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colas Joseph Marie Willhelm
한국명 : 홍석구
1860 ~ 1936
프랑스인 천주교 신부이자 선교사. 1860년 프랑스의 알자스-로렌에서 태어났다. 안중근 토마스 의사와 친밀한 관계를 맺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안중근이 순국할 때 고해성사를 집전해 주었던 신부이기도 하다. 한국명은 홍석구.
1881년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를 졸업하고 1883년 사제서품을 받았다. 1888년[1] 선교사로서 조선에 입국했다. 이듬해 제물포 성당[2] 주임을 지냈고 1890년에는 용산예수성심신학교[3] 교수가 되었으나, 고향인 알자스 로렌이 독일 영토에 편입되자 국적문제로 프랑스로 귀국하였다. 1891년 조선으로 재입국하여 갓등이 본당[4]의 임시 주임이 되었다.
1896년 황해도 담당으로 파견되면서 안중근 토마스의 아버지이자 천주교 신자인 안태훈 베드로를 만나게 되었고, 안중근의 가문과 친해지게 되었다. 안중근과도 만나는 등 여러차례 친분관계를 맺어왔다. 본래 친일 성향인 귀스타브 샤를 마리 뮈텔[5] 주교와 동급이었던 것으로 알려졌지만, 안중근을 만나고 나서 점차 조선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게 되었다. 1909년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고 이듬해 사형이 확정되면서 신부의 자격으로 고해성사도 집전해 주는 등, 안중근과 인연을 맺어왔다.
그 이후, 안중근의 일을 놓고 친일 성향인 귀스타브 샤를 마리 뮈텔 주교와 갈등하게 된다. 뮈텔 주교는 빌렘 신부의 행동에 불만을 품었으며, 빌렘 신부에게 성무(聖務) 자격정지[6]를 내렸다. 빌렘 신부 역시 친일 성향인 귀스타브 샤를 마리 뮈텔 주교를 불신하는 등, 안중근 사건을 계기로 두 사제는 갈등을 빚게 되었다.
여기에 1911년 천주교 신자인 안명근 야고보의 데라우치 마사타케 암살 미수 사건까지 겹치고, 귀스타브 샤를 마리 뮈텔 주교는 직접 조선총독부로 찾아가 사건을 밀고했다. 뮈텔 주교와 빌렘 신부 사이에는 불화와 갈등이 이어지게 되었고, 결국 빌렘 신부는 1914년 프랑스로 귀국하여 고향인 알자스에서 사목하였다. 귀스타브 샤를 마리 뮈텔 주교의 회고에 따르면 1919년 신한청년단 대표자격으로 파리 강화 회의에 참석코자 했던 김규식을 빌렘 신부가 도와줬다고 하는데, 이를 확인할 방도가 없다.- ↑ 이 해에 한불수교가 맺어져, 한국에서 가톨릭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었다. 또한 한국 천주교 최초의 수도회(남녀 통틀어)인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가 한국에 진출해 온 해이기도 하다.
- ↑ 現 천주교 인천교구 주교좌 답동성당.
- ↑ 현재 이 자리에는 성심수녀회가 운영하는 성심여자중학교와 성심여자고등학교가 있다. 신학교는 혜화동으로 이전하였는데, 오늘날의 가톨릭대학교/성신교정이다. 한편 성심수녀회에서는 성심여자대학교도 운영했으나, 성심여대는 가톨릭대학교에 흡수되어 가톨릭대학교/성심교정이 되었다.
- ↑ 現 천주교 수원교구 왕림본당. 한강 이남 최초의 본당이다. 수원가톨릭대학교(신학대학)와 이웃해 있다. '갓등'이라는 이름은 지금도 남아 있는데, 수원가톨릭대학교 음악(생활성가) 동아리의 이름이 '갓등중창단'이다.
- ↑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8대 교구장.
- ↑ 미사와 성사를 집전하는 자격을 정지시킨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