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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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錫源. 1893-1978.

1 개요

일제강점기 일본제국의 군인, 대한민국군인, 교육인, 친일파, 국회의원.

2 생애

1893년 9월 29일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1909년에 일본으로 유학을 가 1915년에 일본육군사관학교 27기로 졸업하였다. 보병으로 근무했으며 만주사변중일전쟁 등에 참전하였다. 중일전쟁 초창기 산시성 일대에서 2개 중대로 중국 국부군 1개 사단을 쫓아버리는 전공[1]을 올려 한중일 삼국에 전쟁영웅으로 이름을 날렸다고 한다.당시 그의 위상이 어떠했는지 보여주는 기사글.

일본 패망 당시에 계급이 대좌로 당시 생존한 조선인 일본군으로는 영친왕(중장), 홍사익(중장)에 이어 다음이었다. 이응준도 대좌였는데 이응준이 일본육사 26기로 한 기수 선임이었다. 홍사익이 전범재판에 회부되어 사형되었고 영친왕이 귀국하지 못했기 때문에 한반도에서 일본군 출신 군경력자 가운데 이응준과 더불어 최고 계급자이며 중국군이나 광복군 출신까지 포함해도 이 정도 경력자는 드물었다.[2]

교육에 관심이 컸는지 1938년 기업인 원윤수와 함께 원석학원이라는 학교법인[3]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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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약! 군문에 진입하라. 홍대무변(鴻大無邊)한 황은에 보답하는 길은 성스런 싸움터에 나가 죽을 각오로 영, 미 귀축의 적을 때려잡는 데 있다"

'이런 취지의 강도 높은 열변이 히틀러식으로 한두 마디 웅장하게 발성될 때마다 박수가 연발 터져 나왔다. 진짜 순도 높은 황군의 최선두답다. 반 시간 남짓의 열변이 토해지는 동안 청중들의 박수가 10여 차례나 장내를 진동시켰다.'

- 부민관 학병권유 강연회에 관한 매일신보 1943년 11월 11일 기사.

태평양 전쟁 때는 이응준과 함께 학병참전 권유 강연회를 다녔다고 한다. 그가 민족문제연구소를 포함한 일각에서 '일본제국주의의 화신'이란 비난을 받은 이유다.

나는 이종혁과의 오랜 해후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착잡한 감회를 맛보았다. 우선 이종혁을 바로 쳐다볼 면목이 없었다. 심한 늑막염으로 병색이 말이 아닌 이종혁이었지만 도리어 그가 당당한 인간처럼 보였고 나 자신은 초라하기 짝이 없는 존재로 보였다.

김석원은 일본군에 투신한 조선군인들에게서 엿보이는 복잡한 정체성과 민족의식을 잘 보여준 인물이다. 일본군을 떠나 독립운동에 투신한 한 기수 선배 김경천지청천의 가족[4]을 보살펴주었고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반송장이 되어 돌아온 육사동기 이종혁을 보고 죄책감과 부끄러움을 숨기지 않으며 그를 도왔다. 1944년 평양에서 강제 징집된 학생들이 무기를 탈취해 무장투쟁을 벌이려다 체포된 평양 학병의거 재판 때는 맨 마지막까지 재판정에 남아 지켜보다 형이 확정되자 눈물을 쏟았다고 한다.[5] 훗날 회고록에서 일본군 복무 경험을 "무엇이 옳은지 분간 못하고 철 없던 시절의 불명예로 여긴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자신의 친일경력 및 의혹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는 사람들에 비하면 그나마 양반인 셈.

광복 후에는 이응준이 이끈 조선임시군사위원회에 참여했고 남조선국방경비대가 세워지자 대령으로 특별임관해 한국군 경력을 시작하였다. 1949년에 제1보병사단장으로 근무하던 중 남북간 밀무역에 문제가 있다 판단한 김석원 장군이 북한에서 토성으로 넘어오던 북어를 트럭째 죄다 압수해서 임의로 처분한 다음 병사들에게 부식, 과일, 과자, 음료수를 지급했다(일명 '명태사건'). 이 밀무역에는 한국 군/관 고위층이 다수 얽혀있었고, 김석원 장군은 이승만 대통령 앞에서 채병덕 당시 육군참모총장을 거론했다가 둘 다 예편됐다. 6.25 전쟁이 일어나자 사단장으로 복귀했고 최종 계급은 육군 소장.

한국전쟁 때에도 트레이드 마크인 카이젤 콧수염을 기르고 일본도를 차고 다니며 최전선까지 나가 진두지휘하는 것으로 유명했다.[6] 진천 전투 이래 사단본부가 그리 후방에 있으면 어떻게 하냐며 최전선 고지(!)에다 설치해놓았다는 일화가 있다.

한국전쟁 발발 이전부터 그를 곱게 보지 않았던 미군 지휘부와의 마찰은 갈수록 심각해졌고 결국 야전에서는 물러나야 했다. 1956년 64세로 예편하였고 성남고등학교 교장, 제5대 국회의원(무소속.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을)으로 활동했다.

1978년 85세로 사망. 저서로 회고록인 노병의 한(1977)이 있다. 출간년도에서 보듯이 옛날 책이다. 어지간한 도서관에서도 찾기 빡세므로 국립중앙도서관을 이용하자. 그가 세운 학교인 성남고등학교의 도서관에는 이 책이 여러 권 비치되어 있다.

앞서 언급된 자서전 본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떤 경우는 무지했던 탓으로 또 어떤 경우는 올바른 인생관과 올바른 세계관을 못 가졌던 탓으로 그동안 내가 저지른 잘못은 많다 할 것이다. 그중에서도 이유야 어쨌든 일제식민지시대에 오래토록 일본군인 노릇을 했다는 것은 나의 생애 중에서 가장 큰 불명예라 생각되는 것이다.

3 능력

일본군 출신이라는 것 때문에 무조건 점령, 아니면 무조건 사수를 고집했다고 평가하는 경우[7]가 있다. 49년 미 군사고문단 보고서에 의하면, 작전을 짤 때 예비대를 두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다. 이 보고서에는 예비대도 하나도 없고 경계 순찰도 없으며 김석원의 후임으로 온 유승렬, 백선엽은 반대로 예비대를 확보해놨다고 적혀 있다. 부패, 공금횡령 등으로 제거 1순위라는 평가는 덤.

물론 이는 김석원과 사이가 극도로 나빴던 미군측의 악의적 왜곡이다. 당시는 한국군 사단장이 위관급 미군 고문관을 상석에 모시고 다니던 시절이었는데, 김석원은 연배가 높아 만주군 출신 젊은 장교들처럼[8] 미 고문단과 잘 어울리지 못했고 그저 고문관으로 대했으며 잘못되었다 싶으면 거리낌없이 불호령을 내렸던 사람이라 미군과 사이가 극도로 안 좋았다. 또한 이 시기 북한군의 대규모 남침 징후는 보이지 않았다. 규모가 커봐야 대대급인 국지전이 벌어지고 있었을 뿐이다. 게다가 당시 황해도부터 동해까지 260km가 넘는 거리를 겨우 4개 사단이 담당했고, 그 중에서도 김석원의 1사단이 책임진 구역은 전체 전선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94km에 달했으며, 후임자들이 예비대와 방어선을 갖춘 것도 사단 방어정면을 다시 1/3로 줄였기에 가능했다. 부패나 공금횡령은 명태사건 뒷처리 방식만 봐도 말도 안되는 소리다.

실제론 진천전투, 포항 독석리 해상철수작전 등에서 보여지듯 지형지물을 활용하는 재주가 탁월했고 작전계획도 세심하게 짜는 편이었다. 독석리 해상철수작전 때 주민 1명도 남기지 않고 성공적으로 수행한 건 유명한 일화.[9] 당시 유명한 일화가 피난민들이 송아지를 끌고와 배에 타려고 하는 걸 미군이 막자 송아지가 없으면 농사를 못짓는다며 결국 태워간 것.우리가 아는 그 일본군 출신 맞냐 ㅎㄷㄷ

미군 보고서가 아닌 국내 자료들, 즉 채명신 장군 회고록 <사선을 넘고 넘어> (p.71-74)와 이재전 장군의 국방일보 기고문 등 당시의 여러 초급 장교들의 기록에서 공통적으로 김석원은 강력한 카리스마와 솔선수범, 과감한 지휘로 지연전에 탁월한 역량을 발휘했으며 젊은 장병들의 존경을 받았다고 적고 있다. 백선엽도 자신의 자서전에서 김석원이 3사단장으로 복귀했다고 하니 자기 아래에서 그에게로 가는 부하들이 많았다고 적었다. 본인은 전시에 자신이 믿는 상관 밑에서 싸우겠다는데 말릴 수도 없어서 그냥 가게 했다고.

김석원의 명성은 장교만이 아니라 당시 병사들의 참전수기 등에서도 공통으로 증언되는 이야기다. 일례로 포항여중 전투에 참전한 71명 학도병들은 원래 김석원 휘하 수도사단에 배치되었는데, 김석원이 3사단장으로 임명되어 떠나게 되자 그는 학도병들이 무장해제하고 자유롭게 행동해도 좋다고 집에 갈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하지만 이들 71명은 자신들을 받아준 김석원 밑에서 계속 싸우기 위해 포항까지 찾아갔다.[10][11]

4 여담

창씨개명 때 쓰던 이름은 가네야마 사쿠겐(金山錫源)으로 석원을 그대로 읽은 것이다. 가네야마(金山)는 김씨들이 일본에서 통명으로 가네다(金田)와 더불어 많이 쓰는 이름이고.

4.19 혁명 당시 성남고등학교 교장으로 재직 중이었는데 당시 시국 때문에 경찰에게 학생들 관리 똑바로 하라는 말을 듣자 오히려 정의는 막을 길이 없다. 애들이 올바르게 행동했는데 무슨 지도를 하란 말인가며 따지기도 했다.[12]우리가 아는 그 일본군 출신 맞냐 ㅎㄷㄷ(2) [13]

2003년까지 학교 설립자로서 동상이 성남고등학교에 남아있었으나, 일본제국 육군 고급장교전력이 문제가 되어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민족문제연구소, 시민단체들의 반발로 교내의 과거 관사로 쓰였던 곳에 옮겨놓았다(학교측에서 잠가놓고 비공개 중...). 마찬가지 이유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 회고록에 쓴대로 가장 큰 불명예로 남은 셈.

그의 차남 김영수도 일본육사를 졸업해 44년에 임관, 육군 중위로 태평양 전쟁에 참전했다. 1945년에 필리핀 레이테 섬에서 전사,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었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올라가 있다.

일본어 위키피디아에 의하면, 말년에 일본 육군 장교 출신들의 친목회에 초청 받자 전사한 아들을 두고 "전장에서 죽는 것은 군인의 숙원이므로 아들은 만족했을 것이다"라 말했다고 한다.

북한에서 김석원 장군의 국지전 경력을 남한의 북침 사례로 악용하곤 했으며, 간혹 일제시절 김일성이 함흥에서 김석원을 패퇴시켰단 이야기도 있지만 일고의 가치도 없는 거짓이다. 김석원은 그 시기 함흥에 없었다.

유원식의 저서 <혁명은 어디로 갔나>에서 '김석원 적전 도주설'을 줄기차게 인용하는 사람들(ex: 친일파 99인 - 민족문제연구소)도 있는데, 이 또한 모함이다. 원 저서의 신뢰성 자체가 의심된다는 게 정설. 김석원 장군에 대한 아래 사례들을 보면 의심할 수 밖에 없다.

1. 한국전쟁 개전 당시 예편한 민간인이었으나 피난하지 않고, 시흥지구 전투사령관 김홍일 장군을 찾아간 후 현역으로 복귀하여 수도사단장에 임명되었다.

2. 김석원 장군이 수도사단장에 취임해서 충남 조치원을 거쳐 진천 방면으로 북상하던 중 피난민 대열에 섞인 국군과 경찰 장병들을 만났다. 이에 그는 군도를 뽑아들고 "군경들아! 나는 수도사단장이 될 김석원이다. 그대들은 생명을 바쳐 싸워야 하거늘 지금 어디로 가는 것인가? 그대들의 후퇴로 우리의 형제자매와 늙으신 부모님들이 얼마나 고통을 겪을 것인가! 돌아서라! 김석원이 앞장설 테니 북으로 가자!" 라고 연설을 하여 장병들을 돌려세웠고, 이런 식으로 병력을 규합하며 자신의 부대로 향했다.

3. 수도사단장 부임 직후, 김석원 장군은 적군의 맹공 앞에 노출된 문안산으로 사단 지휘소를 옮기고 병사들을 독려했다. 이 때 미군 군사고문관이 위험하다며 2km 후방으로 물러날 것을 종용했지만, 그는 "김석원이를 죽일 포탄을 아직 만들지는 못했소. 병사들이 쓰러지는데 나만 안전한 곳에 있을 순 없소." 라며 고문관의 건의를 거절했다. 전투가 격렬해져 병사들이 동요하면 전선을 돌아다니며 사기를 고취시키는 일 또한 게을리하지 않았다.

4. 결국 김석원 장군의 지휘 아래 수도사단은 진천 전투에서 적을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 이 때 수도사단과 교전한 북한군 제2사단장 최현[14]은 한국전쟁 발발 전 개성 송악산 전투[15] 에서도 당시 제1사단장이던 김석원 장군과 맞붙은 악연이 있는 자로, 진천에서 패배하자 "또 그놈과 만나 이 꼴이 됐군. 그놈은 교묘히 병사들을 휘어잡는단 말이야."라며 불평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5. 육군본부는 한미 연합군의 전선 조정을 위해 수도사단이 인민군 제2사단을 3일간만 진천에서 저지해 줄 것을 희망했고, 김석원 장군과 장병들은 7일 동안 이 지역을 확보하여 임무를 다했다. 그러나 국군 제1군단의 좌우측 전선이 모두 남하하면서, 수도사단도 전선 균형 유지를 위해 철수 명령을 받아 청주로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6. 이런 일화도 있다. 전선에서 후퇴하는 병사들을 보고는 불러 모아 모두 무릎꿇게 하였다. 헌병들은 계속 후퇴하는 병사들을 잡아 왔는데 "명령없이 후퇴한 너희 놈들도 이리와서 무릎을 꿇어!"하고 외치며 몽땅 꿇게 하였다. 이때 연대장 최석용 중령(만주군 출신)이 "연대장인 제가 후퇴명령을 했습니다. 책임은 저에게 있으며 어떠한 처벌도 달게 받겠습니다."라며 연대장이 말하자 그제야 "연대장이 철수명령을 내렸다면 좋소"라며 용서 하였다. 당시에 김석원은 군법에 처하겠다고 길길이 날뛰기는 했지만 실제로 군법에 처하거나 엄단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오히려 즉흥 연설이나 부상병 하나하나 손 잡고 위문하며 병사들 사기 단박에 끌어올린 증언만 한 다스다.

5 창작물에서

TV 드라마 야인시대에 등장했다. 배역은 박통일.
6. 25전쟁 당시 김두한에게 그의 부관을 통해 학도병을 이끌고 전선에 참여해달라는 부탁을 한다. 김두한은 당시 같이 있었던 명동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수락한다. 그 후 부관을 통해 김두한에게 학도병을 훈련시키게 한 후 영천에 있는 한 고지에서 만난다. 김두한 일행의 전투 전 9시에 공격이 있다는걸 말한 뒤 김두한에게 격려를 해주고 떠난다.
북한 인민군의 퇴각으로 고지전이 끝나고 전사한 문영철을 품에 안고 눈물 흘리는 김두한을 보며 고맙소. "잘 싸워줘서 고맙소. 당신들은 훌륭한 군인이었소. 이 낙동강 전선은 우리 군에 의해 접수되었소. 인천에 유엔군이 상륙했소. 학도병을 데리고 철수하시오. 언젠가는 조국이 당신들에게 보답할거요. 그럼" 이라고 말하고 그 직후 경례하며 퇴장한다. 그 후 그의 부관이 경례와 함께 칭찬이 담긴 격려를 해주고 퇴장하며 학도병들은 슬슬 철수하기 시작하고 그 뒤 화면이 김두한에게 클로즈업 되면서 영천 전투씬을 마무리한다.

6 관련항목

국민방위군 사건
일본육군사관학교
조선인 일본군
중일전쟁
친일파
6.25 전쟁

일본군도 - 김석원 장군은 메누키를 육군삼련앵에서 태극무늬로 바꿨다고 한다.
  1. 일부러 무전을 크게 틀어놓고, 지원이 곧 온다는 가짜 정보를 흘린채 부하들과 왁자지껄하게 먹고 마시는 기만전술을 펼쳤다. 여기에 넘어간 국부군은 진짠가 보다 싶어서 후퇴했다.
  2. 말기에는 참사관 신분으로 소장까지(한국군으로 치면 장관급으로 진급 못 한 대령 전역 직전에 실권 없는 직책에 임명하는 것으로 생각하면 쉽다) 올라갔다는 말이 있는데 혹시 아는 위키니트가 있으면 수정바람.
  3. 성남고등학교의 전신이다.
  4. 이건 칭송받아야 할 마땅한 행동이다. 김경천과 지청천이 누구인지는 항목을 참조해 볼 것. 만약 김석원이 마음을 바꿨으면 일제로부터 어마어마한 보상을 받음과 동시에 친일 반민족행위자로 전락했을 것이다.
  5. 이 사건 주도해서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전상엽 씨 증언이다. 함께 재판받은 태권도 원로 최홍희도 비슷한 증언을 남겼다.
  6. 여러모로 열악한 창군초기라 장교들에게 따로 권총이 지급되지 않았다. 때문에 일본군, 만주군 출신 장교들은 권위를 세우기 위해 일본군도를 패용하거나 망토를 착용하는 경우가 있었다. 허나 미군고문관들은 일본군을 연상시키는 이런 행동을 질색했다.
  7. 심지어 전선에서 병사들이 피흘리는 동안 혼자서 후방에서 맥주 마시며 노가리 깠다 카더라는 소설까지 나돌기도 했다.
  8. 만주군 출신은 일본군 군사고문을 겪어봐서 미군 군사고문의 지도에 익숙한 것이 장점이었다.
  9. 그 전의 안동 철수 작전은 미8군과 국군 1군단의 무리한 명령 때문에 실패했다. 미8군이 명령 내리고 군단에서 4시간 회의하고 하다 보니 남은 시간이 고작 1시간이었대나.
  10. 김석원은 이들을 반기며 후방 사령부가 있는 포항여중으로 보냈다. 그러나 기존 인민군 5사단에 12사단과 766유격부대의 공세로 동해안 전선 40km나 후퇴하고 3사단이 포위섬멸 위기에 처하면서 생각지도 못한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11. 김석원 장군이 제3사단장으로 전임되자 우리 학도병들은 그분을 따르기로 작정을 하고 8월 8일에 포항에 도착했습니다. 포항여중에 있는 3사단 사령부로 찾아갔는데, 거기에는 김대의 대위가 연락장교로 사병 몇 명을 데리고 와있었고, 그밖에 20여명의 군악대원 밖에 없었어요. 이날로 M1을 지급받고 이튿날 대원을 데리고 시내를 구보로 달리다가 안강전방 CP로 가는 김석원사단장을 만났어요. 반가와하시면서 자기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으라고 합디다. - 한국전쟁사 CD(2003/육군 본부, 육군교육사령부)에 수록된 학도의용군 중대장 김용섭 학도병의 증언
  12. 이게 고은 시인의 만인보에 나올 정도였다. 특이하게도 2번씩이나 실렸다.#
  13. 교장으로 있던 당시에 예비역 소장으로 진급되었는데 훈시 시간에 운동장에서 학생들에게 "이 별은 부패하고 정신이 썩어빠진 놈들이 주는 것이라 받을 수 없다."고 하고 그 자리에서 받은 별을 분질러 내던졌다고 한다.
  14. 1907 ~ 1982. 김일성의 최측근으로 인민무력부장을 지낸 인물. 최룡해의 아버지이다.
  15. 이 전투에는 제11연대장 최경록 중령, 포병중대장 노재현 대위, 보병중대장 채명신 대위가 일선 지휘관으로서 참전하였다. 채명신 장군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김석원 사단장은 중대장인 자신과 타 간부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직 포화가 가시지 않은 전투 현장을 시찰하러 걸어 올라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