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르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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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구르카?

네팔어: गोर्खा(Gorkhā)
영어 : Gurkha

네팔의 군인들. 현지에서는 '고르카'라고 불리며 고르카 지역에서 이름을 따왔다. 이는 고르카 지방에 사원이 있는 중세 힌두 성전사 구루 고라크나트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네팔의 산간지방 사람들로 이루어진 군대이다.

대영제국싱할라족이나 시크교도 라지푸트 다음으로 가는 전투민족으로 꼽았으며 이들과 달리 영국 육군의 용병에 긍정적이었던 구르카족들을 지금까지 용병으로 잘 고용하고 있다. 영국 육군뿐만 아니라 인도 육군에서도 이들을 고용한다. 당연히 네팔군에도 있다.

기본적으로 세계 최고 고산지대에서 살아가는 덕에 일반인이라면 정신도 못차릴 고지대에서도 뛰어다닐만큼 심폐량이 높으며, 그에 따라 신체능력도 당연히 뛰어나다. 스위스와 마찬가지로 매우 우수한 용병으로 유명한데 네팔의 3대 수입원으로 마약(...), 관광[1], 구르카족 용병을 꼽을 정도. 이들은 네팔 전통 칼이라고도 불리는 쿠크리를 사용한다.

1.1 구르카 용병의 역사

네팔의 고르카 왕국과 동인도회사의 구르카 전쟁(1814-1816) 중 영국은 자신들이 구르카로 칭한 고르칼리 군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받는다. 평화 협정에 따라 고르칼리군은 동인도회사 군대와 계약하여 이들로 합류하게 된다.

전통적으로는 네팔 산간지방 사람들로 이루어져있는데 체트리(타쿠리), 머거르, 구릉의 사람들이 영국과 맞서 싸운 원조 구르카이다. 브라민(브라만 네팔에서는 브라민이라고 부름), 셰르파/따망 들은 입대가 허용되지 않았다. 오늘날 구르카는 모든 네팔의 부족들로 이루어져있는데 기존의 구릉, 머거르, 체트리(타쿠리) 외에도 라이, 림부, 셰르파, 따망, 네와리 등이 속해있다. 구르카군은 전투종족으로도 불리는데 이것은 그들의 선천적으로 호전적인 점과 전투에서의 공격성, 용감함, 충성심, 자부, 신체적인 힘, 탄력, 질서정연함을 갖춰 오랜 기간동안 열심히 일하고 불굴의 의지와 군사력으로 싸울 수있기 때문이었다.

원래 영국은 각지의 식민지에 현지인으로 구성된 외인부대(세포이 같은 부대)[2]를 창설해 유지해 왔으나, 인도 및 홍콩,아프리카등 자국 식민지를 독립시켜주는 과정에서 현지인 부대도 대부분 해체했다. 그러나 오직 구르카족 부대만은 해체하지 않은 채 지금도 1개 여단 규모로 존재하고 있다. 이는 약 3천 명 정도로, 영국 육군 전투병의 1/9 규모에 해당한다. 구르카 부대 창설 이래의 전사자도 만여 명에 달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도 영국 육군의 일부로 정글등지에서 일본군을 기습하여 큰 손실을 입혔으며, 유럽과 아프리카 일부에서도 활약했다. 영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인 나라들은 모두 이들을 두려워하게 된다.

심지어 포클랜드 전쟁때 일부 아르헨티나 육군 병력들은 구르카 부대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냥 항복하거나 도망쳐 버리기도 했다. 또한 영국 육군의 규모가 많이 축소된 최근에도 여전히 중요한 전투부대중 하나로, 이라크에도 파병중이다. 평화유지군으로도 파견되어 있다.

더불어 영국 육군뿐만 아니라 인도군도 일부 고용하고 있다. 90년대 후반 파키스탄과 국경분쟁에서 이들이 실제로 파키스탄 육군과 대적한 것도 이름을 날렸다.

이들의 활약을 간단히 말하면...걸어다니는 사망 플래그.

1.1.1 전투종족, 영국 육군의 용병이 되다

네팔을 점령할 때는 이미 네팔의 구르카 부족이 쳐들어와 1788년(건륭 53년) 티베트 남부를 점령하고 라사를 향해 진격해오고 있었다. 티베트 주재 청군은 판첸 라마 텐페이 니마를 납치하여 다른 곳에서 요격할 태세를 갖추었다. 한편 건륭제는 사천성에 주재하던 군사들에게 티베트 남부에 있는 구르카 군사들을 몰아내라 명령하였으나 이미 구르카 부족은 퇴각한 상태였다. 그러나 1791년(건륭 56년) 겨울, 구르카는 다시 티베트로 진격해 들어왔다. 이에 맞서 건륭제는 팔기군과 녹영의 군사들을 파병하고 그 사령관에 자신의 처조카인 복강안(福康安)을 임명하여 구르카군을 몰아내도록 하였다. 복강안의 군대는 청해성으로 진격해 티베트 분지로 들어가려 하였으나 날씨가 춥고 고지 분대라서 눈이 녹지 않아 날이 풀릴 때까지 기다리다가 봄이 되어 다시 진격한 후 1792년(건륭 57년) 여름에 구르카군을 섬멸하고 그들을 히말라야 산맥의 카트만두 계곡으로까지 압박하였다. 1793년(건륭 58년) 복강안은 구르카족의 항복을 만주식으로 받고 철군하여 북경으로 돌아갔다. 이후 구르카는 더이상 티베트를 넘보지 못했다.

1803년 이래 네팔의 구르카 정부는 인도의 국경지대를 노골적으로 침범하여, 영국을 도발했다. 특히 인도 북부의 영국령 촌락을 약 200개나 병합하고 갠지즈강(江) 상류까지 침략할 기미를 보였다. 영국의 인도총독 민트 경(卿)은 이 지역은 영국에 귀속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네팔은 계속 권리를 주장하여 양도하지 않았으므로, 새로 부임한 총독 모이라 경이 비상수단으로 현지에 경찰서를 설치하고 강경한 태도로 임하였다.

당연히 구르카 측이 가만있지 않고 1814년에 그 경찰서를 습격, 18명의 경찰관을 살해함으로써 전쟁이 시작되었다. 영국도 이에 대응하여 선전포고를 하고 군대를 4개 부대로 편성하여 네팔로 진격시켰다. 히말라야산맥의 험난한 지세를 이용한 구르카족은 여러 성새(城塞)를 중심으로 완강히 저항함으로써 영국군은 초전에 고전하였으나, 서틀레지 방면으로 진격한 사령관 D.옥털로니의 분전으로 요새를 차례로 격파하고 구르카군의 최후거점인 마룬 등의 요새를 격파함으로써 전쟁에서 승리한다. 패배한 구르카측은 항복하여 영국과 사가우리 강화조약을 체결하였다.

1.1.2 영국군이 되어 벌인 전투

이들이 맹활약한 전투로 알아주는 게 세포이 인도용병대들의 반란을 진압한 전투와 그리고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이다. 1차 전쟁(1839~1842)에서 호되게 털린 영국은 당시 영국군 및 인도계들로 이뤄진 영국군이 전멸(딱 1명만 살아 돌아옴)당한 것을 교훈삼아 산악전의 고수인 구르카병을 2차 전쟁이 벌어진 1878년에 대거 파병했다. 그리고 카불 점령에 크나큰 공을 세웠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20만이 넘는 구르카병이 참전하여 용맹을 떨쳤다. 이들은 목숨을 아끼지 않고 먼저 진격하며 전설을 만들어냈다고 한다. 물론 4만에 이르는 구르카병이 전사했을 정도로 이들의 피해도 컸다.

1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 벌어진 3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도 구르카군이 대거 파병 나갔지만 영국은 1차대전의 피해도 엄청났던 터에 여기에 총력을 다할 수 없어서 지원도 흐지부지된 상태였고, 몇 달 안 가 전쟁은 대충 끝났던 탓에 구르카군은 2차 전쟁과 달리 큰 활약을 하지 못했다.

1.1.3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구르카 무쌍

gurkha.jpg
북아프리카 전선에서의 사진이다. 웃으니까 더 무섭다 칼날은 왜 만지작거리는데

구르카병이 이름을 세계적으로 알린 건 2차 세계 대전이다. 1차 대전이나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별다른 사진 자료나 취재 기록이 없었던 거랑 다르게 2차 대전에서는 상당한 자료와 취재가 이뤄졌기 때문. 북아프리카에서는 독일군을 상대로, 동남아시아에서는 일본군을 상대로 전투를 했다. 독일 아프리카 군단 장병들의 증언에는 이들이 밤마다 독일군의 진지를 기습해 장병들의 목이나 귀를 베어가는 공포의 존재로 각인되어 있고, 실제로 이들의 전과를 의심하는 영국 육군 장교 앞에 적군에게서 따온(?) 귀를 한바구니 보여주기도 했다. 일본 육군은 정글전에 능해서 영국 육군 지휘관들이 정글에서 싸우기를 꺼려 했는데, 그러자 구르카족은 이 정글에서 일본 육군을 쿠크리 칼로 사냥하고 다녔다. 일본군의 막장전설중 하나를 차지하는 임팔 전투에서는 구르카 소대가 일본군 중대를 전멸시키는 공도 새우기도 했다. 같은 전투에서 구르카 대대의 디마푸르라는 육군 중사가 일본 육군 참호로 뛰어들어 무려 24명의 일본 육군을 베어 죽여 빅토리아 무공훈장을 받았다.

위 취소선 쳐놓은 마지막 두 문장에 대해서는 출처 및 확인을 바란다. 영문판 위키와 The London Gazette 검색 결과2차대전기 구르카 출신 빅토리아 무공훈장 수훈자는 총 12명인데 그 중 위의 이름과 비슷한 이름도 없다.[3] 다만 위 문장의 사례와 비슷한 사례를 찾자면 Agansing Rai라는 제5왕실구르카소총연대 2대대 소속 상병(Naik는 영국군 계급으로 치환하면 Corporal, 즉 상병이다)인데, 임팔 전투 중인 1944년 6월 경 적군에게 2개 벙커가 점령당한 상태에서 화력 열세에도 불구하고 분대원들과 적 기관총 진지로 돌격하여 일본군 3명을 사살하고, 1번째 벙커를 탈환한 후 정글로 돌진하여 엄폐한 상태로 기관총을 쏘던 일본군 3명을 사살하고 나머지를 분대원에 맡긴 후 2번째 벙커에 뛰어들어 4명을 총과 쿠크리로 사살하여 나머지 적군이 모랄빵 나서 도망치게 만들어 결국 2개 벙커 모두를 되찾는 데 큰 공헌을 한 것이다. 사실 10명을 혼자 죽인 것도 어마무시한거다...
다른 사례를 들자면 Lachhiman Gurung이라는 제8구르카소총연대 4대대 소속 병장(Havildar는 영국군 계급상 Sergeant, 즉 병장이다)이 있는데, 이 병장은 1945년 5월 버마에서 소대 최전방 전초기지에서 자신 포함 3명과 같이 주둔하다가 200명, 즉 1개 중대 규모나 되는 일본군의 공격을 받았다. 참호에 들어온 수류탄 3개 중 2개는 되던졌으나 마지막 한발이 그의 오른손 바로 위에서 폭발해 동료 2명이 중상을 입어 전투 불능 상태가 된 상태였다. 그런데 그도 오른손이 절단되고 안면과 오른 다리에 부상을 입은 상황에서 왼손으로 소총을 들고 31명을 사살하며 무려 4시간 동안이나 버텼다. 참고로 이 때 소대 전체 일본군 사살 수는 87명이었다... 그의 참호가 점령되었으면 소대는 전멸했었지만, 그가 버틴 덕분에 결국 소대는 방어에 성공했고, 그도 살아남았다. 아마 위 문장은 이 두 사례가 섞이고 약간 과장되어 묘사된 것 같다. 근데 어째 진짜 내용을 봐도 이미 보통 인간을 초월한 사람들로 보이는 건 기분 탓인가...

일본군의 막나가는 전술 반자이 돌격에도 구르카들은 코웃음치면서 무쌍을 찍기도 했다. 사실 영국군의 화력에 반자이 돌격을 하던 일본군은 마구 털리던 와중에 가까스로 영국군 진지에 일본도나 총칼 들고 와봐야 쿠크리 들고 기다리던 구르카를 만나면 안봐도 뻔했다. 그야말로 일본군 피바다 풍경... 월간 지오 한글판에서 1997년에 이들에 관하여 취재한 적이 있는데, 2차대전 당시 이들은 쿠크리 하나로 일본 육군들을 대적한 기록이 나와있으며 일본도를 단숨에 동강내고 쿠크리 하나로 일본 육군 15명을 베어죽인 구르카병 이야기도 나온 바 있다. 이 사람은 당시 취재에서도 나와 인터뷰했는데 수수한 옷차림에 훈장을 주렁주렁 매달고 다니고 있었다. 당사자는 매우 자랑했고 마을 사람들도 전설의 용병으로 알아준다고 인터뷰했다. 그리고 수수한 옷차림과 달리 영국에게 두둑한 연금을 받으며 매우 부유층이었다.

여러모로 남쪽의 전투민족과 닮은 꼴이 많은 민족이다.

코만도스 2의 인도차이나전선 관련 미션에서 구르카 용병들이 등장한다.

1.1.4 포클랜드 전쟁의 구르카

이후, 1982년 포클랜드. 포트 스탠리를 지키는 아르헨티나 수비대에서 벌어진 일이다. 실제로는 영국군이 계속 민사심리전을 펼쳤고 SAS 부대가 기습을 담당할 예정이었는데 아르헨티나군이 구르카들이 온다고 하자 서로들 달아나거나 손 들고 기어나와서 이들은 무혈입성했다. 심지어 몇몇은 이들에게 항복하면서 제발 구르카에게 우릴 넘기지 말아달라고 울며 사정까지 했었다고 한다.(...) 이걸 전해들은 구르카병들은 "우린 저항하지 않은 자, 포로는 일절 건드리지 않는다!" 라고 하며 불쾌해했다.그런데 목 안 친다고는 안했다. 겁나는 놈들...

1.1.5 카길 전쟁

1999년 파키스탄인도카슈미르에서 벌인 국지전인 카길 전쟁에서 인도군 소속 구르카병들도 참전했다. 당시 국내 언론 보도에 의하면 역시 백병전에서 이들은 무서운 활약을 했기에 파키스탄군들이 절대로 이들과 가까이서 싸우지 말라는 분부를 내렸다고 한다. 중앙일보 보도에 의하면 구르카병들과 백병전을 벌이던 파키스탄군이 호되게 털린 다음에 부랴부랴 물량전으로 반격했다고 할 정도였다. 이 때 부상을 입고 포로가 된 구르카들이 종전 뒤 풀려나서 인도군 훈장을 받고 후한 보상을 받은 것도 나왔다. 파키스탄군도 용병인 그들을 꽤 우대해줬는데 박대했다가 나중에 구르카병들과 전투가 언제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더 보복을 받을 걸 두려워해서였다고.

참고로 파키스탄에 거주하는 파슈툰족들도 만만치 않게 전투민족이고 파키스탄의 주 인종인 펀자브인들도 ㅎㄷㄷ한 민족이다. 아프가니스탄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이들도 히말라야 못지않게 척박한 산지 힌두쿠시를 중심으로 온갖 외세 공격을 자기 힘으로 막아내던 전투민족이다. 그런 이들이 상당수인 파키스탄군도 구르카에게 무척 고전했다는 뜻. 하긴 위에 나온 대로 이미 120년전 2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도 구르카군들이 파슈툰족이 다수인 카불을 함락할 때 이름을 날렸던 걸 보면 이게 처음은 아니었다.

1.1.6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다

실사판 '아저씨'라고 보면 된다. 한 구르카 용병이 기차 안에서 강도들의 약탈과 강간 시도를 저지하며 강도들과 40대 1로 맞서 싸워 어린 소녀를 비롯한 승객들을 지켜낸 실화.

한글번역실제기사

1.1.7 구르카병과 30명의 탈레반

구르카 연대 소속, 네팔 비마 출신의 31세 딥프라사드 푼 하사는 2010년 9월 17일, 아프간 헬만드 주[4] 라힘 칼라이 근처에 있는 기지에서 야간 경비 근무를 서다가, 전방의 어둠 속에서 뭔가 땅파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처음 짐승의 소리인줄 알았으나 소리의 정체는 IED를 매설중이던 2명의 탈레반들이었다.

그의 소대는 순찰을 나간 시점이었기에 그는 즉시 무전기로 지휘관에게 보고하고, 삼각대에 거치돼있던 GPMG 1문을 떼어들고, 개인화기인 SA80, 유탄발사기 한 정과 수류탄 다수, 무전기 두 대를 가지고 지붕으로 올라간 후 사격을 개시했다. 탈레반들도 RPG를 발사하고 사격을 가해왔으나, 푼 하사는 15분 이상 그 위치를 사수하면서 400여발의 탄환과 수발의 수류탄 등등 손에 잡히는 무기를 몽땅 사용해 최소 세 명 이상의 탈레반을 죽이고 다수를 부상 입혔다고 한다.처음엔 겁이 났지만,교전을 시작하자 그런 생각은 싹 사라진 채 전투에 임했다고 한다.

그 때, 푼 하사는 덩치 큰 탈레반 전사 한명이 벽까지 완전히 접근해왔고, 그가 사격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또 하사는 지붕 위에서 사격하고 있던지라 무거운 GPMG로는 사격 각이 잘 나오지 않는 상황에서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또 다른 놈이 접근해서 벽을 타고 오르려는것까지 발견했다. 이에 푼 하사는 SA80을 들고 발사하려 했지만, 당연하게도(?) SA80은 작동하지 않았고 SA-80: 나는 창인데 왜 발사를 하려그래 그는 주위에 무기로 사용할 만한 마땅한 물건을 찾다가 삼각대를 발견하고 그것으로 대응하였다고 한다. 오오, 구르카 오오 그는 "마추 탈라이(Marchu Talai)!" 라고 소리지르며 탈레반에게 달려들었다. 그 말은 네팔 말로 "지금 만나러 갑니다 지금 네놈을 죽이러 간다!"는 뜻이라고 한다.

홀로 30여명의 탈레반들을 물리친 공훈으로, 푼 하사는 2011년 3월 25일, 용훈십자훈장(Conspicuous Gallantry Cross)을 받았다. [5][6]#

1.2 선발 과정

구르카의 급여나 연금은 원칙적으로는 영국군과 동등하다.## 네팔은 최빈국이기 때문에 당사자에게는 엄청난 수입이다. 2015년 기준으로 일병이 년간 18,000파운드, 우리 돈으로 약 3300만 원 정도인데, 네팔의 연간 국민소득이 400달러(50만 원정도)가 좀 넘는 것(2015년 기준)에 비하면 연 3300만 원이 얼마나 고액인지 알 수 있다. 구르카로 복무하고 전역한 사람은 부유층으로 살 수 있어, 매년 2~300명을 선발하는 구르카병 지원경쟁률은 엄청나게 높아 50 대 1을 상회한다. 체력 테스트뿐만 아니라 영어, 수학, 면접 등 다양한 전형을 요구하기 때문에 사회 엘리트인 대학생들이 몇 년씩 구르카 준비에만 매달려 사회 문제가 되고 있으며, 카트만두에는 구르카 준비를 위한 사설 학원만도 이십여 개가 성업 중이다. 그야말로 네팔판 한국공무원 시험이라고 할 수 있다. 08년도 기준 경쟁률이 700:1을 넘는다. 2015년 2월 기준으로 영국군 가운데 구르카 출신은 장교가 110명, 사병이 2,610명 수준이었다.출처

특히 최근에는 사교육을 많이 하는 도시민의 합격률이 높아지고 있다고 한다. 한 해 40명 선의 합격자를 배출한다는 유명 사설학원의 수강료는 한화 월 3만 원으로 부유층이거나 구르카 출신의 아버지가 있지 않으면 감당하기 어려운 정도이다. 이런 학원은 전직 구르카 출신이 운영하며 영국군의 선발전형에 맞춘 커리큘럼으로 교육을 한다. 반면 지방민이나 저소득층은 밭일이나 평소 운동 등으로 체력을 단련할 수밖에 없고, 영어나 수학도 이들에게는 큰 장애물인데 네팔은 아직 학교조차 없는 지방이 많기 때문이다.

선발과정을 좀 더 살펴보자. 구르카 출신 모병관이 가을에 고향을 돌면서 지역 예선을 실시한다. 여기서는 키와 가슴둘레 등 신체조건과 기본적인 체력 테스트를 치르며 약 2~3배 수를 선발한다.[7] 예선통과자들은 포카라에 위치한 모병소에 입소하여 보름간 최종 경선을 진행한다. 이때 입소자는 가족의 응원을 받으며 모병소로 들어가는데 마치 한국 수능 등굣길 분위기이다. 다양한 선발 전형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역시 체력 테스트로서 다양한 과목을 수행하는 중에 하나라도 미달되면 그 즉시 탈락이다.

파일:MkipN6G.jpg
그 중에서도 하이라이트는 '도코 레이스'인데, 25kg의 돌을 채운 전통바구니(도코)를 끈으로 머리에 매고 네팔의 가파른 산길 6km를 달리는 것. 삼십분대를 달성해야, 즉 10분 기준 2KM를 달려야 합격을 바라볼 수 있다고 하며 중간에 쉬거나 48분을 넘기면 바로 탈락. 부대마다 다르겠지만 한국군이 급속 행군시 완전군장으로 10km를 1시간10분~1시간30분안에 달리는 것이 목표니 10분 기준 1km가 좀 넘는다.

최종 선발된 인원은 영국 여왕에 대한 충성 서약을 하고 다음해 1월 영국 본토로 가서 8개월 동안 정규군 훈련을 받는다.

한편 영국군 외에 싱가포르경찰 및 인도군도 구르카를 선발한다. 싱가포르 경찰은 영국군 선발에서 차순위자들을 데려가고[8], 싱가포르의 구르카도 영국군보다는 급여가 좀 낮긴 하지만 네팔기준으로는 아주 높은 편이라 인기가 아주 많다. 2014년 기준으로 월 1,500~2,000유로(년간 2600만원 정도)를 받는다. 1년에 300명쯤 뽑는데 2014년에는 14,000명이나 경쟁자가 몰렸다고 한다. ## 많을때는 경쟁자가 2만명이 넘는 해도 있다고 한다.

인도군은 별도의 선발 시험을 실시한다. 이쪽은 급여가 덜해서 경쟁률도 낮다. 그렇긴 해도 인도군 소속 구르카들도 보통 네팔인 노동자보단 당연히 많이 받는다.[9] 영국군 출신처럼 부유층은 되기 어려워도 장기복무하면 중산층은 될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영국군 선발에 최종 불합격하면 다시 인도군 및 싱가포르 경찰 선발에 도전하는 경우도 많다고. 영국군 구르카보단 경쟁률이 낮다 뿐이지 여기도 경쟁 자체는 치열하다.

그밖에도 공식부대는 아니지만 말레이시아 로얄 레인저 특수부대(Royal Ranger Regiment)에도 구르카병 일부가 보안군으로 복무하며 아프가니스탄주둔 미해군 부대 보안군으로서 구르카병이 일부 복무하고 있다. 공식적으로 네팔 군대로 이름을 올리지만 무장 및 복무관련 비용은 각 나라들이 지급하고 있다.

1.3 급료와 연금 등 처우

1997년 전까지는 영국 정규군이 받는 돈의 3분의 1수준이었지만[10] 1997년 홍콩 반환으로 영국으로 구르카 연대의 본부가 옮겨짐에 따라 원칙적으로는 규정상 영국 정규군과 동등한 급료를 받는다. 하지만 실제로는 월급이나 복지등에서 차이가 난다고 한다. 기사 이 분은 영국군 최고 훈장인 빅토리아 십자 훈장을 받은 사람인데도 사후복지가 차이가 난다고 할정도니 무시할 수준은 아닌듯 하다. 특히 월급보다 사후복지에서 차이가 많이 난다고 하며 그보다 더 문제는 영국군의 고질적인 군축문제로 최소 복무기간만 복무하고 정리해고 되며 장기복무가 안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2014년에만 해도 350명의 구르카가 해고당했다고 한다.## 퇴역용병들의 연금도 2005년이 돼서야 95파운드(약 20만원)에서 450파운드(90만원)로 인상되었다. 게다가 퇴역 용병들의 영국 정착이 무지하게 까다로웠다. 이런 차별 대우에 여러 인권단체가 항의한 결과[11] 2009년 5월 29일 영국 의회에서 네팔 구르카족 용병의 영국 정착을 조건 없이 허용하는 법안이 통과되었다. 늦게나마 그들의 노고가 보상받았으니 다행이다.

문제는 이렇게 인권단체의 요청으로 구르카의 복지 수준이 대폭 향상된것이 꼭 좋은 일이냐면 그렇지도 않다는 점이다. 구르카의 장점은 싼 값에 뛰어난 병력 자원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가성비가 뛰어났다는 점인데 이제는 영국군과 동등한 급료와 연금을 받으니 딱히 영국군이 구르카를 쓸 메리트가 없다는 점이다. 오히려 영국군에게 지불된 급료는 영국내에서 선순환되는 반면에, 구르카에게 지불된 급료는 네팔로 빠져나가니 영국입장에서는 더욱 손해. 거기다가 때가 어느때인데 아직도 제국주의 시절처럼 용병을 쓰느냐는 비판도 있다. 물론 구르카의 선발과정은 영국군보다 엄격하므로 선발 자원의 질은 좋을 수 있겠으나 영국군도 어디가서 약병(弱兵)소리 듣는 군대가 아니고, 병사 개개인의 전투능력으로 전쟁의 승패를 결정짓는 시대도 아니다. 19세기처럼 영국이 전세계를 떠돌며 전쟁하는 것도 아니고 영국군이 병력 자원 확충에 어려움도 없어서 구태어 구르카를 쓸 이유가 없다는 말. 여기에 더해 네팔 정부도 구르카 퇴역 병사들의 영국 정착에 반대하고 나서서 상황은 더욱 복잡하다.# 이 때문에 영국내에서 구르카 그만 쓰자는 말이 계속 나오고 있는 상황.#1, #2 따라서 점차적으로 신규 병력 모집을 줄여나갈 것이 유력하다. 이런 이유로 2015년은 구르카 연대 창설 200주년이지만 영국의 군축 영향으로 구르카가 폐지될지도 모른다는 기사도 나온 적이 있다.##

1.4 그 외

이들을 상징하는 칼로 쿠크리를 꼽는다. 부대 문양도 쿠크리 두 개의 검날을 교차한 것.

여담인데 1979년 마운트배든 백작(영국 왕족이던 그는 IRA 저항군의 폭탄 테러 공격에 죽었다) 장례식 당시 정복 차림의 구르카병 20명이 장례식에 참가했는데 용병이면서도 근위병들과 한자리에 있었기에 눈길을 끌었다.

싱가포르 경찰 소속 구르카들은 경찰임에도 쿠크리를 차고 다닌다. 도구니까

구르카들은 일부가 독일군과의 전투에도 참전했다. 그런데, 당시 프랑스군도 북아프리카 산악에 거주하던 모로코 출신 유목민 구미에(goumier)를 용병으로 고용했는데, 이들도 근접전에선 엄청나게 강해서 나치군들은 이들과 근접전으로 싸우느니 하루종일 포탄 세례를 받는게 낫다고 치를 떨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래서 구르카와 이들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 라며 연합군들이 궁금해했지만 이들은 일절 싸울 일이 없었기에 이 농담에 대한 진실은 가려지지 않았다고 한다.
300px-Goumier001.jpg 구미에 사진.이들도 쿠크리처럼 지역 고유 칼을 들고 근접전에서 이름을 떨쳤다.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프랑스 육군 장교가 야습을 준비하는 용병 곁을 지나가며 혹시 쓸만한 손목시계가 있거든 하나 루팅구해 달라고 부탁했더니, 다음날 아침에 그 장교 막사 입구에 손목시계가 원래 주인의 손목째로(!!!) 공손하게 놓여 있더라고 한다.(구르카나 라지푸트 등에 가려져서 그렇지, 구미에들도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의 산악지대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그에 대한 일화들이 '타임 라이프 2차 세계대전사'에 일부 실려 있다.)

미군이 구르카병처럼 용병부대로 삼을 계획을 하던 나라가 바로 몽골군이었다고 한다. 해외 주둔 미군 모습을 다룬 저서 <제국의 최전선>에 따르면 몽골에 파견된 미군 장교들은 몽골 군인들을 구르카처럼 미군에 복무하는 외인부대로 만드는 게 목적이었다고 저술하고 있다.

90년대에 독일 출판사에서 제재한 인문지리백과인 랜드 앤 피플에서도 소개되었다.
여기서는 구르카 족의 돌격 구호로 아요 구르칼리(구르카 족이 나간다!)를 사용한다고 서술했다

2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3: 아시아 왕조

파일:Attachment/구르카/구르카.jpg
파일:Attachment/구르카/gurkha.gif

체력:115
속도:4
원거리공격16
공성공격12
근접공격6
인구수:1
가격은 식량70 금50

인도의 척후병 역할, 아쉽게도 쿠크리는 보여주지 않고 그냥 개머리판으로 후려치는 근접 공격을 한다.대신 세포이가 길다란 칼을 쓴다

설정 상 구르카는 북부 인도 라지푸트족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던 네팔인 집단이라고.

척후병인데 사정거리가 짧다고 안쓰는 사람이 많으나, 단련=>명예=>용맹 업그레이드를 할때마다 사정거리 1씩 늘어나 결국엔 척후병보다 사거리가 길어진다. 또한 비전투시 체력이 천천히 회복되는 특성도 있으며, 아시아 지도들 중 일부에서는 포로로 구출해서 사용할 수도 있다. 물론 인도가 아니면 업그레이드 불가능하다는 단점이 있다.

만샤브다르 구르카는 일반 구르카의 2배 스펙에 주변 구르카들 버프 오라가 있다.
파일:Attachment/구르카/mansabdarg.gif

3 시가 브랜드

Gurkha-Shield.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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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rkha Black Dragon 2006.

유명 시가 브랜드로 2006년 세계에서 가장 비싼 시가[12]인 구르카 블랙 드래곤 2006을 제작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시가 매니아들로부터 최고의 브랜드중 한곳으로 꼽히는 곳으로 이름 값 만큼이나 가격이 미쳐 날뛴다(...)

  1. 주로 히말라야 등반에 관련된 관광 사업.
  2. 1857년 세포이들이 인도인임을 고려하지 않은 영국의 뻘짓 탓에 세포이 항쟁이 일어나자 구르카들은 가차없이 세포이들과 싸웠다. 덕분에 이들의 용맹성과 충성심을 영국에서 알아주게 된다. 자세한 것은 세포이 참조.
  3. 참고로 12명중 2명(Frank Blaker 소령, Michael Allmand 대위)은 비록 구르카 연대 소속이긴 했지만 구르카족은 아니다. 보면 알겠지만 다른 부대에 있다가 보직 이동(구르카대대에 속하기 전에 Blaker 소령은 하이랜드 경보병 소속, Allmand 대위는 6창기병연대 소속이었다)으로 온 장교들이다. 딱 봐도 그냥 영국인 이름이지 않는가... 그러나 용맹함은 구르카랑 비교해도 전혀 쳐지지 않는게 둘다 전사 후에 추서받았다.
  4. 탈레반 세력이 강력하게 자리잡은 위험지역
  5. 이 훈장은 93년 제정된 이래 50명도 받지 못한 훈장이다.
  6. 원래 DSO(Distinguished Service Order)라는 두드러진 용맹을 보이는 경우에 수여하는 훈장이 있었으나, 사실상 장교에게만 부여하던 것이라서 이를 대체해 계급 구분 없이 수여하도록 용훈십자훈장이 제정되었다.
  7. 이 때 마을 아가씨들이 구경 나와 최종 합격할 것 같은 장정을 마음 속으로 점찍는 모습을 볼 수 있다.
  8. 2차 전형은 전적으로 영국군이 관리한다. 따라서 싱가포르는 위탁선발인 셈.
  9. 월급이 25-30 만원이 되니 대졸이 20만원 정도 월급을 받으니 그래도 큰돈이다. 거기에 위에 나오듯이 카길전쟁같은 실전 나가서 활약하면 당연히 추가 수당을 준다.
  10. 하지만 네팔 쪽에서 보면 그래도 큰 돈이긴 하다. 2차대전 당시 받은 돈으로 네팔로 돌아와서 제법 풍요롭게 사는 이들이 많았다고 한다. 참고로 2차대전 당시 구르카들이 받는 월급은 네팔 직장인 평균 70배나 되었다고 하니 경쟁률이 몇백대 일이 될 수 밖에. 지금은 네팔 물가도 많이 올라서 격차가 많이 줄어들었으나 여전히 무시 못할 돈이다.
  11. 구르카 출신 아버지를 둔 영국의 여배우 Joanna Lumley의 활동이 특히 유명했다
  12. 1대당 개당 1,150불, 한화로 약 120만원(...) 이렇게 비싼 이유는 전세계에서 특s급 담배잎들을 모아서 그걸 특별한 방법으로 숙성시킨후 루이 13세 꼬냑으로 인퓨즈해서 딱 100개만 만들었기 때문. 그리고 저 튜브도 낙타뼈를 손으로 직접 깎아 만든 통이다. 그야말로 돈지랄의 결정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