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가파르바트

8,000미터 14좌
(The Eight-Thousanders)
1. 에베레스트(8,848m)2. K2(8,613m)3. 칸첸중가(8,586m)4. 로체(8,518m)
얄룽캉(칸첸중가 서봉)(8,507m)5. 마칼루(8,465m) 로체샤르(로체 남봉)(8,400m)6. 초오유(8,203m)
7. 다울라기리 1봉(8,169m)8. 마나슬루(8,165m)9. 낭가파르바트(8,128m)10. 안나푸르나 1봉(8,092m)
11. 가셔브룸 1봉(8,070m)12. 브로드피크(8,048m)13. 가셔브룸 2봉(8,036m)14. 시샤팡마(8,027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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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 위키피디아)

명칭영어: Nanga Parbat(낭가파르바트)
우르두어: نانگا پربت (nəŋɡapərbət̪)

낭가파르바트 루팔 남벽-크게보기
높이8,126m(세계 9위봉)
지형학적
상대높이
4,608m(세계 14위)[1]
모체 봉우리다울라기리[2]
위치한 국가파키스탄
산맥히말라야 산맥
초등정1953년
헤르만 불
(Hermann Buhl, 오스트리아)
역대
등정 횟수
287 (8000m급 14좌 중 7위)
등반 중
사망률
(종합) 22.30% (8000m급 14좌 중 3위)
(90년대 이전) 77% (8000m급 14좌 중 1위)[3]
77퍼센트? 와 잠깐만

낭가파르바트(Nanga Parbat)는 히말라야 산맥 끝에 위치하고 있으며, 해발고도가 8,126미터로 세계에서 9번째로 높은 이다.

1 소개

망가파르바트가 아니다! 망자파르파트일지도 모른다

'낭가파르바트'는 우르두어로 '벌거벗은 산'을 의미한다. 셰르파들 사이에서는 악마의 산으로 불리고 있으며, 외국에서도 공공연히 'Killer Mountain'이란 명칭을 쓸 만큼 난이도가 높고 실제로 이 산에 오르느라 사람들이 많이 희생된 산으로 더더욱 유명하다. 산의 남동쪽 벽인 루팔 벽[4]은 높이 4,500미터의 수직 암벽으로, 히말라야의 3대 난벽으로 꼽히는 곳이다.

파키스탄 내에서 두 번째로 높은 산으로, 이 지방 주민들은 '산 중의 왕'이란 의미의 '디아미르(Diamir)'라는 이름으로 부르며 숭배하고 있다. 8000미터 이상급 산 중에서는 가장 위험한 산으로 꼽히는 곳. K2가 위험하다고 알려져 있지만[5] 이쪽은 숨은 최종보스인셈. 그래도 사망률이 많이 줄었고 안나푸르나에게 최악의 산 자리를 내주었다.[6]

K2와 함께 겨울 시즌에 등정된 바가 없는 유이한 산이었으나 2016년 시모네 모로의 팀이 동계초등정에 성공하면서 K2만이 유일한 동계 등정이 안된 산으로 남아 있다.

2 등정 역사

1895년 영국알버트 프레데릭 머메리가 두 명의 구르카와 처음으로 등반을 시도했다가 실종되었다. 그저 눈사태에 휘말려 죽었으리란 추정만 나올 뿐이다.

그리고 1932년 독일인 빌리 메르클, 빌로 벨첸바흐가 이끄는 독일 등산대가 도전했으나 1차는 실패했고 1934년 2차 재도전에 나섰으나 악천후로 하나둘 쓰러져 죽으면서 메르클과 빌란트,벨첸바흐 등 독일인 4명과 가이라이,다그시,니마노르부 같은 현지인 포터 6명이 목숨을 잃었다.포터인 앙체링이 극적으로 내려와서 마지막에 남은 메르클과 포터 가이라이를 살려달라고 애원했지만 눈보라 속에서 후발 등산대는 구경만 해야했고 이들은 다시는 스스로 내려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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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당시 극적으로 살아 내려온 포터인 셰르파 앙체링(가운데).

이렇게 살아남은 앙체링은 무려 70년이 지난 2003년까지 약 100살 전후 나이(1903년 정도 태어난 걸로 추정할 정도로 자신도 태어난 연도를 몰랐다..다만 주변인이라든지 몇며 기록으로는 1902년에서 1903년 생으로 파악됐다.)로 세상을 떠났다. 앙체링은 1960년대까지도 60대 나이까지 이후로 30여년동안 현역으로 포터로 일했다. 90년대 후반,해외 언론이 앙체링을 찾아가 인터뷰하니 그는 이 당시 일을 아직도 기억한다면서 이때, 죽은 다그시와 가이라이는 친구라서 더더욱 잊지못한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텐징 노르게이가 네팔 셰르파의 영웅이라면 그는 파키스탄 쪽 셰르파의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한편, 게르만 민족의 우월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나치히틀러가 낭가파르바트 등정을 지원하기로 하고 1937년, 6월 7일 칼 비엔(Karl Wien) 대장이 이끄는 독일등산대가 재도전에 나선다. 그들은 6,180m 지점에 제4캠프를 구축했다. 그리고 6월 14일 저녁 정상 공격을 위해 독일인 대원 7명과 셰르파 9명이 제4캠프에 모였고 그 자리에서 잠을 잤다. 그러나... 바로 그날 밤 거대한 눈사태가 제4캠프를 덮쳐 자고 있던 16명 모두 그 자리에서 숨을 거뒀다.

1938년 파울 파우어 대장이 이끄는 독일 등산대가 다시 도전했으나 악천후에 시달려 결국 라키오트 루트(북동쪽) 무어즈 헤드 부근에 있던 얼음굴에서 4년 전 조난당한 빌리 메르클 대장과 포터 가이라이의 시신을 발견하고 물러나야만 했다.이 과정에서 포터인 히야이룸과 독일인 등산대원 리하르트 발뢴코프가 목숨을 잃으면서 사망자는 31명으로 늘어났다. 이런 사태가 한번 터지면 사망률이 폭증한다

1939년 페터 아우프취나이터가 이끄는 4명으로 구성된 소규모 독일 등반대에가 낭가파르바트 디아미르(서쪽벽)의 머메리 립(rib) 좌측에 위치한 거대한 바위 스퍼의 6,100m 지점까지 올라갔으나 역시 악천후로 물러났다. 히틀러도 연이은 실패에 노발대발했지만 곧 터진 2차세계대전 여파로 등산은 흐지부지 밀려나야 했다.

그리고 1953년 독일인 의사 칼 마리아 헤를리히코퍼(1916~1991)가 등반대를 조직했다. 바로 그는 1934년 조난당한 빌리 메르클의 이복아우로, 등반에 문외한이었지만 형이 못한 걸 이루겠다는 집념으로 도전에 성공했다. 하지만, 문제는 등반에 문외한이었으며 독선적인 그의 고집으로 등산대와 충돌이 빚어졌고 결국 그를 무시하며 당시 29살인 헤르만 불이 당시 본부의 명령을 어기고 단독으로 등정을 시도, 41시간만에 살아 돌아왔다.

[1]

헤르만 불의 모습

여담으로 등정하고 내려온 헤르만 불은 온갖 추위와 고생으로 주름 투성이 얼굴이 되어 60대 할아버지 얼굴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리더인 헤를리히코퍼는 모든 영광을 빼앗아갔다고 불을 치료하지 않아 동상에 시달리던 그는 발가락 2개를 잘라야 했다. 이유야 어쨌든 31명이 죽은 마의 산을 등정한 헤르만 불은 영웅이 되었다. 그리고 그가 쓴 책에서 헤를리히코퍼를 엄청나게 비난하면서 고소와 맞고소가 이뤄졌지며 둘은 원수지간이 되었고 불은 1957년 카라코람 산맥의 초골리사 등정에 도전했다가 조난당해 33살로 세상을 떠났다.

결국 헤를리히코퍼는 스스로 오르고자 재도전에 나서 1961년 재등정에 나섰지만 루퍼트 뢰브와 한스 킨스호퍼가 추락사하면서 실패하고 만다. 그리고 우습게도 그 이듬해인 1962년, 다른 독일 등정대인 토니 킨쇼퍼가 이끄는 등정대가 2번째 정상에 오르면서 헤를리코퍼에게 굴욕을 안겨줬다. 하지만 이 등정에서도 1명이 죽었으며 킨쇼퍼 또한 다른 산 등정 도중에 1964년 목숨을 잃었는데 헤르만 불과 똑같은 33살이었다.

그 뒤로도 3번이나 헤를리히코퍼는 재도전에 나섰지만 그 스스로 정상에 오르는 건 죄다 실패했다. 그 중 하나인 4차 도전 당시(이탈리아-독일 합작으로 등정 시도)인 1970년에 팀에 동생 귄터 메스너와 함께 합류한 이탈리아의 라인홀트 메스너[7]가 귄터와 단둘이 최초로 루팔 벽을 통해 등정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서쪽의 디아미르 벽을 통해 하산하던 중 눈사태로 동생 귄터를 잃고 혼자 내려왔다. 여담인데 이때도 대장인 헤를리히코퍼는 젊은 메스너[8]가 영광을 차지하는 게 배가 아파서 메스너가 기록을 세우기에 급급해 정상에 오른 걸로 만족하지 못하고 고산병에 시달리는 동생을 강제로 더 위험한 루트로 내려보내다 죽인 거라고까지 했다. 분노한 메스너는 "나는 내 동생을 죽이지 않았다!"는 입장을 밝히며 비로소 헤르만 불을 이해하겠다는 말로 그 역시 헤를리히코퍼를 공식적으로 비난했다. 참고로 이 등정을 그린 2010년작인 독일 영화 <운명의 산 낭가 파르밧/Nanga Parbat>(2013년에 국내개봉) 에서도 헤를리히코퍼는 찌질이 악역급으로 나왔다. 뿐만 아니라 처음에는 메스너 형제가 정상에 오르는 걸 적극 지지했으나 실제로 이들 형제가 정상에 오르자 태도가 돌변한 것으로 그려졌다.

이렇게 헤를리히코퍼가 등정에 연이어 실패할 때 체코의 이반 갈피가 3번째 도전에(1969년에 1차 실패) 나선 1971년에 4번째 정상 등정에 성공하여 이전 3번의 등정이 모두 독일인 및 독일과 합작으로 이뤄진거랑 달리 비독일 나라가 홀로 등정에 성공하면서 헤를리히코퍼를 좌절시켰다. 결국 그는 낭가파르바트에 직접 오르는 걸 포기했고 등산가로서 그는 묻혀졌으며 되려 헤르만 불이나 메스너를 질투한 찌질이로서 등산 역사에 추하게 남게 되었을 뿐이다.

여성으로서는 1984년 프랑스의 릴리앙 베르나르(1948~1986)가 남편인 모리스 베르나르(1941~1986)와 같이 처음으로 등정에 성공했다. 생몰연도를 보면 알겠지만 이 내외는 1986년 6월, K2 등정 도중 같이 목숨을 잃었으며 나중에 그녀의 시체를 발견하여 묻어준 등정대가 바로 한국 등정대였다.

우리나라에서는 1990년 7월 광주전남합동대가 등정을 시도했으나 실패, 7900미터 지점에서 정성백 대원이 실종,아니 사망했다. 이후 1992년 우암산악회가 첫 등정에 성공했다. 그리고 1999년에는 엄홍길 대장이 루팔벽을 통해 등정하는 데 성공했다. 2009년에는 여성 산악인인 고미영이 등정 후 하산하는 중에 실족하여 사망하는 안타까운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9]

2016년 이탈리아 등산가 시모네 모로의 팀이 동계초등정에 성공했다.

3 트리비아

  • 2013년 6월 22일 탈레반이 낭가파르바트 베이스캠프에 마구잡이 총격을 가하여 우크라이나인 5명, 중국인 3명, 체코인 1명, 파키스탄 가이드 1명을 비롯한 10명이 사망했다.[10] 이 사건에 대하여 아시아 산악연맹은 강력비난하고 나아가 치안이 엉망인 파키스탄 정부 책임을 묻고 국제산악연맹과 손잡고 파키스탄 여행금지 및 산악등정 금지를 결의했다. 아시아 산악연맹 회장 이인정이 밝히길, 이에 대하여 파키스탄 정부가 당황해하며 문화부 및 외교부장관이 와서 재발방지를 약속했다고 한다. 당연히 파키스탄에게도 제법 쏠쏠한 수익이 들어오는 여기 등정을 국제적으로 금지하면 큰 경제적 타격이 가기 때문에 이렇게 저자세로 굽신거리는 것. 이 덕분에 중무장한 현지 병력이 곳곳에 배치 중이라고 한다.
이 당시 이 사건현장으로부터 10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머물던 등산인이자 기자인 김영주의 책을 봐도 당시 이 사건이 보도되며 등산객들이 하산하기 바빴다. 때문에 이 척박한 산지에서 그들을 통한 장사가 그나마 돈벌이였던 현지인들은 울상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김영주나 몇몇 해외 등산객들이 가지 않고 남으니까 군병력 수십여명이 기관총을 가득 가져와 경호를 해줬다고 한다.
  1. 히말라야의 8천미터급 고봉중에 지형학적 상대높이는 2번째로 높다. K2보다도 높다. 그야말로 독립적으로 우뚝 서있는 거봉.
  2. 다울라기리의 지형학적 모체 봉우리는 K2, K2의 모체 봉우리는 에베레스트다. K2의 손자, 에베레스트의 증손자뻘 되는 산인 셈.
  3. 농담 안하고 10명중 8명이 죽는 레벨. 그야말로 악마의 산이다.
  4. 19%20Nanga%20Parbat%20Rupal%20Face%20And%20Rakhiot%20Peak%20From%20Bazhin%20Glacier%20Just%20Past%20Rupal%20Face%20Base%20Camp.jpg Rupal_NangaParbatB.jpg
  5. 물론 등정 난이도는 K2가 넘사벽이다. 사망률이 생각보다 낮은 이유는근데 종합 사망률은 낭가파르밧보다 높은데? 애초에 시도조차 안하니까(...).
  6. 등정 시도가 많지 않은 상황에서 아래 설명된 재앙급의 사망사고로 인해 사망률이 심하게 올라가긴 했다.
  7. 이탈리아어: Reinhold Messner 레이놀드 메스네르. 이름이 독일풍같아서 독일인으로 많이 아는데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이탈리아인이다. 물론 이름처럼 독일계 조상을 둔 독일계 이탈리아인이다. 또한 잘 알려져 있다시피 메스너는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14좌를 무산소로 완등한 위대한 산악인이다.
  8. 1944년생으로 1970년 당시 26세였고, 동생인 귄터는 그와 3살 터울로 1947년생이다. 귄터 역시 어렸을 때부터 등산에 남다른 소질을 보였다고 하니 만약 저때 23세의 나이로 안타깝게 요절하지 않았더라면 형 못지 않게 저명한 산악인이 됐을지도 모른다.
  9. 1천미터 가까운 높이를 떨어졌다고 하며 중간에 튀어나와 있던 바위에 머리를 부딫혀 아주 심각한 두부손상을 입어 사망했다고 한다. 발견당시 머리에서 피를 많이 흘린 모습이었다.
  10. 기사에서는 러시아인으로 나와있는 1명은 2014년 10월에 나온 중앙일보 기자 김영주가 쓴 히말라야 14봉 가이드 책에서는 체코인으로 나와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