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일

  • 혹여나 김남일을 찾아왔으면 해당 항목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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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1953년 휴전협정 당시 공산측 대표단. 왼쪽부터 중국 대표인 세팡(解方) 소장, 덩화(鄧華) 상장, 가운데가 북한대표인 남일 대장, 오른쪽이 이상조 소장, 그 오른쪽은 장평산 대좌)[1][2][3]


1913년~1976년

북한의 군인, 정치가. 함경북도 출신이지만, 원래는 전라남도 강진군이 본적이라고 한다.

강진일보에서는 2014년에 기획특집으로 남일에 대해서 실었는데, 이를 정리해 소개해보고자 한다.

남일은 의령남씨이고 전라남도 강진군 병영면 출신이다. 이상한 것은 1939년 타슈켄트 사범대학 입학전 행적이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분명 타슈켄트 사범대학 입학을 위해서는 고등학교 등의 필요학력이 있어야 하는데 그러한 기록이 전혀없다. 또한 북한으로 귀환했을 때 그의 인적사항은 출생지가 함경북도 경원군이라고 알려졌는데, 남일 자신도 그렇고 북한언론 역시 남일의 혈통이나 고향에 대해서 경원군이라는 것외에는 일언반구의 언급도 없었다는 점이다. 소련군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고 그 유명한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참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귀향하여 북한에 왔을 때는 여기저기 공백이 남은 약력만 공개되었다. 교육부 차관에 인민군 총참모장에 임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남일의 가족사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특이하게도 1950 ~ 60년대에 강진군에선 “휴전회담에 나온 남일이 강진 전병영면장이었던 남주익의 아들”이라는 소문이 떠돌아다녔다. 거기다 “남일이 병영 고향을 야밤에 찾아왔다”는 이야기도 들려왔다. 실제로 남주익에게는 아들이 셋 있었는데 장자인 남정욱이 광주서중학교까지 다니고 일본 유학 이후에는 기록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전쟁이 끝난지 아직 10년이 넘지못한 시기에 하필이면 적괴의 군사령관이 고향사람이라는 소문이 퍼진 경로에 대해서는 강진일보조차 추적하지 못했다. 그만큼 소문은 뜬소문의 수준에 머물렀지만 그 주인공이 너무 특이하긴 했다. 또한 동아일보 최흥조 기자는 휴전회담장에 출입허가된 유일한 남한기자였는데, 실제로 남일과 마주친 적도 많았는데, 유엔군과 기싸움할 때와는 다른 면을 자신에게 보여주었다고 당시 기사에서 서술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강진일보의 주장처럼 남주익의 아들 남정욱이 과연 남일이 맞냐는 것이다. 의령남씨 중 병영면 출신 문중사람이 서울에서 발행된 타임지에 난 남일의 사진을 보고 남정욱이라며 가족들에게 알렸다는 것이다. 가족과 친인척들도 남일의 사진을 보고 남정욱이라고 했으나 일단 쉬쉬해야 했고 이후에는 모두 고향을 등졌다고 한다. 하지만 일본인 교사의 양자로 입적되어 도일한 이후 기록이 없어진 남정욱과 타슈켄트 대학 입학전 행적이 불분명한 남일 간의 연관성이 얼마나 있는지는 객관적으로 불입증된 상황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남일의 공식적 고향인 함경남도 경원군 정반대인 전라남도 강진군에서 “인민군 총참모장이 남일인데 이 사람이 원래는 병영사람 남정욱이고 전쟁때는 야밤에 고향을 몰래 찾아왔다”라는 소문이 돈 것이나 의령 남씨 문중과 남주익의 집안에서 남정욱이 남일이 되어 돌아왔다는 이야기가 돈 것은 무슨 이유인지 아직도 알려지지 않은 상태이다보니 이 부분의 사실조사는 조심해야할 필요가 있다.

정리하자면

- 타슈켄트 사범대학 이전의 행적이 불분명하다. 타슈켄트 사범대학 입학을 위해서는 적어도 중등학교 이상의 학력이 필요한데 어느 학교를 졸업했는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 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에서 상당한 경력을 쌓았고 국제적으로도 널리 알려졌지만, 정작 행적이나 가계에 대해서 알려진 것이 많지 않다.
- 뜬금없이 고향이라 알려진 함북 경원이 아닌 전남 강진 병영면에서 남일에 대한 소문이 돈다. 그것도 전쟁 중과 전후 10년 내외이다. 이 시기는 반공이념이 완전히 정립된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북괴군 총참모장' 남일에 대해서 이야기가 돈 것이다.
- 소문의 내용이 병영면장 남주익의 아들 남정욱이 '남일'이 되었다는 것이고 전쟁때는 '남일'이 비밀리에 병영면을 찾아왔다는 것이다.
- 남주익의 장남 남정욱은 도일 이후 행적이 불분명하다. 도일 시기는 광주서중을 졸업한 이후이기에 10대때 도일한 것으로 보인다.
- 휴전회담이 한창 진행될 당시 타임지에 실린 남일의 사진을 본 의령남씨 문중과 남주익의 가족들은 남정욱이 맞다고 하였다. 문제는 시대상으로 인해서 드러내고 말할 수 없었기 때문에 조용히 묻혔다. 자칫하면 가족 전체가 몰살당할 판국이니 말이다.

어렸을 적에 연해주로 이주했으나, 스탈린의 강제 민족이동 정책으로 중앙아시아로 끌려갔다. 타슈켄트(혹은 사마르칸드라는 설도 있다) 사범대학을 나와 교사로 일하다가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소련군에 입대했다.

대학까지 나온 인텔리였기 때문에 참모장교로 일했으며, 스탈린그라드 전투, 바그라티온 작전, 베를린 전투에 참가하였고, 이 부대들의 사단 참모장까지 올랐다고 한다. 특히 베를린 전투때는 주코프가 지휘하는 제1벨라루시 전선군에 소속된 사단참모로 나치독일의 숨통을 끊는데 일익을 담당했다.

6.25 참전자로서는 남북한 통틀어 최고의 커리어를 자랑.[4] 최종계급은 대위였다. 이에 대해, 대위 계급은 사단 참모장에 보임할 수 없는 계급이므로 이는 불가능하다는 의견이 존재하나, 당시의 소련군은 계급 제도가 부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직책이 계급보다 우선한다."는 원칙이 남아 있었고, 특정 인물이 유능하다고 판단되면 진급시키지 않고 바로 상급 직책을 맡는 것이 가능했다. 남일의 경우는 아니지만 심한 경우, 대위 계급으로 사단장으로 부임해 좌관급 참모들을 거느린 사례도 존재했다. 비슷한 예로 구 일본군의 경우 보병 대위가 포병 중좌와 기갑 중좌와 병참 대좌를 부하로 둔 전례도 있다. 물론 이쪽은 계급이 아닌 병과 위주로 지휘서열을 정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였다.

소련군이 북한을 접수하자 고려인들이 북한으로 와서 고위직을 점했는데, 남일도 그중 한 명이었다. 남일은 처음에 사범대학 출신답게 북한 교육부 차관을 하다가 조선인민군이 창군되자 입대하였으며, 6.25가 발발하고 강건 총참모장이 전사하자 그의 뒤를 이어 제2대 인민군 총참모장에 선임되었다. 휴전협정때는 북한측 수석 대표로 참가하였다.

당시 남한 참관인[5]으로 참가한 백선엽 장군의 회고에서도 남일에 대해 차분하고 지적이었다고 기술. 키가 컸고 미남이었기 때문에 북한측 대표단에서도 눈에 띄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백선엽 장군은 동시에 6.25 회고록인 '내가 물러선다면 나를 쏴라'에서 그가 맹목적인 반미와 김일성 숭배에 함몰된 정신병자같은 인간이라고 매우 비판하기도 했다. 실제로 남일은 조이 제독이 자신에게 담배를 권하자 그것을 미제국주의자들의 추악한 수작이라고 주장하며 담배를 파이프대에 담아 피우며 "당신네 미국을 태우니 참으로 맛있지 않을 수가 없다!"라고 떠벌려서 순전히 호의로 접근했던 조이 제독을 비롯한 미국인들의 어이를 날려버렸다. 그리고 '조이와 그 졸개들이 꼬리를 내리고 달아났다'고 주장하며 정신승리까지 시전했다. 단, 이런 모습들이 휴전회담부터 남북회담이 활발했던 2000년대 초중반까지 줄곧 목격되는 것을 보면, 일종의 충성 발언[6] 성격도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6.25 전쟁을 기점으로 김일성이 자신의 지지세력인 갑산파를 밀어주고 숙청을 강화하는 과정에서도 살아남은 것은, 이런 처신(?)이[7] 도움됐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후 군에서 나와 박헌영에 뒤이어 외교부장에 선임되었고 북한의 여러 고위직을 거쳤다. 소련파였지만 김일성을 지지하였기 때문에 그 뒤에 벌어진 숙청에서 무사하였다. 이후 부총리까지 올랐다.

1976년 교통사고로 사망했고, 장례는 북한 국장으로 치뤄졌다. 그를 치어버린 자동차 번호가 91로 시작하는 번호였는데 91은 김정일의 호위차량들의 일련번호의 시작번호라서 북한에선 김정일이 그를 암살한 것이라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게다가 탈북자의 증언에 의하면 남일의 아들들(두명인데 해군과 내각에서 근무)이 바로 증발됐기에 그 소문이 더 실제처럼 보여졌다.

중국 축구협회 회장인 조선족 남용(南勇)씨가 남일의 아들이라는 설도 보도되었으나, 중국측의 보도에 의하면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1. 중국 대표들은 계급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초라한 복장인데, 이는 북한은 소련식 군제를 따랐고, 당시 중공군은 직급과 보직에 대한 차이만 있을 뿐, 계급이 없는(!) 군대였기 때문이다.
  2. 이 휴전협정의 북한 대표단의 후일담은 참으로 기구하다. 먼저 남일은 아래서 기술하겠지만, 70년대 말에 교통사고로 사망했는데, 후일 후계구도에 걸림돌이 될것을 우려한 김정일의 음모라는 설이 있다. 이상조는 소련에 외교관으로 근무하다가 8월 종파사건때 소련과 중국 당국에 김일성의 독재를 알리는 편지를 썼다가 김일성이 반대파를 숙청하고 대세를 장악하자 바로 소련에 망명한다. 이후 소련에서 역사학을 공부하고 1980년대말 한소 수교가 이뤄지자 남한에 강연을 와서 김일성을 매우 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김일성의 항일운동에 대해서는 맞다고 증언했다. 그러니까 당시 남한에서 대세이던 김일성 가짜설을 정면으로 부정했다.) 장평산은 역시 8월 종파사건 때 김일성을 몰아내기 위한 쿠데타 음모 혐의로 체포되어 사형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중공군의 셰팡(1908~84)은 1955년 계급이 도입되었을 때 소장에 올랐고, 문화대혁명 당시 숙청당해서 8년간 옥고를 치뤘으나 덩샤오핑 집권 이후 복권되었다. 덩화(1910~1980)는 상장(한국식으로 말하면 대장)에 올랐고, 1959년 펑더화이 실각당시 펑더화이파로 몰려 군에서 쫓겨난 후 잠시 사천성 부성장으로 근무하다가 다시 문화대혁명때 홍위병에게 박해를 당했다. 이양반도 덩샤오핑 집권 당시 복권되었다.
  3. 백선엽 대장은 휴전회담 당시 이상조와 하나의 악연이 있었는데 개성 내봉장에서 휴전회담이 열렸을 때 북은 자기쪽 의자를 더 높게 만들어놓았고. 얘기없이 1시간 동안 노려보고 있는데 맞은 편 이상조가 종이에 빨간 색연필로 “제국주의자의 주구는 상가집 개만도 못하다”라고 쓴 것을 계속 보여준 것. 백선엽 대장은 당장 이상조를 때려눕히고 싶었지만 참았다고 밝혔다. 하지만 훗날 백선엽 대장이 1980년대 소련으로 망명한 이상조를 다시 만났을 당시 이상조에게 그 얘기를 하니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서 어물쩡 넘어갔다고...
  4. 이 양반과 맞먹을 만한 커리어를 지닌 사람은 둘 있는데, 중국군에서 소장을 지냈고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의거에도 관여한 오성장군 김홍일, 일본군에서 대좌를 지낸 김석원 정도가 있다. 다만 나이 대비로 따지면 넘사벽이다. 사실 김홍일 장군은 6.25당시 이전에 사단급의 참모장을 해본 거의 유일한 국군장성이었다(중국군 사단장이라고 나온 자료가 많은데, 정확히는 참모장교로 계속 재임했다). 김석원은 중일전쟁에서 대대를 지휘해 중국군 사단을 격파하는 놀라운 전공을 세우긴 했지만, 전공자체가 일본군으로 세웠다는 점에서 거기에 막장 중국군 상대로 자랑스럽게 내세울만한 건 아니었다. 또한 김석원은 일본육사출신이긴 하지만, 장교의 출세코스인 육군대학을 나오지 못했기 때문에 대좌가 일본군에서 오를 수 있는 한계였다.또다른 사람으론 제5보병사단 초대 사단장인 김상겸 대령으로 이분은 구한말에 러시아로 넘어가 러시아군에 입대하여 1차대전-적백내전-소비에트-폴란드 전쟁에 참전한 베테랑이었지만 고령으로 인해 한국전쟁때는 이미 퇴역하여서...
  5. 당시 대한민국은 이승만 대통령이 휴전협정을 반대했기 때문에 대표단에 끼지 못했으나, 백선엽 장군이 참관인(업저버)으로 라도 참여하겠다고 해서 갔다.
  6.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이 이북 관료들을 겪으면서 썼던 표현. 뜬금없이 의전이나 생각지도 못한 사소한 부분을 가지고 강한 목소리를 내며 기선을 제압하려 들었기 때문에, 처음엔 기싸움이라고 여겼으나, 점점 그런 것만은 아닐거라 생각되더라고.
  7. 우리나라 군사정권 시절에도 비슷한 처신 사례가 있었다. 당시 하나회가 득세하던 가운데서도 용케 대령 진급에 성공하고 준장 진급까지 성공한 호남 출신 장성이 금의환향해 마을 잔치가 열린 자리에서, 어느 촌로가 "OOO장군은 대통령감이다."고 덕담(?)을 건네자, 이 장성은 "누구 죽일 일 있느냐?"며 대경실색하며 오히려 그 촌로를 심하게 구타했던 것. 작은 사회 성격이 강하고 1다리만 건너도 다 알고 지내는 지역사회에서 벌어진 일이라 소문이 순식간에 퍼졌는데, 당연히 온갖 욕을 하는 이들과, 그게 바로 권력이라며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어느 귀신이 잡아간지도 모르게 죽었을 것"이라 말하는 이들로 평이 나뉘었다는 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