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가짜설

1 개요

북한의 최고 지도자였던 김일성일제강점기 저명한 항일 투사의 이름을 도용한 가짜라는 설. 1945년 10월 14일 김일성의 평양 연설 이후 국내에서 본격적으로 제기되었다. 특히 군사정권의 반공 통치가 강화된 60년말부터 국내의 어용학자, 반공주의자 등에 의해 대세를 타기 시작해 한때 남한 사회에선 상식처럼 통용되었으나, 현재는 학계에선 폐기된 학설이다.

다만 한 가지 주의할 것이 있는데, 이 '가짜론'은 남한에서 처음 제기된 것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우익에 의해 체계적으로 퍼뜨려진 것도 아닌, 그가 평양에 등장한 이래 북한 주민들 내부와 남한내 조선공산당, 우익 진영 등에서 거의 동시에 시작되었던 것이 그 기원이다. 만일 이 설이 우익이 김일성을 비난하려는 목적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면, 박헌영여운형에 대해 그랬던 것처럼, 굳이 가짜론을 만들 필요도 없이 '사회주의자'라는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설의 악용은 어디까지나 '원래 있던 것'을 원용한 것이다.

2 시초와 설명

김일성 가짜설의 시작은 김일성이 백발노장이라는 소문에서 시작되었다. 이는 일제강점기 당시의 국내에 거주하던 사람들에게 김일성의 항일투쟁 소문이 퍼지면서 시작된 것인데, 당시 한국 사람들의 기본적인 정서는 장군이라고 하면 백발이 성성한 지식과 내공충만한 중년 이후의 남정네를 먼저 떠올리곤 했다(이는 과거 구한말 때 교육된 위인전의 영향이 크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김일성도 을지문덕이나 강감찬 같은 이미지의 장군이라고 믿은 것이다.

그러나 1930년대 당시 항일 투쟁은 장기화되면서 기존에 항일 투쟁을 지속하던 노령의 인사들은 여러 이유로 세상을 떠나는 상황이었고, 사회주의 이념을 바탕으로 국제 공산당의 협력을 얻어 항일 투쟁을 전개하려는 젊은 층들이 항일 무장 투쟁의 맥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공산당 내에 조선인 간첩이 있다'라는 소문이 돌아 공산당 내 조선인 간부가 대숙청(+ '일제의 간첩' 조선인 자체를 배척하는 분위기가 조성)되는 민생단 사건이 발생하면서, 그나마 남아있던 고령의 지도층이 희생당하고 중국과 합작해 활동하던 조선인 부대들이 내륙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후 만주 공산당 내 조선인 세력 사이에서 젊은 층이 지도부에 올라 입김을 행사하는 일이 생기게 되었고, 여기에는 20대 후반의 김일성도 포함되어 있었다.[1] 그리고 김일성은 보천보 전투로 조선 내에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된 것이다. 게다가 현실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193~40년대 만주에서의 항일 투쟁은 상황이 매우 열악해서 노령의 인사들이 나이와 건강상 버틸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그리고 해방 이후 김일성이 평양에서 한 최초의 연설(1945년 10월 14일) 때 평양시민들은 자신들이 생각했던 김일성 장군의 이미지와 다른 젊은 김일성을 만나게 되었고(당시 김일성은 33세), 이런 이유로 김일성이 가짜라는 소문이 퍼지게 된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의혹이 남한에서 공식적으로 가짜론으로 퍼지게 되었다는 것, 흔히들 70년대를 그 기원으로 보지만[2] 가짜 김일성 타도는 40년대 후반 대북 전단이나 대북 선전에도 버젓히 나오던 이야기. 다만 후술하게 될 김일성 가짜설의 정교한 이론화는 유신정권 이후로 시작되었다고 보면 된다.

사실 해방을 전후해서 김일성이 과연 이전부터 알려져 있던 독립운동가 김일성인가에 대한 회의는 지식인들 사이에서 계속 일고 있었다고 하다. 일단 이름 한자부터 달랐다(또 다른 독립운동가 김일성은 金一聖, 북한의 김일성은 金日成). 해방 직후 미 군정도 김일성(김성주)은 그 이전의 독립운동가인 '김일성'(만주에서 무장독립운동 활동하던 김경천이 대표적)이 존재했고 김일성(김성주)은 그의 이름을 빌려서 사용했다고 파악하고 있었다고 한다.[3]

다만 김일성이 아주 유명한 아이돌(...)도 아니고 김일성에 대한 정보는 대부분 일본경찰의 첩보에 의존하였고 그 첩보는 프락치가 없는 이상 대부분 용의자 심문이나 조선인들에 의한 소문에 의존했기 때문에 일본의 초기자료는 한자가 다른 김일성이나 오타로 김일선(...)까지 나왔고 그것이 김성주의 가명인지 모르고 있었다. 그러니 후대의 연구자들로서는 이것이 서로 다른 사람인지, 동일인인지 어려운 일. 다만 김일성이 소련으로 넘어갈 즈음에는 일본 경찰도 김일성의 정체에 대해서 확실히 알았었고 이때의 자료를 보면 우리가 아는 북한의 김일성임이 확실히 파악된다.

이러한 김일성 가짜론의 정교한 이론은 재일교포 학자 허동찬의 이론인데, 허동찬은 일제 심문조서등에 나오는 한문 다른 김일성과 김일센(...)등에 따라서 적어도 두명 정도의 김일성이 있었다고 봤지만 앞서 말한대로 30년대 후반의 일제 첩보 자료 연구 결과 자신의 이론을 철회하고 김일성이 진짜임을 인정한다[4]

가장 유명한 가짜설은 이명영[5]의 이론인데, 이 사람은 김일성이 3인(혹은 5인 이상)있다는 이론이다. 유명한 보천보 대전투를 이끈 사람은 1대 노인 김일성이고 이 사람은 전사했으며[6] 소련에서 파견된 좀 젊은 2대 김일성이 1대 김일성의 이름을 이었고, 무슨 DC나 마블의 슈퍼히어로도 아니고... 캡틴 북조선이 사람은 소련에 돌아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사망(...), 1대와 2대의 이름과 업적을 김성주가 날로먹고 북한의 지도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명영은 심지어 이런 1대, 2대를 제외하고 다른 김일성도 있었다고 해서 일명 김일성 열전을 쓰기도 했다. 이종석의 말대로 김일성 열전에 대한 연구는 곧 김일성의 업적을 빛내는 역설을 가져왔다는 것.

그러나 김일성(김성주)이 과거부터 있던 다른 사람인 '김일성 장군'의 이름을 빌렸다고 해도 보천보 전투의 김일성이 김일성(김성주)이라는 것은 현재 거의 확실시되고 있다. 당시 항일 무장 투쟁 지도자들이 자신과 부대의 안전을 위해서 가명을 사용하는 것은 무척 흔한 일이었다. 예를 들면 님 웨일스의 아리랑의 주인공인 김산의 경우, 김산은 가명이고 본명은 '장지락'이었다. 항일운동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기록을 뒤져서 가명 알아내는 게 일이다. 북한 주민들 사이에서도 김일성의 본명이 김성주라는 것은 의외로 널리 알려진 사실이란 정도는 알아둘 필요가 있다. 북한의 선전영화 조선의 별에서도 엄연히 엄친아 김성주가 김일성으로 개명해서 무장투쟁하는 이야기가 나오고, 북한의 교과서에도 김일성의 어린시절 이름이 김성주라는 서술이 나온다.

3 학계의 공식적인 입장

일단 반공적인 의미에서 김일성 가짜설이 널리 퍼지고 교육된 만큼 아직도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김일성 가짜설이 널리 퍼져 있기는 하나, 학계에서는 폐기된 상태이다.[7] 극우 성향 인물들은 단순히 김일성을 폄하하기 위해 김일성 가짜설을 주장하는 경향이 있으나, 사실 김일성이 진짜 독립 운동가였다고 해서 해방후 행적에 대한 면벌부가 주어지는 것은 당연히 아니므로 굳이 '김일성이 가짜라능!'이라고 억지 쓸 필요는 없다. 한국인들이 항일운동에 열광하는 것은 조선인들의 인권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다라는 점 때문인데, 도리어 김일성은 조선인들의 인권 자체를 말살시키고 자신의 개인 노예로 전환시켜서 2015년 북한 주민들의 인권이 1915년 일제강점기 인권보다 못하게 만든 주범이므로 그가 항일운동 했다고 해서 그를 찬양하거나 높게 볼 이유는 전혀 없다. 오히려 김일성 때문에 항일운동의 가치마저 퇴색될 소지가 있는 것이다. 김일성이 만들어낸건 조지오웰의 동물농장 실사판인데, 조선인들을 착취하는 나쁜놈 몰아내자더니 더 나쁜 돼지가 조선인들을 착취하고 있고, 현재 해외인권단체 선정 세계 최악 인권 국가 1위로 선정되는 영예(...)를 누리게 되었다. 2015년 난민 사태를 봐도 알 수 있듯, 현대에는 국적보다 인권이 더욱 중요한 가치인데(니네 나라로 돌아가라며 난민을 거부한 나라들은 엄청난 비판을 받는다) 단지 IS가 서방연합군과 싸운다고 IS를 민족을 지키는 영웅이라고 추앙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일부 극단적인 반미 성향의 인물들은 IS가 서방 침략자들로부터 민족을 지킨다라는 식의 칼럼을 써서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는데, 그들은 IS와 김일성이 외세와 싸웠다는 사실만 바라보고 열광할 뿐, 자국인들의 인권을 철저하게 짓밟고 유린하는 것은 외면한다.

학계의 대세는 '김일성이 독립 운동을 한 건 사실이지만 보천보 전투을 빼면 크게 내세울 만한 공은 없다'는 견해. 하지만 보천보 전투 항목에도 설명되어 있듯 그 전과가 크지 않더라도, 이미 이전의 주요 항일 투쟁 거점에 만주국이 자리잡고 항일 투쟁의 소식조차 뜸하던 때에 항일 무장 세력의 국내 진입이 이루어져 김일성의 이름이 널리 퍼졌다는 의의는 있긴 하다[8]. 어쨌든 김일성이 북한에서 권력을 잡을 수 있었던 큰 기반이기도 했으니까. 물론, 결과론적인 말이지만 조선인들의 인권을 위해서 김일성같은 항일 무장 세력은 없는게 나았다. 그 김일성이 북한에서 권력을 잡은 덕에 2016년 현재 북쪽의 조선인들은 극단적인 상황에서 인권따위 개나 줘버린채 신음하고 있으니까.

오랜기간 김일성 진짜설(...)을 주장하면 상당히 위험했던 것도 사실, 종북주의자들의 저서가 아니더라도 김일성 진짜 독립운동가설이 적혀있으면 처벌을 받았는데 70~80년대 악명높은 금서인 김형욱 회고록에도 엄연히 김일성은 진짜임이 적혀 있었다.[9] 많은 지식인들이 놀랐던 부분.

북한 망명 정치인 임은[10]이 일본에서 출간한 북조선 왕조 비사는 김일성 정권의 피의 숙청을 처절하게 고발하고 한국전쟁은 북한이 주도했다는 걸 강조한 책임에도 김일성 가짜설을 부정하고 김일성 보천보 전투 주도설을 주장했다. 그는 물론 자신이 듣고, 조사한 바-주로 관계자들의 전언을 근거로 책을 썼는데, 책의 요지는 제목에 나오듯이 김일성 왕조를 무너뜨리자는 신념이라고 서술했다. 그는 북한 김일성의 경력이 대단히 부풀려졌다고 하나, 보천보의 김일성은 북한의 김일성이 맞다는 주장을 폈다. 대한민국에서 금서로 지정되었다는 일부의 주장이 있으나, 당시 일본에서 이 책이 출판되자마자 한국의 신문들은 여러 날에 걸쳐서 경쟁적으로 번역 연재하기도 했으며. 그리고 자연스럽게 번역되어 출간되었다.

정자환 가톨릭대학교 전 교수가 쓴, 《북한에게 남한은 무엇인가》에서 저자는 보천보 전투의 김일성은 북한의 김일성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11]

  1. 당시 30대 초반인 김책, 최용건도 비슷한 시기에 지도부로 급속 진급하였다.
  2. 60년대 문교부 공식 서적에는 버젓히 "김일성은 약간의 반일활동은 했지만 그 범위는 크지 않았다라고 적혀 있기도 했다. 코렁탕
  3. 이 설은 해외까지 알려져서 고바야시 모토후미의 만화 《동아총통특무대》에서는 소련NKVD(내무인민위원회)가 라브렌티 베리야의 명을 받고 진짜 김일성을 처형하고 김성주를 다음 김일성으로 세운다는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
  4. 물론 한국의 일부 학자들은 30년대 자료를 고의로 무시한다.
  5. 전 성균관대 정치학교수. 그의 아들 역시 모 대학 교수로 재직중인데 가끔 수업중에 김일성 가짜설의 근거를 보여주기도 한다 카더라.
  6. 일본군 그리고 초기 한국군의 특성인 전과 부풀리기의 일환으로 윌리엄 홀시,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모두 몇 번씩 전사한 경험이 있다. 김일성의 경우도 마찬가지
  7. 앞서 말한 이명영은 1994년 김일성 사망후에도 월간조선을 통해서 끝없이 가짜 김일성론을 주장했다
  8. 조선인민군 부총참모장 이상조는 보천보 전투 이후 중공군으로부터 김일성 부대를 도와주라는 지시를 받고 김일성을 찾았으나 김일성을 찾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상조는 오히려 김일성 가짜설을 부정한 인물이다. 이상조는 김일성이 보천보 전투에 참가한 것은 확실하다고 말하며, 그를 만나지 못한 이유를 '진지를 사수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관련 기사(1989년 경향신문)
  9. 물론 남한 중앙정보부장을 역임한 저자의 성향상 김일성은 천하의 개쌍놈이 맞고 자신은 반공주의자라는 걸 강조하지만서도
  10. 해방 전후사의 인식에서는 이 사람을 중앙정보부에서 만든 가상의 인물이라고 하는데, 오늘날에는 앞서 말한 이상조의 필명이라고 추정하는 사람도 있으나, 그의 본명은 허웅배이다. 임은이란 이름은 필명으로, 본인이 경상북도 선산군 임은리에서 필명을 따왔다고 언급하였다. 허웅배는 비록 임은리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으나 그의 선대 본거지인 이곳을 그리워하며 필명으로 삼았다고 밝혔다. 독립운동가 왕산 허위 장군의 손자로. 모스크바 유학중 망명을 결심해 친구 셋이서 각자 이름을 이진, 한진, 허진으로 개명하고 함께 망명했다.
  11. 정자환 교수는 학부에선 영문학을 전공했고, 이후 하와이 대학에서 유학한후 가톨릭대학교 사회학 교수로 정년 퇴임하였다. 여성노동자에 대한 연구와 진보적 사회활동을 많이 한 인물로, 북한이나 한국 근현대사 전공자는 아니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