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련 항목 : 러시아 제국, 소비에트 연방, 러시아 연방, 유로마이단, 2014년 크림 위기, 동부 우크라이나 위기,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러시아어 : Великороссия, Великая Русь[1]
영어 : Greater Russia
1 역사, 민족적 의미
러시아의 역사 История России | |||||||||||
고대 | 중세 | 근대 | 현대 | ||||||||
슬라브 / 루스 | 루스 카간국 | 키예프 공국 | 블라디미르-수즈달 | 노브고로드 공화국 | 몽골-타타르의 멍에 | 모스크바 대공국 | 루스 차르국 | 러시아 제국 | 적백내전기 러시아 공화국 | 소련 소비에트 러시아 | 러시아 연방 |
러시아판 범게르만주의
러시아란 나라와 민족 자체가 러시아 역사 항목에 가보면 나와 있듯이 수 세기에 걸쳐 상당한 변화와 이민족과의 상호 교류를 하며 정의 되고 발전 된 개념이기 때문에 "(오리지널이란 의미로) 진짜 러시아인이란 누구인가?"는 러시아 역사학계와 인류학계에서 첨예한 논쟁 거리이다. 이 와중에서 근현대의 제정 러시아, 소련, 러시아 연방 공화국 사람을 가리키는 '러시아인'과 달리, 전근대적 의미에서 16~17세기 러시아계 공국들이 모스크바 대공국의 통치 아래 통합 되기 이전, 중세의 현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러시아 등지에 사는 동방정교회를 믿으며 키예프 공국과 직간접적으로 연관을 맺고 있는 동슬라브족 전반을 의미할 때는 그냥 루스인, 혹은 당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맹 측에서 쓰던 용어인 '루테니아인'으로 칭한다. 영어와 라틴어에서는 이를 Ruthenian이라 표기하는데, 사실 각종 역사적 문서에서도 엄격한 구분 없이 Russian, Rus, Ruthenian 등의 단어를 막 혼용하기 때문에 특정 역사서에서 루스인, 루테니아인 소리를 한다면 골치아프게 머리 굴리며 이게 모스크바 대공국을 의미하는지, 그냥 전반적인 문화, 언어적 집단을 의미하는지 하나 하나 문맥을 따지면서 판단할 수 밖에 없다. 연구자들을 위한 조언을 하자면 다만 이런 역사적 구분과 분화가 본격화 되기 시작하는 16~17세기 문맥에서 Muscovite라는 표현이 나온다면 이건 확실하게 현대 러시아 지역에 기반한 모스크바 대공국과 루스 차르국만 콕 찝어서 의미하는 것이다.
이 구분이 왜 생겼냐 하면 키예프 공국이 분열 되고, 킵차크 한국의 지배를 받으며 중세의 소규모 공국들로 쪼개졌다가 다시 모스크바 대공국 아래 근대적인 의미에서 러시아가 되는 과정에서 동슬라브인들의 민족적, 사회문화적 구분이 마구 꼬였기 때문이다. 특히 현대 서부 우크라이나, 서부 벨라루스, 동부 벨라루스 등의 광활한 정교회 동슬라브 민족들이 살던 땅이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이어서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지배를 받으며 루스 민족 전체 (Всея Руси)의 지배권을 주장했던 모스크바의 대공들의 권역 밖에서 독자적으로 발전했다. 이 모스크바 권역 외의 루스인들의 땅이 적러시아,[2] 백러시아,[3] 흑러시아[4] 등으로 따로 발전했기 때문에 키예프 루스의 직계 후손을 자처한 모스크바 대공국과 이를 이은 루스 차르국의 신민들을 따로 지칭하기 위하여 현대적 의미에서의 고대-중세 '루스인'과 구별 된 '러시아인'이란 호칭과 정체성이 발전한 것이다. 표기학적으로도 17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이반 뇌제의 공문서 등을 보면 대부분 알파벳 s (키릴 문자로는 с) 하나만 쓴 '루스'로 자국과 그 민족을 지칭하였으나, 로마노프 왕조 설립 전후로 현대처럼 s를 두개로 표기하며 표트르 대제시절 두개 표기를 공식화 함으로 그 정체성의 변화와 승계 과정을 볼 수 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신화적으로 러시아에 처음 왕조를 설립했다던 바이킹의 분파인 루스족을 의미하든, 키예프 공국 사람들을 의미하든, 트베리, 스몰렌스크, 랴쟌, 프스코프, 노브고로드 공화국 등 수 십개의 분열된 중세 루스계 공국 중 하나의 사람을 의미하든, 현대 러시아인들을 의미하든 영어로는 전부 다 'Russian'으로 번역되어 버려 생기는 의미의 혼돈을 피하기 위해 사용되는 동유럽사 역사학 용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정치적 관점에서 볼 때 유로마이단 사태 또한 깊게 보자면 이런 중세적 의미의 '루스인'과 근대적 의미의 '러시아인'과도 관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현대 우크라이나인들은 본인들이 전자, 즉 '중세 키예프 공국의 후손의 의미에서 루스인'이란 사실에는 토를 달지 않고 이를 인정하며 계승하지만, 후자의 근대적 러시아 제국의 국민이란 의미에서의 '러시아인'은 아니라고 주장하나, 블라디미르 푸틴을 비롯한 대러시아 민족주의적 관점에서[5] 현대 러시아 국가는 모든 루스인을 대표하는 국가이기 때문에 우크라이나인들 또한 역사적으로 '소러시아(Малороссия)'인들로 보며 러시아에 편입되어야 할 대상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개념으로는 독일인을 가리키는 말인 도이치(Deutschen)가 있다. 오늘날 이 단어는 보통 현대 독일, 즉 독일연방공화국 시민을 말하지만, 2차대전 이전까지 "도이치"라는 말은 독일어를 쓰는 인구, 즉 독일과 오스트리아 및 그외의 영토에 거주하는 인구를 가리키는 말로써 쓰였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현재는 출신 등을 나타낼 때 독일인(Deutschen)과 오스트리아인(Österreichern)이라는 말로 별도로 구별해 쓰고 있다. 또한 독일과 오스트리아 양측 모두 이 단어의 해석에 대해 매우 조심스럽게 접근하는데, 그 이유야 설명하지 않아도 잘 알 것이다.
2 정치, 외교적 의미
응? 북한이 왜..[6]
러시아판 제국주의
정치 외교적 관점에서의 대러시아는 러시아가 루스 차르국시절부터 제정 러시아, 좀 더나아가서 소비에트 연방에 이르기까지 넓혀온 땅이자, 이를 복원하려는 이념이다. 이러한 개념은 현재 모든 러시아의 정치세력에 뿌리깊게 박혀있으며, 통합 러시아당, 공산당, 자유민주당마다 각각 유라시아 연합, 소련 부활, 러시아 제국의 부활(...)[7]이라는 방식으로 추구한다.
보다 더 외교적인 용어로써는 옛 소련 국가들을 가리키는 가까운 해외(또는 가까운 외국. Ближнее зарубежье)라는 말이 있다. 이는 1996년 러시아 초대 외무장관이었던 안드레이 코지례프가 이들 국가를 가리키면서 처음 쓴 말이다. 하지만 러시아에서 일상적으로 보통 이들 국가들을 지칭할 때는 주로 옛소련 국가(Постсоветское пространство)나 독립국가연합(СНГ)이라는 말을 더 많이 쓰는 편이다.
2.1 역사
러시아의 역사를 루스 차르국 시절부터 보면 다음과 같은 국가가 있다.[8]
- 1547년~1721년의 루스 차르국
- 1721년~1917년의 러시아 제국
- 1917년 3월~1917년 11월의 러시아 공화국
- 1917년~1922년의 소비에트 러시아
- 1922년~1991년의 소비에트 연방
- 1991년~ 현재까지의 러시아 연방
위의 각 항목을 보면 알수있듯, 아직 성장중이었던 루스 차르국을 제외하면 모든 국가들이 대 러시아 지역에 대해선 온전히 자신의 몫을 가지고 있었으며, 설령 뺏기게 되더라도 그 땅을 되찾으려고 했다. 심지어 히틀러에게 이념적으로 적이었인 스탈린조차 독일이 제시한 불가침조약의 내용 중 발트 3국과 베사라비아, 폴란드 동부영토 병합이라는 조건에 혹해 훗날 적이 될 나치와 조약을 체결했을 정도로, 대러시아라는 정치적 이데올로기는 러시아 민족주의자들의 갈망 그 자체였다.
2.2 소련
그루지야 쪽의 일들은 진정으로 프롤레타리아적인 입장에서 접근한다면 극도로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하며, 사려깊음과 준비성을 가지고 필요사항에 대해 절충안을 이끌어내야 한다. 하지만 그루지야인(스탈린)은 이런 문제에 대해 무지한 모습을 보여줬고, 마구잡이로 남들을 '국수주의적 사회주의자'라며 비난하면서(사실은 그 자야말로 진정한 국수주의적 사회주의자이며, 대러시아주의에 물든 천박한 깡패 놈이다.), 사실상 노동자 계층의 단결을 저해하고 있다. 노동자 계층의 단결을 가장 크게 해치고 그를 무너뜨리는 요소는 국가의 '부당함'이며, "피해를 본" 민족들은 평등하다는 느낌과 그 평등에 대한 침해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할 것이다 - 특히 그게 과실이나 기만, 그것도 바로 그들의 노동자 동지들에 의한 것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많은 역사학자들은 소련을 러시아 제국과 비슷한 패권주의 강대국으로써 평가하고 있지만, 적어도 소련은 러시아 역사에 있어 전례없는 국가 중 하나였다. 특히 러시아 혁명과 적백내전을 거쳐 소련이 설립된 초창기의 경우, 적어도 국제주의적인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아 반민족주의적인 성향이 강했었다. 특히 러시아 혁명을 이끈 블라디미르 레닌은 종종 대국적 쇼비니즘(Великодержавный шовинизм)이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할 정도로 러시아 민족주의에 비판적이었다. 레닌은 러시아어를 공용어로 삼는 것에 반대했으며,[10] 러시아 제국 치하에서 정교회로 개종을 강요당했던 (주로 중앙아시아) 민족에게 종교의 자유를 허용해 자치를 보장했다.
레닌이 집권하던 시절, 소련 정부는 중앙아시아 지역 및 옛 러시아 제국 내 비러시아계 민족이 거주하고 있던 지역에서 현지화(Коренизация) 정책을 시행, 각 공화국 또는 자치주, 자치구별로 민족어를 교육시킬 수 있도록 허용했으며, 이 시기 중앙아시아 등지에서 아랍 문자 등 외래 문자로 표기되던 현지어들을 라틴 문자로 재정리, 보급해 문맹률을 해소하는데 크게 기여했다.[11]
또한, 러시아 제국이 보유하던 영토 주권에 크게 집착하지 않아서 옛 러시아 제국의 영토였던 핀란드와 발트 국가, 폴란드의 독립을 허용하고,[12][13] 1921년 카라한 선언을 통해 러시아 제국이 만주에서 가지고 있던 영향력을 포기하면서 여러 모로 탈민족주의적인 성향을 보였다. 소련이 보인 이러한 모습은 당시 식민지 치하에서 독립을 추구하던 지식인들[14]에게 큰 인상을 주었고, 이후 사회주의 운동을 키워내는 밑거름이 되었다.
하지만 1924년 이오시프 스탈린이 집권하면서 당시 소련이 표방했었던 국제주의적인 성향은 점차 일국사회주의로 대표되는 국가중심적인 사회주의로 대체되었다. 스탈린의 입장에서 소련의 국제적인 성향은 자신의 정적이었던 트로츠키이 중심적으로 주장하던 논리나 다름없었고, 이후 대숙청 등을 통해 당시 다양한 조류를 이루고 있던 공산주의자들을 숙청하면서, 공산주의의 해석을 사실상 코민테른으로 대표되는 중앙 통제 하에 두려하면서 급격히 보수화되었다.
특히 1941년 독소전쟁이 발발한 이후 조국(Отечество, Родина)[15]으로 대표되는 애국주의[16] 이념을 강화시켰으며, 이후 1945년 소련이 독소전쟁 승리를 통해 패권국가로 거듭나면서 초창기에 꿈꾸었던 사회주의 국가들의 연합에서 탈피해 새로운 러시아 제국으로써 영향력이 더욱 커지게 되었다.[17]
하지만 이 시기부터 소련은 본격적으로 대러시아적인 면모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특히 1956년 헝가리 혁명, 1968년 프라하의 봄 등 같은 사회주의 국가에서 임레 너지, 알렉산데르 둡체크로 대표되는 개혁파 지도자들의 개혁을 좌절시키고 무력으로 진압해버렸다. 이러한 모습은 옛 러시아 제국이 폴란드 봉기를 진압한 것과 별 다를 바가 없었고, 특히 1979년 인도양에 진출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면서 절정에 달했다. 소련의 이러한 패권주의적 모습에 실망한 서구 좌파 정치세력은 소련의 주이념이던 마르크스-레닌주의 대신 사회민주주의, 유럽공산주의(Eurocommunism), 제3의 길 등을 통해 대안을 모색하기도 했다.
하지만 전후 경제가 피폐화된 상황에서 무리하게 미국과 경쟁하려 하면서 촉발된 군비경쟁은 소련 경제에 지속적으로 막대한 지출을 강요했고, 설상가상으로 1980년대 중반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체르노빌 사고 등 재정적으로 부담이 가중된 상황에서 페레스트로이카 등을 통해 그동안 소련 내부에 잠재되어 있던 문제가 폭발해버렸다. 이후 소련은 급속도로 영향력을 잃기 시작해 1991년 완전히 해체되었다.
2.3 소련 붕괴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면서 현재의 러시아 연방은 그동안 역사적으로 쌓아온 대러시아 지역을 모두 잃어버렸으며, 사실상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직후와 거의 같은 상황, 혹은 더 심각한[18]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거기에 서방이 당초 소련 시절 호의적으로 체결했던 약속과는 달리 붕괴 이후 러시아의 경제 지원에 생각 외로 뜨뜻미지근하게 나오고, 옛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시켰는데, 이는 90년대 경제적으로 극심한 빈곤 상황을 겪고있던 러시아인들에게 반감을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2004년 우크라이나와 조지아같이 제법 중요한 국가들이 민주화 혁명을 통해 친러 정부를 전복시키고, 서방과 친하게 지내려 하자 러시아 입장에서는 과거 자신의 영토이던 지역들이 자신을 향해 총구를 들이미는 것과 다름없는 상황을 맞게 되었다.
물론 러시아 입장에서는 상당히 고까웠겠지만, 당시 러시아는 자국의 경제를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불필요한 충돌을 삼가해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19] 딱히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는 않았다.[20]
2.4 남오세티아 전쟁
그러던 중 2008년 압하지아, 남오세티아 등과 분쟁을 겪고 있던 조지아의 사카슈빌리 대통령은 (당시에는 자국 영토였던) 남오세티아를 공격했다. 압하지아와 남오세티아는 조지아 독립 후인 1991년부터 자치권을 두고 조지아 정부와 분쟁 관계였고,[21] 1995년 러시아군이 분쟁에 개입한 이후에도 관할권을 두고 자잘한 분쟁이 있었다. 이에 당시 대통령이었던 사카슈빌리는 이라크 전쟁 등을 통해 미국과 가까워진 외교관계, 강화된 군사협력 등을 바탕으로 압하지아와 남오세티아를 무력으로 제압해 러시아의 반발을 무력화시키고, 이들 분쟁지역을 조지아 정부 통제 아래 두려고 계획했다.
문제는 조지아군이 공격한 압하지아와 남오세티아에는 공식적으로 러시아군이 주둔해 있었다는 것이었다. 러시아는 이를 자국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했고, 결국 조지아와 전쟁을 통해 사실상 압하지아와 남오세티아를 합병했다.
러시아 입장에서 이 사건으로 주변국에 경고를 주려한 것 이었지만, 이 사건으로 가장 크게 영향을 받은 것은 서방이었다. 미국과 유럽연합은 구소련권에서 벌이는 확장정책이 러시아를 자극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고, 러시아를 크게 자극하지 않기 시작해 오바마 집권 이후 MD 계획을 철회하고 관계 개선 메시지를 보내는 등, 러시아에 더 이상 자국의 영향력을 확장하지는 않겠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실제로 서방 국가들은 이후 구소련권에서 영향력 확대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러시아를 크게 자극하지 않으려 애썼다.
(러시아 외무장관인 세르게이 라브로프에게 '리셋' 버튼을 선물한 미국 국무장관이었던 힐러리 클린턴)
당시 회동을 다룬 AP통신 뉴스.
하지만...
2.5 유로마이단
총칼로 왕좌를 세울 수는 있겠지만, 그리 오래 앉아 있지는 못할 것이다.보리스 옐친[22]
2014년 채무협상 과정에서 우크라이나가 러시아가 구상하던 유라시아 연합의 일원으로 관세동맹(Таможенный союз)에 관련된 경제지원협약을 체결한다. 하지만 이는 그동안 부패와 무능으로 점철된 빅토르 야누코비치 정권에 대한 불만을 폭발시켜버린 계기가 되었고, 결국 야누코비치는 2014년 2월 민중시위로 물러나게 되었다.
이렇게 우크라이나에서 민중혁명이 발생하자, 러시아 입장에서는 큰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당장 우크라이나가 다른 국가들처럼 러시아와 심하게 대립해왔던 것은 아니었고,[23] 러시아 또한 무조건적으로 타국의 민주화 시위에 개입하려 하지는 않았다.[24] 하지만 가장 큰 문제점은 당시 푸틴 정부가 민주화 시위에 예민했다는 것이었다.
러시아 정부는 2008년 세계금융위기를 겪으면서 잃은 지지율을 만회하기 위해 2011년 선거에서 대규모 부정 사태를 자행했고, 이로 인해 푸틴 입장에서는 유로마이단과 같은 민중시위가 성공할 경우 비슷한 환경인 러시아에서도 민주화 시위가 번질 위험이 크다고 생각했다. 사실 2011년 총선 부정 사태 때도 이미 러시아에서 몇 만명이 운집한 나름 큰 규모의 시위가 있었던 만큼, 우크라이나가 서방에 가까워지게 될 지정학적 위협보다도 당장 정권의 유지 차원에서 큰 위협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이 상황에서 우크라이나에 서방과 가까워지려는 정부가 장래 등장할 것이라고 판단한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 거주하던 러시아인들의 국민감정을 자극해 크림 반도를 군사적으로 병합해버렸고, 우크라이나 동부지역에 군사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남오세티아 전쟁 당시 조지아 내에 주둔하던 평화유지군이 먼저 공격당한 상황과는 달리, 러시아가 엄연히 우크라이나에 선제공격을 가한 만큼 서방에서는 러시아의 이러한 행동에 가만히 보고있지는 않았다.
크림 병합 이후 서방 국가들이 러시아에 본격적으로 경제제제를 걸기 시작하면서 러시아와 대립각을 세우기 시작하자, 러시아는 생각했던 것보다 주저할 수 밖에 없었고,[25] 게다가 생각 외로 반군이 호전하지 못하면서[26] 우크라이나와 어정쩡한 상황을 이어가게 되었다. 물론 러시아의 선제공격으로 단단히 열받은 우크라이나 입장에서는 러시아의 잔재를 완전히 청산하면서까지 대립각을 세우는 만큼, 러시아 입장에서는 골칫거리가 된 셈. 하지만 푸틴 입장에서는 기존 러시아 정치를 향하던 국민들의 불만을 외부로 성공적으로 돌린만큼 만족할 만한 성과를 얻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2.6 결론
You cannot continue to victimize someone else just because you yourself were a victim once—there has to be a limit.당신들은 한 때 당신들이 희생자였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계속 괴롭힐 수는 없다. 여기에는 당연히 한계가 있다.
- 에드워드 사이드, 팔레스타인계 미국 사회학자.
1991년 소련 해체로 러시아는 과거 자신들이 수백년 걸쳐 확장했던 영토를 상실했다. 러시아 입장에서 보았을 때 지정학적으로 매우 불리한 위치에 처해버렸고, 경제, 정치적으로 모든 면에서 약화되었다.[27] 이러한 상황이기에 러시아는 옛소련 공화국들을 어떻게 해서든 자국의 영향권으로 편입시키려 하고 있다. 특히 소련에서 독립한 여러 국가 중 비교적 친러 성향에 가까운 몇몇 국가들은 러시아와 협력해 유라시아 연합으로 재통합을 모색 중이다.
(2015년 리투아니아군에서 러시아계의 소요사태에 대비해 실시한 진압훈련)
반면 이러한 러시아의 움직임은 러시아의 주변에 위치한 국가들 입장에서 거의 경기를 일으킬 정도의 공포 수준에 가까워서, 조금 노골적으로 비유하면 한국인 입장에서 보는 적화통일이나 북중합병과 비슷하다. 특히 러시아에 비교적 우호적이었던 중앙아시아 국가들과 캅카즈 국가들과는 달리 러시아와 역사적으로 관계가 좋을래야 좋을 수가 없는 동유럽 국가들 입장에서는 자국이 러시아에 합병되었던 전례가 있던 만큼, 러시아의 군사적 개입을 막기위해 적극적으로 NATO나 유럽연합에 가입했거나, 가입하려고 한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2차대전의 안좋은 기억이 남아있는 상황에서 자신들의 옛 영토가 적에게 넘어가는 약이 달아 오르는 상황이겠지만, 그들 입장에서는 러시아가 무력으로 펼친 강압통치의 복수인 셈이다.- ↑ 벨리카야 루스 라고 읽는다. 소련 국가에서도 등장.
- ↑ 갈리치아 등을 포함한 서부 우크라이나 지역
- ↑ 벨라루스 지역
- ↑ 현 벨라루스의 서부지역,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으로 스탈린이 뜯은 벨라루스 서부의 영토를 말한다.
- ↑ 이 대목에서 또 한층 더 골치아픈 세부 분화가 생긴다. 여기서 대러시아라 함은 단순히 큰 러시아를 의미하는게 아니라, 폴란드-리투아니아나 오스만 제국이나 스웨덴 등의 지배를 받은 적이 없는 현대 모스크바와 그 일대의 블라디미르, 야로슬라블, 수즈달, 프스코프, 벨리키 노브고로드, 니즈니 노브고로드, 트베리 등의 도시 국가에 역사적 기원을 두는 루스인들의 분파를 의미한다. 축약해서 정리하자면 현대적, 민족 국가적 관점에서의 러시아인=대 러시아인이라 정의할 수 있다 레닌이 비난했던 대러시아 쇼비니즘에서 대러시아가 바로 이걸 뜻한다. 거기에 정치적, 외교적 의미의 대러시아는 또 다른 의미다. 이건 밑을 참조.
- ↑ 보통 저기서 붉은 갈색과 고동색지역인 구 소련 영역을 일컫는다, 동유럽부분과 북한은 냉전시기에 직간접적 러시아의 통제하였던 지역이며, 페르시아 북부와 만주, 몽골 등을 포함한 중국 북부는 제정시기에 영향력을 미치던 지역이다.
- ↑ 해당 항목을 참조하면 알겠지만, 이 정당은 애초부터 진지한 정당은 아니다.
- ↑ 사실 학자들에 따라 러시아 공화국이나, 소비에트 러시아를 빼기도 한다.
- ↑ 당시 레닌은 그루지야에서 스탈린이 강압적으로 내세운 소수민족 정책을 비판하며, 스탈린이 자신의 후계자 자리에 부적합하다는 평가를 내렸다. 하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이후 스탈린이 펼칠 강압적인 소수민족 정책과 이로 인해 대러시아주의에 물든 소련의 미래를 예언한 셈이 되었다.
- ↑ 실제로 초창기에 인공어였던 에스페란토가 소련에서 잠깐 인기를 끌었던 이유가 이 때문이었다.
- ↑ 사실 이러한 문자 개혁에는 문맹률 해소 및 언어 보급률을 높이려는 시도 외에도 당시 중앙아시아 등지에서 유행하던 바스마치 운동 등 중앙아시아가 전통적으로 문화적 접점을 가지고 있던 이슬람, 튀르크계 민족주의 운동과 유대감을 줄이기 위해서였다. 비슷한 사례로 터키에서 아타튀르크가 추진한 세속화, 아랍 문자를 라틴 문자로 바꾼 터키어 개혁 등이 있다.
- ↑ 정확히 말하자면 내전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이들 국가에 개입할 만한 여력이 없기도 했다.
- ↑ 의외라면 의외일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소련 내에서 영토에 대한 인식은 "같은 소련인"이라는 인식 때문이었는지 상당히 자유로웠다. 당장 소련 내 수많은 공화국들에 존재하던 자치공화국(ASSR)과 자치주(AO)만 보더라도 소속이 바뀌는 일이 빈번했다. 특히 1936년 러시아 공화국에 소속되어있던 중앙아시아 영토를 5개 연방 공화국(SSR)으로 별도 설립시킨 것이나, 1954년 러시아 공화국 소속이었던 크림 반도를 우크라이나 소속으로 편입시킨 것 역시 이러한 인식의 일부였다. 물론 각 공화국들이 주권국가로 독립해버린 오늘날에는 커다란 골칫거리가 되었지만.
- ↑ 대표적으로 쑨원, 호치민 등.
- ↑ 재미있게도, 이러한 단어들은 독소전과 그 이후 소련에서는 거의 밥 먹듯이 쓰였지만, 독소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소련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았다.
- ↑ 오늘날 러시아 연방 공산당이 기존 서구권의 전통적인 좌파 정치세력과는 달리 보수적이며 애국적인 성향을 띄는 이유이기도 하다.
- ↑ 이러한 과정은 조지 오웰이 쓴 동물 농장에서 잘 드러난다.
- ↑ 중앙아시아 지역도 상실하였다. 카자흐스탄만 해도 전세계에서 9번째로 넓은 나라임을 감안하면...
- ↑ 이 때는 푸틴이 서방에서 친서방적이라고 평가되던 시절이었다.
- ↑ 하지만 빅토르 유셴코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노골적인 제스처만 안 취했을 뿐이지 아무 것도 안한 것은 아니었다.
- ↑ 1993년에는 한국에서 평화유지군을 파병했던 적이 있다.
- ↑ 정작 아이러니한 것은 본인 역시 무력을 동원해 시위를 진압한 경력이 있고, 결국 이 때문에 민주화를 이끈 지도자에서 독재자로써 정치적으로 몰락했다. 보리스 옐친 참조
- ↑ 물론 잠가라 밸브와 같이 경제적 이권을 두고 다툼이 꾸준히 있었지만, 대놓고 NATO에 가입한 발트 3국이나 자국 군대를 미국 무기로 재무장시키던 조지아에 비하면 비교적 큰 충돌 없이 잘 지내는 편이었다.
- ↑ 2010년 키르기즈스탄에서 민중혁명이 일어나자, 러시아는 당시 대통령이었던 아키예프에 대한 지지를 철회해 사실상 현 정권을 몰아내도록 방조했다.
- ↑ 공식적으로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 군사적으로 개입했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있는데, 만약 러시아가 적극적으로 우크라이나군과 교전할 경우 이는 명백히 UN 회원국에 대한 침공이다. 왜 미국이 이라크 전쟁 이후 평판이 극도로 나빠졌는지 생각해보자.
- ↑ 크림 위기 이후 오데사, 하르키우 등지에서 지역 청사 점거 시도가 있었으나, 대부분 우크라이나 군과 경찰에 진압되었다.
- ↑ 소련 시절 3억에 육박, 세계 3위이던 인구가 러시아 연방에서는 그 절반 밖에 안 된다. 그것도 2000년대까진 계속 감소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