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효범


전주 KCC 이지스의 김효범.


서울 SK 나이츠 시절.


울산 모비스 피버스 시절.

전주 KCC 이지스 No. 34
김효범
생년월일1983년 11월 10일
국적캐나다
출신학교뱅가드대학교
포지션슈팅가드
신체사이즈191cm, 90kg[1]
프로입단2005년 드래프트 2번 (모비스)
소속팀울산 모비스 피버스 (2005~2010)
서울 SK 나이츠 (2010~2012)
전주 KCC 이지스 (2012~ )
2010~2011 한국프로농구 올스타전 MVP
이승준(서울 삼성 썬더스)김효범(서울 SK 나이츠)문태영(창원 LG 세이커스)

1 개요

한국프로농구에서 뛰는 가드. 여러가지로 한국 프로농구의 뜨거운 감자. 디시 농구 갤러리에서는 그의 캐나다 이름에서 파생된 브랄킴, 부랄킴(...) 등으로 불린다.

2 행적

2.1 데뷔 이전

잠원초등학교를 나오고, 중학교 때 가족 전체가 캐나다로 이민을 갔다. 캐나다에서 농구를 배웠고, 뱅가드 대학교를 나왔다. 그리고 중학교와 고등학교, 대학교를 보내면서 자연히 캐나다 국적을 취득하게 되었다. 여기까지는 뭐 흔하지는 않아도 종종 있는 일이다. 그래서 캐나다에서의 그의 정식 이름은 브라이언 킴(Brian Kim).

캐나다 밴쿠버 옆에있는 랭리라는 도시에서 살았다.[2] 월넛 그로브 세컨더리스쿨 출신이다. 쥬니어 스쿨 시절부터 학교 대표팀에서 두각을 나타냈는데 주전 대부분이 170~180대 동양인에 190 남짓한 백인 한두명 있던 팀을 주4강으로 이끌면서 랭리시 mvp, bc 주 올스타로 꼽히기도 하고 주 6위권 유망주에 랭크되는 등 유명세를 탄다. 특히 빈스카터의 360윈드밀이나 마이클 조던의 크레이들 덩크, 코비의 비트윈더렉 덩크 등을 구사하면서 동양인 최초로 bc주 덩크왕에 오른 고2 시절은 당시 지역 일간지, 교포 신문에도 크게 나온 바가 있다.[3] 12학년 시절 24득점 8리바운드를 평균으로 하는 성적을 거두면서 캐나다 스포츠 다이제스트가 선정하는 고교선수 12위에 꼽히고 올 캐네디언 나이키 캠프에 초청받는 등 캐나다 고교농구의 실력자로 인정받는다. 그리고 NCAA 1부리그 wcc 컨퍼런스의 포틀랜드 대학으로 진학하여 당시 NCAA 1부에 진출한 단 3명의 아시아인 중 하나로서 교포 잡지 KORAM에 자랑스런 한국인으로 소개되기도 한다. [4]

하지만 NCAA 리그 적응에 다소 힘들어하면서 결과는 좋지 않았다. 2002년 9월 14일에는 UCLA와의 경기에 출전한 모습이 전파를 타서 한국에 방영되기도 했난데 이를 본 해설위원의 평가는 공격력이나 하드웨어는 좋지만 팀수비를 비롯한 유기적인 움직임에 문제가 있었다고 한다. 고교시절 혼자서 해결하는 공격농구에 익숙해진 탓인지 리그의 수준차 때문인지 하여튼 적응에는 실패. 이에 대해 본인은 자신을 스카웃했던 코치가 사임, 새로 들어온 코치진의 인종차별 문제까지 겪으면서 팀 리빌딩 계획에서 배제당하고 레드셔츠 신분으로 1년을 허비했다고 회고한다. 결국 그렇게 그는 평균 2.4득점의 초라한 기록을 남기고 전학을 가게 된다. [5] [6]

2003년에는 스티브 내쉬 등과 함께 캐나다 국가대표 15인 예비멤버로 연습경기까지 뛰었으나 결국 탈락한다. 그리고 2004년 유니버시아드 대표 때도 소집되었다.

전학 가서는 NAIA 리그 gsac 컨퍼런스 소속의 뱅가드대학교[7] 에이스로 활약하여 평균득점 17점으로 컨퍼런스 득점왕, 6승 18패의 하위권 팀을 17승 7패의 중상위권 팀으로 올려 컨퍼런스 토너먼트에 올리기도 한다..
이후 2003년 말부터 경희대에서 한두번 연습경기를 가지고 미디어 워크아웃을 보여주는 등 KBL 진출을 염두에 두는 행보를 보이기 시작한다. 이전에도 덩크대회 우승, NCAA 진출, UCLA와의 경기, 캐나다 국가대표 엔트리 포함 등으로 교포 사회에서 유명하고 국내에서도 간간히 화제가 되곤 했으나 단발성이었다.[8] 미디어 워크아웃으로 화젯거리가 되던 중 말에 이런 소문에 대한 증인들과 일부 영상이 증거로 나오고[9] 급기야 수만명 규모의 팬카페가 개설되고 NBA와 KBL 드래프트 신청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면서 각 커뮤니티에서는 몇 년간 그 기량에 대한 갑론을박으로 파이어나는 경우가 심심할만하면 일어났다.[10]

2.2 1~3년차, 모비스 시절 초기

처음 구단에 합류하고 비시즌을 보낼 때까지도 그에 대한 평가는 상당히 엇갈렸는데 대체적으로 운동능력, 슛, 드리블 등의 개인기량은 완벽한 수준이라는 평가였으나 오프더볼 무브, 로테이션 수비, 패턴 공격 등 유기적인 플레이에 관해서는 상당히 미흡한 모습이어서 때문에 관계자들 사이에서도 득점왕과 신인왕을 거머쥘 선수다, 아직 시합 나갈 기량이 아니다 등 극명한 온도차를 보였다.[11] 이 논란을 실력으로 해결하겠다는 본인의 의지와는 다르게 그의 커리어는 거품론으로 점철된다. 개인기량을 앞세워 시합을 주도하는 모습도 간간히 보여줬으나 기존 선수들과 다른 리듬과 특유의 어리버리함 때문에 팀의 리듬을 깨고 수비나 팀 플레이에 적응 못 하더니 급기야 벤치에서 기용되지 못하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심지어 리그 내에서 가장 효율이 마이너스 쪽으로 높다는 통계마저 나오고 거기다 가장 주목받던 덩크마저도 동영상의 그것과는 거리가 있는 수준으로[12] 결국 그의 기량에 대한 논란은 압도적으로 거품론이 대세, 급기야 농구계의 황우석, 동아리 농구 출신으로 기억하는 사람조차 다수가 되었다. [13]

그래도 국내선수 중 가장 뛰어난 개인기를 가지고 있다는 평가에, 연습경기 때는 의외로 도미넌트한 모습을 보여줬고, 개인기량이나 하드웨어에 의한 자신감은 있는 것인지 빈센트 그리어 같은 동급의 용병들을 상대로는 매치업, 특히 일대일 상황에서 의외의 우위를 보이면서 가능성을 보여줬다.[14] 여담으로 벤치멤버 시절에는 현주엽을 상대로 활약하는 경향이 있어서 LG전만 보면 영락없는 주전급 식스맨이다.

어쨌든 그동안 모비스는 05~06시즌 정규리그 우승과 플레이오프 준우승, 06~07시즌에 통합 우승을 차지하는 등 잘나갔지만 정작 본인은 결승전에서 단 1초도 기용되지 못하면서 벤치를 달궈야했다. 그러다가 우승멤버인 양동근, 김동우 등이 입대하고 용병제도가 바뀜에 따라 팀의 핵심인 크리스 윌리엄스도 떠나면서 07~08시즌에는 주전의 자리를 맡게 된다.

2007~2008 시즌에는 첫 경기 20득점, 두번째 경기 29득점에 한 경기 3점슛 성공 갯수 1위 기록을 갱신하는 등 달라진 모습을 보여줬다. 타점을 버리고 타이밍을 선택한 빠른 릴리즈의 슛폼을 바탕으로 하는 외곽능력과 여전히 현란한 개인기로 팀을 이끌며 평균 득점 두자리 수를 기록하며 MIP 후보에까지 오른다. 리즈시절 최고 주가의 정영삼과 함께 슈팅가드 라이벌로 거론된 것. 하지만 현저하게 줄어든 운동능력, 아직도 미숙한 팀플레이 등으로 에이스로서 팀을 이끌기에는 역부족임을 보여줬고 설상가상으로 용병 선수들의 기량 부족으로 인사이드부터 털리고 그나마 버티던 함지훈조차 시즌아웃되면서 팀은 하위권 나락에 빠진다. 시즌 막판부터는 어느정도 팀플레이에도 적응하는 모습을 보여줘 다음 시즌을 기대하게 했다.

2.3 4년차, 전성기의 시작

2008-2009시즌은 김효범 커리어의 전성기가 시작되는 해이다. 이제 한국 무대에서의 적응도 어느정도 완료되었으며 특히 비시즌 기간동안 허리교정이 효과를 보는 통에 탄력, 웨이트, 밸런스를 어느정도 회복하면서 부상 후유증도 많이 완화되어[15], 2점슛 대비 덩크슛 비중이 13.6퍼센트로 거의 모든 상황에서 덩크가 가능함을 보여줬다.[16]

시즌이 시작되자 모비스의 에이스로 인정받으면서 크로스오버, 인유어페이스 슬램덩크, 장거리 풀업 점퍼 등 내외곽을 맹폭하는 명실상부한 최고의 슈팅가드로서 시즌 초반에는 리그를 지배한다 봐도 무방할 정도의 모습을 보여준다.[17] 여기에 던스턴, 블랭슨 등 안정적인 용병 전력이 합류하고 임대선수로 들여온 김현중, 우승연까지 전성기를 맞아 시너지를 보임으로써 원래 잘해야 6강 턱걸이라고 평가되던 모비스는 정규리그 우승까지 차지하여 역대 최고의 파란을 일으킨 팀으로 꼽히기도, 최초로 올스타에 뽑힌 이 시즌에는 덩크왕, 3점왕을 동시에 석권하는 유일한 선수가 된다.[18]

플레이오프 4강 첫 경기에서도 삼성을 상대로 덩크슛, 더블클러치, 외곽 등 전천후 폭격을 보여주면서 첫 경기를 쉽게 가져갔지만 이후 강혁과 헤인즈의 투맨게임, 레더의 지배력이 되살아나고 이상민의 노련함 이라고 쓰고 더티 플레이와 헐리웃이라 읽는 플레이에 의한 파울트러블 [19] [20] 등에 의해 시리즈는 업셋된다. 정규리그 우승을 하고 + 첫승을 챙기고도 결승에 오르지 못하는 최초의 팀이라는 불명예를 안은 것.. 김효범은 앨리웁, 토마호크 덩크 등 클러치 타임 때마다 몇 번의 하이라이트 필름을 남기며 분전했지만 여러 불미스러운 일을 겪고 리듬이 깨진 플레이를 하다가 결국 팀을 구하지 못하고 내년을 기약하게 되는데... KBL 커리어에서 가장 빛이 났던 시즌이지만 해피엔딩은 아니었던 것이다.

2.3.1 논란

이 시즌을 지나면서 불거져 나온 두개의 화두가 있는데 첫번째는 과연 유재학 체제의 모비스의 조직 농구 때문에 김효범의 개인 기량이 죽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김효범의 실력은 애당초 과장된 것이었고, 이를 유재학 체제에서 키워낸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다. 원래부터 이런 의문이 있긴 했지만 그간 거품론이 대세가 되면서 크게 논의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의 활약이 늘어나면서 김효범이 장기로 하는 돌파나 운동능력 같은 능력을 좀 더 활용할 필요가 있다거나 모비스 말고 다른 팀을 가도 되지 않겠느냐는 의견이 많아졌고 양측의 견해가 진지하게 논의되기 시작한 것..[21]

두번째 화두는 국적 문제이다. 역시 벤치에서 삽 푸고 있던 시절에는 가볍게 오가던 논의였고 큰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김남기 감독이 '이정도 기량이면 국가대표로도 쓰임새가 있을 것이다 귀화했으면 좋겠다'라는 발언을 한 것을 시작으로 기량이 만개한 김효범의 국적 문제가 불거진 것이다. 여기에 김효범 역시 '아직은 무리, 일단은 모비스 팀에 집중' 등 회피성 발언으로 군 기피의혹까지 논의되기 시작하는 것..[22]

KBL 규정에는 부모나 조부모중 한 명만 한국인이면 신청자격이 주어진다고 나왔는데, 사실 김효범의 부모는 모두 한국인이기 때문에 교포로서 국내선수 자격을 얻었다.[23] 2005 드래프트 당시에는 참가자 30명이 집단으로 거부하는 파행이 일어났다.[24]

입국 기자회견에서 김효범은 한국 대표로도 뛰고 싶다는 소망을 밝혔다. 그리고 이 소망을 밝힌 것이 그에 대한 비판의 결정적인 근거가 되기도 했다. 한국 대표가 되기 위해서는 캐나다 시민권을 포기해야 했는데, 한국 국적이 회복되는 순간 신체 건강한 김효범은 군대를 가야 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알았기 때문인지 국적 회복 및 대표 발탁은 그 뒤로도 어물쩍 넘어갔고, 이를 기억하는 농구팬들은 그를 계속 까고 있다. 후에 귀화혼혈 선수로 KBL에 들어온 전태풍, 이승준, 문태영, 문태종이 불합리한 제도의 희생양이 되는 것과 대비되어 더욱 까였다. [25]

2.4 5년차, 모비스에서 마지막해

2009-2010 시즌은 모비스에서의 마지막 시즌이다.

입대했던 에이스 양동근의 귀환으로 지난 시즌보다는 비중이 약간 줄었고 궁합이 잘 맞았던 김현중의 임대기간이 끝나 LG로 돌아갔지만 여전히 건재한 함지훈과 던스턴의 인사이드진을 바탕으로 좀 더 안정된 팀 전력으로 강력한 우승후보로 떠오른다. 거기다가 용병 출전시간 제한이 생기고 3점슛 거리가 멀어지게 되어 돌파와 장거리포를 가진 김효범으로서는 유리한 상황. 자타가 공인할 정도로 개선된 수비력까지 더해져[26] 기록에는 큰 변화가 없고 하이라이트성 플레이는 줄었음에도 좀 더 여유있는 플레이를 하게 된 것..

양동근과 함지훈, 던스턴을 주축으로 하는 공격을 거드는 3~4옵션을 하다가 전술적으로 꼬이기 시작할 때 클러치 슈터로서 순도높은 활약을 펼치는데 특히 각각이 리그 최고의 공격력과 수비력, 그리고 파워를 가진 양동근-김효범 백코트 듀오는 유재학의 주문대로 리그 백코트진들을 밀어버렸다.[27]

시즌 개막 직후는 교통 정리가 덜 되었든지 약간 해메기는 했지만 새로워진 3점 라인에 적응하고 시합 감각을 찾아감에 따라 팀은 무난히 플레이오프 안정권에 진입하고 정규시즌 마지막 경기는 골득실차로 정규리그 2연패, 4강에 직행한다.

동부와 만난 4강전에서는 역시 미친듯한 파워와 운동량을 바탕으로 하는 올코트 프레스로 첫승을 가볍게 거머쥔다. 이후 2차전에서 석패하지만 4점 클러치 플레이를 비롯한 활약으로 팀을 캐리했고 나머지 경기를 가볍게 제압하면서 힘의 격차를 보여줬고 매 경기마다 클러치 골을 여러번 터트려주며 승리의 일익을 담당한다.

결승 상대는 KCC, 전태풍의 가공할만한 개인기와 아이반 존슨의 폭발력을 감당하지 못하면서 첫경기 부진하지만 함지훈의 대폭발에 힘입어 각각 클러치 골을 하나씩 넣어주며 역전승에 성공한다. 이후에도 2차전에는 팀의 공격을 주도하면서 경기 막판 연달아 슛을 폭발시키면서 경기를 가져가고 3, 5차전에서는 전태풍과 아이반 존슨의 폭발력에 맞불을 놓는 등 쏠쏠한 활약을 펼친다. 양동근을 탈탈 털던 전태풍을 제어하는 것은 덤. 결국 처음으로 주역으로서의 파이널 우승을 하게 된다.

2.5 SK 1년차, 짧은 전성기

여하튼, 김효범은 모비스에서 두 차례의 우승 반지를 끼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2009-10 시즌 우승과 함께 FA로 풀렸고, 그를 노린 것은 전력 보강을 위해 혈안이 된 서울 SK 나이츠. 그리고 충격적인 발표가 이어지는데, 그의 연봉은 놀랍게도 5억 1300만원이었다. 이는 김주성에 이은 KBL 두 번째 고액 연봉이었다. 과연 김효범이 그럴 가치가 있는 선수인가부터 어마어마한 논란이 또 다시 벌어졌다. 직전 시즌 성적인 평균 11.1점이었던 선수가 5억원 선수가 되는 것이 과연 옳은지에 대한 논쟁이 벌어진 것. 이에 대해 김효범은 담담하게 자기 할 일을 한다고는 말하지만 연봉을 꽤나 의식하는 모습을 보인다.[28]

개막을 하면서 얼마 헤매는가 싶더니 점차 감을 찾으면서 시즌 딱 절반 시점까지는 평균 득점 18.2점 3.1리바운드를 기록하며 그래도 연봉값은 하고있었다. 명실상부한 전성기, 특히 친정팀 모비스를 상대로는 시즌 동안 평균 18.8 득점 4.1 리바운드 2.5어시스트의 MVP급 플레이어로 변신해서 '내가 원래 이정도 실력이야!라는 것을 시위하는듯 폭격을 퍼부었다.(..) [29]

이전 시즌보다 파워와 높이는 다소 떨어졌지만 좀 더 빠르고 적극적인 움직임과 이전까지 선보이지 못한 개인기, 이전에 비해 숙달된 스크린 우회나 2:2 플레이 능력까지 발휘하면서 레더와 함께 5위를 수성하는 쌍두마차 역할을 해줬다. 특히 당시 최강의 위력을 자랑하던 동부의 김주성-윤호영-벤슨 트리플타워를 개인기로 농락한 유일한 선수이기도... 이런 활약을 인정받아 올스타 득표에서 2위, 올스타 게임에서 MVP 수상을 하기도 한다.[30]

하지만 원래라면 김효범을 데려오면서 방성윤, 김민수 등이 건재한 가운데 시즌을 치른다는 것이 계획으로 둘은 드러눕고 김효범의 책임이 기대 이상으로 커졌다. 모비스 시절에 비해서 늘어난 출전시간에다가 본인이 해왔던 역할에서 주득점원 역할, 가드와 포워드는 물론이고 빅맨까지 종종 마크하는 해야하는 상황은 분명한 과부하였다. 레더와 김효범을 제외하면 SK에는 변변한 공격루트가 없어진 상황에서 집중 마크가 들어갔고 4라운드부터 본인과 팀은 나락에 빠지기 시작한다.

누가 봐도 가장 마지막까지 몸부림을 치는 것이 김효범이었으나... 결과적으로는 팀의 주포 역할만 이어받았을 뿐 떨어진 체력, 집중마크에 이어 모비스에서 늘어난 수비력까지 까먹는듯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결국 팀은 작년과 같은 7위..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한다.

경기 내적으로는 적시적소에 힘을 배분하는 문태종에 비교하면 노련함이 떨어지고, 문태영과 비교하면 무게와 안정감이 떨어지는 등 아직 풀타임 에이스로서의 역할에는 역부족임을 보여줬고 특히 경기 외적으로도 다소 경망스러운 인터뷰를 하면서 리더로서는 아직은 모자란 점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그의 짧은 전성기는 여기서 끝난다.

생애 최다인 평균 15.2점을 집어넣고, 3점슛 부분 1위에 오르며 방성윤이 부상으로 은퇴하고, 주희정이 무너진 SK의 에이스로 활약했으나 근데 팀 성적은 변하지 않았다. 여기에 고액의 연봉에 팀 플레이가 안 된다는 비난까지 겹치면서 돈값을 못했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기록만 놓고 보면, 돈 값을 한 편인데, 팀 성적과 동료와의 시너지를 놓고 보면 아니올씨다라는 의견도 적지 않은 것. [31]

그리고 팀 성적 부진을 이유로 SK는 연봉 삭감을 시도했는데, 여기서 또 충돌이 빚어졌다. 사실 개인 성적만 놓고 보면 삭감할 이유는 없었는데, 주희정과 김효범이 모두 5억씩 받으면 샐러리캡이 다 차는 관계로 무리한 삭감을 시도한 것. 이에 반발한 김효범이 연봉조정을 신청하면서 충돌하는 과정에서 KBL 연봉 체계가 개판이라는 것이 또 다시 드러났다.[32] [33] 다년 계약이 아니라 FA 선수에게 높은 금액을 부르는 쪽이 이기는 입찰제 방식의 한계가 나타난 것. 정작 못하면 바로 삭감 크리(...) 어쨌든 연봉은 3억 6천만원으로 깎였다.

2.6 SK 2~3년차, 너무나도 빠른 쇠락

2011년 플레이오프 진출 실패의 책임을 진 신선우는 감독직에서 사임하고, 문경은이 감독 대행을 맡는다. 문경은은 김효범의 공격능력에 신뢰감을 보여줬고 유래 없이 유한 모습을 보였으나 페이크다 xx아 [34] 문제는 본인의 준비가 안 됐다는 것(..) 지난 시즌 누적된 피로에 이은 피로골절, 무릎 부상, 디스크 재발 등으로 비시즌 동안 몸이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이따금씩은 공격으로 팀을 이끌어나가며 클래스를 보여줬으나 팀은 만들어지지 않은 채 거기다 팀 사정 상 포워드 붙박이가 되면서 본인 경기 리듬까지 잃어버린다. 거기다가 연봉 협상에서 구단의 후려치기에 의한 멘탈 붕괴 등등의 문제가 겹치면서 태업 논란까지 나오더니 그사이 그의 롤은 김선형, 변기훈에게 이관되고 급기야 발목 부상까지 겹쳐 시즌아웃..

2011-2012 시즌에는 어찌 보면 김선형-김효범이라는, 모비스시절 양동근 김효범 백코트의 재림이 될 수도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이따끔씩 상대 수비를 번갈아 개인기로 농락하는 모습을 보면 어느정도 기대를 가질만하기도 했다. 한국농구에서 일대일이 되는 단 두명의 가드가 백코트를 이루니...

하지만 프로의 세계는 냉정한 법, 팀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2012/2013시즌은 최부경, 박상오라는 블루워커들의 투입과 헤인즈의 영입으로 밸런스를 맞추면서 본 포지션을 되찾는 것인가 싶었으나 김효범의 롤은 김선형에게, 외곽 롤은 변기훈에게 완전히 넘어갔고 그의 비중은 거의 사라진 것... 한마디로 팀 플랜에서 배제한 것이다. 어쩌다 터지면 쓰겠지만 굳이 아쉽게 의존하면서 쓰지 않겠다는 천명인 셈(..) 그렇게 평균 2.2득점을 기록하며 벤치에 박혀있고, 팀은 정규리그 1위에 치고 나갔으나 역할 축소 - 감각 상실 - 역할 축소의 무한반복이 이어지면서 데뷔 이래 최악의 상황을 보내게 된다. 그렇게 그는 누구보다도 빠른 쇠퇴를 겪어간다.

2.7 KCC 이적 이후

결국 문경은 감독도 김효범을 계속 끌고 가는 것을 포기하고, KCC의 코트니 심스를 영입하기 위한 카드로 사용하면서 1:2 트레이드를 통해 크리스 알렉산더와 함께 KCC로 이적했다.

그는 이적 후 첫경기나 친정팀 SK와의 첫경기에서는 리듬이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만 이외에 오리온스전 23득점, LG전 26득점, KT전 30득점, 한 쿼터 3점슛 15득점 신기록, 시즌 자유투 성공률 96퍼센트 등 남은 시즌 동안 평균 13.8득점으로 안정된 공격력을 보여준다. 이때 모습만 보면 아직 개인기량이 리그 최고 수준으로 건재하다는 것을 확인한 셈, 꼴지 팀 KCC를 먹여살린다. 그래봤자 팀은 겨우 10승을 채우고 꼴지로 시즌을 마감했지만 개성이 강한 박경상, 강병현과도 원투펀치로서 어울리려는 모습을 보여줬으며 수비에서도 적극적인 태도를 가져 이적 후 눈물의 인터뷰로 호소한 농구에 대한 열정이 거짓이 아님을 보여줬다.[35]

2013-2014 시즌이 개막되고도 김효범은 강병현과 원투펀치를 이루면서 1라운드 6승 3패라는 쾌조의 스타트를 끊는다. 비록 그때보다는 몸상태나 기량이 못하지만 흡사 모비스 5년차에 근접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 그리고 이번 KCC에 드래프트된 김민구가 합류하면서 팀의 미래는 의외로 밝아지는듯 했다.

하지만 팀의 활약은 여기까지였다. 뛰어난 개인기량에 시야까지 가진 김민구가 볼을 가져가고 슈터로는 장민국 등에게 역할이 몰리면서 출전시간이 줄어들었고 상대적으로 김효범이 경기 감각을 유지할 기회가 줄어들었다. 김민구 본인은 나무랄데 없는 완벽한 기량을 가졌으나 역설적으로 그 뛰어난 기량 때문에 그와 장민국에게 비중이 몰리고 벤치 멤버들이 죽어버리면서 팀이 몰락하는 기현상이 일어나버렸다(..) 허재는 간간히 김효범을 클러치슈터로 기용하려는 모습을 보여주기는 했으나... 평소에 공도 못 만져보다가 갑자기 들여보내서 슛 쏘라고 하는데 먹힐 리는 만무하고 도리어 클러치 턴오버만 양산하는 꼴이 되었고 결국 팀은 또다시 나락에... 7위로 시즌을 마감한다.

2014-2015 시즌을 앞둔 비시즌 기간동안 김태술을 강병현과 맞바꿔서 리딩가드를 보완하고 하승진이 소집해제되면서 인사이더까지 강력해진 우승후보로 꼽히게 된다. 하지만 김민구는 음주운전 교통사고로 선수생활이 불투명해진 상태로 나가리(..) 김태술은 아시안게임 부상 후유증으로 감각 상실 등으로 역대급 먹튀짓을 하고있고 하승진 역시 이전만큼의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불의의 부상으로 들쭉날쭉하는 등 팀은 여전히 막장으로 9위에 랭크. 김효범은 어쩌다 갑자기 주전으로 뛰게 되었지만 평균 5.8득점이라는 주전과는 거리가 먼 기록을 남기며 연봉은 2년 연속 반토막이 난다.[36]

그리고 15-16시즌, 스팟업 3점슈터로 근근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개막 두번째 경기에서 19점을 올리며 팀의 첫 승을 도왔는데 시즌 초반 서술 시점에서는 0득점-19득점-3득점-8득점-13득점 강-약-중강-약 들쭉날쭉한 경기력을 보였는데 새로운 공인구와 다시 바꾼 슛폼 탓인지 기복이 있었으나 여전한 클러치 능력으로 외곽 능력만큼은 쏠쏠한 모습을 보여줬다. 점수를 올리지 못하여도 팀에서 신명호 다음가는 수비력으로 그것을 보충하였고 식스맨임에도 은근슬쩍 팀의 2~3옵션급 활약을 펼쳐 커리어 5번째 정규리그 우승을 달성한다. 다만 비중이 늘어나면서 은근슬쩍 선발, 주전으로 분류되는 바람에 거의 유력했던 식스맨상은 신명호에게 돌아갔다 준위에서 소위로 진급

6라운드 후반부터 4강 플레이오프까지는 영 힘을 쓰지 못하고 있다. 4강 플레이오프 4경기 동안 평균 득점 3, 야투율 18퍼센트, 3점 성공률은 겨우 10퍼센트, 한마디로 10개 던져서 하나 겨우 넣는 수준이다. 수비 때문에 쓰긴 쓰는데 공격에서는 저게 과연 선수인가 싶을 정도의(..) 부진한 모습이었다. 이 시점까지는 팀 에이스인 에밋과 하승진, 전태풍이 돌아가면서 무쌍을 찍어대는 바람에 크게 문제되지는 않았지만...

3 플레이 스타일

KBL 역사상 거의 유일한 슬래셔 및 리듬슈터. 기본적으로는 3점 2점 비율이 4:6 정도인 3점슈터로 페이스업 공격에 관해서는 전태풍과 더불어 역대 최고의 테크닉을 보유한 선수다.

기존 선수들은 직선적인, 역방향 원투스텝 돌파 정도만 구사하는데 비해 그는 퍼스트스텝 같은 기본적인 스텝이 빠른 것은 물론이고 스텝, 방향, 리듬 모두 다양한 편이다. 거기다가 순속과 높이, 파워까지 갖추고 있으니 막기가 더욱 어렵다. 또한 미국 농구 경험자답게 볼핸들링이 뛰어나고 방향전환, 훼이크, 완급조절 등 테크닉이 세련되고 빠르면서 현란하여 앵클브레이킹 상황도 자주 나온다.[37] 특히 숄더 훼이크, 크로스오버, 유로스텝, 더블클러치, 풀업 점퍼 등은 전매특허 동작으로 다른 선수들에게서는 그만큼 세련되게 구사하는 것을 보기 힘들며 플로터나 핑거롤에도 능하다. 운동능력의 감퇴와 3점의 비교우위 때문에 돌파의 비중이 낮아지긴 했지만 스텝을 놓는 위치나 기교가 있기 때문에 가끔씩 구사하는 돌파를 보면 여전히 여느 선수들과는 다른 모습을 간간히 보여준다.

간단히 말하자면 요즘들어 선수들도 개인기량 배양에 뒤늦게 관심을 보이면서 스킬 트레이닝 개념이 도입되고 있는데 김효범은 10년도 더 전에 이런 것들을 습득하고 실전에서 선보였다는 점에서 시대를 앞서나갔다고 할만하다. 때문에 '우와.. 드디어 KBL 선수가 저런 스킬을 구사하는구나!!' 하면서 돌이켜보면 김효범이 되려 더 세련되게 구사했던 것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기존의 선수들과 다른 테크닉 때문에 트래블링으로 오해를 사는 경우가 많고 캐링더볼 반칙에 손해를 많이 보기도 했다(..)[38]

여기다가 슛 거리가 길고 릴리즈가 빨라 탄력을 이용해 타이밍을 빼앗는 슈팅에도 능하다. 스팟업 뿐만 아니라 스크린이 걸리지 않은 1:1 상황에서도 슛을 만들어 던질 수 있는 풀업 능력도 갖춘 리듬슈터라서 공을 잡은 상황에서는 막기가 힘들다. 자유투 역시 프로 초기엔 좋지 못했으나[39]점퍼비중을 늘리고부터는 몇 년째 90%이상을 찍어줬고 통산 성공률도 80퍼센트를 넘을 정도로 정확한 편이었는데 15~16시즌에는 이상하게 많이 놓치는 모습을 다시 보여준다.

드리블과 스텝을 다양하게 섞어서 수비의 블락을 무력화하는 용도로 덩크를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선수로 실전에서도 컷인, 돌파, 앨리웁 등의 상황에서 오른발 왼발 양발 가리지 않고 덩크스텝을 밟을 수 있고 블락을 따돌려 인유어페이스, 리버스 덩크 등으로 마무리할 수 있다. 마음만 먹으면 거의 모든 상황에서 스텝과 좌우를 가리지 않고 덩크가 가능, 가드 포지션에서 1번째, 빅맨들까지 포함해도 7번째로 많은 덩크를 기록했다. 하지만 속공 가담 능력이 떨어지고 은근히 시합 중에 높이 기복이 심한데다 덩크 금지령 등의 문제까지 있었기 때문에 덩크 능력에 비해서 시합 때의 퍼포먼스는 아쉬운 편이다.

어리바리한 팀 수비 때문에 많이 묻히지만 대인 수비능력 역시 뛰어난 수준이다. 디스크 후유증 탓인지 순속에 비해 반응속도가 다소 늦지만 스텝을 읽는데 능하고 파워와 높이가 흑인들에게 뒤지지 않기 때문에 특히 190 초중반 슬래셔형 용병들과 매치업하면 그들을 공수에서 제압하는 경우도 왕왕 생길 정도.. 빈센트 그리어, 웬델 화이트, 카를로스 딕슨 등을 농락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평균득점 20은 우습게 찍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했다. 위에 언급된 장점들은 고급 기술들이지만 상당한 체력을 소모한다. 농구를 하면서 하이라이트처럼 고급 기술들을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은 극히 일부분이며 대부분의 득점은 공 없는 움직임에 의한 쉬운 컷인, 미드레인지, 킥아웃에 의한 외곽 등이고 이외에 농구를 하면서 대부분의 활동은 이를 위한 조직적인 움직임이다. 그런데 이것들은 거의 대부분 김효범이 능하지 못한 부분이라 센스가 탁월하거나 발 빠른 선수가 공을 잡을 기회를 차단하면 시합에 말리는 경향이 있다. 리그 특성상 용병 의존도가 높고, 움직임이나 인사이드진의 압박이 빡빡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손해를 많이 보는 편..

슛폼을 바꾼 탓에 타이밍은 빠르지만 타점이 낮아 본인의 특기인 미들 풀업 등 미드레인지의 안정성이 뛰어나지 못하다는 점[40], 모션 오펜스 같은 정교한 전술이나 트랩 디펜스를 소화할 정도의 센스나 운동량을 가진 스타일은 아니라는 것 역시 그의 단점이기도 하다. 개인기와 하드웨어에서 역대 최고급이고 최고수준의 장거리포까지 가졌지만 안정적인 득점원이 되지는 못한 예라고 할 수 있다.

허리 부상으로 운동능력을 잃은 이후로 돌파를 자제하고 점퍼, 특히 3점에 의존하는 경향이 심해졌는데, 파울을 얻어내는 능력은 상당히 떨어지는편이라 최근 몇년간은 자유투가 정확함에도 불구하고 경기당 자유투 시도횟수는 1개수준에 그치며 가장 많은 시즌도 2.6개에 불과했다.

볼운반, 키핑, 속공 드리블 능력은 왠만한 포인트가드만큼은 하고 수치상으로 턴오버 수치가 그렇게 심각하게 높은 편은 아니지만 돌파 능력과 비교하면 속공 능력 역시 다소 떨어지며 어처구니없이 털려서 점수를 헌납하는 임팩트가 상당히 큰 편이다.

패스를 찔러주는 센스는 어느정도 있는 편이다.[41] 하지만 다소 모험성이 강하거나 어리버리한 죽은 패스를 돌리는 등 중간이 없는 패스에 이은 턴오버를 하는 경우가 많아서 어시스트 수치는 최하급, 가드로서의 리딩 안정성 역시 상당히 떨어지는 편이다.

포스트업 능력은 나쁘지 않은데 박스아웃 능력도 떨어지는 등 덩크나 공격 이외에는 본인의 운동능력을 활용하지 못하는 편이다. 리바운드 수치는 거의 170대 가드라고 하도 위화감이 없을 수준이다(..)[42]

이런 저런 한계로 공격에서 다재다능한 모습을 보임에도 의외로 활용폭이 좁았던 선수로 안정성이 필요한 1~2옵션 주득점원보다는 3~4옵션으로서 감을 유지하다가 전술이 어그러졌을 때 개인기로 풀어가는 역할을 하면서 가장 활약의 순도가 높았던 스타일이다.

07~08시즌부터 10~11시즌까지 3~4시즌은 최고의 슈팅가드이면서 정영삼, 강병현, 이광재, 조성민 등 비교대상이 바뀌는 정도의 위상이었고 11~12시즌까지는 어느정도 클래스를 보여줬으나 급격한 하락세를 타기 시작하고 반대로 김선형, 김민구, 조성민 등이 치고 올라감에 따라 14/15시즌 이래로는 주전은 주전인데 주전이라 할 수 있는가... 하는 정도의 위치이며 스팟업 점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한국 농구에서 볼 수 없는 재능을 가졌지만, 정작 한국 농구의 기본적인 소양이 다소 결핍된, 저평가와 언급한 장점을 보는 고평가 사이의 간극이 큰 선수이다.

4 트리비아

  • 7학년, 그러니까 중학교 1학년 나이 때 처음 덩크를 했다고 한다.[43]
  • 유명 연예인 줄리엔 강과는 고교시절에 농구를 같이 하던 사이라고 한다.
  • 선수 중에 보기 드물게 공부도 잘해 고등학교 시절 올A를 받았다고... [44]
  • 국적에 걸맞게(...) SNS토익 만점 성적표를 인증하기도 하는 등 영어에 능하고 시험머리도 있는 편이다.
  • 등번호 34번은 폴 피어스에게서 따온 번호이다. 고등학교 때부터 사용해왔는데 모비스 시절 버지스에게 등번호를 뺏기기도 한다.
  • 미술이랑 음악 쪽에도 어느정도 재능이 있어서 팀 동료인 양동근에게 피아노 과외를 하기도 했다.
  • 대학 시절까지 인종차별에 시달려서 가장 싫어하는 것이 인종차별이라고 한다. 김효범이 굳이 NCAA 1부가 아닌 하부리그 NAIA, 거기서도 상위권인 콘코디아가 아닌 중위권 뱅가드로 전학한 이유가 인종에 대한 편견이 없는 감독과의 상담으로 감명을 받아서이다.
  • 데뷔 몇 년 전, 잠깐 한국에 놀러왔다가 선수들이 훈련 중인 삼성 홈구장에서 온갖 고난도 덩크를 처박아대면서 선수들의 기를 죽였다고 한다. 이 때 깜짝 놀란 서장훈주희정이 뭐하는 놈이냐고 물어봤다는 후문.
  • 길거리 농구 대회도 종종 나갔는데 포틀랜드나 밴쿠버 일대에 코트 잡아주는 것은 자기가 다 했다고 한다. 국적과 인종을 가리지 않고 학살을 해대니 김효범이 출몰하는 동네에는 한국인이라는 말만으로도 코트를 비워주는 일도 생겼다.(...) 한국 와서도 종종 길거리에 출몰하는데 덩크를 그렇게 난사한다고...[45] 유재학 밑에서 덩크 한다고 혼나면서 얼마나 빡쳤을까
  • 낙생고 선수들이 본인 앞에서 잘난 척을 하길래 학살하고 덩크로 골대까지 부숴 놓고 도망간 적이 있다.[46]
  • '난 리얼이다'[47] '드웨인 웨이드보다 내가 슛은 잘 쏜다'[48] '내 가족은 누가 먹어살리냐'[49] '(창원) 세이커스가 아니라 레이커스라도 이기자는 각오' 등등 어록(...)이 은근히 되고 꼬투리 잡히는 경우가 많다. 인터뷰하는 아나운서조차 SNS를 통해 디스할 정도... 말을 아끼고 하는데 있어서 생각은 많이 하는 편인데 그럼에도 장고 끝에 악수를 두는 스타일.(...) [50]
  • 나이키 농구화 줌코비4의 애용자다.[51] 눈에 보이는 대로 다 사는 것은 물론이고 지인들까지 전국 매장을 수소문, 주문제작, 한정판 구매까지 해서 긁어모있다. 지금은 다 떨어져서 다른 것을 착용한다고.
  1. 한 때 95~100kg의 웨이트였지만 디스크 수술 이후 근육이 빠졌다. 프로에서도 96kg까지 증량하기도 했으나 여러모로 운동능력 유지가 안 되는 모습을 보였고 대개 90 안팎을 유지한다고 한다.
  2. 밴쿠버에서 자동차로 약 40분정도 떨어져 있는 도시이다.
  3. 한국에 와서는 허리수술을 해서 점프력이 많이 낮아졌지만 리즈시절에는 105cm에 이르는 가공할만한 점프력을 자랑하여 시합 중에도 윈드밀이나 더블클러치 덩크 등을 종종 구사했다. 드래프트 직후 워크아웃 때는 림 위에 작은 네모를 손목으로치는 것을 시연하여 관중을 놀래켰을 정도로 이게 이게 어느정도냐면 현재 한국 배구 최고의 탄력을 자랑하는 전광인보다도 10cm 정도 더 높다.
  4. 포틀랜드 파일럿츠는 190위 정도 하는 NCAA 1부 리그 중하위권 팀이다. 재미있는 것은 같은 외국파 선수 출신인 이승준, 이동준, 김효범 셋이 차례로 포틀랜드 대학을 거쳐갔다는 것... 이승준이 전학 가니 이동준이 들어오고, 이동준이 가는 해에 김효범이 들어온다. 원래 서로 아는 사이라서 이승준이 김효범의 대학 선택에 영향을 줬다고 한다.
  5. 원래 대학 진학 때 이야기가 있었던 big west 컨퍼런스의 롱비치 스테이트로 전학을 간다는 계획이었으나 훗날 그의 에이전트가 되는 존 김이 '네가 어디서 뛰든 NBA 스카우터를 꼭 보내주겠다'라고 설득하여 NAIA 리그로 가게 되었다고 한다. NCAA 규정상 리그 내의 전학생은 1년간 출전이 제한되기 때문에 이미 2001년부터 포틀랜드에서 공백이 길었던 김효범으로서는 더이상의 공백은 치명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일로 국내 팬들에게 NCAA 1부 경험자라는 사실은 잘 기억되지 않고 마치 길거리 동아리 출신인양 폄하를 당하기도...
  6. 재미있게도 당시 wcc 컨퍼런스 신인왕이자 올 컨퍼런스 팀에 들었던 테런스 존슨 역시 같은 리그, 같은 컨퍼런스로 전학을 가면서 다시 매치업을 하게 되는 기묘한 인연을 연출하기도 한다.
  7. NAIA 1부는 NCAA 2부와 비슷한 수준이나 다소 저변이 좁다고 평가받는 리그이다. 당시 김효범이 전학 간 뱅가드는 거기서도 중하위권이지만 그 학교가 속한 gsac 컨퍼런스가 테런스 존슨, 닉 밴더렌 등 NCAA 1부에서도 에이스 내지 주전급 선수들이 피난(?)오는 등으로 전력이 높은 상위권 컨퍼런스이다. NCAA 3부 이하급이라는 이야기도 있는데 일부 하위권 학교는 그럴지 모르겠지만 대개는 2부와 많이 비교된다. 당시 콘코디아 같은 팀은 NCAA 1부 최하위권~2부 상위권은 쌈싸먹을 전력으로 교류전에서 실제로 쌈싸먹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 컨퍼런스에서 NCAA 2부로 편입된 아즈사 나가사와 대학은 거기서도 10위 안에 들어간다. 참고로 한국 국가대표나 대학팀과 교류전을 갖는 브리검영 대학이 NCAA 2부 15위권이라 한국과 미국 농구의 수준을 비교하는 지표가 되기도 한다.
  8. 당시는 단순한 원핸드, 투핸드, 백덩크 정도면 덩크왕을 노려볼 정도의 수준이었고 기껏해야 연습 때 360도, 앨리웁 정도를 할 수 있을까 없을까 하는 정도였다. 사실 지금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이런 상황에서 허니딥, 비트윈더렉, 윈드밀, 크레이들, 더블클러치 덩크, 211cm 수비 위로 덩크 등 운동능력이 현저히 좋아진 지금 선수들조차도 엄두를 못 내는 덩크를 구사하는 한국인이라는 말에 처음 사람들은 도시 전설이 아닌 실존하는 인물인가 하는 의문부터 가졌다.
  9. 미국에서 훈련을 하면서 하승진과 함께 지내며 훈련을 했었고 방성윤과도 연습경기에서 몇차례 안면을 틔웠다고 한다. 하승진이 말하길 '한국인 빈스카터로 방성윤보다 3점이 좋고 덩크는 흑인들보다 잘한다.' 라는 코멘트를 하면서 기대감을 증폭..
  10. 용병급 플레이어가 온다는 과대평가성 루머가 돌고 극성 팬들이 기존의 선수들을 폄하해서 눈총을 받는가 하면 아직 선수급조차 아니라는 의견마저 있었는데 스타일상 예나 지금이나 항상 과평가와 저평가의 온도차가 극심한 편이다.
  11. 한국 입국 다음날 치러진 연습경기 20분 정도를 보고 유재학은 인터뷰로 이런 저런 장단점을 말하면서 'NBA를 노리는 선수 치고는 미숙하지만 이런저런 기대 없이 제로베이스에서 보면 상당히 좋은 선수'라고 첫인상 소감을 마무리한다. 당시는 물론이고 이후에도 기대치에 대한 반작용, 또 그에 대한 반작용, 국적 문제에 대한 괘씸죄 등으로 냉정한 평가가 드물다는 것을 감안하면 곧바로 김효범의 기량을 파악해낸 안목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12. 2007년, 2009년에 올스타 덩크왕을 두 번 차지하기는 하는데 예전 탄력을 기억하는 이들에게는 꽤나 아쉬운 모습이었다. 이외에 2006년, 2008년에는 그마저도 못했고...
  13. 사실 이건 좀 억울한 것이 허리디스크 수술로 6개월의 재활을 거친 이후 점프력이 20cm 가까이 줄어들고 웨이트도 10kg 가까이 빠진 데다가 몸의 밸런스, 농구 감각까지 잃어버린, 말 그대로 차포 모두 떼고 가는 상황이었다.
  14. 유재학은 인터뷰에서 2~3년 정도 보고있다, 2년 안에 국가대표에 들어가도 손색 없을 정도의 기량, 특히 한국농구에 적응이 끝나면 전술로도 제어가 불가능한 유일한 선수가 될 것이라는 등의 평가를 하여 기대감을 보였다.
  15. 비시즌 미국 전지훈련 동안 연습경기에서 NBA에서도 뛰어난 운동능력을 자랑하는 리키 데이비스 위로 인유어페이스 슬램덩크를 꽂아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으며 용병으로 새로 들어온 던스톤과의 덩크대결은 KBL 용병 덩크 콘테스트를 뛰어넘는 수준으로 시합 직전 모비스 경기 직관 재미거리 중 하나이기도 했다.
  16. 전성기 웨이드가 20퍼센트, 데릭로즈 8퍼센트 정도의 비중.
  17. 하지만 우연인지 국가대표 귀화 논란이 불거지자 갑자기 활약도가 급추락하는 모습을 보인다.
  18. 그리고 2년 후 올스타 MVP까지 수상하여 리그 역사상 유일하게 3점, 덩크, 올스타MVP를 석권한 선수가 된다
  19. 농담이라고만 할 수 없는 것이 레더는 팔꿈치로 김효범이나 김두현을 가격하는 등으로 모비스 팬들의 공분을 샀고 이상민은 감퇴하는 기량을 헐리웃 액션을 통해 메우려 들었다. 특히 3차전, 2파울인 김효범 토마호크 덩크를 꽂고 점수 차를 좁혀가며 기세가 오르자 교묘한 일리걸 스크린으로 접근, 헐리웃 액션을 통한 연속적인 파울콤보를 먹여 순식간에 퇴장시킨 장면은 플레이오프의 분수령이었다(..) 이후 삼성과의 경기 때는 관중석에서 물병이 날아오는 등의 해프닝이 벌어질 정도로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20. 참고로 이 플레이오프를 망친(?) 이상민은 다음 시즌 플레이오프에서도 KCC 전태풍에게 같은 짓을 해서 재미를 보려했는데 흥분한 전태풍이 평정을 찾고 헐리웃에 대한 은근한 디스도 함께 날리며 무시 전략으로 차분하게 나오면서 오히려 이상민 혼자 자멸해버린다(..)
  21. 유재학은 훗날 '효범이는 흥분하면 오바해서 개인플레이가 나오기 때문에 다잡아줄 필요가 있다'라고 술회한다. 하지만 클러치 타임 때 감이 좋았음에도 그를 벤치로 보내 리듬을 끊어 시합을 내주는 경우도 있었고, 대부분의 용병들보다도 능한 덩크를 자제시키는 등 다소 지나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SK로 떠나고 김효범은 '다른 농구를 해보고 싶었다'라는 말을 했고 유재학은 2014년 우승 직후 문태영과 김효범을 비교하면서 '성실하지만 농구 스타일이 안 맞았다'라는 말을 남겨 둘 사이의 어느정도 스타일 차이가 있음을 인정한다. 사실 이런 말 필요없이 누가 봐도 안 맞아보였지만..
  22. 사실 외국 국적 취득에 의한 군 기피는 유승준의 예에서 유명하듯 처벌 대상이지만 김효범의 국적 취득 시점은 만12세이기 때문에 들어맞는 표현은 아니다. 하지만 방송을 탈 때도 사전에 국적과 같은 민감한 문제를 체크하거나 상무 입영 가능 시기가 끝나자마자 국적 관련 인터뷰가 나오는 것을 보면 행보에 군대를 의식했을 가능성은 높아보인다.
  23. 여기에 대해 일부 선수들은 군대를 가지 않는데 불공평하지 않느냐고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다.
  24. 사실 이 집단퇴장 및 무마는 국적 문제를 걸고 넘어진 것은 아니고 국내 대학 선수들이 뽑히지 않았다는 불만의 표현이었다. 당시 방성윤 김효범 한상웅까지 1~3순위 모두 기량 검증을 하지 않은 외국파거나 외국 리그에서 뛰기 때문에 국내리그 출전이 거의 어려운 선수들이니 국내파 입장에서는 '차라리 픽을 헛으로 날리는 한이 있더라도 상위권으로 너희는 못 뽑겠다'라고 받아들여질 여지가 강하다. 실제로 김효범의 대리인으로 참석한 김효범 아버지가 무마책으로 언급한 요지는 반드시 국내에서 뛰겠다는 약속이었고 이것은 오히려 국내선수 자리를 빼앗고 얻은 2픽을 공으로 날리지 않는다는 뉘앙스가 더 강하다. 또한 모비스와 내놓은 안은 추가적으로 대학 선수들을 뽑는 것이었다. 오히려 훗날 국적 문제가 불거지면서 '국적이나 군대 이야기도 하였다'라는 당시 관계자의 술회가 나옴에 따라 다른 맥락으로 의미부여를 하게 된 경우다.
  25. 이들은 현 소속팀과 재계약이 안 되고, 3년이 지나면 무조건 드래프트 대상이 되어 다시 뽑힌다. 반대로 귀화를 안 한 김효범은 KBL 드래프트 출신이라 그런 거 없다.
  26. 유재학이 '넌 이제 수비로도 최고니까 양동근이랑 다 밀어버려!'라는 주문을 할 정도
  27. 전태풍 정도가 겨우 맞불을 놓을 정도
  28. 한 팀으로 합류하게 된 주희정은 과거에 같이 뛰어보고 싶은 선수 중 하나로 김효범을 꼽았고 김효범은 화보 촬영 인터뷰에서 MVP 도전을 종용받았다는 귀띔을 한다. 다만 이들의 끝은..
  29. 아이러니한 것이.. 유재학이 김효범을 공수에서 완벽한 최고의 선수로 키워서 구현하고자 하는 플레이에 근접한 모습을 모비스 상대하면서 보여줬다. 이상하게 모비스 상대로는 공격력은 물론이고 수비, 리바운드 참여 등에서 상당히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30. 하지만 이 MVP는 문태종이 받았어야 하는 것이라는 평가가 많다. 4쿼터에 활약을 시작하는 문태종의 특성상 3쿼터까지 끝날 즈음에 선정하는 방식이 불리하게 작용했다.
  31. 근데 지나고 보면 고액연봉자들 활약상을 감안, 평타는 넘는 수준이다. 원래 논란이 많은 선수에다가 연봉 급상승이 너무 튀었고 가드 첫타로 뭇매를 맞은 것이 컸다...
  32. 구단 측은 자기 나름대로의 계량화된 수치를 근거로 김효범의 기여도가 떨어진다 주장했지만 김민수 방성윤 땜빵에 혹사까지는 예상하지 못한 일이고 그의 장단점은 영입 당시 견적이 나온 상황이었다. 평균 1.x어시의 슈터를 데려와놓고 주희정 김태술이 들어가도 안 되는 팀플레이의 책임을 지우면서 '넌 2억 5천짜리' 드립에 본인만 연봉 절반 가까이 후려치는 것은 누가 봐도 군색하다.
  33. 구단에서 주장하는 통계치를 전적으로 신뢰한다 하더라도 팀에서 눈곱만큼의 차이로 3위, 한 쪽만 1억5천(구단에서 주장한 적정 삭감액은 2억6천) 삭감을 뒷받침하기에는 근거가 빈약하다.
  34. 사실 얼핏 보면 공격은 프리롤에 가까운 모습이나 공을 잡는 시간이 단축되고 여전히 빈약한 포워드 뺌빵을 가면서 수비 쪽으로의 부담이 커졌다.
  35. KCC로 이적하고 첫 승을 거둔 때의 인터뷰에서 그는 감정이 북받쳐 눈물을 쏟음으로 그의 농구에 대한 간절함과 그것이 무너져 내려가는 스트레스를 보여줬는데 안티들도 차마 그날만큼은 좀 덜했다고..(..)
  36. 이게 참 결과론적인 것이지만 모비스에서 계속 있었더라면 연봉을 몇 억은 더 받았을 것이고 우승반지 서너개는 더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니 본인으로서도 아쉬웠을 것이다. 혹사로 부상당할 염려도 덜했을 것이고 2012년 플레이오프 4강전 모비스의 상대인 동부의 트리플 타워를 슛과 돌파로 공략할 수 있는 김효범이 있었더라면 한결 수월했을 것이다.
  37. 헤인즈, 던스턴, 크리스윌리암스 등 쟁쟁한 용병들이 있는 팀에서도 일대일 능력은 가장 뛰어났다고 한다. 또한 NCAA 시절 팀의 에이스였던 케이시 프래드슨과의 1대1 대결에서 진 적이 거의 없다고 하는데 예전에 NBA 인디애나 페이서스의 프래드존스와의 대결에서 이겼다는 소문은 이것이 와전된 듯 하다.
  38. 사실 캐링더볼 위험이 큰 기술을 많이 구사하기도 했고 실제로 범한 경우도 있지만 요주의 인물로 찍힌 것인지 잠깐 멈칫하는 헤지테이션 드리블을 캐링더볼로 불리는 억울한 상황 역시 못지않게 많았다. 또한 유로스텝의 경우에도 지금이야 기술로 받아들여지지만 트래블링을 통한 편법이라 생각되던 것이 그렇게 오래 전 이야기가 아니다.
  39. 이건 김효범이 리듬슈터라 출전시간이 들쭉날쭉했던 것도 영향이 있을것이다. 출전시간과 공격롤이 늘어난 3년차 이후부턴 자유투는 거의 80%이상에 한 두시즌정도나 70%대를 찍었을 정도.
  40. 그래도 KCC 초창기까지만 해도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폼이었는데 KCC 이적 이후 시간이 갈수록 메커니즘까지 무너지는 모습을 보인다. 애초부터 샤프슈터는 아니었지만...
  41. 어시스트 수치가 낮아서 그렇지 돌파 이후 2:2 패스 찌를 때의 감을 보면 못하는 것은 아니다. 모비스시절만해도 양동근이 상무에 가 있던 공백기동안 김현중포인트가드들의 리딩을 분담했을 정도.
  42. 유재학은 김효범 정도 능력이면 리바운드도 최소한 5개 정도 잡아줘야 하는데 안 하고 있다고 언급하면서 그를 까기도 했다.
  43. 이 때 키가 170 조금 넘는 정도였다고 한다.
  44. 이외에 우리나라로 치면 고대 정도에 해당하는 브리티시 컬럼비아에도 무난히 갈 정도였고 대학 시절에도 NAIA all American scholarship athletic에도 선정되기도 한다.
  45. 미국 유학 시절 러커파크에도 몇 번 농구를 했다고 하는데 길거리 스타일로 하다가 털리고 정석 플레이로 나갔다는 소문도 있다.(...)
  46. 모비스 시절 팀 동료인 던스턴과 덩크 시합으로 박아대니 골대 높이가 바뀌는 일이 종종 있었다. 또한 몸을 풀던 동네 체육관이나, 학교 골대를 부숴먹었는 등 은근히 골대 부순 목격담이 많다.
  47. 사실 이건 특별히 문제되는 발언은 아니고 미국에 있을 당시 프로에서도 잘 할 자신 있다는 표현이었는데 초창기 부진하면서 거품에 대한 조롱으로 인용된 것... 나중에는 'xx는 리얼이다' '리얼 xx선수' 등 칭찬 쪽으로 바리에이션이 많다.
  48. 데뷔 전에 메신저로 인터뷰 하면서 나온 말이다. NBA 진출에 다한 포부를 밝히면서 본인의 스타일을 웨이드에 비유하고 거기에 '저보다 슈팅은 떨어지기 때문에 조금 승산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응원해 주시는 여러분들과 한국이 제 뒤에 든든히 서 있기 때문에 뭐 드웨인 웨이드 쯤이야' 등의 발언을 한 것.(...) 이렇게 보면 웨이드를 무시하는 것 같지만 단순한 포부 밝히기+ 농담조라고 밝히고 실제로는 롤모델로 웨이드를 꼽으며 가장 닮고 싶고 존경한다고 한다. 근데 당시 웨이드는 중거리 이상의 점퍼가 불안정한 것도 사실이잖아?...
  49. 하필이면 연봉 5억 대박 터지고, 군대 및 국적 문제 조용해져 갈 시점에 국적 관련 인터뷰에서 나온 발언이라 많은 이들의 공분을 샀다. 팬들도 차마 옹호해주지 못 하고 심지어 이 발언을 계기로 팬에서 안티로 전향한 이들도 있을 정도.(...)
  50. 교포이다 보니 언어 구사능력과 별개로 의사 표현에 있어서 정서적으로는 다소 거리가 있는 듯한데다 무엇보다 안티 팬이 워낙 많기에 그냥 말을 해도 이리저리 꼬투리 잡혀 밉보이는 경향도 강하고...
  51. 2009년에 나온 코비 농구화. 발볼이 좁다는 단점은 있지만 편안한 착용감과 가벼운 무게, 쫄깃한 쿠션 등으로 6년이 지난 서술 시점에도 비길만한 신발이 없을 정도로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코비 농구화 최고의 명작으로 취급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