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나카 히로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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野中広務. 1925년(다이쇼 11년) 10월 20일에 태어난 일본정치인.

1 개요

교토 출신이다. 부라쿠민임에도 자민당 간사장 자리까지 오르는 등 한때 정치적 영향력이 상당했으나 고이즈미 준이치로와 총리 자리를 두고 하시모토 류타로, 후지이 다카오를 내세워 두 차례 대리전을 펼치고 전부 패하였다.

2 생애

1925년 교토에서 태어났다. 1943년에 오사카의 철도관리국에 취직했다. 1945년 3월에 일본군에 입대하였고 일본이 패전하자 다시 철도관리국으로 돌아왔다. 그후 1951년에 기초의회의원으로 정치 경력을 시작했다. 1978년에는 교토부지사를 지내고 1983년 교토 지역구를 바탕으로 중의원에 등원한다. 1994년 무라야마 도미이치 내각에서 처음으로 대신직을 맡는데 보직은 국가공안위원회 위원장이었다. 1998년엔 내각관방대신을 지내고 2000년엔 중의원 7선으로 자민당 간사장에 오른다.

노나카는 2001년 자민당 대표 선거에서 총리 후보중 하나로 꼽혔으나 고사하고 대신 하시모토 류타로를 밀었다. 그러나 하시모토 류타로는 고이즈미 돌풍에 밀려 패배한다.

2003년에 자민당 대표 선거에서 다시 자기가 밀던 후보인 후지이 다카오가 고이즈미에게 패배하자 정계 은퇴를 한다.지못미 2009년부터는 리츠메이칸 대학교의 객원교수로 출강하고 있다. 2011년엔 자민당을 탈당했다.

아소 타로가 자기 파벌의 회합 자리에서, 자민당 총리 후보 중 하나였던 노나카 히로무를 비난하면서 한 발언이 "노나카 히로무 같은 부라쿠민을 일본 총리로 세울 수는 없다"였다고 한다. 격분한 노나카 히로무는 자민당 총무회에서

総務大臣に予定されておる麻生政調会長。あなたは大勇会の会合で『野中のような部落出身者を日本の総理にはできないわなあ』とおっしゃった。そのことを、私は大勇会の三人のメンバーに確認しました。君のような人間がわが党の政策をやり、これから大臣ポストについていく。こんなことで人権啓発なんかできようはずがないんだ。私は絶対に許さん!

"장래의 총리대신 자리를 약속받은 아소 타로 정책조사회장(원내대표 격), 당신은 파벌 회합 자리에서 "노나카 히로무 같은 부라쿠민을 일본 총리로 세울 수는 없다" 라고 말했다. 나는 이 사실을 당시 회합에 참석한 의원 중 세 사람을 통해서 이미 확인했다. 당신 같은 사람이 당의 정책을 담당하고, 잎으로 대신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면, 앞으로 인권 계몽이 가능할 리가 없다. 나는 절대 용서할 수 없다!" 우오즈미 아키라, <노나카 히로무 차별과 권력(野中広務 差別と権力)> 2003년 9월 11일

그런데 결국 아소 타로는 총리대신 해먹었다. 답이 없다. 망했어요

노나카는 부라쿠민 출신으로 정계를 입문했을때 자신이 부라쿠민 출신임을 밝히고 부락해방동맹 등의 사회운동과 거리 두기를 했다. 2003년에 아소 다로가 부라쿠민 출신인 노나카가 총리를 해선 안된다고 차별을 한 적이 있다. 이에 노나카가 격분하여 아소 다로를 규탄했고, 노나카의 규탄에 아소 다로는 얼굴이 새빨갛게 상기되어 아무 말도 못했고, 훗날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해명했다.[1]

3 여담

노나카가 부라쿠민이어서 총리가 못되었다는 얘기가 한국 인터넷에 널리 퍼졌으나 사실이 아니다. 애초에 노나카는 자민당 대표 선거(총리 선거)에 나온 적도 없고, 노나카가 밀던 후보가 패배한 건 고이즈미의 개혁론이 먹혀들어서다.

노나카의 본가는 교토의 망간 광산으로 끌려온 조선인 징용자 가운데 탈출한 자들을 숨겨줬다고 한다. 어린 시절에 노나카를 돌봐준 사람도 조선인 여성이었다. 노나카는 아래와 같이 말한 바 있다.

"한반도에서 끌려온 사람들이 학대받는 걸 본 적이 있다. 나에게는 (그 사람들에게) 매우 힘든 일을 겪게 했다는 죄악감이 있다. 그런 것들을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 불식시키고, 한반도와의 신뢰관계를 만들어두고 싶다."

「朝鮮半島から連れて来られた人たちが虐待を受けた姿を何度も見てきた。僕には大へんひどい目にあわせたという罪悪感がある。そういうものを我々が生きとる間に払拭して、朝鮮半島との信頼関係をつくっておきたいんや」

북한이나 중국에 대해서도 다른 일본 정치인보다 우호적인 편이다. 납북 일본인 문제를 들어 북한에 대한 식량지원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인도적 차원의 문제라며 발언하기도 했다. 다만 북한을 방북했을 땐 이런 나라엔 다신 오고 싶지 않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위안부난징 대학살을 인정하며 센가쿠 열도 문제 등에 대해서도 중국측을 배려하여 발언했다.

자민당 정치인 중에서 상당히 리버럴한 편이었다. 같은 자민당 소속인 가토 고이치(加藤紘一, 1939-)[2]와 더불어 자민당 내 좌파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전쟁을 겪은 세대라 전쟁이나 일본의 보통국가화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편. 2009년엔 정치적으로 오랜 적이었던 일본 공산당의 기관지인 적기와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한신 타이거스의 팬이며 부부별성을 가능케하는 정책을 추진하기도 했다.
  1. 아소 다로 본인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해명했으나, 몇몇 의원의 증언이나 정황상 했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
  2. 민주당 소속의 중의원 가토 고이치(加藤公一, 1964-)와는 다른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