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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弘壹
1898.9.23~1980.8.8
1 소개
1898년 평안북도 용천군에서 출생하였다.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하였다. 8.15 광복 이후 대한민국 육군 창군에 참가했고, 6.25 전쟁 초반 기적을 일으켰다.[1]
2 일생
2.1 구한말 ~ 일제강점기
평안북도 용천 출생으로 오산학교에서 남강 이승훈, 고당 조만식 선생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이후 오산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중 일경의 감시와 탄압을 피해 중화민국으로 망명하였다. 1920년 구이저우의 육군군관학교를 졸업, 국민혁명군 소위로 임관 이후 독립운동에 투신, 1923년에는 한국의용군사령관을 지냈다.
중일전쟁 당시 중국 국민당소속으로 활동했으며, 특히 보급분야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고 전해진다. 1932년 상해 임시정부의 김구와 접촉하여 이봉창, 윤봉길의 거사에 필요한 폭탄을 제작하여 지원하였다.[2] 자서전인 대륙의 분노에 따르면, 이 일이 있은 후 일본에서 왕웅이라는 중국군인을 색출하기 위해서 노력했는데, 그때는 이미 다른 이름으로 바꾸어서 목숨을 구했다고 한다. 이후 상해에서 내륙으로 전근을 가게된 김홍일은 보급참모로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중일전쟁이 급격히 변화되어 35군단[3]의 지휘관으로 임시 내정받아 강을 이용하여 일본군을 격퇴하기도 하였다.
자세한 것은 자서전인 대륙의 분노 참조
2.2 8.15 광복 후
2.2.1 군인
일제가 패망한 후인 1945년 11월 국민혁명군에 다시 복귀하여 두율명 소장의 동북보안사령부 고급 참모 겸 한교사무처장으로 부임하였고, 중장(2성장군)으로 남경의 국방부 정치부 전문위원으로 부임하였다. 이 과정에서 약간의 재미있는 일화가 있는데, 김홍일(당시 왕웅)이 너무 열성적으로 조선인들의 여건 및 처우 개선과 한국으로 돌아가는 기차표를 구해주는 일을 하자 두율명 소장이 전체회의에서 "왕장군은 무슨 조선인들의 대표요? 왜 그렇게 열성적으로 조선인들을 돕는단 말이요?"라는 질문을 했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참도들이 웃으면서 "조선인들의 대표지요"라고 말을 했고, 그가 사실은 조선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된 두율명 소장은 한교사무처장이라는 직책을 신설하여 그가 조선인들을 지원하는데 총력을 다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고 한다.
본국으로 귀환하려고 하는데, 북한과 남한 중에서 어디를 갈까 고민하던 중에 과거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공산주의 독립운동가들의 분란이었던 자유시참변을 겪은 김홍일은 남한을 선택했다고 한다.
1948년 12월 10일 이승만 대통령의 특별 지시로 대한민국 육군 준장으로 임관되었다. 이는 그의 실전경험에 바탕을 둔 탁월한 지휘력을 인정받아, 12329의 군번을 부여받고 특별히 육군 준장으로 임관하였던 것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개전초기 그는 국방부에서 개최된 군원로회의에서 서울포기 및 한강이남에서 방어선 구축안을 제시했지만 거부당했다. 이후 그에게 주어진 직책이 없었기에 참모학교로 내려가 있었다. 전쟁 초기 한강 방어선 구축을 먼저 건의했으나 당시 육군총참모장 겸 육해공군 총사령관이었던 채병덕이 거부하여 한강 방어선 구축이 늦어졌다.[4] 이후 전황은 점점 심각해졌고, 결국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의 잘못된 명령으로 인해 국군 5개사단이 서울에서 철수하기 전에 한강교가 폭파된다. 이로써 국군의 5개 사단이 한강 이북에 고립되었고, 이로인해 대부분의 병력이 흩어지게 되었다. 상대적으로 선전했던 1사단마저 사단장인 백선엽이 부대원들에게 개별적으로 후퇴해서 한강 이남에서 다시 살아 만나자고 이야기했을 정도.
이때 구원 투수로 등장, 시흥지구전투사령부 사령관으로 보직한다.채병덕 최고의 선택 말이 사령부지 휘하 병력이라고는 하나도 없었고, 수습하는 병력이 휘하병력이 되는 상황이었다. 백선엽의 <군과 나>에 의하면, 부하에게 말끔하게 장군복을 다려오라고 한 다음 위엄있는 모습으로 서서 흩어져 도망치는 병력들을 불러 세웠다고 한다. 우왕좌왕하던 병사들에게 신뢰감 있는 모습을 보여주어 다시 부대에 복귀하게 한 것. 게다가 잘생기셨다 이렇게 긁어모은 병력으로 한강지역에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또한 맥아더와 직접 만나서 한강선 방어계획을 제대로 설명하였고[5] 당연히 맥아더 장군에게 감탄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지연전을 펼쳐 미군이 도착하기 전까지 한강 방어선 전투에서 7일이나 버티는 기적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진정한 기적은 완전히 흩어진 병력을 수습했다는 것이다. 당시 전군이 총 8개 사단이었는데 그 중에 5개 사단이 사라졌다. 그나마 1사단은 제대를 유지하면서 퇴각했고, 중부의 6사간 동부의 8사단은 거의 완벽에 가까운 형태를 유지하면서 후퇴중이었다. 그러나 나머지 5개 사단은 무기도 없이 흩어진 상태였다. 그런 와중에 병력을 모으고 제대를 편성해 어느정도 형태를 갖추었다는 것만으로 대단한 것이다. 물론 모든 병력을 수습한 것은 아니었지만 흩어진 병력의 절반에 가까운 병력을 수습하였고, 이는 이후 1,6, 8사단과 함께 지연작전을 수행하는데 중요한 인력을 확보했다는 점에서 격찬을 받을 만 하다. 그렇기에 국방부전사편찬연구소는 김홍일 장군에 대해서 "탁월한 지휘능력"을 발휘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한마디로 채병덕이 싼 크고 아름다운 똥을 상당히 치우는 성과를 보여주었다.[6] 국방부 발간 6.25전쟁사에서 김홍일 장군을 미친듯이 빠는데 다 이유가 있다 이후 시흥지구전투사령부는 1군단이 된다. 당연히 초대 1군단장에 임명되었고, 지연작전의 개념이 없던 국군에게 지연작전 개념을 수립하였고, 이 지역작전 덕분에 낙동강 전선이 형성될 수 있었다. 1950년 7월 이후 국군의 지연작전은 거의 대부분이 김홍일 장군의 구상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찌보면 이분의 지연작전 덕분에 낙동강 전선이라는 것이라도 만들어질 수 있었고, 그 결과 인천상륙작전도 가능했다는 것이다.
이후 수도사단, 제1사단, 제2사단을 효과적으로 지휘하여 미군과 협조하여 진천-음성-청주 축선에서 성공적인 지연전을 수행하였다. 또한 낙동강 방어작전에서 안강-기계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등 제1군단장으로서 반격작전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그러나 미 고문관과 갈등이 잦았고, 영어를 못한다는 것은 큰 약점으로 작용했다.[7] 결국 인천상륙작전 이후 김홍일 장군은 1군단장에서 육군종합학교장으로 밀려났다가 전쟁 중 육군중장으로 예편되었다. 한국군에서 군단급 제대를 운용해 본 유일한 경험자이며 중일전쟁을 거친 베테랑 야전 지휘관이 갑자기 한직으로 밀려난 이 사건에 대해 전쟁초기 수도사단을 지휘했던 일본군 출신 김석원 준장은 자서전 《노병의 한》에서 '아연실색했다'고 표현했다.[8]
실책이 없는 것은 아닌데, 낙동강 방어전선으로 퇴각하는 과정에서 실수를 하여 상당한 병력을 상실했고, 그것을 빌미로 해임된다.
2.2.2 정치인
결국 더 이상 야전 경험을 살릴 수 없었던 김홍일은 1951년 육군 중장으로 예편하였고, 전후 중화민국 대사가 되었다.
1961년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자 군정 기간 동안 외무부 장관으로 재임했다. 그러나 박정희가 군에 복귀하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민주공화당을 창당하고 대선에 출마한데다가 한일협정까지 맺자 박정희와 결별. 이후 한국독립당을 재창당했으나, 선거에서 참패한데다가 이후 보궐 선거를 통해 배출한 단 한명의 국회의원이 하필이면 김두한. 결국 김두한이 당선 직후 한국독립당 내란음모 사건이니 국회 오물 투척사건이니 하는 사건들을 일으키자 한독당 자체가 자연스럽게 소멸해버린다. 이후 신민당에 입당해 두 차례 국회의원을 지냈다. 그러던 중 유진산의 지도노선에 반발하여 1973년 양일동 등과 신민당을 탈당하여 민주통일당(약칭 통일당)을 창당하여 활동하였다.
3 기타
중국군에서 중장[9], 한국군에서 중장까지 진급한 기록 때문에 합해서 '오성' 장군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한국군에서 임관할 당시 계급이 준장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1년 9월 그를 중화민국 대사로 임명한 자리에서 “김 장군이 군인으로서 우리나라에 기여한 공로를 생각하면 오성 장군으로 제대시켜야 하는데, 우리 군에 그런 제도가 없다고 해서 그리 못했습니다. 하지만 김 장군은 우리나라 별 세 개에다 중국 별 두 개를 보태면 오성 장군과 마찬가지”라며 그의 군공(軍功)을 치하하며 위로했다고 한다.- ↑ 기적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을 정도의 업적이다. 와해된 사단의 상당수를 수습하고 재정비 했으며, 지연작전의 개념을 도입하여 북한군의 공습을 지연시켰다. 괜히 백선엽이 이분이 없었다면 적화통일 되었을 것이라는 말을 하는게 아니다.
- ↑ 백범일지에 등장하는 왕웅이란 양반이 바로 이 양반이다. 왕웅은 김홍일이 중국에서 사용한 이름이었다.
- ↑ 정확히는 35군이다. 국민당군에서 군은 한국군의 군단에 해당되고 군에 해당되는 편제는 '로군'이라고 지칭한다.
- ↑ 이 과정에서 그때까지 그나마 근근히 버티고 있던 1사단 병력을 더 늦기 전에 퇴각시켜 한강 방어선 구축에 투입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으나 채병덕 총참모장이 거부했다. 심지어 전화기까지 손에 직접 들려주며 간청했음에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백선엽 장군의 자서전 <군과 나> 참고).
- ↑ 현재 부족한 탄약과 무기의 공급, 그리고 미공군에 의한 한강철교의 파괴를 요구했다. 그러면서 약 1-2주 정도를 버틸 수 있을 것이라고 상황판단이 적실했다. 당시 채병덕은 맥아더를 만나는 자리에서 조선남한장정 200만명을 동원하여 반격하겠다고 이야기했다.
- ↑ 전에는 깔끔히 치웠다고 서술되어있었지만, 채병덕의 똥은 너무나 거대해서 미군이 개입하고서야 해결될 수 있었다.
- ↑ 중국어는 모어수준이고, 러시아어는 간단한 소통이 가능했다고 한다.
- ↑ 김석원 역시 미군과의 마찰 때문에 지휘권을 내려놓게 된다. 미군이 자신들의 말을 잘 따르는 젊은 장군들과 작전하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참고로 백선엽 1사단장이 이 당시 30대였다.
- ↑ 중국은 준장이 없고 소장이 별 하나, 중장이 별 두 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