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레드 노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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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fred Bernhard Nobel

1833년 10월 21일 ~ 1896년 12월 10일

스웨덴의 사업가, 노벨상의 제정자.

위인전에 의하면 어린 시절부터 폭약에 관심이 많아서, 깡통에 흑색화약을 꽉꽉 채워넣고 터트려서 대폭발을 일으키고 동네 난리나게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당연히 노벨도 크게 다쳐서 한동안 움직이지도 못했다고 한다. Don't try this at home.

1 죽음의 상인

아들보다 덜 유명하지만, 아버지인 임마누엘 노벨도 발명가로서 크림 전쟁 당시 기뢰지뢰를 개발, 러시아군에 납품한 인물이다. 하지만 전쟁에서 진 러시아 제국은 그에게 보상하지 않았고 승자인 연합군에게도 찍혀서 무기공장은 파산했다. 결국 노벨과 두 형, 아우들은 유럽 각지에서 온갖 일을 하며 돈을 모아 공부해야 했다.

나중에 러시아의(현재는 아제르바이잔) 바쿠 유전을 두 형과 함께 개발하여 큰 돈을 벌었다. 그런데 바쿠 유전에 방화로 추정되는 불이 나서 다 타버리는 바람에 손해를 좀 많이 입었다고 한다.

니트로글리세린을 이용한 폭약 사업을 시작했는데, 당연히 이 위험하기 짝이 없는 물질을 제조하는 공장을 환영하는 마을은 어디에도 없었다. 노벨은 니트로글리세린에 달군 쇠를 넣어 보이는[1] 등 안전성을 홍보했다고 하는데 그다지 믿지 않았던 듯….

그렇게 공장을 지어 잘 돌아가는 듯 했는데…. 1866년 공장이 폭발해서 간부인 동생 에밀과 직원 4명 및 지나가던 사람 1명이 사망했고 욕을 푸짐하게 얻어먹으며 보상을 치룬 다음 할 수 없이 호수 위에 배를 띄우고 그곳에 공장을 차렸다고 한다. 더불어 아버지는 에밀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 쓰러져 장애인이 되었다가 1872년 세상을 떠났다.

노벨은 폭약을 안전하게 만드는 연구를 해야 했고, 결국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했다. 초반에 약간의 저작권 분쟁도 있었지만 힘세고 강한 폭발력이 뛰어나고, 안정성이 좋아서(?) 취급하기에도 편리하고, 이름도 멋있는 다이너마이트[2] 광산업에 쓰이는 등 널리 사용되었다. 그리고 전쟁터에도 투입되어 수많은 사람을 죽였다.(…) 처음으로 본격적으로 쓰인 것은 보불전쟁 때로 프로이센 군이 프랑스 군을 신나게 날려버릴 때 참 많이 썼다. 하지만 이 덕에 노벨이 돈을 많이 벌었으니 아이러니한 일.

그럼에도 가정적으로는 불우하여 평생 독신으로 지냈다. 사실 좋아하던 여성이 있었으나 아버지가 가난하다고 반대하여 끝내 헤어진 적도 있다. 프랑스에서 여자를 만나 한 차례 사귄 적도 있으나 여인의 사망으로 인해 비극으로 끝을 맺기도 했다. 그 밖에 너무나도 짝사랑하여 1년에 216통 편지를 보내며 사랑을 고백했지만 상대는 노벨을 개무시했던 적도 있다. 우습게도 노벨이 죽고나서 노벨상으로 유명해지자 그 편지를 팔아 돈을 벌던 그 여성은 노벨의 아내로서 그 막대한 재산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뻥을 치다가 실컷 욕을 먹었고 말년에는 정신이상으로 비참하게 죽었다.꼴좋다.

2 노벨상의 제정

프랑스에서 18년 동안 살았으나 무련화약 발명을 두고 특허권 분쟁으로 프랑스를 떠나 스웨덴 시골에서 나머지 5년을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말년에는 후회하여 (노벨은 방법이 달라도 인류 평화가 궁극 바람이었으니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켰을 수도 있지만...) 인류에 공헌을 하기 위해 자기 재산을 기부하고 노벨상을 만들었다..."는 훼이크고 사실 자신의 형 루드비히 노벨이 죽었을 때 알프레드 노벨이 죽은 것으로 오보가 났었다. 문제는 이 기사가 '죽음의 상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노벨을 비난한 것. 이걸 본 노벨이 '내가 그냥 죽으면 욕 엄청 먹겠지' 하는 생각으로 만들었다 한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잘 알려지지 않고 그냥 노벨의 선행으로만 알려졌으니 결과적으로는 아주 훈훈하고 좋은 이야기가 되었다.

독신으로 살다가 죽었는데 그의 막대한 재산을 두고 친척들이 서로 차지하려 소송을 했으나 결국 그의 뜻대로 노벨상이 만들어지게 된다.

그는 심장병이 있어서 니트로글리세린을 약으로 먹었는데 현대 의학에서도 협심증 및 심근경색 등 심장질환에 니트로글리세린을 사용한다.

3 평가

사실 다이너마이트가 사람들을 죽였다고 착각하기 쉬운데, 진짜 전쟁에 투입된 것은 콜로디온과 니트로글리세린을 배합한 바리스타이트. 이는 노벨이 어떻게 하면 다이너마이트를 강력한 군사 무기로 쓸 수 있을까?하고 고민하다가 만들어진 대작이다. 그렇다고 노벨이 전쟁을 좋아해서 그랬던 것은 아니고, 내가 이렇게 무시무시한 무기를 만들었으니 이제 다들 전쟁할 엄두를 못 내겠지?라는 생각이었다. 지금으로치면 '핵폭탄 들고 있으니 못 건드리겠지?'와 비슷하다. 비슷한 생각을 한 사람으로 개틀링 박사가 있다. 허나 두 사람의 발명품은 모두 훌륭한 대량 살상 무기가 되어버렸다. 사실 두 사람의 이상이 완전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는데, 20세기 중반에 특정 국가군을 대상으로 하여 좀 이상한 형태로 실현되었다. 일부 국가들에 한해서는 여전한 이유로 현재도 유지 중.

노벨의 유명한 말인 '내 발명품이 평화 조약보다 더 빠른 평화를 불러올 것이다' 는 주트너 남작부인[3]이 노벨에게 평화 회의 참석을 부탁했을 때 대꾸한 말로 유명하다.

노벨이 정말로 평화를 지향해서 그런 건지 그냥 비난을 피하기 위한 발언인지는 알아서 판단하자.

노벨의 명성은 오히려 다이너마이트보다도 노벨상의 제정으로 인해 유지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니트로글리세린을 규조토에 흡수시켜 안전한 폭탄을 만들었다는 정도로 백년 이상 이름을 기억해줄 만큼 세상이 만만하지 않다. 물론 이 정도 업적으로는 노벨상을 받기도 어렵다 당장 니트로글리세린의 합성자 이름(아스카니오 소브레로)을 세상이 전혀 기억해주지 않는 것[4]을 생각해보자.

다이너마이트 발명에 밀려 잘 안 알려져 있지만, 그의 회사는 초기 자본주의 사회의 근무 여건들을 생각할 때 매우 파격적으로 직원들의 급여와 복지 수준이 높았다. 말단 사원이나 공장 막노동자조차 다치게 되면 의무실로 가서 의사에게 무료로 진료를 받을 수 있었을 정도였다.역시 스웨덴[5][6]
  1. 사실 노벨이 니트로글리세린의 특성을 잘 알아서 이런 곡예를 해보인 거라고 한다. 절대로 따라하지 말자.
  2.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다이너마이트는 노벨이 붙인 상품명이었다. 고로 보통명사가 된 고유명사들.
  3. 1843~1914/ 소설가이자 평화운동가로 '사람은 무기를 버려야 한다!'는 급진적인 사상을 가졌다. 하지만 노벨과 이 문제로 다투긴 해도 굉장히 친하게 지냈다. 덕분에 노벨의 장례식에도 참여했으며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노벨상(1905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그녀가 쓴 소설 <무기를 버려라>는 국내에서도 번역 출판되었다.
  4. 1812~1888.이탈리아 화학자. 그래도 노벨이 다이너마이트로 큰 돈을 벌고나서 그를 잊지않고 그에게 경제적 보상을 하기도 하며 우대한 바 있다.
  5. 하지만 노벨 일생 동안 스웨덴에서 산 기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부유해지자 독일, 스코틀랜드,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지에 집을 구해 돌아가면서 살았다. 빅토르 위고는 노벨을 "백만달러를 가진 방랑자"라고 불렀을 정도.
  6. 다만 노벨의 공장은 에밀의 죽음 이후 스웨덴에서 재건되었고 이후 독일인의 투자로 독일로 옮겨가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