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로시 죄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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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와 지능을 한 번에 타고난 축구 영웅

이름샤로시 죄르지[1]
(György Sárosi)
생년월일1912년 8월 5일
사망년월일1993년 6월 20일
국적헝가리
출신지부다페스트
포지션인사이드 포워드, 센터 하프
신체조건181cm / 75kg
등번호-[2]
소속팀페렌츠바로시 TC(1930~1948)
국가대표62경기 / 42골(1931~1943)
감독바리(1948~1950)
루케세(1950~1951)
유벤투스(1951~1953)
제노아(1953~1955)
로마(1955~1956)
볼로냐(1957~1958)
로마(1959)
브레시아(1960)
루가노(1962~1963)

1 초기 선수 생활. 1934년 월드컵까지

부다페스트에서 재봉사의 아들로 태어난 사로시는 원래 법학을 공부하였던 인텔리였다. 동생인 벨라와 함께 축구에도 재능을 보였던 사로시는 페렌츠바로시의 유스팀에 있었지만 어렸을 때에는 취미로만 축구를 즐겼을 뿐이었다. 하지만 15세부터 본격적으로 축구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축구 재능도 꽃피웠다. 처음 팀에 들어갔을 때에는 센터 하프로 축구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개인기가 특출난 것을 간파한 감독은 그에게 인사이드 포워드로 더 공격적인 역할을 주문했고, 말 그대로 대박이 났다. 곧이어 이듬해에 18세의 나이로 대표팀에도 소집되었으니 그의 가능성은 실로 대단했다 말할 수 있다.[3]
21살의 나이에 헝가리 대표팀 소속으로 월드컵 무대를 밟은 사로시는 첫 경기였던 이집트와의 경기에서는 나서지 못했지만 뒤이은 8강전의 상대는 오스트리아였고 사로시는 이 경기에 선발 출전했다. 당시 오스트리아는 최고의 공격수 마티아스 진델라를 필두로 한 유럽 최강팀이었고 사로시는 후반 15분에 얻은 페널티 킥을 성공시켜 2:1로 따라붙는 추격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하지만 3분 후에 팀의 수비수 임레 마르코스가 퇴장당하면서 헝가리는 결국 수적 열세를 극복치 못하고 패하고 말았다.

2 1938년 월드컵

사로시의 기량은 더욱 물이 올랐다. 특히 1935-36 시즌에는 36골로 헝가리 리그 득점왕을 차지했는데 이것은 경기당 1.5골이라는 대단한 것이었다. 사로시가 포지션을 변경한 이래로 최소한 22골 이상은 넣어주었는데 대표팀의 간판으로 활약하기에는 모자람이 없었다. 1937년 중유럽 컵에서는 체코슬로바키아를 만나서 체코슬로바키아를 8:3으로 대파했는데 유럽 최고의 수문장 중 한 명이었던 프란티세크 플라니츠카를 상대로 7골을 터뜨리는 괴력을 과시했다.
이런 활약을 펼치면서 사로시는 주장으로 프랑스에 갔다. 그리고 대표팀에 새로 들어온 후배 귤라 젱겔러와 함께 호흡을 맞춰가며 상대편 골문을 하나하나 뚫어갔다. 첫 경기 네덜란드령 동인도전에서는 6:0으로 유럽 축구의 높은 벽을 실감케 해주었고 사로시는 이 경기에서 2골을 넣었다. 두 번째 경기인 8강전에서 스위스를 상대로 사로시는 한 골을 넣어 2대0 승리를 이끌어냈다. 다음 4강전의 상대는 스웨덴. 선제골을 내주어 불안하게 출발했지만 스웨덴의 자책골이 터졌고 뒤이은 헝가리 공격수들의 가둬놓고 패는 수준의 경기력으로 5:1로 낙승을 거두었다. 결승전의 상대는 디펜딩 챔피언 이탈리아. 특히 이탈리아에는 주세페 메아차라는 대형 공격수가 있어서 사로시와의 자존심 대결 또한 볼만했다. 사로시는 한 골을 넣고 사보 골키퍼가 사력을 다해 방어했지만 이탈리아의 공격력이 한 수 위였다. 결국 헝가리는 이탈리아에게 4:2로 패해 우승이 좌절되었다. 5골을 넣어 헝가리의 공격을 이끈 그에게는 브론즈 볼이 수여되었다.

3 이후

이듬해 제 2차 세계대전이 터졌고 헝가리도 그 여파에서 벗어나진 못했지만 사로시는 페렌츠바로시에서 계속 남아서 활약하였다. 그렇게 계속 법학을 공부하던 사로시는 1943년에 결국 법학 박사 학위를 따내었다. 사로시의 가장 유명한 별명인 닥터(박사님)는 여기에서 생긴 것이다. 선수 시절에 닥터라고 그렇게 많이 불릴 일은 없었다곤 해도 충분히 대단하다 하지만 사로시가 박사 학위를 딴 1943년 이후 사로시의 골퍼레이드는 거의 멈추었고 1946년 사로시는 31골을 집어넣음으로서 마지막 불꽃을 태웠다.[4] 사로시가 은퇴하던 1948년. 헝가리는 공산화되었고 사로시는 가족과 함께 이탈리아로 건너가서 감독직을 수행하였다. 유벤투스를 맡아 우승시키기도 하는 등 감독으로서도 좋은 모습을 보여준 사로시는 1963년 스위스의 루가노를 끝으로 공식적인 감독 생활을 접었다. 제노바에서 여생을 보내다 헝가리의 공산정권이 무너지는 것을 눈으로 본 사로시는 1993년에 80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4 플레이 스타일 & 평가

다재다능함과 기술로 무장한 공격수. 181cm로 키가 크기도 했지만 기술이 좋아서 볼을 쉽게 빼앗기지 않았으며 공격과 수비를 모두 소화할 수 있는 당시에도 상당히 유니크한 선수였다. FIFA 월드컵에서 처음으로 헝가리 축구의 높은 수준을 보여준 선수로 아직도 42골로 헝가리 대표팀 내의 역대 득점 랭킹에서 5위에 올라있다. 또한, IFFHS에서 뽑은 20세기 100인의 랭킹에서 89위에 랭크되었다.

5 수상

5.1 클럽

헝가리 리그 우승 5회: 1931-32, 1933-34, 1937-38, 1939-40, 1940-41(이상 페렌츠바로시 TC)
헝가리 컵 대회 우승 4회: 1933, 1942, 1943, 1944(이상 페렌츠바로시 TC)

5.2 국가대표

FIFA 월드컵 준우승 1회: 1938
중유럽 컵 우승 1회:1937

5.3 개인

월드컵 브론즈볼: 1938
월드컵 브론즈슈: 1938
월드컵 베스트 11 1회: 1938
헝가리 리그 득점왕 3회: 1935-36, 1939-40, 1940-41

5.4 감독

세리에 A 우승 1회: 1951-52(이상 유벤투스)
  1. 헝가리는 아시아적 특성이 강하기 때문에 사람의 이름을 쓸 때 서양식 배치인 이름과 성의 순서가 아닌 동양식 배치인 성과 이름의 순서를 사용한다. 따라서 헝가리식 이름은 샤로시 죄르지(Sárosi György)가 된다.
  2.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
  3. 동시대에 유럽 최고의 공격수로 평가받는 주세페 메아차마티아스 진델라등보다 사로시의 데뷔가 더 빨랐다.
  4. 페렌츠 데아크가 66골을 넣은 시즌이 바로 이때로 전 시즌 득점왕이 36골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골 인플레이션이 있었던 시즌이다. 득점 10위가 15골 언저리였던 지난 시즌에 비해 같은 10위가 30골이 넘어갈 정도로 골이 두 배는 더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