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자이후

太宰府市/ Dazaifu C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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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宰府市
(だざいふし)
다자이후 시 / Dazaifu City

시기(市旗)
국가일본
지방큐슈
도도부현후쿠오카
면적29.60km²
인구72,298명[1]
상징
시화매화(ウメ)
시목녹나무(クスノキ)
홈페이지

후쿠오카현의 중부에 위치한 시이다. 명칭의 유래는 시의 이름 그대로 과거 이곳에 설치되었던 다자이후(大宰府). 현재는 터만 남아있다.

1 개요

후쿠오카시에서 동남쪽으로 약16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당연하게도 후쿠오카시의 위성도시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위성도시 치고는 그 인지도가 상당한데, 일본 3대 텐만구 중 하나인 다자이후 텐만구(太宰府天満宮)[2]규슈국립박물관(九州国立博物館)[3]이 소재하고 있는 도시이기 때문이다.[4] 이 외에도 크고 작은 사적이 많이 있어, 그 덕분에 연 관광객이 수백만에 달하는 관광도시가 되었다. 다만, 보통 외지인이 다자이후시에 방문할 경우는 다자이후시만을 목적으로 방문하는 경우는 드물고 후쿠오카시 관광에 한나절~하루 짜리 코스로 끼워서 방문하는 편이다. 어차피 도시 자체가 그리 크지도 않고 후쿠오카시와 가까워서 왕복도 편리하다.

철도 교통은 규슈 여객철도가고시마 본선서일본 철도텐진오무타선, 다자이후선[5]이 이 도시를 지난다. 이 중 주로 이용되는 것은 다자이후시의 중심부와 관광지로의 접근성이 좋은 다자이후선.

시를 상징하는 꽃은 매화인데, 그래서인지 매화나 매실을 사용한 음식이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특히 유명한 것은 우메가에모찌(梅ヶ枝餅)라고 불리는 모찌 경단. 그 외에도 매실주(梅酒)나 매실소금라멘(梅塩ラーメン) 등도 이 지역의 특산품으로 유명하다.

한국의 충청남도 부여군과 자매 결연을 맺고 있는 도시이기도 하다.

2 역사

660년에 백제가 멸망했을 때 일본의 덴지 덴노는 백제 부흥군을 지원하기 위해 2만 7천 명에 이르는 군사를 한반도로 파병했지만, 이들은 백강 어귀에서 당의 수군 7천(+신라의 육상지원병)에게 개발살나고 수장된다. 덴지 덴노는 이후 신라와 당이 일본으로 쳐들어올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백제 유민들을 동원해 일본 각지에 조선식 산성(고식산성)이라 불리는 성들을 축조했고, 외부로부터의 침략이 있을 때 가장 먼저 적에게 노출될 수 있는 규슈 일대를 총괄하는 쓰쿠시도독부(筑紫都督府)를 설치했다. 이것이 다자이후의 유래다.[6] 다자이후는 일본어 음독이고, 훈독으로는 오호미코토모치노 쓰카사인데[7] 쓰쿠시 즉 지금의 규슈 지역의 군사적 방위를 책임지는 지방군사령부 역할을 맡고 있었다. 서일본 일대에 설치된 사이카이도(西海道) 소속 9개 구니와 3개 섬[8]의 인사 및 감사 등의 역할을 모두 다자이후가 맡고 있었고, 신라나 당과의 관계가 정상화되고 군사적인 역할이 줄어들고 나서도 외교적으로 오히려 중시되어서 하카타 연안에 고료칸(鴻臚館)을 설치하고 다자이후의 감독 아래 외국 사신의 접대 및 상인의 관리 업무가 이루어졌다.[9]

고대 일본에서는 기나이의 조정과 함께 수도에 준하는 위치에 있었지만, 교토에 비하면 격이 떨어졌다. 나라 시대740년에 후지와라노 히로츠구(藤原廣繼)라는 인물이 다자이후의 쇼니로 좌천된 것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을 정도. 쇼니는 차관직이고 다자이후의 장관은 다자이노소치(大宰帥)라고 불렀는데, 도고쿠의 친왕임국(親王任國)[10]으로 종3위 정부 고관 및 친왕이 임명되는 자리였지만 이들은 관직만 맡아놓고 실제부임지에는 가지를 않아서[11] 곤노소치(權帥)가 있기는 했지만 조정 대신이 다자이후의 곤노소치가 되는 경우 실무권한이 거의 없었다. 때문에 우대신[12]이었던 스가와라노 미치자네가 좌대신 후지와라노 도키히라와의 정쟁에 밀려 다자이곤노소치로 부임해오게 된 것은 좌천이라는 말로도 부족한 그야말로 정리해고나 다름없는 조치였던 것. 자연스럽게 다자이후의 실권은 차관직인 쇼니(少貳)가 맡게 되었다. 타이라노 마사카도의 난 때는 비슷한 시기에 서쪽에서 반란을 일으킨 후지와라노 스미토모의 반란에 의해 불타기도 했다. 남북조 시대에서 무로마치 시대에 이르러 활약한 슈고 다이묘 쇼니(少夷) 씨는 후지와라를 혼세(本姓)로 하는 가마쿠라 시대 초기의 인물 무토 스케요리(武藤資賴)[13]가 다자이쇼니를 지냈다는 데서 유래한 것. 가마쿠라 막부 타도 이후 고다이고 덴노의 황자였던 가네요시 친왕(懷良親王)이 정서장군으로써 다자이후에 파견되었고, 이곳에서 기쿠치 씨에게 옹립되어 남조를 지지하며 북조에 맞섰다가 1359년에 지쿠고 강 전투에서 쇼니 씨가 이끄는 북조측 군사에 패해 다자이후가 쇼니 씨에게 넘어갔다. 무로마치 막부에서는 이마가와 사다요(今川貞世)[14]를 보내 규슈 단다이(九州探題)로써 다자이후를 지배하게 했다. 센고쿠 시대에는 오우치 씨가 지배했다고.

고대 이래로 규슈 지역의 정치 중심지이자 경제, 문화적으로도 중요한 곳이었지만 남북조 시대에 이어 센고쿠 시대를 거치면서 기능이 약화되어, 현재는 후쿠오카의 지방도시가 되었다.

3 매체에서

징기스칸 4 게임에 따르면 일본의 4대 도시이다. 나머지는 교토 부, 카나가와가마쿠라 시, 이와테 현 히라이즈미 정이 그것이다. 재밌는건 정작 교토는 처음에 등장하지 않다가 가마쿠라 막부가 신도시로 세워버리는데 항상 자리가 고정되어 있다.
  1. 추계인구 2015년 9월 1일 기준
  2. 나머지 2개는 야마구치호후시의 호후 텐만구, 교토부의 키타노 텐만구이다
  3. 우리나라와는 다르게 입장료가 비싼데 일본의 관광지는 거의 대부분 한국보다 비싸다. 한국이 비정상적으로 싼 것에 가깝다. 3층은 특별전시관으로 보통 성인 1600엔, 4층은 문화교류전 성인 440엔정도로 관람이 가능하며 둘 다 같이 관림시 약간 할인혜택이있다. 3층 전시내용은 기간별로 매번 바뀌므로 미리 홈페이지에서 관람 내용이나 휴관일등의 체크는 필수
  4. 특히 다자이후 덴만구는 학문의 신인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를 숭배하고 있다고 하여 큰 시험을 앞 둔 학생들이나 학부모들의 방문이 잦다.
  5. 텐진오무타선의 지선
  6. 다자이후 정청 터 바로 위에 조선식 산성의 하나인 오노 성(大野城)이 위치하고 있다.
  7. 이 오호미코토모치(大宰)의 미코토모치(宰)의 경우 중앙에서 특별히 파견하는 관리직을 가리키는 용어였는데, 임나일본부설의 여러 학설 가운데 부(府)의 일본어식 훈독 또한 미코토모치라는 점에 주목해 임나일본부의 정체가 실은 가야에 외교적 목적을 띠고 파견된 일회성 사신이 아니었나 하는 주장도 존재한다.
  8. 쓰시마, 이키, 그리고 다네가시마.
  9. 신라발해의 사신들에게 으레 다자이후를 거쳐서 오도록 명령하거나 다자이후에서 사신을 그냥 돌려보내는 대목이 자주 보인다.
  10. 고대 일본에서 도고쿠의 가즈사(上總), 고즈케(上野), 히타치(相陸)의 경우는 해당 구니(國)의 지방관인 카미(守)를 다른 관리가 아니라 덴노의 친아들 즉 친왕으로 임명했다.
  11. 이는 도고쿠의 친왕임국 역시 마찬가지였다. 타이라노 마사카도 항목 참조.
  12. 한국으로 치면 우의정급. 이는 좌대신(좌의정)도 마찬가지다.
  13. 원래는 헤이케의 다이라노 토모모리를 섬겼던 무장인데 이치노타니 전투 이후에 겐지에 투항했다.
  14. 고려 말의 정몽주왜구 근절을 요청하기 위해 직접 일본으로 와서 만났던 사람이기도 하다. 현재 다자이후 시에 남아있는 간제온지(觀世音寺) 절이 바로 당시 일본으로 건너온 정몽주가 처소로써 머물렀던 곳으로, 정몽주 본인이 간제온지의 경치를 두고 읊었던 한시도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