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얀 사비체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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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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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모습)

몬테네그로 축구협회 회장
데얀 사비체비치
(Dejan Savićević)
[1]
생년월일1966년 9월 15일
국적몬테네그로
출신지포드리고차[2]
포지션공격형 미드필더, 윙어
신장181cm
주로 쓰는 발왼발
소속팀FK 부드츠노스트 티토그라드(1983~1988)
FK 츠르베나 즈베즈다(1988~1992)
AC 밀란(1992~1998)
FK 츠르베나 즈베즈다(1999)
라피드 빈 (1999~2001)
지도자세르비아 몬테네그로 축구 국가대표팀(2001~2003)
국가대표56경기 19골
1991 Ballond'or
수상
장 피에르 파팽
2위(공동)
다르코 판체프
데얀 사비체비치
로타어 마테우스
3위
수상자 없음

Il Genio(천재)

몬테네그로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

1 설명

구 유고슬라비아, 지금은 몬테네그로에 속하는 선수. 공격형 미드필더로, 그야말로 트레콰르티스타의 전형이었다. 뛰어난 패싱과 결정력, 개인기에 무서운 집중력까지 더해져 경기를 뒤집는 능력이 탁월했다. 특히 AC 밀란에서 그는 짧고 강력한 인상을 줬다. 루드 굴리트의 뒤를 이은 밀란 제너레이션의 No.10이였지만 부상, 감독과의 불화 등으로 많은 출전은 하지 못하였다. 그렇지만 사비체비치는 언제나 기대에 부합하는 실력을 보여줬기에 팬들도 좋아하였다.

2 플레이스타일

공격형 미드필더와 윙어 포지션에서 뛸 수 있으며 섀도우 스트라이커 같이 뛸 수도 있다. 최대 장기는 드리블로, 드라간 스토이코비치 등과 함께 90년대 최고의 수준의 드리블러였다. 빠른 스피드를 이용한 돌파보다 테크닉으로 상대 수비를 벗겨내는 것을 즐기며[3] 키핑 능력 역시 뛰어나다.

3 클럽

사비체비치가 축구를 정식적으로 시작한 것은 1981년으로 만 15세라는, 비교적 늦은 나이였다. 이전까지 그는 주로 길거리에서 풋살을 즐겼으며 이는 그가 최정상급의 볼 컨트롤 능력과 테크닉을 가지게 된 원동력이라 할 수 있다. 그가 축구를 처음 시작한 OFK 티토그라드라는 팀은 그를 감당하기에는 작은 클럽이었고 사비체비치는 1983년 유고슬라비아 1부 리그에 참가하는 부드츠노스트 티토그라드로 적을 옮긴다.

부드츠노스트에서 첫 시즌, 사비체비치는 유스팀과 성인팀을 왔다갔다 했으며 두번째 시즌부터는 흠좀무하게 팀의 레전드인 안테 미로체비치[4]를 은퇴시켜버리며 1군 스쿼드에 등록된다. 사비체비치는 첫 시즌 26경기 9골을 기록했으나 팀은 강등을 간신히 면했다. 1985-86 시즌을 앞두고 사비체비치는 프로 계약을 할 수 있는 팀을 물색했다.[5] 이때 그에게 접근한 클럽은 다름아닌 유고슬라비아 최강팀인 FK 츠르베나 즈베즈다. 츠르베나 측에서는 사비체비치의 재능을 높게 사 프로 계약을 제시했으나, 사비체비치는 이를 거절하고 부드츠노스트와 프로 계약을 체결한다. 사비체비치가 이적하려면 부드츠노스트의 동의가 있어야 했는데, 팀 내 최고의 유망주를 공짜로 내줄리가 없었고, 다른 방법으로 사비체비치가 우선 부드츠노스트와 프로 계약을 체결한 뒤 츠르베나 측에서 이적료를 투자하는 방법이 있었으나 그를 이적료까지 주면서 영입할 필요성을 못느꼈기 때문이다. 또한 사비체비치는 본인이 이적을 위해 항명한다면 부드츠노스트 측의 보복 행위가 두려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부드츠노스트에서 꾸준히 출장한 사비체비치는 재능이 만개하기 시작했고 1986-87 시즌 하위권의 팀이 7위라는 훌륭한 성적을 기록하는데 일조했다. 이 시기 국가대표팀에도 승선했고 유고슬라비아의 거함인 FK 츠르베나 즈베즈다, FK 파르티잔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결국 1987-88 시즌이 끝난 직후 사비체비치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지켜본 츠르베나 즈베즈다로 이적한다. 같은 날, 츠르베나에 팀의 득점을 책임질 공격수 다르코 판체프 역시 합류했고, 기존의 드라간 스토이코비치, 87년 우승 세대의 일원이자 특급 유망주였던 로베르트 프로시네츠키 등 츠르베나의 스쿼드는 유고슬라비아 최강에 국한된 것이 아닌 유럽에서도 성공할 수 있는 스쿼드였다.

츠르베나에서 첫 시즌인 1988-89시즌, 사비체비치는 군에 입대했는데, 문제는 군인들의 팀은 츠르베나의 최대 라이벌인 파르티잔이라는 것이었다. 때문에 사비체비치는 클럽 대항전과 국가대표팀에서만 활약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시즌 유러피언 컵에서 AC 밀란과의 경기는 사비체비치의 활약이 돋보였던 경기인데, 1차전 원정 경기에서 기막힌 왼발 로빙 패스로 스토이코비치의 득점을 도왔고, 이어지는 2차전에서는 직접 선취골까지 득점하며 밀란을 탈락 직전까지 몰아붙였다. 그러나 짙은 안개로 인해 2차전은 중도 취소되었고 다음날 재경기에서 츠르베나는 승부차기 끝에 탈락했다.[6]

유고슬라비아 축구협회는 계속해서 로비 활동을 벌이고 있었고 그것이 성공해 축구 선수들이 군복무를 하면서도 클럽에서 뛸 수 있게 되었다. 사실상의 첫 시즌인 1989-90 시즌 사비체비치는 팀의 리그, 컵 대회 우승에 일조했고 대망의 1990-91 시즌이 다가왔다. 이 시즌은 사비체비치 커리어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해인데, 이 시즌 팀은 리그는 당연지사고, 유러피언 컵에서 우승하며 세계를 놀래켰다. 사비체비치는 유러피언 컵에서 3골을 넣었는데, 그 중에는 4강 1차전, 바이에른 뮌헨을 상대로 결승골을 득점한 것이었다. 2차전 경기 종료 직전 클라우스 아우겐탈러가 헤더로 자책골을 기록하며 팀은 결승 무대에 올랐고 강호 올랭피크 마르세유를 승부차기까지 끌고간 끝에 골키퍼 스토야노비치의 선방으로 우승을 달성했다. 그해 인터콘티넨탈 컵에서는 칠레의 콜로 콜로를 3-0으로 완파하며 우승했고[7] 사비체비치는 팀 동료 판체프와 함께 발롱도르 2위에 랭크되는 등 전성기를 구가했다.

1991-92 시즌에도 사비체비치는 팀의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이 시기 그를 매의 눈으로 지켜보는 구단이 있었으니, 바로 이탈리아의 명문 AC 밀란이었다. 그러나 사비체비치는 첫 시즌 리그에서 10경기에 나서 4골만을 넣는 활약을 보여주었는데, 여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그를 영입한 것이 파비오 카펠로 감독의 의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밀란의 회장인 실비오 베를루스코니는 사비체비치의 열렬한 팬이었고 독단적으로 사비체비치를 영입한 것이다. 수비적인 면을 중시하는 카펠로 감독이기 때문에 활동량이나 수비 가담이 적은 사비체비치는 그의 전술과는 맞지 않았고 공수완전체의 데메트리오 알베르티니를 선호했기 때문에 출전에 어려움을 겪었다. 또한, 당시 세리에 A에는 경기당 3명의 외국인 선수만 출전이 가능하다는 규정이 있었다. 잘 알다싶이 오렌지 삼총사 조합이 밀란의 퍼스트 초이스였고[8] 이외에도 장 피에르 파팽 등에도 밀리는 상황이었다.

사비체비치는 6개월 만에 팀을 떠날 생각을 했고, 올랭피크 마르세유, 아틀레티코 마드리드가 그에게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사비체비치는 팀에 남았고 1993-94 시즌 오렌지 삼총사가 각각 지속적인 부상, 삼프도리아, 아약스로 행하면서 해체되었고 새로이 영입된 외국인 선수인 브라이언 라우드럽, 플로린 라두치오우가 못미더운 활약을 보여주며 사비체비치에게 기회가 돌아가게 된다. 그러나 카펠로는 그를 여전히 완벽한 주전으로 기용하지는 않았고 중요한 경기에서는 명단 제외되었다. 겨울, 마르세유로 부터 마르셀 드사이가 합류하면서 그의 입지는 다시 한 번 좁아지게 되었다. 사비체비치가 밀란을 떠나지 않는 이유는 베를루스코니의 지지에 기반했고 이 시즌 밀란은 리그에서는 36득점, 15실점이라는 경악할 만한 수치로 우승했다.[9] 밀란은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도 진출했는데, 사비체비치의 진가는 여기서 발현됐다.

밀란의 상대팀은 요한 크루이프가 이끄는 '드림 팀' FC 바르셀로나였고 로날드 쿠만,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 호마리우와 같은 스타 플레이어들이 즐비한 팀이었다. 카펠로는 굉장히 수비적인 전술을 운용했으나 결승전만큼은 공격적인 라인업을 들고 나왔다. 사비체비치는 말 그대로 바르셀로나를 박살내기 시작했고 다니엘레 마사로의 선취골을 돕는 것을 시작으로, 후반전에는 기막힌 왼발 하프 발리슛으로 상대 골키퍼인 수비사레타를 꼼짝도 못하게 만들었다. 밀란은 바르셀로나를 4-0으로 완파했고, 사비체비치는 그 중심이었다.

1994-95 시즌 사비체비치의 입지가 상승하나 싶었으나 카펠로의 철학이 한 경기로 인해 바뀔 이유가 없었고 사비체비치 본인도 부상에 시달리며 리그 19경기 출장에 그친다. 밀란은 다시 한번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 올랐지만 사비체비치는 부상으로 인해 명단에서 제외되었고[10], 밀란은 패기로 무장한 아약스에 패배했다. 1995-96 시즌 사비체비치는 리그에서 23경기 출장 6골을 기록했고 팀은 리그에서 우승했다. 1998-99 시즌 중반 사비체비치는 밀란을 떠났고 잠시 친정팀인 츠르베나 즈베즈다로 복귀했다. 6개월만에 사비체비치는 오스트리아의 라피드 빈으로 이적했고 00-01 시즌을 끝으로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4 국가대표

1986년부터 1999년까지 유고슬라비아 대표팀[11]에서 활약했으며 56경기에 나와 19골을 기록했다.

90년 월드컵, 98년 월드컵에 참가했으며 두 대회에서 각각 8강, 16강에 올랐다. 언뜻보면 좋은 성적이라고 할 수 있으나 유고슬라비아의 엄청난 재능들을 생각하면 불미스러운 사건이 유독 안타까운 케이스이다.

우선 불운의 시작은 유로 1992인데, 사비체비치를 포함해 유러피언 컵에서 실력을 입증했던 츠르베나 즈베즈다의 멤버들은 이 대회에 내전으로 참가하지 못했다. 유고슬라비아를 대신 참가한 덴마크가 우승을 거머쥐면서 안습의 절정을 보여줬다. 94년 월드컵 역시 불참했는데, 이 월드컵은 87년 우승 세대 멤버들이 전성기를 맞이할 시점이었다. 이 시기 유고슬라비아는 월드컵이나 유로에서 우승을 거머쥘 수도 있는 황금세대였지만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것이다.[12]

5 감독

2001년 유고슬라비아/세르비아 몬테네그로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에 임명되면서 커리어를 시작했다. 뷰아딘 보스코프, 이반 추르코비치와 함께 공동 감독 체제로 2002년 월드컵 진출을 노렸으나 슬로베니아에게 충격적으로 밀리면서 실패했다. 유로 2004 예선에도 팀을 지휘했으나 부진이 계속되었고 아제르바이잔에게 충격적으로 패배한 뒤 사임했다.
  1. 세르보크로아트어 Дејан Савићевић
  2. 출생 당시 티토그라드
  3. 그렇다고 느린 선수는 아니다.
  4. 몬테네그로 지역 출신으로는 최초로 유고슬라비아 국가대표팀에서 뛴 선수이다. 한때 잉글랜드 무대에서 활약한 바 있다.
  5. 이전까지는 장학금을 지급하는 형태의 계약으로, 프로 계약은 아니었다.
  6. 이 시즌 밀란은 우승을 차지해버렸다.(...)
  7. 정작 본인은 전반전에 퇴장당했다.
  8. 물론 반 바스텐은 이 시즌부터 부상에 시달리게 된다.
  9. 34전 19승 12무 3패
  10. 사비체비치는 당시 자신이 뛸 수 있었더고 주장했다.
  11. 유고 대표팀은 내전으로 인해 뿔뿔히 갈라지고 사실상 세르비아-몬테네그로 국가대표팀이 되는데, 사비체비치의 경우 몬테네그로가 독립한 것은 2006년이기 때문에 계속해서 유고 대표팀으로 활약했다.
  12. 물론 87년 멤버의 주축이 있던 크로아티아나 마케도니아는 이미 분리된 상태였다. 여기서 우승을 거머쥘 수도 있었다는 것은 내전으로 인해 갈라지기 이전의 유고슬라비아 상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