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사신

盧思愼
1427(세종 9)∼1498(연산군 4).

1 개요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교하. 자는 자반(子胖), 호는 보진재(葆眞齋)·천은당(天隱堂).

1451년(문종 1) 생원시, 1453년(단종 1)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곧 집현전박사에 선임되면서 관직에 나아갔다.

1463년에는 도승지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홍문관 직제학을 겸하여 세조가 주석(註釋)한 역학계몽(易學啓蒙)의 주석서 요해 (要解)를 증보하여 편찬하고 불경을 한글로 번역하기도 하였다. 1465년에는 호조판서가 되어 최항과 함께 경국대전 편찬을 총괄하였다. 같은 해에 호조판서에 임명되었다. 1467년 말에는 건주위 여진족 정벌의 공으로 군공 2등을 받았다. 1468년에는 남이, 강순 등의 역모를 다스린 공으로 익대공신 3등에 올라 선성군(宣城君)에 봉해졌다.

1471년에는 성종 즉위를 보좌한 공으로 좌리공신(佐理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1482년에는 선성부원군(宣城府院君)으로 진봉(進封)되었다.

1492년에 좌의정, 1495년에는 영의정에 올랐다.

훈구파의 일원으로 사림파들에게는 엄청난 경계와 비판의 대상이었다.[1] 그러나 무오사화 때는 대승적 차원에서 사림파를 구제하려고 노력하였다. 이것이 실패하고 몇 달 뒤 신이 바라는 것은 특별한 것은 없으나, 다만 경연에 부지런히 임하시고 형벌과 시사는 법도에 맞게 하소서. 라는 유언을 연산군에게 남기고 사망한다. 연산군 초기에 연산군을 많이 지지해준 경력덕인지 자기랑 함께했던 훈구파인 이극균,한치형.성준,이세좌등이 갑자사화때 끔찍한 결말을 맞은것과는 달리 본인은 무덤속에서 편안히 있었다.[2]

2 사극에서

  1. 이유는 연산군과 대간간의 대립때 연산군의 편을 들었기 때문인데 그때문에 늘상 간신이란 딱지가 붙어야 했다.
  2. 한치형도 그때 무덤속에 있었는데 끌려나와 부관능지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