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종(조선)


조선의 역대 국왕
4대 세종 이도5대 문종 이향6대 단종 이홍위
묘호문종(文宗)
시호
흠명인숙광문성효대왕(欽明仁肅光文聖孝大王)
공순(恭順)
본관전주(全州)
능묘현릉(顯陵)
이향(李珦)
휘지(輝之)
출생지한성 사저
사망지한성 경복궁 강녕전
배우자현덕왕후(顯德王后)
아버지조선 세종
어머니소헌왕후(昭憲王后)
생몰
기간
음력1414년 10월 3일 ~ 1452년 5월 14일
양력1414년 11월 15일 ~ 1452년 6월 1일 (37년 6개월 16일, 1만 3713일.)
재위
기간
음력1450년 2월 17일 ~ 1452년 5월 14일.
양력1450년 3월 30일 ~ 1452년 6월 1일 (2년 2개월 2일, 794일.)
조선의 역대 왕세자
세종 이도문종 이향단종 이홍위

1 개요

한국사의 유례 없는 과학자 군주.[1]

조선의 제5대 임금. 세종의 장남. '태조 - 태종 - 세종 - 문종'으로 이어지는, 조선 초기를 하드캐리먼치킨 부자 라인의 마지막 임금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상 조선 초반 전성기를 구가한 마지막 임금. 다만 16세기 조선이 초기의 건강함은 잃었어도 그렇게 막장은 아니었다. 그래서 임진왜란 이후 300년을 더 간 것이다. 단지 세조대를 시작으로 조선의 색채가 바뀌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대중 매체에서는 흔히 계유정난의 프롤로그에서 다뤄져서 병약하거나 잠깐 재위하는 모습으로만 그려지지만, 실제로는 과학적 업적은 물론 병법에도 조예가 깊었다. 한 마디로 실존했던 엄친아. 군사적 업적도 만만치 않아서 그의 업적을 아는 사람들은 농담 삼아 밀덕후라고도 부른다.

세종 치세 말기에 세종의 건강이 악화되자, 세자로서 7년간 대리청정했다. 때문에 세종 치세 말기는 사실상 문종의 치세라고 봐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세종의 3년상을 치른 뒤 급격히 건강이 악화되어 단종을 남겨두고 세상을 떠났다. 그리하여 재위 기간은 매우 짧다.

조선 왕조 역사상 최초의 적장자 출신인 임금이다. 정종, 태종, 세종 모두 적자이긴 했으나 장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태어났을 때 세종은 왕세자가 아니었기 때문에(충녕대군 시절), 태어날 때부터 금지옥엽인 왕의 원자나 원손은 아니었다. 이 경우로서 최초로 왕위에 오른 사람은 그의 아들 단종이다.

그가 재위 기간 동안 업적을 낸 부문은, 세자 시절부터 관심을 가져온 군사 부문이다. 신기전을 100발로 추가시키고, 오행사상에 기초한 오위진법을 저술했다(병력 편제, 결진, 용병, 군령, 장표, 전투 훈련). 이 오위진법의 이론에 따라 군사조직도 기존의 12사 체제에서 5사 체제로 개편되었다. 과연 이성계의 증손자라고 할 수 있다.

2 외모

기록에 보자면 문종은 체격도 크고 수염이 매우 풍성하여 관우와 같은 풍모를 보였고, 얼굴 또한 매우 잘생겼다고 전해진다. 연려실기술에는 이런 일화가 있는데, 병자호란 이후 궁을 정리하는데 타다 남은 왕의 어진이 한 장 나왔다. 수염이 길고, 풍채도 당당한 왕의 어진이었는데 신하들은 인종의 어진이라고 생각했지만, 신익성만은 수염이 길다는 말만 듣고 문종의 어진이라고 주장했다.[2] 다른 신하들은 이를 믿지 않았으나 나중에 어진의 표장을 고치기 위해 이전의 배접을 벗기자 그 뒷에 '문종대왕어진'이라고 쓰여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여러 난리통에 겨우 건진 문종의 어진은 소실되고 말았다.

임금의 화상 한 본이 있었는데 후에 잃어버렸다. 신익성(申翊聖)이 하담(荷潭)으로 김시양(金時讓)을 방문하고, 조용히 말하되, "병자호란 뒤에 비로소 열성(列聖)의 모습이 그려진 족자 한 축을 얻었는데, 조정에서 모두 인종(仁宗)의 어진이라고 의논하였다 하였지만, 나는 그 용안의 수염이 길게 그려졌다는 말을 듣고 혼자 문종의 어진이라고 하였더니, 대신들이 듣고서 낭청(郞廳)을 보내어 상세한 내용을 말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소문쇄록(謏聞瑣錄)》 속에 기록된 문종의 수염이 매우 길었다고 한 부분에 찌를 붙여 보냈습니다. 대신들이 그래도 안 믿더니, 다시 표구할 때 묵은 배접을 벗겨 보니, 그 뒷면에 문종의 진(眞 화상(畫像))이란 글자가 씌어 있으므로, 의논이 드디어 정해졌습니다."하였다. 김시양이 말하기를, "우리나라 사람 야록(野錄) 중에 있는 문종의 의표가 웅위(雄偉)하고, 수염이 매우 길다는 구절은 기억하나 《소문쇄록》을 지은 조신(曺伸)은 곧 연산군 시대의 조위(曺偉)의 서제(庶第)로, 문종을 뵈었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고, 《소문쇄록》을 가져다 살펴보니, 그런 내용이 없고 그 말이 씌어 있는 책은 《용재총화(慵齋叢話)》였다. -《하담록(荷潭錄)》

요지는 인종의 어진이라 믿고 있던 그림에 대해 신익성이 '수염이 길다'는 말을 듣고 문종의 어진이라고 주장했는데, 신하들이 '님 출처 제시 좀'이라고 신익성에게 묻자 그는 '소문쇄록에 그런 기록이 있다'고 근거를 제시했다. 하지만 대신들은 이를 믿지 않았으나 나중에 어진을 손보기 위해 묵은 배접을 벗겨 보니 뒷면에 '문종대왕 어진'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는 얘기. 하지만 김시양이 이 일에 대해 "나도 신익성의 말처럼 문종의 수염이 길다는 구절은 봤는데, 소문쇄록은 연산군 때 누구누구의 동생이[3] 지은 거니 그 사람이 문종을 만났을 리 없잖음?"이라고 했고, 소문쇄록을 뒤져 보니 그런 기록이 없었으며, 문종의 수염이 길었다는 기록은 용재총화에 있었다는 얘기다. 출처 제시가 잘못되어서 옳은 얘기를 하고도 신하들에게 무시당한 듯하다. 다만 용재총화는 중종 때 저술된 야사이다. 하지만 문종의 수염이 길었다는 기록이 소문쇄록에는 없었고 용재총화에 적혀 있었더란 얘기다. 아무래도 신익성이 혼동을 했던 모양.[4]

3 3명의 아내를 두었던 홀아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마누라 복 더럽게 없는 남자다.

첫 번째 세자빈인 휘빈 김씨는 자신에게 관심이 없는 문종을 꼬시기 위해 비방을 쓰다가 쫓겨났다. 대표적인 예로 궁녀들의 신발을 뺏어다가 태워서 재로 만든다음 그걸 문종한테 먹인 게 있다. 이게 가장 대표적인 이유를 굳이 설명하자면 신발의 주인들이 개 빡쳐서 당시 왕한테 고발한 것이 그 이유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그럭저럭 흔한 일이지만 둘째 세자빈인 순빈 봉씨는 대놓고 레즈비언이었던 터라 당시 시대사적 관점으로 봤을 때 남편 얼굴에 먹칠을 할 정도의 충격을 선사했다. 오죽하면 시아버지 세종이 멧돌부부라며 황당해했을 정도. 후궁들과는 큰 문제가 없었다는 걸 보면, 문종 본인이 그 두 세자빈들에게 마음이 없었던 듯한데 전자야 그렇다 쳐도 후자의 경우에는 동성애자[5]였던 걸 찾지 못한 점에서 아버지 세종도 책임을 피하기 힘들다. 두 명이나 쫓겨난 상황이라 세종은 세 번째 세자빈은 새로 간택하지 말고 기존의 후궁 중 한 명을 올리자는 쪽으로 기울었다. 결국 경혜공주의 어머니이자 문종과 사이가 좋은 후궁 권씨를 새로 세자빈으로 뽑았다. 그러나 그녀는 단종을 낳은 직후 사망해, 다시 세자빈 자리가 공석이 되었다.[6] 그러나 어째 새로 세자빈을 뽑는 문제는 흐지부지되었고, 문종은 즉위한 후로도 결혼하지 않았기에 조선에서 재위할 동안 유일하게 한 번도 왕비를 두지 않은 왕이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단종이 즉위한 후, 그를 보호하며 수렴청정을 할 왕실의 웃어른이 없어서 왕권이 약화되는 원인 중 하나가 된다.

참고로 영정조 때 문종의 계비로 추정되는 인물로 공빈 최씨가 등장한다. 현덕왕후 권씨를 관련 문헌에 "원비"라고 적었는데 보통 원비라 함은 뒤에 계비가 존재한다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적합한 문헌을 찾을 수가 없어서 의문으로 끝났다. 그리고 중국의 고서 명사에는 조선 국왕과 왕비 최씨에게 고명과 면복을 주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공빈 최씨 묘비에는 예종의 후궁이라고 표기되어 있지만 공빈 최씨의 아버지 최도일 묘비에는 공빈 최씨가 문종의 왕후라고 표기되어 있다. 세조실록에는 최도일의 딸을 세자의 후궁인 소훈으로 삼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요절하지만 않았다면 세종대왕에 필적하는 성군이 되었을 것으로 보이나 재위 2년만에 병으로 세상을 뜬다.[7] 그렇다고 해서 문종이 아주 단명한 왕은 아닌데, 문종은 성종보다 오래 살았다.[8][9] 세종 말년에는 강무나 종묘의 제례를 대신하는 등 사실상의 국왕 업무를 했지만 실제 재위기간이 짧았던 탓에, 몸이 약하고 요절했다는 이미지가 강하다. 사실 차기 국왕으로서 능력을 인정받았고, 정통성이 꿀릴 일 없는 최초의 적장자 출신 임금이었기 때문에 본인이 가진 권력은 강력했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위 단락의 이유로 단종을 늦은 나이에 얻었고, 후계자인 단종이 자신의 사후에도 별 탈 없이 자리를 지킬 수 있을 만한 확고한 권력 기반을 마련해주지 못한 상황에서 사망하는 바람에 권력 공백을 초래했다.[10] 이는 야심많은 동생 수양대군(세조)이 왕좌를 노리는 계기가 되었다. 여기서 문종이 병약해서 자식을 못 낳아 문종이 어린 단종만 낳았다고 잘못 알려진 경우가 많은데 문종은 당시 40세 가까이 살면서 현덕왕후와의 사이에 1남 1녀(단종, 경혜공주)를 포함해 3남 5녀를 보았다. 전 근대시절 높은 유아사망률 덕분에 1남 2녀만 생존하게 된 것이고 유일한 아들 단종도 28세에 보았으니 아주 늦게 본 것도 아니다.

약간 딸바보인 듯한 모습을 보인다. 문종의 장녀이자 단종의 동복누나 경혜공주가 혼인해서 살림집을 마련하기 위해 한성부 양덕방[11]의 민가들을 허물고 새로 지어 주었다. 신하들이 공주의 집을 위해 30여채나 철거했다며 이는 지나친 행위라고 비판하자 문종은 "다시 조사해 보니 5채만 허물었다고 하던데? 그리고 어차피 벼슬아치들이라서 다른 집에 가서 살 수가 있는데 뭔 상관이냐?"라며 반박하였다.

4 저평가된 명군

문종(文宗)이란 묘호 때문에 문약한 군주로 인식되고는 하나 이것 또한 사실이 아니다.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을 쓴 박영규마저도 "문종은 병약했으나 문약은 아니었다."고 표현하고 있다. 당장 문종이면 중국의 예법으로도 꽤 고평가를 받는 묘호이다. 당장 고려문종은 고려의 전성기를 이룩한 성군으로 평가받는다.[12]

세자 시절부터 짧은 재위기간 동안 문종이 가장 관심을 가지고 가장 발달시킨 게 바로 군사 부문이다. 경연 때 병서를 강연하자고 했을 정도로 조선왕조에 유례가 없는 밀덕후 군주. 스스로 자부심이 있었는지 실록에 자신의 병법이 제갈량보다 조금 모자랄 것이라고 자화자찬하는 부분이 있다.[13]

무기 제작에 지나치게 열중하고 있다며 이를 비판하던 신숙주가 "주상이 숭상하는 것을 만인이 숭상하는 바이니 주상께서 무(武)만 숭상하시니 세상 사람들이 다 무(武)에만 관심을 가집니다.니가하니 다 따라하잖아"라고 문종에게 말한 적도 있다. 이에 대해 문종은 "군사를 준비하는 것 또한 중요한 일인데?개 소리 집어쳐."라며 일축했다.(신숙주와 문종의 대화)

그리고 개국 초 이후부터 병사들이 패용하기 힘들다는 이유로 멋대로 환도의 칼을 분질러서 짧게 해 들고 다니거나 심한 경우 칼 자루만 남겨두고 칼날을 없애는 막장스러운 짓을 저지르는 것을 보고 법적으로 기병과 보병의 환도 길이를 규정했다.[14]

세자 시절의 대리청정과 재위 기간을 통해 부왕의 사업을 이어받아 4군 6진의 북방 정비를 완료했으며, 군제를 개편하여 3군의 12사를 5사로 재정비하고 병력을 증강했다. 화차같은 신병기도 직접 설계했으며, 세종 기에 이뤄진 화포의 규격화 및 국가적인 법제화, 부대 운영과 인원수의 결정 등에도 관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대해서는 세종 참조.

또한 문종이 고조선에서 고려 말까지의 전쟁사를 정리한 《동국병감》을 편찬하라 명하였다. 현존본은 선조 41년에 간행되었다고 한다. 즉 책 자체는 문종의 명으로 편찬되었지만 현존하는 책이 선조 41년에 간행된 책이고, 문종조에 정확한 시기를 알 수 없어서 '문종의 명으로 편찬되었고 선조 41년에 간행되었다'고 한다. 하여튼 문종의 업적이다.

병장도설도 문종이 편찬했다고 하는데 여기보면 문종은 진법을 편찬했고 그걸 성종조에 개정했다.

나아가 문종은 직접 화차를 개발해 그 운영법을 스스로 정하고 진법을 짜는 방법도 고안해낸 진정한 화력덕후이자 밀덕후 군주다. 평지에서는 2명, 오르막 길에서는 4명이 운영하게 하였으며 장전에서 발사 과정 그리고 불발탄 처리 방법까지 완벽하게 구현했다. 이 화차를 문종화차라고 하는데, 이 화차는 후기에 성종 조에 "나라에서 화차를 만들 때는 다 이유가 있으니 잘 쓰도록 하라."는 말이 나올만큼 큰 활약을 하는데, 기사를 찾아서 읽어보면 적의 위치를 확인하고 사격을 해서 타격을 줄 경우에는 그야말로 당시로써는 핵폭탄 급이었고, 설령 맞추지 못한다고 해도 그 소리와 빛때문에 여진족들이 혼비백산해 도망가는데 급했다. 특히 대신기전의 경우에는 직접 타격하는 것이 주목적은 아니었으나 혹여라도 직접적으로 타격을 맞으면...

논의만 하고 끝나긴 했지만 북한산성 축성도 고려했던 인물이다. 만약 북한산성이 이때 축성되었으면 임진왜란 때는 최소한 왜군에게 골치아픈 존재가 되었을 거고 병자호란 때는 여기로 인조가 피난했으면 행궁에 홍이포 발사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농업과 과학 등에도 관심이 많았으며, 흔히 장영실의 작품으로 알고 있는 측우기의 제작 아이디어도 사실 세자 시절의 문종에게서 나왔다. 가뭄이 들자 땅을 파 젖은 깊이를 재다가 부정확하자 구리통을 만들어 비 온 양을 쟀다는 기록이 실록에 나온다.

이 정도까지 보면 명군 축에 속할 만하다. 그러나 여러 고정 관념 때문에 후세 사람들에게 오해를 많이 사는 왕. 어떤 의미에서는 조선 역대 국왕 중 가장 과소평가되는 국왕 중 하나다. 대리청정과 관련하여 실록에 따르면 세종 24년 7월부터 추진하여 세종 말기 7년 반은 문종의 대리청정이 지속되었다.

  • 안평체의 안평대군과 더불어 상당한 명필이었다고 한다. 오죽하면 신하들이 글씨를 받아서 본을 뜨려고 했을 정도. #
  • 또한 우애도 지극해서 동복동생들은 물론 이복동생들도 아껴주었다고 한다. 신빈 김씨의 아들인 담양군이 장가 들기 직전 12살의 나이로 요절을 하는데, 아우사랑이 지나쳤던 탓인지 아직 납채도 안한 상대 약혼녀에게 '장가도 못 가고 죽은게 너무 불쌍한데 상복 입고 장례 좀 치러주면 안될까'하고 부탁해서 신하들을 데꿀멍하게 만든다. 물론 양갓집 규수 하나를 비녀도 안 올린 과부로 만들 수는 없어[15] 신하들의 맹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문종이 계속 애를 썼지만 논리에도 안 맞는 일이고 왕족의 신붓감이 될 만큼 세력도 있었던 집안이라 결국엔 우야무야되고 말지만, 이렇게 호들갑을 떨 정도로 장남답게 아우들은 극진히 챙겼던 셈. 수양대군이 국법을 어겼을 때도 몇번이고 상소를 올려 지적을 해도 그때마다 '수양은 충직하여 다른마음이 없는 사람이다'라며 끝까지 쉴드를 쳐주며 보호했다.
  • 수양대군의 행위를 미리 예방하지 못했다고 하나 문종은 나름대로 할 수 있는데까지는 했다. 신권을 강화시켜 왕족을 견제시키고 믿을 수 있는 신하들에게 단종의 보좌를 부탁한다. 다만 비를 들이지 않아 사후 단종에게 든든한 후원세력을 만들어주지 못한 점에 대해서는 아쉽다는 평. 수양대군을 좀 더 견제를 했어야 한다는 평가가 있다. 애초에 문종 본인의 왕권이 워낙 막강했던데다 문종은 훗날 사극에서 보여주는 유약한 이미지와는 전혀 거리가 멀었다. 이 시기 수양대군은 형에게 찍소리도 못하고 버로우탔었는데, 문종 실록에 수양대군이 사극에서 마냥 전횡을 일삼는게 아니라 열심히 문종 비위 맞추고 다녔던 모습이 기록 돼 있다.

애시당초 이런 주장이 나온 배경은 <왕과 비>부터 <인수대비>까지 방송사 불문하고 사극들이 죄다 문종을 병약하고 힘없는 임금으로 그리고 문종때부터 수양대군이 설치고 다녔다고 왜곡한 탓이 크다. 수양대군의 세력은 문종 때는 말할것도 없고 단종 때도 경쟁세력들 중 가장 약한 축이었다.[16] 만약 문종이 5년 내지 10년만 더 오래살아 단종이 완전히 성인이 되었던 상태였거나 왕실에 수렴청정할 어른 한 명만 있었다면 수양대군은 기껏해야 태종 시기 의안대군 이화 정도의 위상에 만족해야 했을 것이다. 단종 역시 완벽한 정통성을 가지고 있었고, 견제세력으로 김종서 등 대신들이 있었고 종친 중에도 안평대군, 금성대군같은 견제세력이 있었기에 수양대군이 그렇게 막나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듯 하다.

문종은 기록 면에서도 불운했다. 조선의 26명 임금 가운데 가운데 유일하게 재위 기록이 일부 소실된 임금이다. 문종실록 열세권 가운데 11권(음력 1451년 12월 ~ 1452년 1월)이 사라졌는데 전주사고의 문종실록 11권이 표지는 11권이였지만 내용은 9권으로 잘못 들어가 있었다. 그러던 중 임진왜란때 전주사고의 실록을 제외한 나머지 사고와 실록들이 죄다 불타면서 9권 표지를 단 책을 포함한 나머지 문종실록 11권이 모두 사라졌고, 임진왜란 이후 전주사고 실록을 복사하는 과정에서 문종실록 일부가 사라진 것을 알았지만 남은 사본이 모두 사라져서 복원할 수는 없었다.

5 사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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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안에 있는 현릉(顯陵)이다. 단종의 생모인 현덕왕후와 안장되어 있는데 동원이강 형식의 능묘이다. 본래 현덕왕후는 1441년에 승하해서 안산시의 소릉에 묻혀 있었고 문종은 1452년 승하한 후 지금의 능에 묻혔는데 이 때 현덕왕후의 묘를 이장해서 문종과 함께 묻었다. 그런데 현덕왕후 집안이 단종 복위 운동에 연루되자 세조는 1457년에 형수를 폐서인하고 무덤을 파헤쳐 버렸다.[17] 현덕왕후가 오늘날처럼 문종 곁에 묻힐 수 있었던 것은 중종 때인 1513년 다시 왕후로 복위되었을 때였지만 합장되지는 못하고 동원이강 형식으로 안장되었다.

거기에 세조는 계유정난을 일으켰을 때 현릉의 비석 제작을 감독하던 민신과 다섯 아들들을 죽였는데 이들을 참살한 장소 역시 형의 무덤이었던 현릉이었다. 세조가 찬탈 뿐만 아니라 우애까지 안드로메다로 날려버린 패륜아라고 두고두고 까이는 이유 중 하나. 이쯤 되면 세조는 형 문종에게 열등감이나 질투심 같은 뭔가 쌓인 감정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게 할 정도다.[18]

문종 화차의 복원에 얽힌 실화가 있다. 한국 고화기 연구가이자 로켓 공학 박사, 국내 최초 화차 복원자인 채연석 박사가 문종 화차를 복원하려 했으나 부품 조립이 제대로 되지 않자 하다 못해 어느날은 문종왕릉에 화차와 관계된 자료가 없을까 하고 찾아갔다가 자료를 전혀 찾지 못하자 몰래 들어가[19] 왕릉을 붙잡고 호소하였는데 그날 밤 꿈에서 화차의 모습이 나타나고 그대로 복원을 했더니 제대로 되었더라는 서프라이즈에 나올 듯한 신기한 이야기. 농담이 아니라 이거 채연석 박사가 쓴 책인 <로켓이야기>에 자신의 경험이라고 나오는 이야기다.

6 독살설

조선왕 독살설 중에서 나름대로 인지도가 있는 설이다. 문종이 즉위 후 2년 밖에 살지 못한 게 너무 큰 영향을 미쳐서 그런 것이지만.

문종은 세종 말기에 심각한 병을 자주 앓아 아버지에게 손자 걱정까지 하게 만들긴 했지만 원래 몸이 그리 약한 편은 아니다. 오히려 고기를 좋아해 비만에 당뇨가 있던 세종에 비해 체격도 좋았고 무예에도 뛰어난 자질을 보였다. 사망의 원인은 할아버지인 이방원과 같은 종기.[20]

원래 고질병이었긴 했으나 당시 어의 전순의가 병을 오히려 키우는 처방을 내려 죽음을 앞당겼다는 설이 제기된다. 《식료찬요(食療纂要)》를 저술하여 "전통 온실" 등에 대한 놀라운 기록을 남겼고, 이후로도 어의로 계속 재기용되었던 그는 계속 문종의 종기에 나쁘다는 꿩 고기와 활쏘기 구경 등을 처방으로 내렸다.

이 전순의는 귀양 갔다가 세조의 쿠데타 이후 공신에 책봉되고 복권되었다. 다만 전순의가 책봉된 공신은 원종공신으로 급이 크게 떨어지며, 1등만 무려 79명이다. 정작 이보다 윗등급인 좌익공신에서도 성삼문, 이휘가 단종 복위 운동을 일으켰고, 원종공신 중에도 단종 복위 운동으로 이름이 떨어진 사람이 많다. 원종공신까지 합하면 세조 때 공신이 된 인물은 2000명.

전순의를 탄핵한 것은 대부분 삼사였는데, 이를 반대한 것은 김종서와 황보인 등의 권신, 즉 세조의 반대파였다. 오히려 세조 쪽인 신숙주는 이에 대해 "대간들 얘기가 맞는데 왜 전순의를 싸고 돔?"이라면서 대신들을 깠다.

문종의 죽음은 독살과는 관계 없고 본인의 스트레스 + 건강 악화에 따른 결과라는 이야기도 있다. 역사학자 신병주 교수는 KBS 역사저널 그날 계유정난 편에서 문종 독살설을 정면으로 부인했다. 문종의 어머니인 소헌왕후 심씨가 1446년에 사망하여 삼년상을 치른 뒤, 이어 1450년에 세종이 붕어하여 다시 삼년상[21]을 치른 탓에 기력이 쇠하였을 것이라고.

상주로서 장례를 치러본 사람은 알 것이다. 아무리 건강한 사람도 상주가 되어 삼일장을 치르고 난 뒤에는 온 기력이 다 쇠한다. 의료기술이 발달하고 건강에 대한 정보와 관심이 많은 현대 사회에서 사흘만 장례를 겪어도 이런데 이걸 3년 내내 겪고 1년 후에 또 3년을 겪는다면? 항우장사라도 버텨내기 쉽지 않을 것이다.

문종 역시 풍채가 좋고 무인 기질이 다분한 인물이었으나 총 6년이나 상주 노릇을 이어서 한다는 건 무리도 아니었을 것이다.

7 사극

왕과 비에서는 전무송이 문종을 맡았다. 서서히 죽어가는 문종과 단종을 걱정하는 아버지로서의 문종의 모습은 최고로 평가된다. 제2화에서 사망하나 이후 때때로 회상씬에서 여러가지 모습을 보여준다.

인수대비(드라마)에서는 선우재덕이 연기했다. 회상씬에서 세종대왕에게 "나약한 세자 따위 갈아치우고 강한 수양대군을 세자로 삼으라."고 역설하는 양녕대군에게 "자네가 한 일이 뭔가!"라는 면박을 받았다. 세자 섭정을 맡아 국정을 잘 이끌었고 세자 시절에 이미 과학, 문화, 군사적 업적들을 세운 문종에게 부당한 비난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정말 한 것 없이 비행을 일삼다 폐세자가 된 양녕이 모범생 문종에게 할 말은 아니다. 이 사극 극본이 왕과 비의 정하연 작가인 것을 생각하면 세조빠 문, 단종까 증세가 더욱 악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실제 양녕대군이 이랬으면 왕의 백부고 나발이고 바로 역적으로 탄핵받고 숙청이다.

KBS 대왕 세종에서는 제법 비중있게 다뤄지는데, 세자로 책봉되던 어린시절부터 세종 말년 대리청정하는 시기까지 나온다. 어린시절은 아역 배우 강빛이 성인시절은 탤런트 이상엽이 맡았다. 여기서는 아버지 세종대왕을 닮아 똑똑하고 능력있으며 신하들과의 관계도 두터운 훌륭한 왕재로 나와, 기존 사극 중에서는 문종을 가장 잘 그렸다는 평을 받고 있다. 특히 측우기를 발명하는 순간, 세자빈이 죽을 때 비가 내리며 문종의 눈물과 빗방울이 겹쳐지며 OST 소원이 흘러나오는 씬은 드라마 전체로 보아도 가장 애잔한 장면.

KBS 2TV 공주의 남자에서 항상 김종필이나 프레지던트에서의 이회창을 연상시키는 콩라인 대선 후보 역이나 맡았던 배우 정동환공주의 남자에서 문종 역을 맡았다. 여기서는 몸이 많이 약해져 병마에 시달리는 임금으로 나오면서도 어린 자식들을 너무나 끔찍히 아끼는 자식바보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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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관상에서는 김태우가 맡아 단종을 걱정하고, 수양대군의 야심에 노심초사하는 역할을 맡았다. 자세한 내용은 관상 참조.

상술한 내용에도 나오듯이 전체적인 경향을 보면 30대 후반에 사망한 임금이지만, '문약'하다는 기존의 이미지 때문에 40대 이상의 중장년 배우가 맡는 경우가 많다.
특히 계유정난이 끼인 작품일 경우에는 더욱 그러한 경향이 짙은듯 하다.

예를 들자면, 왕과 비에서의 전무송이나, 공주의 남자에서의 정동환은 문종을 연기할 당시 두 명 모두 예순 전후에 30대 후반에 죽은 문종을 연기한 것이다.
  1. 반면 아버지인 세종은 음악가 군주이기도 한데 그가 작곡한 곡이 5개나 되고(후에는 2개만 남는다) 편경의 음이 미세하게 이상함을 감지하는등 음악적 재능을 보였다.
  2. 신익성은 조선 중기의 명문장가 신흠의 아들로 선조의 딸 정숙옹주와 혼인해 동양위라는 작호를 받고 부마가 됐다.
  3. 단순히 시간적으로는 단종에서 성종까지가 40여년 정도이니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4. 아무래도 중종 때 책에 문종 얘기가 있는 건 신빙성도 적고 주장하다 보니 머릿속에서 자체 보정이 된 듯하다.
  5. 물론 연애혼도 아닌 간택에 성격이나 성적 취향을 파악할 순 없기는 한데 봉씨 같은 경우는 세종이 대놓고 얼굴 보고 뽑았다. 그녀는 성격에 심각한 결함이 있었다. 동성애 취향도 정말 레즈비언이었다기보다는 문종과 사이가 벌어지며 생긴 욕구불만을 궁녀들에게 돌린 것일 가능성이 높다. 그녀와 동성애 관계를 가진 궁녀 소쌍만 해도 애초 남의 애인이었던 사람을 지위를 이용해 강제로 빼앗은 것이다. 수시로 궁인들을 폭행하고 술주정을 부리는 등 요즘 기준으로도 제대로 된 아내는 아니었다.
  6. 권씨의 칭호 현덕왕후는 사후에 받은 것이다.
  7. 단 아버지 세종이 10년 전부터 사실상의 통치를 맡겼기에 실질적인 치세는 12년 정도가 된다.
  8. 1414년 출생~1452년 사망으로 사망시 39세. 성종은 1457년 출생~1494년 사망으로 사망시 38세였다.
  9. 근데 성종의 승하 날짜가 음력기준이면 문종보다 덜 산거라 생각하는데. 양력으로 하면 문종이랑 같이 39살에 승하했다.(성종의 사망날짜: 음력 1494년 12월 24일, 양력 1495년 1월 20일)
  10. 하다못해 또 한 번 왕비를 들였다면 적어도 단종을 대신해 수렴청정할 대비 한 명은 만들어 대비할 수 있었는데 그러지 않았다.
  11. 현대의 종로구 계동, 가회동 일대다. 조선시대에 이곳은 한성 제일의 부촌이었다.
  12. 종과 조의 차이는 유덕자는 '종' 유공자는 '조'를 쓰는데 갈수록 예의과잉으로 '인조'처럼 막 퍼주면서 유명무실하다.
  13. 더 재미있는건 옆에서 어디 제갈량을 형님한테 비교하겠냐고 열심히 아부떠는 수양대군. 그리고 그는 후에...
  14.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생기는데, 문종 당시의 척법을 적용하면 여전히 짧다. 기병도의 날 길이가 기껏 해야 30cm~45cm 정도로 계산된다. 후대의 영조척을 적용하면 어느 정도 검의 길이가 나온다. 때문에 일부에서는 영조척을 적용해서 칼 길이를 계산하는 경우가 있으나, 문종 역시 화력적인 측면을 강조하면 면을 볼때 주무기로써의 검이 아니라 호신용 내지는 최소한의 방어를 위한 보조 무기로써의 길이를 규정한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15. 사실 좀 그런게 상복을 입으면 담양군의 부인임을 의미하게 되는데 그러면 평생 과부로 살게 된다. 약혼녀의 나이가 얼마인지는 몰라도 십대에 결혼도 한번 안하고 과부가 되는건데 조선시대에는 반역죄로 누가 걸렸을때 그 일가중 결혼한 사람은 피해를 입지만 약혼한 상태는 아무 관계도 아니다며 연좌하지 않고 약혼한 상태에서 상대가 죽어도 상복을 입지 않는다. 당연히 신하들이 데꿀멍 할 수밖에.
  16. 그래서 설마 쿠데타를 일으킬거라곤 생각하지 못했고 수양 세력내에도 주저하는 이들이 있어 수양이 직접 앞장섰다. 계유정난이 성공한건 이런 인식 때문에 다들 방심하고 있었던 탓이 컸다.
  17. 세조가 괜히 욕먹는 게 아니다. 형수는 형과 함께 합장되어 있었다. 즉, 단순히 형수의 무덤을 파헤친 게 아니라 형의 무덤을 파헤쳐 버린 것. 괜히 문종 독살설 같은 게 설득력을 얻는 게 아니다.
  18. 사실 문종에 대한 악감정이 있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세조는 세종 대부터 이미 야심이 매우 강했고, 은연중에 자신의 능력을 과시함으로서 자신이 형 문종보다 더 유능함을 어필하려는 흔적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하지만 정통성이 확실하고 본인의 능력또한 매우 우수한 문종이 폐세자되고 세조가 세자로 등극할 가능성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이러한 좌절감과 극도의 야심이란 심리가 형 문종에 대한 악감정을 증폭시켰을 가능성이 크다.
  19. 문종의 현릉은 지금도 능침 바로 앞으로 올라가지 못하게 울타리로 막아 놓았다. 이렇게 울타리를 쳐 놓은 능들은 별도의 안내원 인솔 없이는 정자각 쪽에서만 관람하는 것이 원칙. 왕릉에 가면 꼭 울타리 넘어가서 능침 앞까지 올라가는 사람이 있는데 이러지 말자. 현릉이 있는 동구릉에서 능침 앞까지 올라가도 되는 능은 선조의 목릉 뿐이다.
  20. 옛 문헌에는 흔히 '등창' 이라는 표현으로 등장한다. 지금에야 종기는 단순한 질병이지만 항생제가 없었던 옛날에는 종기가 심각한 질병이었다. 이방원, 현종, 정조 등 조선시대 왕의 사망 원인 중 상당수가 종기였다. 몸에 종기가 났을 때 치료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하고 무식한 방법은 환부를 지지는 것인데 왕의 몸에 쇠토막을 함부로 댈 수 없었던 때였으니 사망률은 더했을 듯.
  21. 영화감독 이해영은 이 사실에 대해 '군대를 연이어 두 번 다녀온 셈'이라고 표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