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북 일본인

1 개요

북한197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일본인을 대상으로 벌인 납치 피해자를 말한다. 일본 정부12건의 납북으로 17명이 납치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북한측은 13명의 납치는 인정하고 5명을 일본으로 돌려보냈으나 8명은 사망했다고 밝히고 4명에 관해서는 북한에 입국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일본에선 "북조선에 의한 일본인 납치사건(北朝鮮による日本人拉致事件)"이라고 표기한다.

1970년대에서 1980년대에 일본에서 부자연스러운 실종 사건이 빈번히 발생했다. 공통점은 대부분이 젊은 20대 남녀였으며 모두 해안가 근처에서 실종되었다는 것이다. 일본에서 납북 문제가 처음으로 제기된 것은 1980년 산케이 신문의 보도였는데, 북한이라는 구체적인 언급은 없었으며 한국 정부 측에서 이 사안에 대해 일본 정부 측에 귀띔을 했지만 일본에선 사실상 말도 안되는 일이라며 웃어넘길 정도였고 누구도 인정조차 하지 않았던 문제였다. 그러나 80년대 후반에 들어 일본 경찰공안 당국은 1987년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의 주범 김현희의 증언을 시작으로 북한 출신의 탈북자와 망명한 북한 공작원, 북한으로 갔다가 돌아온 재일교포, 일본인의 증언을 토대로 북한 정부가 일본인을 계획적으로 납치했다고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 1991년 일본 정부는 공식적으로 이 문제를 제기하였으나 북한은 부정하였다.

2000년대에 들어서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도 지사가 '북한에 납치된 불쌍한 소녀 1명(=요코타 메구미)을 구하지도 못하는 것은 정부의 책임이다'라고 공개적으로 발언, 북한이 일본인 150명을 납치했다고 주장할 정도로 입장을 강화했고 조총련은 '악의에 가득찬 폭언'이라며 비난했다.

2002년 납북 피해자 일시 귀국 당시의 영상.

그리고 2002년 9월 17일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가 평양을 방문한 북일정상회담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북한의 특수기관들의 조총련계 공작원들이 공모하여 일본인 13명을 납치한 것을 인정, 사과하였다. 또한, '(일본인을 납치한 것은)영웅주의에 심취한 일부에 의한 행위', '내가 알고나서부터 (납치를 주도한)관계자들은 전부 처분되었다'라며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는 듯한 개드립변명을 하였다. 이 회담을 계기로 일시귀국 형태로 생존한 납북 일본인 5명이 일본으로 귀환하였다. 이 사건은 일본에서 호외가 뿌려질 만큼 축제 분위기 속에 이루어졌다. 2004년에 열린 제 2차 북일정상회담에서는 사망이 확인된 8명의 '사망확인서'가 전부 조작된 것임을 인정하였고 생사 여부가 불분명한 사람에 대해서 철저하게 조사를 재개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회담에서는 북한에 남겨진 피해자 가족들을 추가로 데리고 일본으로 귀국했다. 이에 대해 북한이 조용히 넘어갔다는 글이 쓰여있었으나, 실제 북한은 약속 위반이라며 강하게 비난했고 철저히 조사하겠다는 약속도 소용없이 이 후의 교섭마저 일정을 정하지 않았다는 둥의 이유로 중단시켰다.

2 일본인들을 납북한 배경

한국 전쟁 발발 후 한국이 남, 북으로 갈라지고 난 뒤 북한이 한국을 겨냥해 각종 도발과 교전을 벌인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인데, 1960년대에 들어 적극 간첩 활동을 펼치기 시작한 북한의 행적이 드러나자 한국 당국은 삐라 찾기, 간첩선 신고 등 안보 교육과 경비 태세를 강화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북한한국인과 용모가 비슷하면서 세계 각국으로의 입국이 쉬운 여권을 갖고있는 일본인으로 위장하여 한국에 잠입하는 것이 꽤 획기적인 방법이라 생각하였고 공작원에게 일본어를 가르칠 교육관이 필요하다는 갖가지 이유로 일본인을 납치한 것이 이유라고 2002년 북일회담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직접 밝혔다.

1970년대북한으로 자진 망명한 요도호 사건의 주범들의 경우, 제발로 걸어온북한공작원 활동에 이용가치가 매우 높았으므로 그들에게 짝을 지어주기 위해 일본인 여성을 납치한 경우도 상당수였다. 1983년납북된 아리모토 케이코(有本恵子)가 그 예이며 공식 납북자는 아니지만 요도호 사건의 범인 중 한명인 오카모토 타케시의 처 후쿠토메 키미코도 바로 이 케이스로 납북된 것으로 보인다.

납북된 일본인들은 평양의 용성(龍城) 구역에 모여서 결혼한 이를 제외하고 남녀가 각자 마을을 이루며 사실상 감금된 형태로 외부로의 노출은 극도로 제한되어 감시 속에 살고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들의 존재는 북한 사람에게는 철저히 비밀리에 감춰져있기때문에 결혼도 북한 현지인과 시키지않고 같은 일본인끼리, 또는 제 3국에서 납북한 타국의 납북자와 결혼시키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3 북한과 일본 측의 주장이 엇갈리는 이유

북한은 인정된 납북자 17명 가운데 남은 12명 중 8명은 이미 사망하였다고 밝혔고 4명은 납치된 적이 없다고 주장했으나 일본 정부측은 단호하게 반박하고 있다. 그 이유는 사망자 모두가 20~30대라는 젊은 나이에 심장마비, 교통사고, 가스 중독으로 사망하였고 일관되게 시신이 유실되어 찾을 수 없다는 북한의 주장 때문이며, 북한이 내민 '사망확인서' 또한 2002년 고이즈미 총리의 방북으로 급하게 작성된 것이라 사망일자와 사인이 다름에도 모두 같은 병원에서 작성되었기 때문이다.

mondaiten5.jpg
'환자 입회원 대장'이 너무나 허술하게 '사망'으로 수정되어 있다.

mondaiten7.jpg
요코타 메구미의 병원 차트 기록.
당시의 연령, 정보와 맞지 않는 부분이 다수 보였다.

북한 공작원이자 18살 때부터 한국에서 간첩 활동을 벌이다 체포당하고 현재 한국에 귀화한 김동식(金東植)의 말에 따르면, 공작원 시절 연락부에 있었을 때 카메이(亀井)나, 다나카(田中)라는 이름을 쓰는 일본인 교사가 있었으며 공작원들의 얼굴과 이름 등을 알고있기 때문에 일본에 되돌려 보내면 북한의 어마어마한 국가 기밀이 노출될 염려가 크다는 이유로 '사망확인서'를 조작하여 죽었다고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돌려보내지 않고 있는 것이라 얘기했다.

요코타 메구미는 남편 김은남의 오락가락한 진술 덕에 더더욱 의문점이 많은 상황이며, 다구치 야에코의 경우는 1984년에 사망했다는 북한의 주장과 다르게 86년까지 같은 곳에서 지냈다는 납북 피해자의 증언이 있었기 때문에 북한 측의 말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4 납북 수법

jian_map.jpg
납북된 인원과 납북 장소.

공식 납북자 이외에도 납북된 것으로 추정되는 다수의 인원이 해안가에서 실종되었으며 장소는 주로 동해와 인접한 후쿠이현, 니가타현, 가고시마현이었다.

  • 첫번째, 북한은 해안가에 선박을 정착시킨 뒤 타겟을 정하고 말을 걸어 납치.
  • 두번째, "일을 소개해주겠다"는 방법으로 유인하여 납치.
  • 세번째, 타겟으로 정한 상대가 아니라도 공작원이 본인의 정체를 목격했다고 여겨지면 가리지않고 납치.[1]

첫번째는 1977년 돗토리현의 해안가 인접한 자택 근처에서 납치된 마츠모토 쿄코(松本京子, 당시 29세)로 두 명의 수상한 남성과 대화하고있는 모습이 이웃 주민에게 목격되어 말을 걸었으나 그들에게 습격당해 얼굴이 찢어지는 타박상을 입었고 마츠모토 쿄코는 해안가 방향으로 끌려간 뒤 샌들 한짝만을 남겨두고 납치된 케이스다.

요도호 사건의 범인 중 한명인 오카모토 타케시의 아내 후쿠토메 키미코(福留貴美子)는 73년까지 '유니버스 트레이딩'이라는 간첩들의 비밀 공작 거점이었던 회사에서 일하다가 몽골에 체류한다며 실종되었는데 정확한 루트는 알 수 없지만 두번째 케이스로 추정된다.

세번째는 납북 피해자 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인 요코타 메구미(横田めぐみ)의 경우로, 그녀는 납치 당시 겨우 중학생 정도의 나이였지만 공작원이 되돌아가던 중 목격한 그녀를 자세히 보지않고 납치하였다는 설이 있다.

5 납북자 명단

'특정 실종자 문제 조사회'라는 민간 단체에서 추정하고 있는 납북 일본인 리스트는 1940년대부터 2000년대 초까지 시대불문 400여명이 훌쩍 넘는 인원이지만 정확한 사실이라고 보기 어려우며, 일본 경찰청은 '납북의 가능성이 인정되는 특정실종자' 리스트로 868명을 공개하고있다. '북한에 납치된 일본인을 구출하기 위한 전국 협력회(北朝鮮に拉致された日本人を救出するための全国協議会)', 약칭 '구출회(救う会)'는 공식 납북자 이외에 7명이 더 납북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일본 정부 측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피해자는 납북이라 공식적으로 인정되지 않은 인물은 제외하여 총 17명이다.

5.1 일본 국내에서 납북된 사람

☆표시는 일본에 귀국한 사람이다.

5_kume.jpg
  • 구메 유타카(久米裕, 1925-?, 당시 52세) : 1977년 9월 19일 우시츠 해안가에서 납치. 통칭 '우시츠 사건(宇出津事件)'이라 칭한다. 도쿄 미타카시 관공서 경비원이었으며, 공식 납북자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다. "45세에서 50세 사이의 결혼하지 않은 일본인 남성을 납치하라"라는 지시를 받은 재일 조선인 공작원 이추길(李秋吉)이 해안가에 데려갔고 미리 대기하고있던 김세호(金世鎬)에게 넘겨 공작선에 태워 납치했다. 주범인 김세호는 현재 국제 지명수배 되어있으며 이추길은 기소 유예 처리되었고 현재는 일본인으로 귀화하여 오야마 아키요시(大山秋吉)란 이름으로 도쿄에서 자영업을 하고 있다. 이 사건으로 이시카와현 경찰은 압수한 난수표의 암호를 해독하는데 성공하여 79년 경찰청 장관상을 수상했다. 일본인이 북한에 의해 납북되었다는 사실은 이로부터 한참 후에나 세상에 드러났기때문에 이 당시엔 사건을 철저히 비밀리에 붙이고 단순하게 '불법적으로 한국에 출국한 일본인이 있다'는 얘기로만 작게 보도되었다. 북한에선 공식적으로 이 사건을 부인하고 있다.

yokota.jpg

  • 요코타 메구미(横田めぐみ, 1964-1994?, 당시 13세) : 1977년 11월 15일 니가타에서 납치. 통칭 '소녀납치사안(少女拉致事案)'으로 칭한다. 중학교 하교길에 실종되었으며 당시엔 단순 유괴 사건으로 추정했다. 북한측의 주장에 따르면 1986년 한국인 김영남(金英男)[2]과 결혼하였고 1987년에 딸 김은경을 출산, 1994년에 병원에서 자살하여 1997년에 화장했다고 밝혔다. 2004년 그녀의 화장된 유골이 일본에 전달되었는데, DNA 감정 결과 다른 사람이란 결과가 나왔고 일본은 분노로 들끓었다. 1997년 조선노동당 서기가 당시 일본의 총리였던 하시모토 류타로에게 비공식적으로 요코타 메구미의 생존을 알렸다는 보도가 나온 이후부터 97년 그녀를 화장한 오봉산 화장소도 99년에야 건설되었다는 여러 탈북자들의 진술 등 다수의 증언이 더해져 생존설이 빈번하게 대두되고 있다. 요코타 메구미가 공작원들에게 일본어를 교육했다는 설도 나오고 있다. 또 다른 설로는 김정은의 모친이 일찍 사망했기때문에 그를 돌본 것이 요코타 메구미라는 설도 있는 등 현재까지도 다양한 논란의 중심에 서있는 대표적인 인물이다.(자세한 건 해당 항목 참조.)

2_taguchi_p.jpg

  • 다구치 야에코(田口八重子, 1955-1986?, 당시 22세) : 1978년 6월 29일 납치. 통칭 '이은혜 납치 사안(李恩恵拉致事案)'이라 칭한다. 도쿄의 음식점 점원으로 1984년 오사카 중국요리점 요리사였다가 납북된 하라 타다아키와 결혼하였고 86년 남편이 병사하고 같은 해에 교통사고로 사망, 홍수로 묘지가 유실되었다는 게 북한의 주장이다. 1987년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의 주범 김현희가 '이은혜라는 여성에게 일본인처럼 행동하는 법을 배웠다'라는 증언과 몽타주를 그리게 하여 88년 일본 각지에 '1980년 이전에 행방불명된 이 여성을 알고계십니까?'라는 포스터를 붙이고 대대적으로 조사하기 시작했다. 91년에 들어 1978년에 실종된 다구치 야에코가 '이은혜'와 동일인인 것으로 추정했으며, 김현희와 공작원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쳤던 교관인 것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일본 조사단이 서울에 수감되있던 김현희와 직접 면회, 동년배 여성의 사진 10장을 뿌리고 이 중에서 교육관이었던 사람을 찾으라고 지시했을 때, 김현희가 다구치 야에코의 사진을 보고 정확하게 '이 사람'이라고 얘기함으로써 다구치 야에코=이은혜가 맞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다만 북한은 다구치 야에코가 이은혜임을 인정하지 않고있다.
  • ☆소가 히토미(曽我ひとみ, 당시 19세) : 1978년 8월 12일에 납치.통칭 '모녀 납치 사안(母娘拉致事案)'으로 칭한다. 당시 간호사였던 소가 히토미는 어머니인 소가 미요시(曽我ミヨシ, 1931-?, 당시 46세)와 함께 시장에 다녀오다 니가타현에서 납북[3]된 뒤 1980년 북한에서 월북 미군찰스 로버트 젱킨스와 결혼하여 두 명의 자녀를 두었다. 하지만 2002년 이루어진 북일정상회담에서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김정일과의 회담 시 납북자의 석방을 요구하여 일본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그 뒤 협정에 따라 북한에 남겨진 남편과 아이들도 일본행 비행기를 타게 되었는데, 북한의 세뇌교육을 받은 그들은 일본으로 가는 것을 극도로 거부하여 소가 히토미 본인이 1시간에 걸쳐 설득했음에도 동행하지 않았다. 하지만 7월 찰스 로버트 젱킨스자카르타에서 부인과 재회하여 2004년 가족 모두가 일본에 입국했다. 현재는 일본 영주권을 취득하여 가족과 함께 작은 가게를 차려 살고 있다. 참고로 소가 히토미는 요코다 메구미를 만난 적도 있다고 한다. 어머니인 소가 미요시는 북한에서도 만나지 못했고 북한 당국도 납치를 부인하여, 북한으로 가던 중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북한 측은 소가 미요시의 납치 사실은 부정하지만 일본 측에선 공식 납북자로 인정하고 있다. 현재는 각지로 강연과 집회를 다니며 납북 피해자들의 구명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있다. 납치 당시를 증언하는 14년 인터뷰

timura.jpg

  • ☆지무라 야스시(地村保志, 1955-, 당시 23세), 하마모토 후키에(濱本富貴惠, 1955-, 당시 23세) : 1978년 7월 7일 후쿠이오마바시에서 납치. 통칭 '아베크[4] 납치사안(アベック拉致事案)'이라고 칭한다. 지무라는 목수 견습생이었고 후키에는 옷가게 점원이었는데, 납북 후 79년 북한에서 결혼해 2남 1녀를 두었다. 2002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와 함께 고향 방문 후 북한으로 돌려보낸다는 조건으로 북한에서 귀국을 허용. 일시 귀국했으나 일본 사회에서 그들을 돌려보내선 안된다는 여론이 들끓었다. 본인의 의사도 그러하였고, 수십 년만에 만난 가족들도 그들의 영구 귀국을 일본 정부에 요구하여 결국 정부가 당초 합의를 깨고 그들을 잔류시켰다. 2004년엔 세 자녀도 일본으로 영구 귀국했다.

hasuike.jpg

  • ☆하스이케 카오루(蓮池 薰, 1957-, 당시 20세), 오쿠도 유키코(奥土佑木子, 1956-, 당시 22세) : 1978년 7월 18일 니가타현에서 납치. 위의 지무라 부부와 동일하게 '아베크 납치사안(アベック拉致事案)'이라 불리지만 그 쪽은 후쿠이현, 이쪽은 니가타현이라는 괄호가 붙는다. 당시 츄오대에 재학중이던 하스이케 카오루는 화장품 회사 직원이던 여자친구 오쿠도 유키코와 "데이트에 다녀온다"는 말을 남긴 채 실종되었다. 이들은 카시와자키시의 해변가에서 납치되었고 1980년 북한에서 결혼하여 1남 1녀를 두었다. 요코타 메구미와 다구치 야에코와 같은 구역에 거주했다. 그 후 2002년 납북 피해자들이 일시귀국할 때 일본에 들어와 역시 영구 귀국. 2004년 자녀들도 일본에 귀국했다. 납북 일본인들 중에서도 일종의 리더 격이었다고 한다. 현재는 한국어 번역 등에 종사하면서 대학 교수로 재직중이며[5] 언론과 강의에 얼굴을 비추며 외무성과 납북 문제에 대해 극비로 면담하는 등 납북 피해자 구출에 힘쓰고있다.

3_ichikawa_masumoto.jpg

  • 이치카와 슈이치(市川修一, 1954-1981?, 당시 23세), 마스모토 루미코(増元るみ子, 1953-?, 당시 24세): 1978년 8월 12일 카고시마현에서 납치. 위의 두 부부와 동일하게 '아베크 납치사안(アベック拉致事案)'이라 불리며 이쪽은 카고시마현이라는 괄호가 붙는다. 두 사람은 후키아게가마(吹上浜) 캠프장에서 실종되었다. 북한 측의 주장에 따르면 이들은 1979년 결혼하였고 같은 해 9월 남성이 심장마비로 사망, 여성 역시 81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북한이 언제나 그렇듯 주장하는 시신 유실과 둘 다 젊은 나이에 심장마비라는 부자연스러운 사인때문에 거짓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한국으로 귀화환 전 북한 공작원 안명진은 90년대까지 그들을 몇번이나 봤다고 증언하고 있다.

5_matsumoto.jpg

  • 마츠모토 쿄코(松本京子, 1948-?, 당시 29세): 1977년 9월경 카토리현에서 납치. 납치 당시 목격자가 있는 유일한 인물이다. 그녀는 오후 8시경 자택 근처 뜨개질 교실로 향하던 중 수상한 2명의 남성과 마주쳐 이야기를 하던 모습을 인근 이웃이 목격하였는데, 한명은 망을 보는 듯한 매우 수상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그들에게 "여기서 무엇을 하고있나?"라고 말을 걸자 남성 중 한 명이 그를 구타하였고 마츠모토 케이코는 해변가로 끌려가 샌들 한 짝만이 발견되었다. 실종 직후 수상한 배 한척이 목격되었고 일본 경찰이 수상한 전파 교신을 감청했다. 이후 북한의 청진에 살고있으며 일본의 한 회사 관계자가 북한의 무역회사 직원과 통화했을 때, 자신을 '쿄코'라고 칭했던 여성이 그녀라고 추정된다. 우리나라에서도 납북자가 다수 있기때문에 일본의 납북자 가족들과도 접촉이 잦은데, 우리나라에서 조직한 납북자 가족회의 조사에 따르면 거주지가 2011년 청진에서 평양으로 옮겨졌으며 북한에서 결혼하였고 아이는 없다는 정보를 입수. 한국국가정보원도 같은 의견을 보이고 있으나 일본 정부측은 조사중이라는 이유로 별다른 의견을 보이지 않고있다. 그런데 2013년 라오스에서 탈북했다가 북한으로 강제송환된 9명 중 없다고 여겨진 마츠모토 쿄코의 아들이 속해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고 동아일보가 취재했다. 2016년 평양의 한 병원에 입원해 있다고 교도통신 등 일본 언론이 최성룡 납북자가족모임 대표의 주장을 인용해 보도했다.

2_hara.jpg

  • 하라 타다아키(原敕晁, 1936-1986?, 당시 43세): 1980년 6월경 미야자키현에서 납치. 통칭 '신광수 사건(辛光洙事件)이라 칭한다. 당시 재일교포 오사카 상공회 이사장이었던 이삼준(李三俊)이 경영하던 중국집 국해루(宝海楼) 조리사였다. 북한의 지령을 받고 공작 활동을 벌이던 신광수는 하라 타다아키를 납치 후 그로 위장하여 일본에 입국, 여권, 운전면허증, 국민건강보험증까지 취득하며 국내외에서 간첩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다 85년 한국에서 체포되었고, 하라 타다아키가 납북당한 것이 세상에 드러났다. 한국명은 박철수이며 돈벌이와 지병치료를 위해 해외로 가길 희망하던 차 북한 공작원이 접촉하여 엔화 100만엔과 북한입국을 허가하는 대신 하라 타다아키 본인의 호적등본을 맞교환하는 조건으로 미야자키현 해안에서 북한으로 데려갔다는 것이 북한 측의 주장이다. 84년 다구치 야에코와 결혼했으나 2년뒤 황해북도 임산에서 간경변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이후 다구치 야에코와 같은 묘에 묻혔지만 역시나 홍수로 시신이 유실되었다는 게 북한 측의 주장. 신광수는 99년 석방되었고 당시 김대중 정권의 '비전향 장기수 송환' 정책에 따라 북한으로 송환되었다. 체포되어 옥살이까지 했기에 돌려보내지면 처형이 당연시되는 게 북한이지만 신광수의 공적이 크다고 여긴 김정일은 가문의 영광급이자 최고 등급인 국가 훈장 1급까지 부여하고 기념 우표에도 얼굴을 싣게해주는 등 영웅으로써 대접을 톡톡히 해주었으니 신광수는 북한에서 한사람의 인생을 말아먹고도잘먹고 잘살고있을 것으로 보인다.

5.2 일본 국외에서 납북된 사람

4_ishioka_matsuki.jpg

  • 마츠키 카오루(松木薫, 1953-1996?, 당시 26세): 위 사진에서 왼쪽. 해당 사건은 통칭 '유럽에서 일어난 일본인 남성 납치 용의 사안(欧州における日本人男性拉致容疑事案)'으로 칭한다. 1980년대 활발했던 북한 공작원의 유럽 진출유럽 납치 사건이라는 큰 틀에 놓여있는 사건이다. 1980년 5월 스페인 유학중 마드리드에서 행방불명되었으나 북한에 거주하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북한측은 '공작원에게 본인이 스스로 북한으로 가길 희망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요도호 사건 주범들의 부인이자 북한의 지령을 받고 공작원 활동을 펼치던 모리 요리코(森順子)와 와카바야시 사키코(若林佐喜子)[6] 두 여성에 의해 납치된 것으로 드러났다. 납치 목적은 공작원의 일본어 교육관으로 이용하기 위해서이며 한국명은 '임청수'이고 96년 혁명사 유적지를 참관하러 가던 중 함경남도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했다고 북한 측은 밝혔다. 2002년 북한에 파견된 일본 조사팀이 유골을 인도받았으나 DNA 감정 결과 요코타 메구미와 동일하게 가짜 유골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며 또 다시 일본의 분노를 일으켰다.
  • 이시오카 토오루(石岡亨, 1957-1988?, 당시 22세): 위 사진에서 오른쪽. 1980년 스페인에서 납치되었다. 마츠키 카오루와 함께 납치되었으며 1985년 납북 피해 여성인 아리모토 케이코와 북한에서 결혼하였고 다음해 장녀를 출산하지만 88년 가스 중독으로 일가 모두 사망했다는 것이 북한 측의 주장이다. 역시 시신은 홍수로 유실되었다는 이유로 확인되지 않았다. 핑계는 모두 유실 1988년 마츠키 카오루와 아리모토 케이코와 함께 북한에 있다고 적힌 그의 편지가 도착했다. 이시오카 토오루의 직필 편지였으며, 'Please send this letter to japan'이라 쓰여진 자그맣게 접힌 편지의 글귀로 보아 어떠한 루트로 비밀리에 보내진 것으로 추정. [7] 편지에 그들의 사진이 동봉되어있었는데, 이시오카와 아리모토 사이의 딸로 추정되는 아기의 사진이 있었다. 그의 여권은 북한에서 위조 여권의 기본 샘플로 사용되어 북한 공작원들과 요도호 사건 그룹에게 유효기간은 같고 여권 번호만 다른 위조 여권으로 뿌려졌다고 한다.(...)
0403yodo02.jpg
letter.gif
이시오카 토오루가 보낸 편지.

4_arimoto.jpg

  • 아리모토 케이코(有本恵子, 1960-, 당시 23세): '유럽에서 일어난 일본인 여성 납치 용의 사안(欧州における日本人女性拉致容疑事案)'의 피해자이다. 1983년 영국 런던 유학중이던 그녀는 6월 본가로, '8월 9일에 싱가폴을 거쳐 오사카에 17시 15분 비행기로 도착한다'는 편지를 보냈으나 일본으로 귀국하기로 예정되어있던 당일날 '일을 찾았다. 귀국이 늦어진다. 케이코(仕事が見つかる 帰国遅れる 恵子)'라는 전보가 본가에 도착했다. 그 후 코펜하겐에서의 편지를 마지막으로 소식이 끊겼다. 그녀의 부모는 외무성과 경찰에 백방으로 수소문했으나 어느 곳도 대응해주는 곳이 없었다. 그 후 북한에 있다고 확인된 것은 5년뒤인 88년 이시오카 토오루에게서 보내진 편지에 의해서였다. 한국명은 김현숙이며 84년부터 88년까지 평양 근교의 여관에서 일본어를 가르쳤으나 88년 가스 중독으로 사망했다는 것이 북한 측의 주장이다. 그러나 북한이 공개한 사망신고서에 기재된 생년이 달랐으며 91년까지도 생존해있었다는 증언이 있었다. 요도호 사건 범인들의 부인 중 한 명인 야오 메구미(八尾恵)가 체포 후 본인이 그녀를 납치했다고 밝혔기에 납북이 공공연한 상황이지만 북한측은 그녀의 납북을 인정하지 않고있다.

5_tanaka.jpg

  • 타나카 미노루(田中実, 1949-, 당시 28세): 1978년 6월 납치. 통칭 '전 음식점 점원 납치 용의 사안(元飲食店店員拉致容疑事案)'으로 칭한다. 라멘 가게의 종업원이었으나 점주이자 북한의 지령을 받은 공작원에게 오스트리아 빈을 경유하여 북한으로 납북되었다. 북한 측은 그의 납북을 부정하고있다.

5.3 일본 정부에서 인정하지 않은 납북자

  • 테라코시 타케시(寺越武志, 1950-, 당시 16세): 1963년 5월 11일 노토 반도에서 작은 아버지인 테라코시 쇼지(寺越昭二, 당시36세), 테라코시 소토오(寺越外雄, 당시 24세)와 함께 고기잡이를 나갔다가 어선만이 표류된 채 실종. 시체를 발견하지 못하고 호적상 사망 처리되었으나 25년이 지난 1987년 테라모토 소토오의 편지로 북한에서 살아가고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단, 북한의 세뇌교육 탓인지 몰라도 자신들은 납치된 것이 아니라 북한의 어선이 구출해준 것이라고 얘기하고있어 납북 피해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전 공작원 안명진의 증언은 상이하여, '공작선이 일본 어선에 목격되어 가장 어린 아이를 감싸던 연장자를 총으로 살해하고 나머지는 북한에 끌고갔다고 얘기하였고 이 쪽이 신빙성이 있어보인다. 이들은 납북자 중에서도 굉장한 특이 케이스로, 테라코시 타케시의 부모인 타자에몬(太左エ門)[8]과 토모에가 방북하여 이들과 재회한 이후 토모에는 2014년까지 62회 가량 북한에 드나들며 아들을 만나고 있고[9] 타자에몬은 2001년 방북하여 아예 눌러살고있다.(...) 아마 북한에 제일 많이 간 일본인일듯. 이 두 부모는 북한에 외화를 갖다바친다는 등 주변 사람들의 비판을 듣고있다. 테라코시 타케시의 한국명은 김영호이며 현재 조선노동당원으로 평양 직업 총동맹위원장이란 고위직에 속하고있다. 2002년 북한 노동당 대표로까지 일본에 방문했을 정도이니 말 다한 듯하다. 더불어 방일 시 본인의 고향 본가에 묵었으며 "넌 일본인이니 일본의 여권을 소지해야한다"는 모친의 말에 "나는 조선민주주의 공화국의 인민입니다. 김정일 수령님의 배려 덕분에 무엇 하나 부족함없이 살고있습니다"라고 대답하며 스스로 일본 국적을 거부했다. 북한에선 일본의 경제 원조를 이끌어내기 위한 대일 문제의 카드로써 이용되고 있다. 함께 실종된 테라코시 쇼지는 '배 위에서 총격당해 살해되었다'는 설과 '침대에 떨어져 사망했다'는 두 가지 설이 있으나 안명진의 발언대로 첫번째 설이 유력하다. 소토오는 94년 귀성(亀城)에서 간암으로 사망했고 함께 살고있던 부친 타자에몬은 2008년 평양에서 86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 카토 쿠미코(加藤久美子, 당시 22세): 1970년 8월 8일 후쿠오카시에서 납치(추정). 88년부터 90년까지 김정일 정치 군사 대학에서 요코타 메구미와 함께 있었던 여성으로 추정된다. 현재로써의 증거는 안명진이 그녀와 닮은 여성을 봤다는 증언밖에 없기때문에 공식 납북자로 인정되지 않고있다.
  • 후루카와 노리코(古川了子, 1955-, 당시 18세): 1973년 7월 7일 치바현에서 납치(추정). 오전에 미용실을 다녀온 뒤 오후에 모친과 유카타를 사러 쇼핑을 나갈 예정이었으나 미용실에 전화를 걸어 "예약을 취소하고 어머니에게도 쇼핑에 못 갈 것같다고 전해달라"고 말한 뒤 소식이 끊겼다. 역시 안명진이 91년 평양에서 병원에 있던 여성과 닮았다는 증언 이외엔 짚히는 점이 없다.
  • 코스미 켄조(小住健蔵, 1933-, 당시 46세): 1961년부터 행방불명되었으나 납북은 1980년으로 보인다. 1985년 (朴)씨로 알려진 공작원이 코스미 켄조인 것처럼 위장하던 것을 일본 경찰이 적발하고 지명수배했으나 잡지못했으며 현재도 국제지명수배 중이다. 이 공작원이 소속된 회사 사장 미야모토 아키라(宮本明), 한국명 이경우(李京雨)라는 인물은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의 주범이었던 공작원 김승일이 소지한 일본 위조 여권을 지인에게 만들게 했으며 다구치 야에코가 일하던 가게 손님이었던 등 납북자와 관련이 많은 거물 공작원이다. 코스미 켄조는 당시의 나이로 보아 현재는 사망했을 것으로 보인다.
  • 후쿠토메 키미코(福留貴美子, 1951-1988?, 당시 25세): 요도호 사건의 범인 오카모토 타케시의 아내로 1976년 여름 실종되었다. 하네다 공항을 출발하여 홍콩, 북경을 경유하여 북한에 납치된 것으로 추정. 당시 그녀는 요도호 사건 주범의 아내 야오 메구미에게 "동경하던 몽골로 가려고 했는데 여기까지 오게되어버렸다"고 말했다고 한다. 73년까지 북한의 비밀 공작 거점이었던 가짜 회사 '유니버스 트레이딩'의 파견직으로 근무하였는데 이것을 계기로 공작원에 눈에 들어 타겟이 된 것으로 보인다. 같은 해 8월 후쿠토메의 본가로 '어느 공산국에 와있다, 외국에 좀 더 체제해야되겠다는 편지가 도착, 그 후 북한에서 오카모토와 결혼하여 두 명의 자녀를 낳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 1980년 3월 9일 일본에 모습을 드러냈고 요코하마의 친구 집에서 11일간 숙박한 뒤 '오사카에 다녀온 후 집으로 돌아간다'는 말을 남겼으나, 몇달 뒤 오사카 국제공항에서 출국한 기록만 남긴 채 또 다시 모습을 감췄다. 그 후 일련의 조사로 오카모토 타케시의 아내가 고치현 출신 후쿠토메임이 1996년 아사히 신문을 통해 보도되었다. 요도호 사건의 멤버이자 북한에 거주중인 코니시 타카히로가 그녀의 부친 앞으로 보낸 편지에선 88년 토사 붕괴로 남편과 함께 사망했다고 적혀져있었다. 야오 메구미에 의하면 "제가 아는 한, 오카모토씨와 그 부인은 망명 후 요도호 그룹이 주체사상을 따르는 것에 반감을 갖고있었기때문에 세뇌 교정을 위해 격리되었고 결국 죽음이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고 얘기한 것으로 보아 처형당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하지만 일본 정부측은 2004년 후쿠토메를 방문이 제한되있던 북한에 필요한 서류도 없이 들어간 혐의로 체포장을 발부하며 사망을 인정하지 않았다. 다행인 것은 그들의 두 자녀는 2002년2004년 차례대로 일본에 귀국했다.

이 외에 야마모토 미호 실종 사건북한 공작원과 일본인 여인 사이에 낳은 아이들이 북한으로 끌려간 사건이 있다. 매스컴 등지에서도 해당 사건은 확실시한 정보로 인정되고있으나 일본 정부측은 여러가지 요건에 의해 미인정하고 있다. 자세한 것은 해당 항목 참조.

6 후폭풍

2002년 북일정상회담에서 김정일이 공식적으로 납북 일본인 사안을 인정하고 사과함으로써 일본충격과 공포에 휩싸였으며 온 매스컴과 국민들이 입을 모아 북한을 강하게 비난했다. 이제껏 단순 실종자로 처리되었던 장기 실종자들의 꽤 상당수가 북한에 의한 납북인 것이 사실시 되면서 그에 따른 구명 운동이나 피해자 가족들의 움직임도 바빠졌으며 '블루리본 운동회'라는 납북 피해자 구명 운동과 단체들도 속속들이 생겨났다. 1998년 대포동으로 대변되는 북한의 미사일 실험 등으로 대북 여론이 극도로 험악했던 터에 조총련은 이 일로 극도로 이미지가 나빠졌으며, 덩달아 혐한 감정까지 심화되었다. 한국에도 납북자가 수두룩한데

이 사안은 2004년 미국 의회가 '북한 인권법(North Korean Human Rights Act of 2004)'을 제정할 정도로 문제가 커져, 2006년 미국 대통령인 조지 부시 대통령과 납북 피해자인 요코타 메구미의 부모 요코타 시게루, 사키에씨가 미국에서 직접 대면하게 되었다. 이에 북한을 자극하고 싶지 않았던 당시 한국의 여당 열린우리당은 유감을 표시했지만 납북자 가족회는 미국 정부에 경의를 표했다.

김정일에서 김정은으로 정권이 바뀐 2013년일본 정부에서 '납치 문제 대책 본부'를 새로이 설치하여 납북 문제가 해결되기 전까지 일본북한의 국교정상화는 없다는 방침을 강화했고 아베 신조 총리는 "내 사명으로써 내가 최고책임자로 있을 때 확실하게 이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고 발언했다. 2014년 아베 총리는 납북 일본인 문제의 추가 조사를 요구하였고 북한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일본은 경제 제제를 일시적으로 풀었다. 이로 인해 일시적으로 북일 관계가 호전되는 듯 했으나, 북에서는 질질 끌다가 '조사해보니까 더 없다' 고 발표하여 일본을 엿 먹이고 재조사 기간을 더 달라며 일을 질질 끌면서 조사 결과를 안 말하는 등 아베 신조를 단단하게 애태운다. 아베 신조 내각이 납북 일본인 구출을 필생의 숙원으로 삼은 걸 김정은이 갖고 노는 셈이다. 대단하다 대단하다 돼지새끼

한국의 공식 납북자는 전후 일본인 납북자의 수백배가 넘는 3,835명으로 추정되며 일본인 납치 문제에 대해 이렇다 할 논평은 잘 나오지 않고 있다. 아무래도 일본보다 훨씬 많은 인원이 납북된 터라 남의 납북 문제에 관심 둘 여력이 없고 반일 감정과 역사왜곡에 대한 반감으로 믿지 않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7년 남북정상회담에서 납치자 문제에 대해 생트집을 잡는다고 비판할 정도였고 심지어는 조선일보 만평에서조차 김정일일제시대 조선인 강제징용을 들먹이며 고이즈미 총리를 데꿀멍시키는 내용이 나올 정도.조선일보가 노무현 편을 들었다. 이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한지 그래도 한국과 일본은 납북 문제에 대해 지속적으로 협의하고있으며, 한국과 일본의 납북자 가족 또한 서로 연결고리가 매우 깊기때문에 함께 모여 송환 촉구 대회와 간담회 등을 열며 교류하고 있다.

한편, 증언자였던 안명진은 통일부 공무원을 북한 공작원이라고 잘못 말한 걸 계기로 일본 방송에서 섭외가 끊겼고 그 뒤 메타암페타민 밀수를 하다가 구속되어서 일본에 충격과 공포를 안겨주었다. 왜냐고? 돈을 벌려고 마약 밀수도 한다면 그 동안의 증언도 출연료를 위해 어떻게 윤색했을지 알 수가 없으니까. 이 사실이 보도되고 서울 주재 일본 특파원들은 멘붕에 빠졌다.

파일:사죄와 배상을 요구한다.png

또한 이 사건은 평소에 한국이 사죄와 배상을 요구한다고 비웃던 일본이 한국에게 오히려 사죄와 배상을 요구한 드문 사례이기도 하다. 그 한국이 그 한국이 아닐텐데? 자국에서 즐겨 쓰던 혐한 네타를 자국에서 진지빨고 쓰는 이 괴이한 사례를 뭐라고 해야 할까. 따지고보면 식민지배 받았던 나라가 식민지배국을 핵미사일로 위협하는 일도 흔하지 않다. 대단하다 대단하다 북괴놈들 그래도 이것보다 나으려나.

7 납북 피해자 구명을 위한 노력

blueribbon.gif
납북 피해자 구명 운동의 상징인 블루리본.[10]

일본 내 민간 단체인 '특정실종자문제조사회'는 구출 활동을 위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으며 2005년 납북 일본인을 주 청취자로 하는 대북방송 '시오카제'를 개국, 2007년에는 일본 정부대북방송 '일본의 바람'을 개국하여 방송하고 있다. 자세한 사항은 시오카제일본의 바람 참조.

2005년 일본 정부에서 요코타 메구미 사건을 애니메이션으로 재구성한 '메구미(めぐみ)'를 제작하여 일본어판, 한국어판, 중국어판, 영어판, 러시아판을 더빙으로, 프랑스판, 스페인판, 독일판, 이탈리아판, 타이판을 자막으로 무료로 배포하고 있다. 해당 애니메이션은 일본 전국의 초, 중, 고등학교와 국회의원, 방일한 외국의 정치인사와 대사관 등에 다방면으로 상영하고 있다. 일본판 성우는 요코타 메구미역에 타카야마 미나미, 메구미의 부모역에 야마데라 코이치후카미 리카, 미키 신이치로등 내노라하는 유명 성우들이 노개런티로 참여하였다. 영상은 유투브일본 정부 공식 사이트에서 시청할 수 있다. 2006년에는 크리스 셰리던, 패티 김 감독이 요코타 가족의 활동을 다큐멘터리로 촬영한 영화 '메구미'가 상영되기도 하였다.

일본 정부에서도 북한과 2014년 스톡홀름 합의를 본 적 있으며, 4차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로 인해 독자 대북제재로 인해 북한이 대북제재를 반발해 납치 문제 조사 중단과 조사위원회 해체를 선언했다. 5차 북핵 직전에 중국에서 납북 일본인 논의해왔다고 보도했다. #

8 같이 보기

  1. 요코다 메구미도 이것 때문에 납치 되었다는 설이 있다
  2. 최초엔 북한인 '김철준'으로 알려져있었으나 1978년 군산 선유도 해안가에서 납북된 고교생 김영남인 것으로 판명났다. 2006년 이산가족상봉에서 부모와 극적으로 재회하였고 현재 그에 대한 한국 송환 압박도 강해지고 있다.
  3. 모친과 귀가길 얘기하며 걷던 중 남자 3명이 천천히 뒤를 따라오는 것을 느꼈고 "이상한 남자들이 쫒아와 기운이 안좋으니 빨리 돌아가자"고 말하며 걷고있었다. 그 때 남자들이 두사람을 습격에 각자 따로 끌고가 자루에 넣어 공작선에 실었다. 그것이 모친을 본 마지막이었다고 한다. 그 후 하루가 지나 북한의 청진항에 도착했다.
  4. 프랑스어이며 일본에서는 '연인', '남녀 동반'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5. 첫 번역 작품이 하필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을 다룬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였다. 납북 일본인이 하필 한일 양국간 논쟁적인 임진왜란, 그것도 이순신을 다룬 소설을 번역해서 화제가 됬다고 한다.
  6. 결혼을 미끼로 유괴했다고 확인되며 현재 국제 지명수배되어있다. 이들 외 요도호 사건 범인들의 부인들은 2001년 여권법 위반으로 일본 귀국 후 체포되어 징역형을 살고있다.
  7. 편지는 폴란드 소인으로 쓰여있었지만 뒷면에 '이시오카가 평양에서'라고 쓰여져 있었다.
  8. 1921년생이라 굉장한 옛날 이름이다.
  9. 북한에 가는 만만치않은 비용은 모두 청소부로 일해서 번 본인의 돈으로 충당하고 있다.
  10. 청색은 피해자의 조국 일본과 북한에 가로놓인 '동해의 파랑'과 피해자와 가족을 유일하게 연결하고 있는 '푸른 하늘'을 상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