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기

인천군 레전드데이 경기에 앞서 시구하는 김경기 (2014.10.07.)
역대 수상

1996년 한국프로야구 1루수 골든글러브 수상자
김경기(金敬起 / Kyung-Ki Kim)
생년월일1968년 4월 5일
출신지경기도 인천시[1]
학력석천초 - 상인천중 - 인천고 - 고려대
포지션1루수
투타우투우타
프로입단1990년 태평양 돌핀스 1차지명
소속팀태평양 돌핀스(1990 ~ 1995)
현대 유니콘스(1996 ~ 2000)
SK 와이번스(2000 ~ 2001)
지도자SK 와이번스 2군 타격코치(2003 ~ 2005)
SK 와이번스 1군 타격코치(2006 ~ 2010)
SK 와이번스 2군 주루코치(2010 ~ 2011)
SK 와이번스 1군 타격코치(2011)
SK 와이번스 2군 타격코치(2012 ~ 2014)
SK 와이번스 1군 수석코치(2015)
SK 와이번스 루키군 타격코치(2015)
SK 와이번스 2군 감독(2016)

1 개요

전직 야구선수이자 야구코치. 신인 시절 3년 동안 쓴 37번을 제외하면 프로 시절 내내 00이란 보기 드문 등번호를 달고 활약했다.

1.1 미스터 인천

험난했던 인천 야구사를 이어주는 자존심

태평양 돌핀스에서 데뷔한 후 인천 연고 팀에서만 뛰며 인천야구의 상징으로 자리잡은 선수. 별명은 그 명성에 걸맞게 미스터 인천[2]. 현역시절 선수단 내에서 불리던 별명은 몸집이 크다는 이유로 고릴라였다고 한다. SK 와이번스 팬은 물론이요, 과거 현대 유니콘스 팬들 역시 굉장히 좋아하는 선수다. 과거의 현대 팬덤을 기반으로 하는 현재의 넥센 팬과 현대에게 버림받은 후 응원팀을 옮긴 인천 지역 SK 팬들 사이에선 항상 삼청태를 둘러싸고 대립이나 갈등을 빚고 있지만, 김경기란 선수 하나로 공통분모를 삼는 이들이 꽤 된다. 그만큼 그가 가진 상징적인 의미가 단순한 선수를 넘어서는 무언가였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당시 태평양을 응원하던 도원전사들에게 김경기가 어떤 존재였냐면, 올스타전 팬 투표에서 그 선동렬보다 사천 표나 더 표를 많이 얻었을 정도였다. 김경기는 인천야구의 희망이자 모든 것이었다.

21세기에 야구를 접한 야구팬들은 김경기의 통산스탯을 보고 "예상보다는 그렇게 성적이 뛰어나진 않았는데?"라는 의문을 갖기도 한다. 하지만 태평양 돌핀스 시절이나 그 이전부터 인천야구를 지켜본 골수팬들은 김경기의 존재는 엄청났다고 인정한다. 애초에 태평양 돌핀스의 타선이 역대급(...) 물방망이여서 김경기의 활약은 천금과도 같았으며, 그럼에도 누적스탯이 좋지 못한 것은 상대팀 투수들도 김경기를 집중견제하다보니 피로와 부상이 누적되며 많은 경기에 출장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방망이 물방망이라고만 해서 잘 이해가 안간다면 이렇게 생각하면 된다. 1992년경에서 1993년도 당시의 태평양 돌핀스 타선을 기준으로 1번부터 9번까지, 윤덕규 안타or범타-염감독 삼진or병살-유이아빠 삼진-김경기 홈런-김동기(홈런or안타)- 뭐 그뒤론 삼진삼진볼넷병살삼진범타삼진 그러다가 김경기 안타 이런 식 이었다. 그러다 보니 상대편의 견제가 엄청났다. 사실 뭐 유이아빠나 염감독은 당대에도 답이 안 나올정도로 유명한 멘도사 라인이니 그렇다 쳐도 다른 선수들은.....[3][4]

2 프로 입단 전

인천 태생으로, 초중고 학창시절을 모두 인천에서만 학창시절을 보냈다. 특히 인천고 재학 시절이었던 1985년에는 전국대회에서 타율 0.457, 46타수 21안타의 성적을 올려 이영민 타격상을 수상했다. 인천고 졸업 후 고려대학교로 진학했고[5], 1988 서울 올림픽 야구 종목의 국가대표 선수로 선발되기도 했다. 이렇듯 고교시절때부터 그는 인천에서 가장 기대받았던 유망주 가운데 한명이었다.

3 프로야구 선수생활

3.1 태평양 돌핀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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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태평양 돌핀스에 1차지명 신인으로 입단하여 1루수와 중심타자(주로 4번 타자)로 활약하였다.[6] 그의 등번호는 원래 37번이었으나[7][8], 1993년부터 한국프로야구에서 처음으로 00번 등번호를 달면서 이때부터 등번호 00번은 곧 그의 상징이 되었다. 또한, 그는 당시 홈구장이던 숭의동 야구장에서 특히나 강한 모습과 인상적인 활약을 보여 홈팬들로부터 열화를 받아 미스터 인천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매년 0.270~0.290타율 사이에 20홈런 칠수있는 능력을 가진 그는 당시 타선이 약한 태평양 돌핀스의 중심타선의 핵심이었다. 특히 1994년에는 윤덕규-김경기-김동기로 이어지는 Y2K 클린업 트리오 주축역할로 활약했는데, 여기서 4,5번 타순인 김경기-김동기로 이어지는 KK포는 실로 위력적이었다.[9] 그 해 김경기는 23홈런을 기록하여 활약한다.

3.2 현대 유니콘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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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태평양 돌핀스를 인수한 현대 유니콘스에서도 1996년 당시 타선이 약한 가운데에서 4번 타자로 20홈런을 기록하였고, 중심타자 1루수로 선수 생활을 활약하였다.[10] 그러나 다음해 1997년에 6개 홈런에 36타점, 0.254타율로 로우 커리어를 기록한다.

1998년에는 3루수1루수 포지션 전전하면서 박재홍-스캇 쿨바-김경기 이어가는 클린업 트리오 타선의 주축역할을 하여 18개 홈런에 0.274타율을 기록하여 건재함을 보여주었고, 1998년 한국시리즈에서 현대 유니콘스 창단 3년만의 첫 우승이자 역대 인천연고팀 사상 첫 우승의 기쁨을 맛보았다. 1999년에는 0.277 타율에 6개의 홈런을 기록했는데, 시즌 초까지는 준수했는데 여름무렵인가 시즌 중반에 부상을 당해 시즌아웃되어버리고 전력에서 이탈하였다. 2000년 시즌에도 그는 꾸준히 0.280 타율을 기록. 팀의 고참으로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시즌 전부터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 문제로 선수단 내 전준호와의 갈등이 있었고, 자신 스스로 소속팀 현대 유니콘스에 트레이드 요청을 하여 현금 트레이드로 SK 와이번스로 이적한다.

3.3 SK 와이번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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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의야구장에서 홈런을 친 뒤 1루 관중석의 팬들에게 답례하는 김경기

2000년 시즌 중, 인천 팬들의 요구로 김경기 자신은 SK 와이번스로 트레이드해달라고 현대 유니콘스에 자진의사를 밝혔다. 당시 인천 팬들은 현대그룹의 불도저식 강경 연고이전 추진으로 인해 현대 유니콘스에 대한 실망감과 반발감이 상상 그 이상이었다. 신생팀 SK 와이번스에 대해서도 아직은 곱게 봐줄 수 없었던 시절, 창단 초기의 SK에 대해 정을 못 붙이자, 인천 팬들은 "다른건 다 좋다! 김경기라도 영입해 달라!"구단에 강하게 요구했었다. 김경기 역시 이 무렵 같은 소속팀 선수인 전준호와의 갈등도 있었고, 그 외에 이러저러한 이유로 결국 트레이드를 요청했던 것. 트레이드 소식을 들었을 당시 현대 팬들은 충격이 매우 컸었다. 김경기는 단순히 '인천 연고지역에만 인기있는' 그런 선수가 아니었다. 비인천 연고지역 팬들도 역시 김경기를 매우 좋아했기 때문. 씁쓸했던 마음이 컸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여곡절 끝에 SK 와이번스에 현금 트레이드로 입단, 입단식을 했을 때 홈 팬들로부터 열화와 갈채를 받았다.[11] 하지만, 그는 그 이후 입지가 좁아져 갔었고 2001년 시즌 종료 후,[12] 현역 은퇴를 선언하면서 2002년 문학구장 개장경기에서 은퇴식을 했다.

4 에피소드

집안 전체가 야구집안이기도 한데, 아버지는 전 삼미 슈퍼스타즈 감독인 김진영이다. 또한 한국야구위원회 심판으로 활동 중인 김풍기는 그의 사촌 형이다. 프로 데뷔 당시에는 배번으로 37번을 달았으나, 1993년부터 마음을 비운다는 뜻으로 등번호 00번을 달아 그 이후부터 00번을 고수하고 있다. 한국의 프로스포츠 사상 00번을 등번호로 달았던 선수는 김경기가 처음이다[13]. 또 태평양과 현대의 백업 내야수이자[14] 그와 고려대, 태평양-현대 시절을 함께했고 현 넥센 히어로즈 감독인 염경엽과는 매제사이라고.[15]

그는 항상 안타를 칠 때나 홈런을 칠 때 십자 성호를 긋는 세레모니를 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십자 성호 세레모니는 평소 그가 다니던 인천의 한 천주교 성당의 신부가 제안했다고 한다. 김경기를 비롯한 그의 가족들은 독실한 천주교 신자이며, 그의 부인이 매 경기가 열리는 날마다 새벽기도를 하면서 김경기의 선전을 기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버지를 이어 인천을 대표하는 야구선수로 성장한 인천야구의 적자라는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처음에 야구를 시작할 때에는 아버지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혔다고 한다. 이유는 김진영 감독 본인이 김경기가 야구 때문에 공부를 소홀히 하지 않을까 걱정해서라고. 결국 김경기에게 야구를 하도록 허락했지만 조건이 붙었다. 반에서 10등 밑으로 떨어지면 바로 야구를 접는 것으로. 김경기는 오로지 야구를 하고 싶다는 일념으로 연습으로 피곤한 몸을 이끌고 공부에도 매진했다. 그 결과 고등학교 3학년 때 본 학력고사에서 담임이 진지하게 체육특기자가 아닌 일반전형으로 고려대 체육교육과에 지원할 것을 권할 정도의 성적을 받았다고 한다.

선수 시절부터 투수 정명원과 함께 '큰형님'같은 역할을 해왔었고 카리스마가 강했다. 한 가지 일화로, 2007년 SK vs. 현대 수원구장 경기를 치렀던 때였다. 당시 양 팀 팬덤은 말 그대로 서로를 원수 보듯 했으며, 수원구장에서는 서로 언성을 높이면서 욕까지 하던 수준이었다. 그러나 김경기가 1루 코치로 나올 때면 1루 관중석에 있던 현대 팬들은 김경기가 SK 코치임에도 다들 '김경기! 김경기!!' 연호를 하였고 김경기는 1루수 이숭용하고 같이 기분좋게 웃어주고 농담도 건네받고, 쇼맨쉽 보여주고 파울볼이 김경기 쪽으로 날라오면 1루 팬들에게 기분 좋게 공을 던져주고 이랬을 정도. 이 정도면 그가 태평양 돌핀스 때부터 인천 팬뿐만이 아닌 비 인천지역 연고 팬들에게도 얼마나 사랑받았던 선수였는지를 알 수 있다.

김은식 작가가 오마이뉴스에 기고한 '야구의 추억, 열 다섯 번째 인천야구의 큰아들, 김경기' 김경기, 그와 함께해 인천은 행복했네

여담으로 현역 시절 굉장한 노력파 선수였다. 기자들도 인정하던 연습벌레였다고. 어느 기자에게는 자기는 스스로 생각해도 죽기 살기로 운동하는데 이 정도밖에 못 한다고 말한 적도 있디고 한다. 발언의 자세한 출처는 추가바람. 또한 아버지가 야구선수였으니 만큼 어릴때 김경기를 위한 조그마한 야구장을 만들어줬는데, 어린시절 밤을 새면서 야구를 연습했다고 한다. 떡잎부터 남달랐던 것..

5 지도자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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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 와이번스에서 은퇴한 이후 SK 와이번스에서만 12년째 코치를 맡고있다. 보직이 바뀐 적은 있지만, 중간에 지도자 연수를 받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SK를 떠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야말로 뼛속까지 미스터 인천.

박경완과 함께 SK팬들이 바라는 차기 감독 0순위이기도 하다.[16] 인천팀 사상 최고의 프랜차이즈 스타였던 만큼 많은 SK팬들이 김경기가 차기 SK 감독이 되길 바랄 정도로 지금까지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연고지인 인천광역시에서는 도원아재팬들에게 영원한 아이돌 같은 존재인데다 팀 내부에서도 따르는 선수들이 많다는 증언도 심심찮게 나오고 있고, 타격코치인 만큼 팀 주축 타자들이 그를 많이 믿고 의지한다고 한다.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2013년 시즌 종료 후 이만수 감독 경질 루머가 돌았을 당시 2014 시즌부터 이만수는 경질되고 차기 감독으로 김경기가 내정되어있다는 루머가 SK 팬들에게 정설로 받아들여지기도 했었다. 하지만 현실은...

2014년 10월 23일에 수석코치로 임명되어 김용희 감독을 보좌하게 되었다.

그러나 SK가 7위까지 떨어지는 부진에 빠지자, 구단 내·외부에선 충격요법을 써야할 때라며 김용희를 압박했고 이에 김경기는 자처해서 자신의 강등을 요청했다. 처음에는 김용희 감독이 이를 거절했지만 김경기가 이를 재차 요청한 끝에 결국 2015년 8월 15일부로 루키군 타격 코치로 내려앉았다. 스스로 목을 친 남자, 김경기

2015 시즌 후 SK 와이번스 2군 감독으로 선임됐다.

2016 시즌 종료 후 SK 와이번스 2군 감독에서 해임되며 16년 만에 SK를 떠나게 되었다.

6 기타

2007시즌에는 강도를 잡다 중상을 당한 적이 있다.1 2 5월 17일 잠실 경기를 마치고 귀가하던 도중 여성의 비명소리를 듣고 달려가 강도와 격투를 벌인 끝에 주변을 지나던 택시기사와 경찰의 도움으로 강도를 붙잡는데엔 성공했으나 자신도 왼손이 찢어지는 부상을 입고 말았다. 결국 강도에게는 구속영장이 발부됐고 이러한 사실을 감추고 경기장에 나왔던 김경기는 상태가 심해져 결국 병원에 입원한 뒤 퇴원 후에는 붕대를 감고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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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태평양데이 당시 조웅천과 함께[17]

2008년 SK 구단이 태평양데이 행사를 했을 때 팬들에게 똑같은 유니폼을 판매했는데 이 당시 과거 태평양 시절에 뛰었던 주요 선수들의 배번과 이름을 마킹할 수 있도록 했다. 그 당시 가장 많은 마킹 유니폼이 00번 김경기였다.[18] 인천야구에서 그가 차지하는 위상을 다시 한 번 보여준 사례. 태평양데이 당시 김경기는 이 유니폼을 입고 경기 전 시타를 했다.

흑역사로는, 선수협시절에 선수협 5적을 주도했던 적이 있었다는 거다. 앞서 잠깐 언급했던 전준호와의 갈등도 이 때문에 일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두산 베어스의 감독이자 과거 등번호 23번을 달던 포수와 마찬가지로 묻힌 감이 없지 않아 있다. 2000년 시즌 전,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가 창설되기 시작할 무렵 전준호가 선수협 참여를 독려하였는데, 당시 선수협에 대해 가장 부정적인 의견을 표하던 현대가 친구단파인 김경기를 통해 이를 저지하면서 둘의 갈등이 생겼다고 한다. 소문에 의하면 전지훈련지에서 둘은 주먹다짐까지 했다고.[19]아무래도 김경기 쪽이 체구가 좋다 보니, 상처를 많이 입은 쪽은 전준호. 갈비뼈와 손가락이 부러졌다고 한다.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전준호의 성적을 보면 2000년도 출장경기수가 유독 적다[20].

인천 출신 힙합그룹 리듬파워의 노래 중 <만루홈런 인천 remix>[21]에서는 'I'm feelin' like 김경기'로 언급된다.

2007년 4월 10일 문학 홈 개막전으로 열린 삼성 라이온즈와의 경기 시작 전 스포테인먼트의 일환으로 개막전 시타를 했다. 이날 시구는 투수 출신 김성근 감독, 시포는 포수 출신인 이만수 수석코치가 했다.

2009년 9월 6일 문학 롯데전 때 CJ 인터넷 마구마구가 선정한 제4대 프로야구 레전드 스타로 선정되어, 경기 전 레전드 동영상 상영 후 시구를 했다.


2014년 10월 7일 문학 NC 다이노스와의 경기 시작 전 레전드 데이의 일환으로 동영상 상영 후 시구를 실시했다. 그리고 그만 시타자로 나선 자신의 골수팬을 맞추고 말았다. 안티팬으로 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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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공깽스럽게도 코치시절부터 진행되어온 탓인지 탈모가 매우 심하다.

7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기록
연도소속팀경기수타수 타율안타2루타3루타홈런타점득점도루4사구장타율출루율
1990태평양 돌핀스120414.2851182911068
(5위)
50756.432.366
1991109392.29111425
(3위)
485942533.436.341
1992126465.254118212216557141.443.312
199386318.2808914084928231.399.343
1994124433.27712019323
(2위)
7068363.494
(5위)
.367
199596356.295105191124652442.455.369
연도소속팀경기수타수 타율안타2루타3루타홈런타점득점도루4사구장타율출루율
1996현대 유니콘스115412.27411316120
(4위)
6454657.464.360
199791311.2547921065136649.379.352
1998126431.274118250185962555.457.354
199992264.2777311163737140.394.368
연도소속팀경기타수타율안타2루타3루타홈런타점득점도루4사구장타율출루율
2000SK 와이번스49142.282405042119233.401.417
20014882.23219102910014.317.340
통산12시즌11824020.27511062061313859851542514.436.355
  1. 인천이 직할시로 승격된 후 경기도에서 분리된 건 1981년이다.
  2. 마구마구에 있는 김경기의 잠재력 중 하나이기도 하며, 한때 가장 쓸모없는 잠재력으로 악명이 자자했다. 구장 랜덤으로 문학구장에서 플레이 시 파워 +3, 컨택 +6(…). 이후 도원구장이 추가되면서 쥐씨알만큼이나마 좋아졌고, 2013년 선수카드 업데이트와 동시에 팀연도 세트덱, '팀 올스타 세트덱으로 플레이 시 파워+1와 컨택트+2'로 변경되었는데, 오히려 13 김선빈의 무등메시 잠재력 부여에 정당성이 모자라니까 물타기할 목적으로(…) 상향시켜줬다는 의심을 하는 유저들만 잔뜩 생겨났다.
  3. 아니 뭐 이런 막장타선이 다 있나 하겠지만 다행히 인천연고팜이 투수력이 쩔어줬다.고등학생시절 류현진을 그저그런 투수로 만드는 동네가 인천이다 김경기가 홈런이라도 치는 날에는 김홍집 정명원 정민태 최창호 박정현 조웅천 같은 수준급 투수란 투수는 총동원, '우오와앙 1점이다'를 외치며 미친듯이 틀어막았다.내가승리투수할꼬야 그리고 이런 말도 안 되는 전술로 1994년 한국시리즈까지 갔다,비록 신바람 야구의 LG 트윈스에게 밀리긴 했지만 그래도 타자는 김경기 하나만 믿는 전술(...)이란걸 생각해보면 당시 태평양의 투수력이 얼마나 셌는지 알수있다,진짜 태평양 바닷물처럼 상대팀에게 점수를 짜게 주는 팀이었다. 그리고 타자들은 자기네팀 점수도 짜게 냈지
  4. 1994년 당시 태평양 돌핀스의 정동진 감독은 미국에서 코치연수를 받고 돌아와서 메이저리그식 자율야구, 빅볼 성향이었지만, 당췌 선수들이 점수를 내질 못하니... 이런 투수력 위주의 지키는 야구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도 부상자 관리는 철저히 하면서 최대한 혹사를 피한건 정동진 감독의 공.
  5. 인천소재 대학교에 야구부가 없어서 고려대를 간 건 아니다. 알다시피 인하대학교에도 야구부가 있고, 김경기의 아버지인 김진영 감독이 인하대 감독으로도 재직한 바 있다.
  6. 당시 태평양에는 거포가 거의 전무했었다. 거포라고 해봤자 1년에 홈런 12개 남짓 치는 김동기 정도. 입단 첫해부터 4번타자 거포로 활약했다는 것은 태평양 돌핀스에서 김경기에 대한 기대가 상상 그 이상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7. 참고로 1년 먼저 태평양에 입단한 회전식 오각별 스트라이크 존, 혼이 실린 스트라이크 등으로 유명한 사촌형 김풍기의 등번호가 38번이었다. 이와 연관이 있을 듯.
  8. 김경기 이후 이재주가 등번호를 물려받는다.
  9. 특히 태평양 돌핀스는 타선이 매우 물방망이였기 때문에 김경기의 활약은 매우 컸다.
  10. 당시 3번 타자는 신인 첫 해 30-30 클럽 달성한 괴물 루키 박재홍이었다. 그 뒤를 받쳐준 선수가 바로 거포 김경기.
  11. 그리고 김경기의 SK 이적 후 첫 경기에서 구단은 경기장에 온 팬들에게 빵을 나눠줬다. 왜 빵이었냐면 등번호가 00(빵빵)이니까.박재홍 은퇴식은? 참고로 김경기의 SK 이적 후 첫 경기는 개막전 때보다 더 많은 관중이 야구장을 찾았다. 김경기에 대한 인천 팬들의 애정이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하게 하는 부분.
  12. 당시 SK는 2:6 트레이드로 통해서 1루수 베테량 김기태를 영입했다.
  13. 0번은 많았으나, 0이 두번 들어간 00번은 김경기가 최초다.
  14. 백업으로 활동한 건 현대 유니콘스 시절. 태평양 돌핀스 시절에는 주전급이었다.
  15. 염경엽 감독의 아내는 김경기의 동생이다.
  16. 실제로 이만수 감독이 물러난 직후 후임 감독을 물색한다고 했을 때 유력한 감독 후보로 꼽혔고 김용희 감독이 물러난 후에도 역시나 후임 감독감이라고 꼽혔지만 이번에도 감독으로는 선임되지 않았다. 다만 구단에서는 감독감으로 보고 있지만 본인이 만약 감독이 되어 성적이 좋지 못할 경우 인천팀을 떠나야 한다는 것 때문에 부담을 느껴서 감독을 맡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있다.
  17. 1994~1995년 당시 두 사람은 나란히 선수였고 태평양데이가 진행되던 시점에는 조웅천만 현역 선수였다.
  18. 실제로 이 유니폼을 입고 뛰던 시절이 김경기에게는 최고의 전성기였고 이 시절 초등학교에 다녔던 20대 후반~30대 중반의 팬들은 자연스럽게 김경기에 열광할 수밖에 없었다.
  19. 다짜고짜 먼저 주먹을 날린 쪽이 김경기다.
  20. 전후 4~5년간은 꾸준히 100경기 이상을 출전했지만, 2000년대에는 87경기만 출전.
  21. 원곡은 다이나믹 듀오의 <만루홈런>. 원곡에선 'I'm feelin' like 이대호'로 언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