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목

가축 생활이 아닌 다른 의미의 유목에 대해서는 유목(동음이의어)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1 설명

가축을 거느리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풀밭을 찾아 가축을 기르는 생활 활동. 혈액형 성격설과는 무관하지만 유라시아의 유목민들은 혈액형 B형이 많다고 한다. 이들이 유목을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가축에게 풀을 뜯기다 보면 풀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열대지역마냥 비 한번 내리면 풀이 우후죽순 자란다면 이럴 필요가 없겠지만, 애초에 그런 열대지역에서 목축을 할 이유가 없다(...) 의외로 이런 현상은 농경민족에게도 흔히 나타나는데 대표적인 예가 화전. 숲에 불을 질러 경지를 확보하고 지력이 고갈될 때까지 농사를 짓다가 지력이 고갈되면 이동하는 생활이다. 물론 이 경우는 유목보다 환경파괴가 크게 일어난다.

학문적으로 볼때 유목은 크게 Nomadism과 Pastoralism으로 나뉜다. 한국어로는 구분하기 힘들지만, 전자의 경우 일정한 장소없이 물과 목초가 있는 곳을 찾아 유랑하는 형태의 유목을 의미하고, 후자의 경우 정해진 거주지가 있으면서 여름과 겨울, 혹은 일정 시기마다 정해진 목축지를 오가며 이동하는 형태로 유목과 정착식 목축의 중간적인 성격이다. 교과서에서는 전자를 유목, 후자를 이목이라 표현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요뤽(Yörük)이라 불리는 터키의 유목민들은 여름에는 산악지대에 올라가서 양과 염소를 치고, 겨울에는 하산해서 헛간 같은 곳에 양과 염소를 키우면서 여름내 만들어두었던 건초를 주는 식으로 유목을 한다.

전자의 전형적인 유목민으로 알려져있는 아라비아 사막의 베두인들의 경우 자신의 부족들이 공유하는 여름 목축지와 겨울 목축지, 봄 목축지를 순회하면서 목축을 한다. 이는 딱히 영역의 구분이 없는 몽골, 튀르크멘 유목민들과 상당히 다른 양상을 보이며, 몽골도 야크를 기르는 경우에는 유목이 아닌 이목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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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되어 산악지대로 이주하는 요뤽 유목민들의 모습

초원지대에서는 의 조합을 선호한다. 사막 지대에서는 낙타를 선호하기도 한다.

떠돌아다니는 특성 탓에 하나의 국가가 만들어지기는 어렵다. 때문에 농경민족의 변방 정도로 취급당하는데 대표적으로 말갈부터 거란 여진 몽골 등이 있다. 이외에도 역사에 나타나는 흉노, 선비등이 모두 이런 유목민족에 포함되는데 보다시피 모두 오랑캐로 분류되었다. 흉노와 같다느니 하는 훈족도 여기에 포함된다. 이들은 말에 익숙한만큼 농경민족보다 전투병력의 비중이 극도로 높다. 농경민족 관점에서 보자면, 기병은 육성하는데 시간도 많이 들고 기수에게도 말에게도 돈이 막대하게 들어간다. 하지만 유목민족의 입장에서는 말이 농경민족보다는 상대적으로 값싸고 사람들 대부분은 말을 탈 줄 안다. 과거 전차나 장갑차와 같았던 기병 병종을 훨씬 쉽게 모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으로 보면 유목민족은 성인 남성 대부분이 짧은 시간안에 기병으로 전장 투입이 가능한, 고대의 기갑 집단이라 할 수 있다. 아무래도 말은 생물이다 보니 현대의 기갑 부대에 비하면 어처구니 없는 참패도 당하는 편이라 기병을 쉽게 보는 사람들도 있는데, 기병들이 올린 전설적인 전공들을 보면 보병은 현실적으로 다 죽일 힘이 부족해 불가능한 종류의 것들도 많다. 십자군 전쟁이나 윙드 후사르 등등에서는 진짜 놀라운 교환비를 세운 적도 있다. 거기다 유목민들같은 경우 수렵까지 병행하는 경우도 많아 각종 무기에 대해서도 농부들보다 익숙하다. 즉 기병이라는 점만으로도 무서운 것인데 숙련도도 만만치 않았다. 더구나 강력한 무력을 생산하기 쉬움+생산력의 상대적 저하라는 두가지 요소가 겹쳐서 대부분은 약탈민족 성격도 커서 공포의 대상이었다. 심지어 알렉산더 대왕이나 키루스 대왕 같은 군주들에게도 유목민들이 시비를 걸기도 했다. 때문에 제대로 된 지도자가 나타나면 무시무시할만큼 극도로 성장하며 이것은 게르만조차도 밀어버려서 서로마의 멸망까지 나비효과를 일으킨 훈족의 성장이나 요, 금, 원, 청으로 이어지는 유목민족의 중국 및 한반도 침략으로 이어졌다. 특히 몽골의 경우 칸국들까지 합치면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나라를 이루었으며 헝가리까지도 몽골의 피가 섞여 있는 걸 생각하면 고대에 그들의 잠재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특히 파르티아는 소수 유목민들이 인구 500만을 정복한 다음에 인구 5,000만의 로마를 위협적으로 압박하기도 했다.

흔히 생각하는 사막의 민족들은 대부분 유목민족이다. 파르티아아르메니아, 베르베르, 아파르족등등..

다만 농경민족을 정복한 후 오히려 그들의 문화에 역으로 점령돼 버리는 일이 흔하다. 특히 중국. 동아시아, 특히 중국과 한반도의 역사는 농업이 정착된 후 이들 유목민족을 막거나 먹히는 역사로 점철돼 있다. , , , 이 모두 이들의 역사이며 이들 민족의 기마 부대는 언제나 공포로 군림해 왔다. 대표적으로 병자호란을 보면 알 수 있다.[1]

또 유목민족은 빠른 성장만큼이나 쇠퇴도 빨라서 거란의 경우 과 금에 의해 멸망했고, 원도 그 엄청난 영토를 생각하면 너무 쉽게 무너져 버렸고 심지어 대제국을 이룬 청도 불과 100년만에 자기들의 언어와 정체성을 거의 잃어버리고 중국에서 소수민족 대우를 받고 있다. 뿐만 아니라 투르크족 역시 한 때 이슬람의 주도권을 쥐었으나 결국 문화적 헤게모니는 아랍인과 페르시아인들에게 내어줬을 뿐더러, 유목민들 중 거의 유일하게 기독교 문화권에 편입된 마자르 족 역시 기독교를 받아들인 후 유목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은 거의 상실하게 되고 기독교를 받아들인 다른 민족들과 별 차이가 없어지게 되었다.

2 고된 유목생활

"용사는 화살 한 발에, 부자는 한파 한번에 끝장난다."

- 몽골 속담

로망을 가진 사람이 많지만 절대 오해해서는 안되는 것이 유목 생활은 농사짓는 것보다 훨씬 고되다는 것이다. 주로 유목을 하는 지역은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척박한 땅들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겨울이 되면 그 소중한 가축들이 얼어죽거나 굶어죽는 일이 빈발하다. 몽골에서는 이런 한파를 조드(Zud)라고 부른다. 기온만 떨어지는 블랙 조드는 그래도 피해가 크지 않지만, 눈이 목초지를 덮어버리는 화이트 조드 때는 유목민 재산 1호인 가축들이 고스란히 굶어죽고 얼어죽고 병들어 죽는 대기근을 겪는다. 유목 생활이 얼마나 고된 것인지는 과거의 영화를 자랑한 몽골이 나름 거대한 영토에 비해 인구가 300만 정도밖에 안 된다는 사실이 이를 반증한다. 사실 영토만 클 뿐 농경민족이 이미 금싸라기 땅을 차지한 상황에서 그들은 변방의 사람이 살기 힘든 땅에서 활보한 것일 뿐이며 인구 수와 문화 면에서 상대가 안 되었다.

농경은 바로 고구려가 만주를 확장하면서도 만주보다 한반도, 특히 한강에 집중한 이유이며, 유목민족들이 중국을 차지하고도 오히려 중국의 문화에 휩쓸린 가장 큰 이유이다. 농경민족의 경우 산이나 강을 경계로 한 방어선의 확립이나 군주의 정복 욕심에 대외정벌을 한 경우가 큰 데 비해[2] 유목민족은 정말 살기 위해 농경민족을 약탈하기 위해 침략한 것이기에 전투력이 그렇게 높은 것이다. 우리에게 크게 다가오는 만주가 그런 경우인데 공업과 상업이 발달해서 과거에 쓸모가 없었던 영토들도 활용할 수 있게 되는 근대가 되기 전까지 이 땅은 차지해도 이득이 적고 손해가 많은 땅일 뿐이었다[3]. 특히 기후를 많이 타는 쌀농사. 현재 만주 지역에서 좋은 쌀이 나오는 곳은 지열 덕에 그나마 쌀농사가 편한 것으로 이마저도 대부분 구한말 이후 조선사람이 건너가서 개척한 것이다. 이 지역에서 현재 주로 생산되는 작물인 옥수수감자는 당시에 없었다.

또 중국의 만리장성부터 고려가 동북9성을 쌓으면서 이들을 저지하고 조선에서도 심심하면 이들을 토벌하러 가면서도 정작 만주에 대한 영토 욕심을 내지 않은 것은 이것 때문이다. 물론 생산력 문제 뿐만 아니라 지정학적 문제도 있다. 만주 지방 같은 경우, 제대로 된 방어선을 설정하기 힘들 뿐더러 이를 감당할 인구가 없다면 뚫리기 쉽상이다. 그 고구려도 요동 방어선을 제대로 설정하기 전까지 선비족과 같은 북방 유목 민족에게 생각보다 쉽게 털렸으며 요동 지방을 어설프게 지배했던 발해도 제대로 된 방어선을 설정하지 못해 요나라에게 일격으로 당했으니...

고려 말 공민왕 시절 실행되었던 제1차 요동 정벌에서도 결국 같은 이유로 요동성을 함락시키고도 내어주었다(물론 이 경우 남쪽에서 치고 올라오는 왜구도 감당했기 때문에 전선을 확대할 수 없었던 사정도 감안해야 한다.

게다가 세종대왕 시절부터 단행된 4군 6진에 대한 사민 정책도 이주 과정에서 백성들에 대해 상당한 고통을 유발했고 다산 정약용도 이 점을 지적하여 국력에 넘치는 요동 정벌에 대해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제대로 된 국력과 역량을 지니고 있다면 오히려 이 지방을 경영하는 것도 괜찮다는 의견을 보이긴 했지만. 실제 조선 왕조에서 왕조 차원이든 민간 차원이든 이 지방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시점은 인구가 서서히 팽창하고 경신대기근과 같은 사태로 국토가 당시 인구를 감당하기 힘겨워지기 시작한 현종 무렵부터였다. 농경민족의 입장에서 이들은 문화를 파괴하는 침략자일 뿐이었다는 것. 거대한 영토에 현혹되지 말자.

물론 농경 기반 정주민들 입장에서는 그들이 같은 인간이라기보단 야만스런 들짐승과 같이 보였겠지만, 반대로 유목민족 입장에서는 정주민족들이 줄에 묶여있는 가축과 같이 생각했다고 한다. 단백질은 유목생활로 충분히 얻을 수 있었으나 생존에 필요한 탄수화물을 얻기 위해서 정주민을 약탈했다는 것. 물론 당하는 입장에서는 미치고 팔짝뛸 노릇. 달래도 보고 때려도 봐도 도무지 통하질 않으니.. 중국 통일왕조? 세계최강? 훌륭한 탄수화물 섭취용이죠.

3 현재

유목민의 직접적 후손을 자처하는 민족 국가로는 몽골,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등이 있다. 그렇다고 ~스탄이 모두 유목문화권은 아니다. 우즈베키스탄만 해도 정주 농경 문화권이다. 공산주의 시대에 유목생활은 탄압을 받았지만, 지금도 떠돌아다니며 유목하는 사람들이 이 나라들에는 적지 않다.

아시아뿐만 아니라 현재 아프리카에서 활동하는 베두인 족이 아직 남아 있다. 이들은 애초에 자기들이 마음대로 다녔던 곳이 국경으로 지정되어서 들어갈 수 없다는 것에 크게 반발하고 있다. 일단 통행증으로 이동하는 것으로 어느 정도 일단락 되었지만 이것은 유목민족의 삶이 어땠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한다. 할힌골 전투의 발단도 이런 갈등으로 발생한 셈. 유목민들이 마음대로 다니던 북방 영토가 소련이며 만주국이며 몽강국의 국경으로 나뉜것은 유목민의 사회에 많은 혼란과 분열을 가져왔다.

그 밖에 마사이 족도 일부 유목생활을 하고 몽골이나 터키나 유라시아나 중국, 러시아에 이르기까지 일부 유목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남아있다. 그러나 당연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이들 수는 줄어든다. 해당 정부도 정착하여 살길 권장하고, 고된 생활을 아이들에게 물려주기 싫기 때문에 결국 유목을 포기하는 경우가 늘기 때문이다.

유목의 역사가 늦어서 빨라도 16세기 경부터 유목 생활을 시작한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의 경우[4], 유목 생활이 자리를 잡아가던 시절이 하필이면 산업 혁명기와 겹치게 되면서 자신들의 땅에 철도를 놓으려던 미국인들과 격렬한 충돌을 빚었다[5]. 그래서 북아메리카 유목민들은 철도의 설치로 인해, 사냥의 대상이던 들소가 열차와의 충돌로 인해 폐사하거나, 철도 공사를 명목으로 원래의 영토에서 추방당하는 등의 피해를 당하면서 이에 저항하는 운동도 많이 일어났다. 19세기 후반의 리틀 빅혼 전투나, 아파치족들의 봉기가 대표적이다. 현재는 수우족을 포함한 몇몇 부족들에 의해서 유목생활의 흔적은 보존되었으나, 20세기를 전후해서 유목생활 자체는 전부 중단되었다[6].

4 전통

유목민들 대부분이 손님을 환대하는 전통이 있다. 유목민족이 사는 땅들은 대체로 인구밀도가 낮고 척박한 땅이 많기 때문에 식당이나 호텔 따위가 적재적소에 있을 리도 없고, 내가 도와주고 다음에 내가 어딘가를 여행할 때도 남의 도움을 받고 상부상조하자는, 광활한 땅을 안전하게 여행하기 위한 상호간의 생존수단으로서의 전통이다.

유목민들의 삶은 대체로 가난하고 거칠었고, 이 때문에 각 부족간의 대립과 분쟁, 약탈 역시 늘상 벌어지는 일이었다. 손님을 환대하거나 환대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손님을 공격하는 것을 매우 불명예스러운 일로 여기는 전통은 이런 상시적 대립 속에 있는 사회가 유지되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였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만약 손님도 아무렇지 않게 공격하기 시작한다면... 다수의 전력과 함께하지 않고서는 부족의 영역 밖으로 단 한발짝도 나갈 수 없게 될 테고, 부족간의 교류 역시 불가능하거나 극히 어려워 질 것이며. 이 때문에 결국은 사회 자체가 붕괴되고 고사할 수 밖에 없는 것. 그리고 이에 더하여 보통 폐쇄적이고 고립된 부족 중심의 사회에서 손님은 외부의 정보와 문물을 전달하는 중요한 창구였다는 점 역시 손님을 환영하는 이유 중 하나였을 것이다. 더 자세한 분석은 이런 문화적 배경을 참조해 웨스테로스라는 가상세계에서 창조 해 낸 접대의 관습 항목을 참조 해보자.

물론 각박한 현대사회에는 아무리 유목민족의 후예들의 나라들이라고 해도 이런 개념이 다소 약해진 것도 있지만 도시를 벗어나면 꽤 통하는 편이다. 몽골, 키르기스스탄, 카자흐스탄, 중동베두인이나 투아레그족 등의 유목민 천막에 아무 연고도 없는 한국인 여행자가 대뜸 찾아가도 따뜻한 차와 최대한의 성의를 담은 식사, 천막 상석의 잠자리를 공짜로 해결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오히려 먼저 들어와서 차나 한 잔 하고 쉬다 가라고 잡아끄는 경우도 많다.[7]

물론 히치하이킹 등이 그렇듯 인신매매의 위험 때문에 대놓고 강추하지는 못하지만, 이런 풍습이 있는 것을 알고 몽골 서부의 버스 타고 며칠을 가야 하는 시골에 가서 한 달 동안 이렇게 공짜로 먹고 자면서 여행한 한국인 블로거도 찾아보면 있다. 몽골어 한 마디 못 해도 가능하다. 이렇게 선뜻 먹여주고 재워주고 하는 대가로 돈을 지불하는 것은 유목민족에 따라 호의를 금전적 관계로 해석하는 실례이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현지인 쪽에서 당당히 1박만큼의 대가를 원하기도 한다. 지역에 따라서도 달라서 가령 몽골 같은 경우 도시화나 현대화가 많이 된 곳일수록 돈을 받거나, 관광객을 상대하지 않는 평범한 유목민 천막에서는 돈을 줘도 안 받으려 하기도 한다.

여담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어쩐지 목축과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 차이점은 링크를 참조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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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유목을 하는 사람들은 옷차림도 남루하고 화려한 것이랑 거리가 멀다는 편견도 많다. 하지만 베두인과 같이 정해진 영역이 있는 유목민들은 대상(Caravan)에 종사하거나, 잉여생산물을 인근의 정착민 마을에 내다팔아 사치품을 교환하는 식으로 상업도 겸했기 때문에 의외로 부유하다. 당연히 유목민들도 사람인지라 부유한 생활을 싫어할 리 없고, 단순 유목만으로는 국력 신장에 한계가 있으니 많은 유목민족들은 상업을 중시했다. 참고로 허영만말에서 내리지 않는 무사를 연재할 당시 작품에 나오던 몽골 및 유목민들 귀부인 여성들 옷차림이 화려한 것이나 갑옷을 입고 싸우는 게 오류라고 주장하는 글이 여럿 있었다. 때문에 이 책 단행본에서 허영만이 몽골 취재로 가서 직접 찍은 울란바타르 박물관에 전시중인 당시 여성 귀부인 사진을 싣으면서 유목민이 화려한 옷차림이나 갑옷을 입지 않았다는 건 편견이라고 일침을 가했다.

신부 이야기에 나온 실제 아제르바이잔 쪽 유목여성 옷차림 그림도 실제 옷차림을 보고 그린 것이다.

5 유목민의 특징

5.1 엄청난 전투력

유목민들은 상술했다시피 척박한 땅에서 맹수들과 상대하고 가축을 지키기 위한 승마술과 사냥술이 생존을 위한 기본 수단이 되는 관계로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구성원 대부분이 기마병력이나 마찬가지였다. 기본적인 말타기나 사냥을 넘어 완전히 군사적 훈련 자체가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겨졌던 부족들도 많았고. 더구나 이 기병이라는 병과가 탄생시점부터 기관총과 전차가 등장하는 1900년대 이전까지 인류 최강의 전투병과였다. 농경민족은 이런 수준의 전사를 기르기 위해서 천문학적인 비용을 들여 전문 직업군인을 양성해야 했다. 농사짓던 사람들 무장시키면 바로 병사가 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징집병의 전투력이 비약적으로 개선된 시기는 머스킷 소총이 나온 이후가 된다. 고대에는 중장보병이나 기마병을 훈련하는데 최소 10년이 걸렸다고 하며 중세까지만 해도 궁병을 기르기 위해 걸리는 훈련기간이 수년이 걸렸는데 오늘날 소총수 훈련은 2주에서 4주면 끝난다.

유목민족에게는 일상생활이기에 어렸을적 부터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근대 시대까지만 해도 규합하기가 어려웠을 뿐이지 규합만 했다 하면 정말 소수의 유목민에게 압도적으로 다수인 농경 제국이 매번 탈탈 털리기를 반복했다.

사실 어떻게 보면 제국들이라서 더 불리한 점들도 있었는데, 우선 영토가 너무 넓으면 농경민들은 유목민들의 기동성을 따라가기가 매우 어려워서 농락당하기 일쑤였다. 특히 교통, 통신이 발달하기 전에는 싸우기도 전에 행군하다 보급이 끊기거나 토질병 등으로 죽을 수도 있었으며 유목민들은 역청야전술로 지나가는 곳마다 초토화를 시켜서 완전히 맥이 빠지는 상황을 만들기도 했다. 이탈리아 반도처럼 바다를 끼고 옆에 광활한 지형이 적은 곳은 드물었고 다른 지역의 세력이 침공할 목적으로 지도를 살피면 유럽으로 가는 길은 상당히 복잡한 편이다. 더구나 개활지에서는 기병에 답이 없는 경우가 많은데, 일반적으로 경제적 이유 때문에 험한 지역에 주요 도시를 건설하는 민족은 드물었기 때문에, 농경 제국들은 유목민의 공격을 근본적이 조건에서 방어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경제력과 기술력 덕분에 건설한 크고 아름다운 성벽 같은 걸 보면 인구가 엄청나 보이지만 막상 영토를 팽창시키기 위해 상당한 인구를 넓게 흩뜨려 놓아 인구 밀도가 그리 높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라 막상 제국들이 가진 도시의 실제 인구는 그리 많지 않아 동원력부터 그렇게까지 대단하지는 않았다. 최근과 꽤 가까운 시대이며 인구가 많았던 명의 수도나 주요 도시마저 50만 ~ 100만 정도의 인구를 넘는 곳들이 거의 없었다. 즉, 그렇게까지 꿀리지 않는 전력사실 의외로 정예 병종이라 무장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당시 병법에 따라 단순 전력으로 계산하면 오히려 압도적일 때도 많았다.으로 각개격파가 가능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제국을 세운 민족들도 정복이니 개척이니 하고 다녔던 애들이라 생각보다 쉬운 상대는 아니었으며 어떤 지역의 제국을 깨뜨린 유목민들은 거의 그 지역 최강으로 봐도 될 정도였고 실제로 주변의 다른 지역들도 박살을 내고 다닌 경우가 태반이었다. 또 많은 인구 역시 문제점이 있었는데, 제대로 된 민족주의가 등장하기 전에는 공부를 해도 지식인들부터 딱히 민족에 충성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적대 민족들과의 대결 시 결집은커녕 양날의 칼이 되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유목민들이 와서 혼란을 일으키는 동안 불구경하며 방관만 하는 행동은 그나마 양반이고 적대 민족에 붙거나 아예 신이나 하늘이 현 정부를 버렸다며 독자 세력을 만들어서 마음대로 하고 다니면 답이 없었다. 현실에서 혼자서는 트롤 짓거리도 할 수 있는 게 적지만 일정 규모가 되면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아지기 때문에 인구 대비 비율이 적어도 현실적으로 매우 부정적인 로또 같은 짓거리를 해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 제국도 복잡한 지형과 침략할 때 바다 or 산지 or 냉지 등을 거쳐야 하는 조건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모른다. 로마 역시 야만인들에게 제국의 중심부가 털렸던 적이 있기도 하고. 솔직히 로마는 세계의 다른 농경 제국들과 비교하여 무능한 지배층들 or 부정부패 or 엄청난 자연재해 등의 제국이 무너질 수도 있는 악조건일 때 탈탈 털려도 바다 건너의 공략하기 쉽지 않은 안전한 영토에서 세력을 회복하여 반격에 나설 수 있었던 점이 있다.

규모가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라 단점이 있기도 하고, 지리적으로 답이 없는 특정 지역에 있는 나라들을 보면 유목민 중에서 똑똑한 지도자가 나온 순간 막장 상황이 오기도 했다. 농경 제국들이 보기에 유목민들은 공격할 곳이나 점령할만한 곳도 딱히 없지만 오히려 군대를 동원해 공격하는 자체만으로 손해라 식량이나 사치품 같은 걸 주고 달래기도 했다. 더구나 유목민들의 군사 가성비는 상당히 좋아서 이기기도 쉽지 않았다. 유목민이 보는 농경 제국들은 포위할 수 있는 도시들도 많고 약탈 등으로 보급을 충당하기에도 상당히 좋았다. 까놓고 농경 제국들은 유목민을 공격하면 국력이 소모되지만 유목민들은 오히려 각종 재화와 학자나 기술자 같은 필요한 인구, 도시를 얻고 국력이 강해지는 관계가 있어서 처음에는 별거 아니던 유목민들이 싸우면 싸울수록 강해지다가 충격과 공포 수준이 되기도 했다. 심지어 근대 이후에도 기병들은 강했다. 대표적으로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는 기병으로 근대적 요새들을 점령하기도 했다.오스만 군이라 우습게 보일 수도 있었지만 영국군도 의외로 고전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걸 부족 기병들로 해낸 것이다. 물론 이 양반은 영화 등에서 과장된 면이 있긴 하지만 실제 역사에서도 아랍 부족들이 말 타고 설치며 영국군이 오기도 전에 오스만 군을 다마스쿠스에서 몰아내는 활약을 했다. 이븐 사우드가 고작 40명의 병력으로 독립 운동을 하다 광대한 영토를 얻을 수 있었던 이유도 기병빨이 좀 있다.아마 한반도에서 독립 운동을 했다면 끔살 당했을 것이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영토를 살피면 일단 머리가 좀 돌아가는 사람이 말 타고 돌아다니며 설친다고 가정할 때 잡는 난이도가 장난이 아니다. 사실 의외로 2차 세계대전까지 창기병 같은 고전적 기병들도 활약했다. 기병 항목 참조.

5.2 민족적 개념

인구밀도가 지독하게 낮기 때문에 혼인 상대를 찾는 것도 어렵다. 따라서 부족 단위로 인종적 특징과 결속이 나타난다. 이것은 당연히 각 유목민의 활동영역에 한정된다. 그런 이유로 유목국가가 출현하더라도 이들은 서로 결속이 매우 약할 수 밖에 없었다. 고구려의 역사와 국가 체제만 살펴봐도 이런 흔적이 많이 나온다. 하지만 이런 유목국가의 흥망이나 부족간의 항쟁, 기후변화등에 따라 유목민의 공동체는 해체와 재결성이 반복된 탓에 고대 시절 갑툭튀해서 세계사를 뒤집어 놓은 유목민족들의 후예가 누구이고 뿌리가 누구인가 찾아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사실 구대륙의 구석에서 살며 서로 피가 좀 많이 섞일 조건이 되었던 민족들이 아니면 농경민족들도 이런 문제들이 좀 있다.

5.3 음식

혹독한 환경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육포같은 보존식품이 발전하였다. 고기를 말등과 안장사이에 끼워두면 압축효과와 마찰열로 쉽게 만들어졌다는 설이 있다. 또 안에서 불을 피우는 천막이라는 주거형태와 최대한 알뜰하게 동물을 활용해야 했던 관계로 내장, 선지나 스튜 형태의 음식 문화가 발달했다. 이런 음식 문화는 동유럽부터 한반도까지 남아있다. 한반도가 유독 탕 요리가 발달 한 것이 유목민과 접점이 많았던 탓일지, 원래 한반도의 문화였는지, 몽골지배 시절 유행하게 된 것인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확실한 것은 농경문화에서 나타나는 흔적은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천막에서 항상 불을 피우는 주거형태는 증류주 제조에도 유리했다. 오늘날 우리가 먹는 소주도 원형은 몽골지배 시절에 들어온 것이다.

5.4 문자

부족 규모의 공동체 특성 때문에 유목민은 자연스럽게 문자의 발명과 기록의 역사를 남기지 못한 편이다. 오늘날 많은 학자들이 유목민들이 사료를 남기지 않은 관계로 세계사를 다룰때 그들이 유라시아 대륙에 끼친 영향에 비해 비중있게 다뤄지지 못한다고 이야기 한다. 오늘날 다뤄지는 유목민의 기록들은 대부분 중국과 이슬람 같은 피정복자에 의한 사료뿐이다. 그렇지만 이도 유목민 나름이라서 원조비사 같은 기록을 남긴 몽골[8]이나 거란, 여진, 돌궐, 만주처럼 국가체제가 갖춰진 이후에 문자를 만든 유목민들은 많았고, 헝가리나 베두인처럼 진작에 문자를 가지고 있었던 유목민도 있었다.

5.5 취수혼과 아내를 빌려주는 풍습

지역에 따라 예외도 있지만 대부분의 유목민은 혼인시 여자가 남자의 집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때 신랑측 집안에서 대가로 많은 선물을 하는 것이 관례이다. 신부는 이렇게 몸값이 나가는 관계로 한번 취한 신부는 남편이 죽게 되면 그 형제들이 형수를 취하는 취수혼의 전통이 많다. 취수혼은 결혼으로 맺어진 부족간의 동맹 관계를 깨지 않기 위한 목적, 과부가 된 여성의 생존과 인권, 또 유목인 공동체의 와해를 막는 등의 다양한 장점이 있었다. 한정된 목초지를 두고 경쟁하기 때문에 이웃한 부족간 관계는 대체로 험악했고 이를 혼인으로 푸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취수혼의 전통은 유목민뿐 아니라 알래스카인들에게도 발견된다. 농경문명에선 보통 여자는 노동생산력이 없으면서 식량소모가 늘어나기 때문에 여자쪽에서 혼수를 하는 풍습이 많지만 유목민에겐 여성도 식량생산을 담당하는데다 인구생산이 더 절박한 문제인 관계로 반대의 풍습이 나오는 것이다. 때문에 장남이 신부를 데려오면 이후 형제들은 집안 형편에 따라 결혼을 못하거나 좀 하자가 있는 여성을 싸게 데려오던가 형이 죽기를 바래야 하는 상황이 나오고 만다. 다만 이러한 풍습이 이누이트에게도 있다고 왜곡되는 경우가 있는데 유목민이라고 죄다 이런 게 아님을 알아두자. 이누이트 인들은 보수적이라 취수혼같은 건 없었다.

또한 드물게 가임기의 딸이나 아내가 이방인 여행자에게 밤일을 제공하는 풍습 있다. 이는 지독하게 낮은 일구밀도에서 유전적 다양성을 확보하려는 생존 본능에 의한 것이다. 북쪽으로 올라갈 수록 이런 풍습이 더욱 많이 발견 된다. 우리와 같은 정착민의 개념으로 보기엔 매우 미개하고 문란한 성문화 같지만 이는 지독하게 인구밀도가 낮은 지역에서 부족의 생존을 위해 발전시킨 현명한 풍습이다. 영화 "마지막 한 걸음까지 (2001)"(So weit die Füße tragen)에서도 주인공이 이런 풍습을 체험(!) 하는 묘사가 나온다.

6 유명한 유목 민족

현대 불가리아인의 기원이 된 민족. 정확하게는 불가르족이 발칸 반도 현지의 슬라브족을 정복한 뒤에 이들에게 동화되어 이루어진 민족이 현대 불가리아인이다.
정확히는 반농 반수렵 민족이지만 유목도 했다.
오늘날의 헝가리를 세운 이들. 지금의 헝가리에 정착한 후에는 유목 생활을 청산하고 농경 생활로 갈아탔다.
반농반목 민족이지만, 본래 유목민으로 시작한 민족이다.
이들 중에서 지금의 위구르 땅으로 간 이들이 세운 나라가 청나라에게 정복당하여 멸망한 준가르이고, 러시아 땅에 잔류한 이들이 세운 나라가 오늘날의 러시아의 칼미키아 공화국이다.
  1. 그런데 이 가운데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은 농경과 목축, 그리고 물고기 잡이를 겸업하였고 초원이 아닌 숲이 주된 그라운드였기에 순수한 의미로서의 유목민족과는 꽤나 다르다. 이러한 민족들을 어렵(漁獵)민족이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2. 대표적으로 알렉산더 대왕이나 아소카 왕의 사례가 있다.
  3. 중국동북3성이 왜 20세기 들어서야 핫플레이스로 떠올랐는 지를 생각해보자.
  4. 아메리카이 없었던 까닭이 크다. 북아메리카에서의 유목의 역사는 이들의 영토를 침공했던 유럽인들이 데려온 말을 훔치거나, 축사에서 탈출해서 야생화된 말을 다시 길들이면서 시작됐다.
  5. 서부극 장르 자체가 원래 이 시기를 소재로 하는 장르이다.
  6. 참고로 수우족은 본래 말을 들여오기 전까지는 농경생활을 주로 하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원래의 삶으로 돌아온 셈이다.
  7. 심지어 일부 유라시아 유목민들은 자기 부인과의 잠자리(!)까지 제공해주기도 했다. 다만 이 경우에는 그 부부가 요구하는 물건을 주어야 하므로, 사실상 매춘과 비슷했다. 물론 진짜 매춘처럼 다크한 것은 아니었지만. 마르코 폴로동방견문록에서도 언급되는 풍습이다.
  8. 다만 현대 몽골에서는 몽골문자는 실생활에서 별로 쓰이지 않는데 1930년대 초중반의 문자개혁으로 키릴문자로 갈아치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몽골문자는 중국령인 내몽골에서 훨씬 더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