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날드 쿠만

2016-17 잉글리시 프리미어 리그 클럽별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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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이그 셰익스피어
(레스터)
위르겐 클롭
(리버풀)
펩 과르디올라
(맨시티)
주제 무리뉴
(맨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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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애그뉴
(미들즈브러)
션 다이크
(번리)
에디 하우
(본머스)
클로드 퓌엘
(사우스햄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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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모예스
(선덜랜드)
폴 클레멘트
(스완지)
마크 휴즈
(스토크)
아르센 벵거
(아스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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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날드 쿠만
(에버튼)
발테르 마차리
(왓포드)
토니 풀리스
(웨스트 브롬)
슬라벤 빌리치
(웨스트 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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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오 콘테
(첼시)
샘 알라다이스
(크리스탈 팰리스)
마우리시오 포체티노
(토트넘)
마르코 실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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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버튼 FC 감독
로날트 쿠만 (Ronald Koeman)
생년월일1963년 3월 21일
국적네덜란드
출생지잔담
신체 조건181cm, 82kg
포지션중앙 수비수, 중앙 미드필더
소속팀FC 흐로닝언 (1980~1983)
AFC 아약스 (1983 - 1986)
PSV 아인트호벤 (1986~1989)
FC 바르셀로나 (1989~1995)
페예노르트 로테르담 (1995~1997)
지도자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 코치 (1997~1998)
FC 바르셀로나 수석코치 (1998~1999)
피테서 감독 (1999~2001)
AFC 아약스 감독 (2001~2005)
SL 벤피카 감독 (2005~2006)
PSV 아인트호벤 감독 (2006~2007)
발렌시아 CF 감독 (2007~2008)
AZ 알크마르 감독 (2009)
페예노르트 로테르담 감독 (2011~2014)
사우스햄튼 FC 감독 (2014~2016)
에버튼 FC 감독 (2016~ )
국가대표78경기 14골
발렌시아 CF 역대 감독
키케 플로레스
(2005~2007)
오스카 페르난데스
(2007)[1]
로날드 쿠만
(2007~2008)
보로
(2008)[2]
우나이 에메리
(2008~2012)
에버튼 FC 역대 감독
로베르토 마르티네스
(2013~2016)
로날드 쿠만
(2016~)

요한 크루이프의 뒤를 잇는 FC 바르셀로나의 레전드

그러나 발렌시아 감독으로서는 최악의 흑역사를 만들어낸 팬들의 금지어.[3]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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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머 심슨?!

네덜란드 발음은 [로:날트 쿠먼]. 전 네덜란드 대표 마르틴 쿠만의 아들이자 전 페예노르트 코치 에르빈 쿠만[4] 의 동생.

2 경력

2.1 선수 시절

선수 시절 FC 흐로닝언AFC 아약스, PSV 아인트호벤, FC 바르셀로나, 페예노르트를 거쳤으며, 자신이 소속되었던 모든 팀에서 뛰어난 경기력을 선보였다. 특히 바르셀로나의 초 거물 레전드급 선수로 꼽히며, 유로 1988네덜란드의 유일한 메이저 국가대항전 우승을 이끌며 국가대표팀에서도 레전드 반열에 등극했다.

게다가 쿠만은 본 포지션이 센터백임에도 불구하고 바르셀로나 6년동안 102골을 넣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득점력을 가진 것이 특징인데[5], 프리킥이나 중거리는 당시 에이스인 미카엘 라우드럽도 한 수 접어주는 정도였다. 인상적인 프리킥 골로는 바르셀로나 시절 1992년 삼프도리아와의 챔피언스리그의 결승전 프리킥 골이 있다. 이 골이 그대로 결승골이 되어 1:0으로 승리했으며, 바르샤는 창단 후 첫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경험한다. 수비수임에도 쿠만의 프리킥 실력에 대한 신뢰가 얼마만큼 대단했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 [6] 프랑스의 최전성기에 센터백을 맡았던 로랑 블랑, 스페인레알 마드리드의 레전드 페르난도 이에로와 함께 3대 골넣는 수비수로 명성을 떨쳤다. 또한 정확한 페널티킥커로도 정평이 나 있다.

PSV에서 1987-1988시즌에 유럽피언 컵, 에레디비지에, KNVB 컵을 석권하며 트레블을 달성하였고, 그 해에 네덜란드 국가대표에서 마르코 반바스텐, 루드 굴리트, 프랭크 레이카르트, 데니스 베르캄프와 함께 유로 88을 우승하였다. 그리고 바르셀로나로 이적하여 요한 크루이프의 드림팀 일원이 되어 1991-1994년 연속으로 라리가를 제패하는데 일조하였다. 1992년 유럽피언 컵에서 삼프도리아 상대로 결승골을 넣기도. 선수생활동안 두번의 유럽피언 컵을 들어올렸다.

2.2 감독 생활

일단 한가지 중요한 점은, 쿠만의 감독 생활은 발렌시아 부임 전과 후로 나뉘게 된다

2.2.1 발렌시아 이전

2000-01 시즌을 앞두고 에레디비지피테서 감독을 맡아 감독 경력을 시작한 쿠만은 한 시즌 뒤 자신의 친정팀이었던 AFC 아약스로 팀을 옮긴 뒤 그 해 리그와 컵대회에서 모두 우승을 차지하며 더블을 일구어 내 주목을 받았다. 이후 2002-03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2차 조별 라운드에서 발렌시아 CF, 아스날 FC, AS 로마와 같은 강팀들과 한 조가 된 상황에서 1승 5무로 발렌시아에 이어 조 2위로 팀을 8강으로 이끌며 지도력을 인정받았다.

그 뒤 2003-04 시즌 팀에 한 차례 리그 우승을 더 선사하고는 2005-06 시즌을 앞두고 SL 벤피카의 새로운 감독으로 취임했으며, 그 시즌 챔피언스 리그 조별 라운드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를 밀어내고 비야레알 CF에 이어 조 2위로 16강에 진출한 뒤 16강에서 디펜딩 챔피언이었던 리버풀 FC를 상대로 홈과 원정에서 모두 승리를 거두어 팀을 8강까지 진출시키는 돌풍을 일으켰다. 다만 이 때 비야레알이 4강까지 가서 묻혀버렸다

그리고 시즌 종료 이후 자신의 또다른 친정팀인 PSV 아인트호벤의 감독직을 맡아 2006-07 시즌 챔피언스 리그 16강에서 아스날을 상대로 1승 1무를 기록해 팀을 8강에 진출시키는 기염을 토했다. 더불어 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이대로 명장 반열에 들어가는 했다.

하지만...

2.2.2 문제의 발렌시아 감독 시절

충격과 공포의 시발점 이자 발렌시아와 로날드 쿠만, 그리고 발렌시아 팬들 모두에게 까지 흑역사로 기록된 발렌시아 감독 시절

ㅋㅁ
2007년 10월 당시 발렌시아의 감독이었던 키케 산체스 플로레스가 성적 부진으로 사임하자 그 자리를 메우러 스페인으로 가게 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팬들은 이 선택이 21세기 발렌시아의 최고 흑역사로 기록됨과 동시에 쿠만 자신에게도 엄청난 오점을 남기게 만든 행보 라는 점을 생각하지 못한채 그의 취임을 환영했고 쿠만도 역시 발렌시아와의 동거(?)를 시작하게 된다 쿠만과 비슷한 감독도 취임할때 이런 행보 였는데?!

그리고 쿠만은 부임하자마자 팀의 핵심선수이자 팀의 주장이던 다비드 알벨다와 주전 수문장 산티아고 카니사레스, 중원의 핵 미겔 앙헬 앙굴로를 팀 개혁의 일환이라며 내치면서 나오기 시작하였다. 파괘왕 쿠만 쿠만 입장에서는 당시 어수선했던 팀 분위기를 바로잡고자 했던 일이었겠으나,[7] 이에 충격받은 카니사레스가 시즌 종료 후 은퇴하겠다고 선언했으며,[8] 알벨다 또한 은퇴까지 고려했다가 다른 팀으로 이적하기로 가닥잡는 등 결과적으로 오히려 팀의 분위기가 더욱 저하되는 초대형 병크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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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더욱이 팀내 차기 레전드로 칭송받던 알벨다의 방출소식에 발랜시아 서포터는 즉각 반발함은 물론이요 알벨다의 소송으로 알벨다의 옹호파와 쿠만의 옹호파로 나뉘어 팀내 파벌이 형성되는 등 일이 더욱 커져만 갔고, 게다가 알벨다를 데려가겠다는 팀에게는 터무니없는 이적료를 제시하는 한편 자유계약 방출까지 하지 않는 면도 보여주기도.사가란거야 말란거야?

그 후 팀의 양쪽 윙을 담당했던 비센테 로드리게스그래도 아직은 호아킨 산체스의 포지션을 맞바꾸어 출전시키거나 호아킨의 경우에는 원톱 기용까지 시키는 기형적인 전술을 펼쳤으며, 공격수인 하비에르 아리스멘디왼쪽 윙백으로 기용하는 조광래식의[10] 이해하기 힘든 선수 기용을 선보였다. 이후 호아킨이 부진에 빠지자 30유로짜리 선수라며 공식석상에서 혹평을 하는 등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은 채 기행을 일삼았고, 결국 팀은 최악의 부진을 계속하다 시즌 막바지에 너무 늦게 경질되고 만다. 결국 프리메라리가 내에서 수위에 꼽히는 전력을 보유한 발렌시아는 초반 부진을 만회하기는 커녕 오히려 끝없는 부진에 빠져 2007-08 시즌을 10위로 마감하게 되었다. 그나마도 쿠만이 계속 있었으면 정말 강등까지 걱정해야할 판이었다. 쿠만 경질 후 임시 감독이 그나마 팀을 잘 추스려서 겨우겨우 10위나 올린 것. 발렌시아의 명성에 10위라는 성적이 눈에 찰 리가 없지만 그 당시에는 10위 한 것도 대단했다. 그 정도로 팀의 부진이 심했다는 것.[11] 다만 경질되기 직전 팀에게 코파 델 레이 우승컵을 안겨주면서 팀이 최악의 부진 속에서 우승컵을 들어올리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연출하기도 했다.[12] 그리고 이걸 수습한 사람은 우나이 에메리.

이 당시의 맹활약(?)으로 쿠만은 발렌시아 팬덤에서 이름을 불러서는 안 되는 그 사람으로 등극하기에 이르렀으며, 심지어 FC 바르셀로나의 첩자라 불리는 등 온갖 조롱의 대상이 되어버려 이전까지의 모든 활약을 모두 허공으로 날린 셈이 되었다. 더욱이 쿠만이 카니사레스의 대체로 기용한 골키퍼 티모 힐데브란트는 발렌시아 이적 이후 말 그대로 폭망해버려 쿠만의 안습함을 뒷받침했다.[13] 다만 겨울 이적시장에서 팀의 미래를 책임질 선수를 찾던 중 신예 미드필더 에베르 바네가를 발견하고 팀에 영입한 뒤 경험치를 쌓아놓은 것은 그나마 업적으로 꼽힌다.[14]

다만 이 당시 발렌시아에서의 깽판은 로날드 쿠만보다도 당시 회장인 솔레르에게 화살을 돌리는 사람들도 있다. 연봉상한선을 만들어 베테랑과 갈등을 일으키기도 했고 잘하고 있던 키케 플로레스 감독을 갑자기 짤라버린 사람도 솔레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2016년 들어서는 쿠만보다 더한 감독이 나왔다.

2.2.3 발렌시아 이후

이대로 감독 커리어가 끝장났다면 승승장구하다 이 작품 하나로 인생을 말아먹은 장선우감독처럼 되었겠지만 축구판과 영화판은 다르니까.

이후 2009년 고국으로 돌아가 AZ 알크마르를 잠시 맡았고, 2011년부터는 페예노르트의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전 시즌 리그 10위로 추락한 페예노르트를 2011/12 시즌 곧바로 리그 준우승으로 이끌며 챔피언스 리그 진출권을 확보하였다. 그 뒤 2012/13 시즌에는 리그 3위, 2013/14 시즌에는 2위를 기록하면서 주목을 받은 로날드 쿠만은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후보로 올랐고 거의 확실시 되었다. 그러나 네덜란드 축구협회가 갑자기 방향을 바꿔 거스 히딩크를 감독으로 선임한 뒤 유로 2016을 치루게 하고 그 뒤 2005/2006 시즌 아약스 감독으로 감독경험은 달랑 1년에 불과했고 프런트 생활을 한 다니 블린트에게 감독직을 넘긴다는 계획을 수립하면서 로날드 쿠만을 완전히 배제시켰다. 게다가 로날드 쿠만에게 거스 히딩크를 보좌하는 수석코치 자리를 제안했다. 물론 로날드 쿠만이 1997년과 1998년에 거스 히딩크 밑에서 프랑크 레이카르트와 함께 지도자 수업을 받은 경험이 있지만 그 당시에는 로날드 쿠만이 선수에서 은퇴한 직후였고 그 역할을 2014년에 와서 다시 하라는건 로날드 쿠만 입장에서도 빡치는 상황이었으니 당연히 로날드 쿠만은 그 제안을 거절하고 2014년 여름 사우스햄튼 FC의 감독이 되었다. 그 이후 거스 히딩크가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을 말아먹고 심지어는 아이슬란드에게도 패배하는 상황까지 오자 아약스 감독인 프랑크 데 부어와 함께 히딩크를 조롱하는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2.2.4 사우스햄튼 FC 시절

사우스햄튼이 13-14 시즌에 중상위권이었긴 하지만 주요 선수들이 많이 유출되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힘들 거 같지 않느냐는 의견도 많았으나 첫 시즌 사우스햄튼 FC는 7연승 행진중이고 10라운드까지 겨우 5실점(21득점)을 당하며 프리미어리그 최저 실점,유일무이한 1자리 실점을 기록하며 리그 2위까지 올라왔다! 리그 1위인 첼시 FC가 8승 2무 26골 10실점으로 +16인데 그 첼시에 이어 2위인데다가 똑같은 +16점이다! 그야말로 쿠만은 진짜 갓동님이 되는중이다.

그렇지만 차츰 중반부에 접어들면서 이 기세도 많이 줄었다. 맨시티에게 안방에서 0-3으로 처발리면서 올 시즌 최다 실점을 당하고 그 뒤 아스날,맨유에게 연패하면서 15라운드까지 8승 2무 5패를 기록하여 한때 1위 첼시랑 비슷한 골득실 차도 이젠 맨시티에게도 밀렸으며 순위도 2위에서 5위로 추락했다. 하지만 박싱데이가 끝난 20라운드 현재 11승 3무 6패에 승점 36점으로 4위에 올라와 있어 다시 챔스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대신 5위 토트넘 하고는 승점이 2점 차(승점 34점)이긴 하지만 팀간 골득실 차는 +17씩이나 나고(사우스햄튼 +19, 토트넘 +2) 3위 맨유 하고는 승점 1점차에 골득실은 사우스햄튼이 앞서므로(맨유 +14) 계속해서 성적반등의 기회를 노려볼 수있게 되었다. 발렌시아 팬들 뒷목잡는 소리. 전 감독 쿠만이 이렇게 잘할리 없어

다만 후반부에 와서 다소 밀리며 유로파리그 진출권도 아쉽게 놓치며 시즌 7위를 기록했으나 아스날이 FA컵에서 우승함으로써 사우스햄튼도 유로파리그 진출권을 획득하게 되었다. 아스날 만세 발렌시아 팬들 뒷목잡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온다 이렇듯 유로파리그도 나가게 되었으니 알차게 지낸 시즌이 되었다.

15-16시즌에도 시즌 전 주요 선수들이 빠져나갔으나 역시나 그 공백을 적절한 영입으로 적절히 메웠다. 시즌 중반 13위까지 밀리자 결질여론이 비등하게 되었다. 하지만 시즌종반에는 경기력을 회복하며 리버풀에 멋진 역전을 하는등 순위를 끌어올리게 되었다. 지난시즌의 임팩트는 보여주지 못하고 있지만 그래도 꾸준히 해주면서 7~8위 정도의 순위를 유지했다. 그리고 클럽 역대 최다 승점(63점)으로 리그 6위를 기록하며 시즌을 마감해 차기 시즌 유로파리그 본선 진출을 확정지었다,

시즌이 끝난 뒤 로베르토 마르티네스를 시즌 막판 짜르고 감독 자리가 비게 된 에버튼이 쿠만을 데려오기 위해 사우스햄튼에 제안을 했다고 한다. 일단 쿠만 본인은 남겠다는 의사를 그동안 쭉 피력해 오긴 했다.

그러나 비피셜이 뜨면서 에버튼 부임은 사실상 확정된 것으로 나타났다.

2.2.5 에버튼 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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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4일, 소튼 감독직에서 사임한 후 에버튼에 부임하는 것이 확정되었다. 잔류 의사를 밝혀놓고 에버튼으로 향한점 때문에 사우스햄튼 팬들에게 배신감을 안기게 되었다.

그러나 그와는 별개로 16-17시즌 초반, 4승 1무로 전승의 맨시티의 뒤를 잇는 2위를 달성 중이다. 물론 박싱데이 전후로 DTD를 감안해야겠지만 레스터의 우승 이후로 더 이상 EPL의 박싱데이드립이 신빙성 있지도 않고 지난 시즌 에버튼의 리그 최종승리가 겨우 11승임을 감안하면 현재 매우 잘 하고 있는 중이다.

3 기타

발렌시아에서의 깽판이 워낙 인상적이어서 그런지 로날드 쿠만은 가는 클럽마다 깽판친다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국내축구팬들이 꽤 있다. 심지어는 최근 사우스햄튼의 상승세를 보고 '쿠만 사람됐네요' 라는 반응(...)까지 보이는데 몇몇 선수들(미도, 즐라탄 등)과의 불화는 있었지만 애초에 발렌시아를 제외하곤 깽판을 친적이 없다. 선수들 과의 불화는 다른 감독들도 다 가지고 있는 것이고 또 가는 클럽마다 그런 짓을 하고 다녔으면 애초에 발렌시아 감독까지 하지도 못했을것이다. 당시 아인트호벤과 계약이 남아 있던 쿠만을 데려오기 위해 발렌시아는 위약금까지 지불했다. 이렇게까지 해서 이전까지 발렌시아와 어떠한 관계도 아니었던 쿠만을 데려온 것은 그만한 업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발렌시아 감독 이후에도 다른 클럽의 감독직을 맡을수 가 없었을것이다.

이것은 국내에선 로날드 쿠만이 주로 활동했던 네덜란드 에레디비지 리그에 대한 관심이 크지 않기 때문이다. 10년이 넘는 지도자 경력 중에서 실패한 것은 반년 남짓 되는 스페인 프리메라 리가의 발렌시아 시절 단 한번인데 그게 워낙 크게 각인된 것이다. 그 전부터 쿠만을 봐온 축구팬들은 그가 기본은 하는 지도자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처음 발렌시아 감독에 부임했을 때 그럭저럭 잘 하겠지라고 기대하기도 했으며 이후 이런저런 일들로 팀이 난장판이 되자 저럴 사람이 아닌데 왜 저러나요 또는 이 사람 그런 사람일 줄 몰랐네요라며 놀라는 반응이었다.

쿠만의 능력을 보여준 한가지 예로는 2014 브라질 월드컵에서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에서의 전술이 네덜란드 내에서도 쿠만의 아이디어를 어느 정도 차용했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주축멤버도 쿠만의 아이들 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요즘 네덜란드 내에서는 루이스 반 할의 후임감독으로 왜 쿠만을 선택하지 않고 히딩크를 임명했느냐는 비판까지 있을정도. 하지만 막상 쿠만이 자기가 응원하는 팀의 감독으로 링크되는 기사가 뜨면 전무 아연질색한다. 그만큼 발렌시아에서의 삽질은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전력상 리그 우승권팀을 말아먹은 경우는 스콜라리모예스, 베니테즈 등 무수히 많지만 쿠만처럼 기량 짱짱한 클럽 레전드강제 은퇴 시키고, 공격수를 윙백에 기용하거나 윙어를 원톱 타겟 스트라이커에 배치하는등 초딩이나 해대는 막장 선수배치를 보여준 사례는 전무후무하다. 그래서 더더욱 충격적으로 축구팬들에게 각인된 것이다.[15]

축구 가족 출신이다. 아버지인 마르틴 쿠만(1938~2013)은 수비수로서 FC 흐로닝언에서 500경기를 넘게 뛴 프랜차이즈 선수 였으며 국가대표로도 한 경기를 뛰었다. 아버지의 입지에 힘입어 두 아들들이 모두 흐로닝언에서 프로로 데뷔랄 수 있었다. 두 살 터울 형인 에르빈 쿠만 역시 축구 선수와 지도자로 꾸준히 활약해온 인물이다. 선수 시절에는 동생보다는 못했지만 네덜란드 내에서 PSV와 FC 흐로닝언, KV 메헬렌 등에서 주전으로 활약했으며 A매치도 31경기에 출전하였고 유로 88 우승도 차지했다. 은퇴 직후에도 PSV의 유소년 팀 감독을 거쳐 2002년에는 거스 히딩크를 보좌하며 PSV 수석코치로 활동하기도 했고 그 이후 RKC 발베이크, 페예노르트, 위트레흐트, FC 아인트호벤, 헝가리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았다. 이후 동생 로날드 쿠만에 의해 사우스햄튼 수석코치로 임명되며 형제가 처음 한 팀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현재는 로날드 쿠만에 의해 에버튼 수석코치로 또다시 임명되어 동생을 계속 보좌하고 있다.

판 할과의 악연으로 유명하다. 판 할이 FC 바르셀로나 감독 시절에 쿠만이 수석코치로 영입되면서 둘의 인연이 시작되는데, 두 양반 다 성격이 워낙 강골이라 이런저런 트러블이 많았다고 한다. 여기까지는 축구계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자잘한 트러블로 생각될 수 있겠으나 훗날 아약스 감독으로 쿠만이 임명되고 아약스의 단장으로 판 할이 임명되면서 다시 악연이 시작됐다. 쿠만이 훈련장에서 선수들을 훈련시키고 있으면 판 할이 구석에 의자를 놓고 앉아서 이래라 저래라 선수들을 평가하고, 여러가지 간섭을 하며 쿠만의 감독 권한을 침해하는 바람에 쿠만이 아주 자존심이 상했었다고 한다. 마침 당시 아약스에 있던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가 이적을 요청했는데 쿠만은 절대 그를 팔 수 없다며 NFS[16]를 때렸다. 그러나 마침 즐라탄과 이런저런 불화가 있던 판 할은 쿠만의 요청을 씹고 즐라탄을 팔아 버렸다. 머리 끝까지 열이 뻗친 쿠만은 구단 측에 나를 짜를 것인지 판 할을 짜를 것인지 선택하라고 요청했고, 결국 판 할이 아약스에서 나가게 되었다. 이후 판 할은 언론 인터뷰를 통해 쿠만을 극딜하였고, 두 사람은 결국 관계를 회복하지 못했다. 후에 판 할은 자신의 후임으로 AZ 알크마르의 감독이 되었던 쿠만을 조롱하는 인터뷰를 한 적도 있다. 그래서 지금도 판 할과 사이가 많이 안 좋다고 한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15-16시즌 맨유 원정에서 찰리 오스틴의 골로 사우스햄튼이 승리하자 쿠만은 사자후를 내질렀다...

네덜란드 에레디비지의 빅 3이자 라이벌관계인 아약스, PSV, 페예노르트 이 세 구단에서 선수 생활뿐 아니라 감독으로도 모두 활동한 경력이 있다.

4 커리어 / 입상 경력

4.1 선수 시절

시즌클럽소속리그리그FA컵대륙대회
경기득점경기득점경기득점
1980/81FC 흐로닝언네덜란드 에레디비지24432--
1981/82FC 흐로닝언네덜란드 에레디비지331410--
1982/83FC 흐로닝언네덜란드 에레디비지331440--
1983/84AFC 아약스네덜란드 에레디비지3274220
1984/85AFC 아약스네덜란드 에레디비지3092143
1985/86AFC 아약스네덜란드 에레디비지3276120
1986/87PSV 아인트호벤네덜란드 에레디비지34163320
1987/88PSV 아인트호벤네덜란드 에레디비지32216481
1988/89PSV 아인트호벤네덜란드 에레디비지32146142
1989/90FC 바르셀로나스페인 라 리가36147441
1990/91FC 바르셀로나스페인 라 리가2164274
1991/92FC 바르셀로나스페인 라 리가351620111
1992/93FC 바르셀로나스페인 라 리가33113030
1993/94FC 바르셀로나스페인 라 리가351120128
1994/95FC 바르셀로나스페인 라 리가3291081
1995/96페예노르트 로테르담네덜란드 에레디비지31103173
1996/97페예노르트 로테르담네덜란드 에레디비지3092050
  •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
  • 개인 수상
    • 1987 네덜란드 올해의 선수
    • 1988 네덜란드 올해의 선수
    • 유로 1988 베스트 일레븐
    • 1993/94 UEFA 챔피언스 리그 득점왕

4.2 감독 시절

  • SL 벤피카 (2005/06)
    • 수페르타사 (1) : 2005
  • AJ 알크마르 (2009)
    • 요한 크루이프 실드 (1) : 2009
  1. 감독 대행
  2. 감독 대행
  3. 사실 발렌시아를 맡기 이전에는 아약스, 벤피카, PSV에서 성공 가도를 달렸다. 현재 사우스햄튼에서도 공중 분해 될 뻔한 팀을 매우 잘 이끌고 있는 중. 유독 발렌시아에서만 심하게 못 했다.
  4. 동생인 로날드 쿠만과 함께 네덜란드 국가대표팀에서 활약하였고 동생과 똑같이 페예노르트 감독직까지 수행하였다, 다만 동생이 워낙 레전드급 활약상을 펼치다 보니 국내에서는 다소 듣보로 들리는 옛날 선수이지만 유로 88등에 참가하는 것을 보면 어느정도 실력이 있다고 볼 정도로 동생 못지 않게 실력을 보여준 선수이기도 하였다. 참고로 두 형제 이후 90년대에는 로날드 데부어프랑크 데 부어 형제가 등장하면서 형제 축구선수 명맥을 이어갔다.
  5. 어느 정도냐면, 1993-94시즌 챔피언스리그에서 총 8골로 득점왕에 올랐었다. 수비수가 챔피언스리그 득점왕을 차지한 것은 쿠만이 유일하다.
  6. 이 뒤를 이어 역시 주장+센터백+뛰어난 프리킥 실력을 갖춘 프랑크 데 부어가 후임으로 등장한다. 단, 쿠만만큼의 득점력을 보여 주지는 못했다.근데 이게 정상인거... 쿠만이 미친 수준이지 그치만 조국 네덜란드와 벨기에가 공동개최했던 유로 2000 대회 조별예선 최종전에서는 엄청난 프리킥 골을 성공시켜 그 선배의 그 후배라는 면모를 유감없이 과시하였다. 더군다나 당시 상대는 세계 최강 프랑스 였으니 말다한 셈;;;#
  7. 참고로 당시 발렌시아는 알벨다와 카니사레스 등의 노장 선수들이 주축이 된 선수파와 당시 팀의 단장이었던 아메데오 카르보니, 당시 팀의 회장이었던 후안 솔레르 등의 권력 다툼이 치열했고, 그 결과 평소 카르보니, 솔레르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키케 산체스 플로레스가 사임하기에 이른다.
  8. 비록 당시 카니사레스는 38세의 노장이었으나 여전히 리그 톱클래스의 기량을 보여주고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팀의 상징적인 선수 중 한 명이었기 때문에 쿠만에 대한 비난이 더욱 거셌다. 이 후에 에드윈 반 데 사르가 40이 넘어서도 그 기량을 그대로 유지한 것. 그리고 지안루이지 부폰카시야스가 카성룡이 된 현재까지도 여전히 기량을 유지하고 있는 것을 봐선 골키퍼에게 38이란 나이는 절대 퇴물 취급할 나이는 아니다.
  9.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대변해준 알벨다의 눈물 짤, 이 짤은 쿠만의 막장 행보를 여실히 드러내게 만든 짤이 되었다.
  10. 당연히 이 시도는 실패로 끝났고 여담으로 한국에서도 과거 조광래가 스트라이커인 정조국을 풀백으로 기용했다 실패했던 적이 있다.
  11. 여담으로 당시 발렌시아는 신예 다비드 실바, 후안 마타 등을 발굴해내어 장미빛 미래가 예견되었던 만큼 이러한 부진이 더욱 뼈아팠다.
  12. 참고로 당시 발렌시아와 마찬가지로 최악의 부진에 시달렸던 바르셀로나는 결국 무관에 그쳤기 때문에 일부 팬들은 바르셀로나보다 더 좋은 시즌을 보냈다며 위안을 삼기도 했다.
  13. 다만 힐데브란트를 발렌시아로 데려온 장본인은 당시 단장이었던 카르보니였다.
  14. 비록 바네가가 당시 주목받는 유망주이긴 했으나, 다비드 알벨다와 루벤 바라하, 미겔 앙헬 앙굴로로 이어지는 중원 라인에서 꾸준한 출전을 하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알벨다와 미겔 앙굴로가 벤치로 밀려 주전으로 나올 수 있었다.
  15. 사실 다른 빅클럽에서도 전술 문제 및 감독의 판단으로 본 포지션이 아닌 다소 생소한 포지션에 기용되어 본의 아니게 그 포지션에 정착하는 선수들도 종종 있다. 대표적으로 본래 라이트 윙이였으나 마우로 카모라네시에게 밀려 왼쪽 풀백, 이 후 조나단 제비나의 기용을 위해 오른쪽 풀백으로 포지션 변경에 성공해 올타임 레전드로 꼽히는 지안루카 잠브로타나 전술상의 문제로 왼쪽 윙에서 뛴 파벨 네드베드가 있다. 뭐 쿠만의 포지션 변경이 성공했다면 신의 한 수가 될 수 있었겠으나... 결과가 참담하니 까임+개그소재로 쓰이는게 현실. 쿠만을 까는 대표적인 레퍼토리가 바로 아리즈멘디 왼쪽 풀백 + 호아킨 왼쪽 윙 + 원톱이다.
  16. not for sale. "선수를 절대 팔지 않는다" 라고 입장을 언론에 확실히 공표하는 행동