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영(야구)

삼미 슈퍼스타즈/청보 핀토스 역대 감독
박현식[1]
(1982)
김진영
(1983~1985)
허구연
(1986)
롯데 자이언츠 역대 감독
어우홍
(1988~1989)
김진영[2]
(1990)
강병철
(1991~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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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삼미 슈퍼스타즈 감독 시절.

1 소개

인천야구대부[3]

대한민국의 전직 야구 선수이자 지도자로 1935년 인천에서 태어났다. 후술하겠지만 훗날 인천 연고팀 최고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성장한 김경기 SK 와이번스 2군 감독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2 선수 시절

현역 시절에는 내야수로 뛰며 모교인 인천고를 전국 최강으로 이끄는데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그가 재학 중이던 시절 인천고는 세 차례 전국무대 정상에 등극했는데, 1950년 중반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 최전성기를 맞은 인천고 야구부는 그 뒤 1989년까지 우승과는 거리가 멀었으니[4] 그가 인천고 시절에 남긴 위업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그 뒤 실업야구 육군 경리단, 교통부. 철도청에서 뛰었다. 활동하는 동안 국가대표 유격수로 활동하였으며, 사실상 국가대표 유격수 계보의 시초. 이후 국가대표 유격수 계보는 박정일-하일-김재박-이종범-박진만-강정호로 이어진다. 전해내려오는 말에 따르면 체구는 크지 않았지만 수비가 좋은 편이었으며 펀치력도 있는 타입이었다고 한다.

故 이종남 기자가 쓴 '인천야구 이야기' 책에 언급된 바에 의하면 상당한 근성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그의 근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를 꼽자면... 실업야구 선수 시절 병원에 입원할 정도로 큰 부상을 입은 상황이었는데 중요한 경기에 그가 필요해지자 병원 직원들 몰래 환자복을 입은 채(!!!) 병원을 나와서 동대문야구장에서 유니폼을 갈아입고 대타로 나와 홈런을 친 뒤(!!!!) 다시 유유히 환자복을 입고 병원으로 돌아왔다는 흠좀무한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3 지도자 시절

현역 은퇴 후 중앙대학교 감독을 지냈고, KBO 리그 출범 직전에는 인하대학교 감독으로 재직 중 이었다.

애초 인천 야구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인천을 연고로 창단한 삼미 슈퍼스타즈의 감독을 맡게 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정작 삼미나 프로야구 추진위원회에서는 김진영에게 아무런 접촉이나 연락이 없었다.[5] 뒤늦게 프로추진위의 이용일[6]이 김진영에게 삼미의 감독을 맡아달라고 제의했지만 감정이 상한 김진영은 "학교(인하대학교)를 대학야구 정상에 한번 더 올리고 생각해 보겠다" 라면서 완곡하게 거절해 버렸다. 일설에는 원년 삼미의 전력이 거의 능지처참 수준이라 일부러 감독직 제의를 외면했다... 란 얘기도 있으나, 어디까지나 카더라 이다.

3.1 삼미 슈퍼스타즈 감독 시절

그러나 1983년삼미 슈퍼스타즈의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이전의 감정은 다 털고 시즌을 준비하였다. 김진영 자신의 성격은 상당히 호쾌한 용장 타입이었지만, 단 한 명의 선수에게는 질질 끌려다니는 모습을 보였고, 이게 그의 영광과 좌절을 동시에 잉태할 줄은 몰랐다. 바로 장명부. 1시즌에 427이닝 30승 16패 6세이브라는 말도 안 되는 괴력을 발휘한 장명부에 의존해 1983년에 돌풍을 일으켰지만, 동시에 그에게 투수 운용까지 끌려다니면서 결국 1984년부터 시즌을 망치게 된다. 문제는 당시 삼미의 1선발 장명부와 2선발 임호균의 사이가 너무 안좋았고, 게다가 장명부는 배터리를 이루던 김진우와도 견원지간이었다. 결국 임호균롯데 자이언츠의 김정수, 우경하, 권두조[7], 박정후와 1-4 트레이드로 맞바꾸는 트레이드를 단행하면서 안그래도 얆은 투수진이 정말 장명부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아무튼 장명부를 앞세워 전기리그 1위를 달리며 "작년의 그 삼미 맞나?" 라고 할 정도로 야구팬들에게 센세이션을 일으키던 중, 2위 해태가 1.5게임차로 바짝 따라붙은 1983년 6월 1일 MBC 청룡과의 잠실 원정경기 때 사건이 터지고 만다. 0-1로 뒤진 8회초, 2사 만루의 찬스에서 최홍석이 좌전 적시타를 날리며 주자 2명을 홈으로 불러들였는데 정작 주심은 2루 주자 이선웅의 득점을 인정하지 않았다. 1루 주자인 김진우가 3루까지 뛰다 태그아웃 된것이 2루 주자의 득점보다 빨랐다는 것이 이유였다. 김진영이 득달같이 주심에게 달려가 거세게 항의했지만 판정이 뒤집힐 리는 없었다. 뚜껑이 열린 김진영은 머리로 주심의 배를 들이받고 유니폼 상의를 풀어헤친 채 폭언을 퍼붓다가[8] 급기야 백스톱 그물 뒤에서 경기 속개를 종용하는 이기역 경기 감독관의 넥타이를 잡아 끌다가 드롭킥을 선사하는 추태까지 벌이고 만다.[9] 결국 김진영은 퇴장당했고 그날 경기는 이종도의 끝내기 안타로 삼미의 1-2 패배(...).

그런데 얘기가 여기서 끝났으면 다행이었겠지만, 하필이면 이 날 경기가 TV로 전국에 생중계 중이었고, 청와대의 어느 높으신 대머리 양반[10]께서 한가하셨는지 그 경기를 TV로 보고 계시던 모양이었다. 김진영이 난동을 부리는 장면[11]이 나오자 그분은 "저러면 안되는데 말이지..." 라고 혀를 끌끌 찼을 뿐인데, 그분 밑에 있던 인물들이 알아서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고 어린이에게 꿈을 주는 야구장에서 그런 사태가 일어나는 것은 정의사회구현에 역행하는 일" 이라는 명목 하에 아래로 무언가 지시를 하달하였고, 김진영은 다음 날 롯데 자이언츠와의 구덕 원정경기 종료 후 폭력혐의로 쇠고랑을 차며 졸지에 구속된다.13분부터 보면 된다.

이후 일주일 만에 벌금 100만원으로 약식기소 되며 석방되었지만, 구단으로부터 그해 잔여경기는 자숙하라는 의미로 감독직에서 일시 퇴진당했고, 이재환 코치와 박현식 총감독이 대행으로 팀을 이끌게 되었다. 결국 김진영은 덕아웃 밖에서 삼미가 간발의 차로 우승권에서 멀어지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전기리그는 해태에게 극적으로 역전당하고, 후기리그는 MBC에게 밀려서 전후기 2위, 통합 3위의 성적이었다. 그해 시즌 종료 후, 삼성 라이온즈에서 감독 제의가 있었지만 "나는 인천야구를 버릴 수 없다" 면서 거절하기도 했다.[12]

1984년 다시 현장에 복귀했으나 이미 장명부의 태업[13]이 심해졌고, 팀 전력도 자연스레 원상복귀 되면서[14] 1984년 전,후기 내내 꼴찌를 기록. 그리고 1985년 전기리그는 아직도 시즌 최다 연패기록인 18연패라는 처참한 기록을 남기며 또 꼴찌(...).[15]

1985년 전기리그 종료 후 모기업의 경영난으로 인해 삼미 구단은 청보에 매각되면서 청보 핀토스로 새 출발을 했고, 후기리그 에서는 예상을 뒤엎고 4위로 시즌을 마감했지만,그래봤자 전후기 통합 성적은 여전히 꼴찌 1986년 참신한 새 감독이 필요하다는 구단의 판단 하에 김진영은 감독에서 해임된다. 그 후임으로 허구라가 취임하고...

3.2 롯데 자이언츠 감독 시절

이후 야인으로 지내던 중 1990년 롯데 자이언츠의 감독으로 현장에 복귀하여 시즌 초반까진 2위를 유지하면서 어느 정도 괜찮은 성적을 보였지만, 중간계투진의 부재와 윤학길의 부진, 타격 침체로 인해 역전패가 잦아졌고 거기다 주전들의 줄부상과 코치진-프런트 간의 갈등까지 겹치면서 7개 팀 중 6위로 추락하며 결국 시즌이 끝나기도 전에 중도 해임당했다.[16] 이 때 같이 투수코치로 데려온 장명부도 해임되었고,[17] 그 이후 김진영은 현재까지도 야구계에 복귀하지 못하고 있다.

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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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김경기(왼쪽)와 함께

'미스터 인천'이라는 별칭으로 인천 팬들에게 절대적 인기를 얻고 있는 김경기아버지로도 유명하다. 김경기인천야구의 적자(適子)가 된 것에는 그 자신의 능력뿐만 아니라, 인천야구의 대부였던 아버지의 후광도 어느정도 작용한 점도 없지않아 있다.

또한 넥센 히어로즈의 제3대 감독인 염경엽의 장인어른이기도 한데, 염경엽의 아내가 김경기의 여동생, 즉 김진영의 딸이기 때문에 이런 관계도 성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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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시즌 초반에 총감독으로 물러나며 이선덕 코치의 감독대행 체제로 잔여시즌 종료.
  2. 시즌 도중 해임.
  3. 이 닉네임은 김진영과 같은 시대에 인천야구를 이끌었던 박현식 초대 삼미 슈퍼스타즈 감독에게도 적용된다.
  4. 1979년에는 한해동안 무려 4번의 준우승만 기록하기도 했다(...).
  5. 그리고 삼미의 구단주이던 김현철 회장은 김진영보다 박현식을 선호하고 있었다고 한다. 결국 회장님의 의중이 우선시되었지만, 박현식은 불과 13게임만에 3승 10패라는 기록만 남기고 총감독으로 물러나며 역대 최단명 감독이란 불명예를 뒤집어썼다(...).
  6. 서울대학교 상대 야구선수 출신으로 한국야구위원회 초대 사무총장을 지낸, 사실상 한국프로야구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닌 인물이다. 이후 쌍방울 레이더스 구단주 대행을 역임했고, 전북 지역에 초/중/고 야구부를 여럿 창설하는 등 야구발전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이후 10구단 창단 시에 전북 야구의 대부로서 10구단 유치 활동의 중심에 나선 바 있다.
  7. 2012시즌 롯데 수석코치 하던 그분
  8. 김진영이 이날 지나치게 화를 낸 것은 다름아닌 심판 판정에 대한 불만이 원인이었다. 전날(5월 31일) 경기 때 6회말 이광은을 상대로 2-2 상황에서 장명부가 던진 공은 누가 봐도 스트라이크 였지만 주심은 볼을 선언했고, 다음 투구 때 1타점 2루타를 맞으며 패배의 단초가 되었다. 또한 사건 당일 4회초에도 김진우가 2-3 풀카운트 때 휘두른 배트에 공이 스치듯 맞고 뒤로 빠졌지만, 주심은 헛스윙 삼진 판정... 이래저래 쌓인 것이 많았던 김진영이었고 끝내 8회초에 사단이 난 것이다.
  9. 그 옆차기는 감독관에게 맞지 않았고 정작 김진영 자신은 그물에 스파이크가 걸리며 땅바닥에 고꾸라졌다...
  10. 프로야구 첫 시구자이기도 하다.
  11. 만약 이날 경기가 TV 중계가 없었다거나, 있었더라도 방송국 측에서 광고를 내보내던지 등의 융통성 있는 진행을 했다면 김진영이 쇠고랑을 차는 최악의 사태는 피했을지도 모르겠지만...
  12. 1983년 시즌 중 서영무 감독을 내치고 이충남 조감독(코치도 감독도 아닌...)의 대행 체제로 시즌을 마친 삼성의 당시 후임감독 후보는 김진영 말고도 OB 코치였던 김성근, 한양대학교 야구부 감독 배성서 등이었는데 결국 OB의 창단 감독이던 김영덕으로 낙점. 이 과정에서 김영덕김성근의 사이가 완전 틀어지게 된다.
  13. 지난해 시즌 전 30승=보너스 1억원 떡밥을 내건 삼미 사장의 약속이 공수표로 돌아가며(사장 사비로 일부 금액을 챙기긴 했지만) 단단히 삐친 상태였다. 한편으로 일본 시절부터 좋지 않았던 장명부의 허리상태가 전해의 혹사로 악화되었기 때문에 설령 정상적인 마인드로 출장했다 하더라도 좋은 성적은 낼래야 낼수가 없었을 것이다(...).
  14. 애당초 전해의 돌풍은 거의 장명부의 30승 버프 덕분이었고, 그나마 12승으로 마운드를 받쳐주던 임호균마저 롯데 자이언츠로 보내 버린데다 구단에서 장명부(의 실력과 투수조련 능력)만 믿고 마운드 보강은 거의 하지 않았다. 우리 명부님이 다 해주실거야(글구보니 장명부MB다?)
  15. 그뿐인가. 에이스로 믿노라 하던 장명부는 그 해 무려 25패라는 시즌 투수 최다패 기록을 작성했다(...).
  16. 잔여시즌은 일본인 수석코치 도이 쇼스케(한국명 도위창)의 대행 체제로 마무리지었다.
  17. 사실 장명부와 김진영은 큰 갈등없이 사이가 원만했고, 장명부도 김진영의 말은 잘 따랐다고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