화부인이 남편인 해모수와 아버지인 하백을 한나라군의 공격으로 잃고 방황하자 이를 거두어주고 유화부인이 해모수 사이에서 낳은 주몽 역시 거두어 아들로 키운다는 설정이 바로 그 것이다.
전체적으로 박력있고 카리스마 있는 영웅적인 이미지로 묘사되며 또한 이룰 수 없는 사랑으로 인한 깊은 고뇌를 앓는 강렬한 캐릭터를 지니고 있어 시청자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왕자 시절에 해모수와 함께 고조선 부흥 운동을 이끌었다거나 아들인 대소왕과 사출도의 반란에 휘말려 잠시 왕위를 잃기도 하는 등 허구적 설정도 많아 지탄을 받았다. 특히 역사적으로는 할아버지인 해모수와는 혈연 관계가 아예 삭제되어[3] 친구 사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