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연정 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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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9월 1일 당시 국민일보 만평

1 개요

2005년 6월 노무현 대통령이 제안한 열린우리당한나라당연합정부 구성안. 한마디로 쉽게 말하자면 현 소선거구제(한 선거구에서 1명만 뽑는 선거제)에서 중*대선거구제(한 선거구에서 당선자가 2명 이상이 뽑히는 선거제)로 바꾸는 걸 한나라당이 동의해준다면 국무총리를 포함한 장관 임명권을 한나라당에 넘기겠다는 제안이었다.

2 내막

2005년 6월 열린우리당의 지지율 하락, 행담도 사건과 러시아 유전 개발 비리 등으로 위기를 맞은 노무현 대통령은 이를 타개하고자 한나라당과의 대연정이라는 승부수를 던지게 된다. 이는 '지역주의 타파'라는 노무현 대통령의 평생 신념이 잘 드러난 일이기도 한데 쉽게 말하자면 호남에서는 민주당 계열 후보들만 계속 당선되고, 영남에서는 당시 한나라당 후보들만 계속 당선되는 지역주의 구도를 깨버리자는 것이었다. 10여년이 지난 2010년대 중후반 들어서도 어느 정도는 무너졌지만 아직 이런 지역주의 구도가 강한 편인데, 2000년대 당시엔 더더욱 이런 지역주의 구도가 확고했다.

즉, 현 양당 구도상 호남에서는 당연히 1위 후보는 민주당 계열 후보가 되겠지만 2위 후보는 한나라당 후보가 될 가능성이 높으므로 호남 입성을 고대하던 한나라당 후보가 호남에서 당선되면 호남 발전에 도움이 될 것이며, 영남에도 영남 입성을 간절히 원하는 민주당 계열 후보가 한나라당 후보에 이어 2위로라도 당선되면 당연히 영남 발전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어찌보면 순수한 생각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 지역주의 구도를 어떻게든 깨버리고 싶어서 3당 합당이 이뤄진 후 민주당 계열 후보들에겐 '반드시 죽는 곳'으로 변한 부산에 연이어 국회의원 출마를 하기도 했고, 이 대연정을 제안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내각을 만들 수 있는 권한을 넘기겠다고 했으나 나중에는 한나라당에서 이 선거구제 개편에 동의만 해준다면 대통령직에서 내려오라고 해도 내려올 수 있다는 뜻을 숨기지 않았다고 전한다.

또한 대연정, 동거정부, 정당연합의 특성이 자주 나타나는 유럽의 정치지형에서 특정 정당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사례가 매우 드물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장기적으로 볼 때 향후 국내 정치에 노무현이 그토록 꿈꾸던 대화와 토론, 그리고 타협이 제대로 자리잡을 수 있는 확실한 제도적 장치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3 후폭풍

사실 기존에 알려진 것처럼 이 대연정이 순전히 노무현 대통령의 머릿속에서만 나온 구상은 아니었으며, 유럽의 대연정동거정부를 연구하는 국내 정치학자들의 연구물을 꼼꼼하게 읽어보고 조언을 구하면서 나온 산물이었다.

하지만, 대통령을 모시는 청와대 비서관들도 말도 안되는 생각이라며 만류했을 만큼 반대가 안팎으로 심했다고 한다. 이미 승자독식이 굳어진 한국의 현 정치 체제에서 과연 사람들이 이를 바꾸려 들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것. 일례로 각각 40만표, 70만표 차로 신승한 15대(김대중), 16대(노무현) 대선의 경우 당선된 대통령은 인사권, 예산에 직접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유력한 자리만 6000개였던 반면, 패한 이회창 한나라당 대표는 동네 이장 1사람 임명할 권한도 없었다. 비록 위험은 클지언정 이기면 거의 모든 것을 갖는데, 과연 이 추세의 변화가 제대로 이루어질지 비관적으로 봤던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모당(母黨)인 열린우리당에서도 이것을 적극 반대했으며 심지어 당시 당의장이었던 문희상은 청와대에 갈 때마다 말렸을 정도라고 한다.

하지만 대통령은 결국 대연정을 제안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대통령과 열린우리당 간의 의견대립 과정이 수면 위로 떠올라 세간에 알려지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게다가 아직 여권 내의 당론과 실력을 갖춘 당직자, 측근들의 이론적 뒷받침이 부족한 상황에서[1][2] 막후 조율을 거치지 않고 성급히 한나라당에 대연정을 제안했기 때문에, 당시 한나라당 대표 박근혜기자회견을 통해 민생에나 신경쓰라는 말로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

사실, 장기적으로 보면 모두가 윈윈하며 공생할 수도 있는 제도였지만, 당시 상황에서는 노무현 대통령의 의도대로 중대선거구제로 선거를 치렀을 때 열린우리당은 영남지역에서 이변이 없는 한 무조건 2위를 확보할 수 있으나, 호남에서의 한나라당은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에 밀려 기껏해야 10%의 지지율에 머물렀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열린우리당의 과반 및 최대의석 확보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더구나 호남에서 한나라당은 마지막 옵션 혹은 그런 위치에도 미치지 못하는 정당으로, 당시 기준 열린우리당, 민주당, 진보정당, 무소속 등이 모든 파이를 갖고 간 뒤 남은 부스러기나 챙기게 된다. 즉, 자신들의 주 기반인 영남은 일부 떨어져 나갈 것이 확실한데, 얻을 것은 별로 없는 거래라 보았던 것. 당연히 한나라당은 동의해줄 리가 만무했고 당시 일부 한나라당 의원은 "미쳤다고 침몰 중인 타이타닉에 올라타겠냐?"라는 말까지 하기에 이른다.

그럼에도 노무현 대통령은 설득작업에 6개월 이상 매달렸으며 여야 영수회담에서도 이를 집중적으로 주장했으나, 돌아온건 조롱과 비웃음(...) 뿐이었다. 여권 인사 중 대통령의 지낭으로 불린 유시민 당시 의원이 노 대통령의 취지를 이해하고 적극적으로 해당 정책 발의를 도왔지만, 도리어 "연정은 지역주의에 기반해 정치를 하는 수구세력 즉 한나라당을 향한 햇볕정책"이라는 언론의 자극적인 선동기사 소재로 활용당했으며, 이후 비판을 받은 한나라당의 반발, 열린우리당 일부 의원들의 탈당 후 민주당 입당 등의 상황이 전개되면서 수고는 많으나 실익은 거의 없었던 헛수고가 되고 말았다.

3.1 대연정은 유럽도 하는데?

당시 대연정을 찬성하는 측에서는 "유럽도 하는데 우리도 못할 거 뭐가 있나"라는 주장을 폈지만 반대측에선 의원내각제대통령중심제는 엄연히 다르다고 주장했다. 독일 등의 국가도 연정을 하긴 하지만, 이들 나라는 의원내각제로 한 정당이 과반수를 차지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이로 인해 여러 정당들이 연립 정부를 구성하는 것이 보편적이라는 것. 그리고 대연정 후 나중에 이견이 생기면 의회를 해산시켜 다시 총선을 한 뒤 새판을 짠다. 한마디로 의원내각제 국가에서 하는 것을 대통령제 국가에서 하려고 하니 반발을 살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당시 여당인 열린우리당은 반지역주의를 기치로 한 정당으로서 '지역주의 구도를 손에 쥐고 대한민국의 기득권을 석권한 한나라당'[3]에 대한 반대를 기초로 한 정치 개혁을 추구하고 있었으며, 노무현 대통령 역시 그런 성원을 등에 업고 대통령이 된 정치인이었다. 그런데 대통령이 그런 '수구적 거악'과 손을 잡으면 정치 잘할 수 있다고 입장 선회를 하니 지지층 내 배신감이 엄청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당시 여권 핵심 지지층 중 하나인 호남 지지층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전폭적인 지지에도 불구하고 영남끼리 뭉쳐서 기득권을 잡고 자신들을 영구 고립시키려는 획책으로 보였을 수도 있는 것이었다. 참여정부, 열린우리당,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지역주의 극복을 지상 과제로 삼고 이를 위해 노력하는 행보를 보였음에도 이를 의심하거나 더 나아가 이를 신지역주의 구축이라고 비판하는 시각에는 이런 요소들이 있었던 것이다.

4 재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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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국민 여론은 다수가 반대였다. 실제 당시 국민들은 대연정 자체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이 대연정 제안으로 인한 후폭풍은 어마어마했는데 노무현 대통령의 지지기반이 붕괴에 가까운 타격을 입게 된다. 노무현 대통령 자신도 폭탄은 저쪽을 향해 던졌는데 오히려 우리편 등 뒤에서 터져버렸다는 말로 대연정 파동의 후폭풍을 인정했을 정도였다.

가장 큰 타격은 호남 지역이었는데 그나마 대북송금 특검으로 인해 벌어진 갈등은 민주당 분당 사태 이후 호남이 열린우리당을 밀어주며 일시적으로 봉합되었으나, 대연정 파동이 터지면서 호남과 친노간 갈등은 표면화되게 된다. 심지어 2010년대까지도 민주당계 정당내 호남계 정파와 친노계 정파가 화합을 말하면서도 어색한 동거를 이어가게 되는 다양한 떡밥들의 실질적인 출발점이 상당부분 여기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호남계 정파는 친노계 정파를 두고 언제든 자신들을 고립시키고 매도할 수 있다며 이들을 신뢰하지 않게 되었으며, 친노계 정파는 DJP연합 땐 조용하다 노무현한텐 배신이냐며 호남계 정파를 두고 지역 정치 타파라는 대의를 따르지 못하고 소지역주의에 매몰된 정파라는 관점을 무의식적으로 깔고 대하게 되었다. 그렇게 잊혀져가는 과거의 일이 되나 했는데..

2010년대 들어 정치권의 분열과 대립이 극화되면서 협치가 중요한 가치로 떠오르고, 2014년 당선된 새누리당 남경필 경기도지사가 경기도내에서 대놓고 연정을 표방하며 과거 노무현 대통령 시절 대연정의 기치를 잇는단 평가를 받기도 했다.[4] 2016년 20대 총선에서도 협치를 기조로 내건 국민의당이 호남을 제패하고, 비박계 학살 공천논란 속에 새누리당 공천을 주도한 친박계는 완패하고 만다. 그리고 우연의 일치인지 2016년 노무현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국정치란 기사가 나온지 고작 이틀 후인 2016년 10월 24일, 대연정과 개헌론에 대해 철저히 부정적인 입장을 고수해왔던 박근혜 대통령이 예산안 시정연설차 방문한 국회에서 직접 분열과 갈등의 정치를 청산해야한다며 임기내 개헌완수를 목표로 개헌론을 꺼내들었다. 朴대통령, 개헌카드 전격 공식화.
  1. 예를 들어 과거 장면 총리의 대변인이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경우, 당내 의견대립이 심하면 철저한 이론적 준비를 하여 설득작업에 나서 담장 안팎에서 "대변인" 역할을 한 바 있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의 경우 이런 역할을 해줄 수 있는 최측근 안희정(훗날 충남지사)이 대선 후 구속되어 활동에 제약이 따르는 상태였다.
  2. 김대중 정부 시절에는 박지원 비서실장이, 이명박 정부 때는 임태희 비서실장이 이런 역할을 주로 맡았다고 한다.
  3. 이것이 타당한 시각인가와는 별개로 여튼 당시 열린우리당 지지층의 인식이 이러했다는 것.
  4. 다만 남 지사는 2014년 인터뷰에서, 노 전 대통령이 대연정을 임기 초부터 제의하셨다면 한국 정치가 완전히 바뀌었을 거라고 생각한다면서 대연정을 제안한 시기가 상대적으로 임기 말이라(정확힌 임기 중반 쯤이었다&남지사도 당시엔 반대했다) 진정성을 의심받게 된 점이 아쉬웠다고 밝히기도 했다. 또 이런 점을 들어 연정에 반대하던 야당을 설득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